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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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는 것을 싫어하니?

그 질문의 울림은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아 있다. │p.304

지리산의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저자가 교사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삶의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덴마크의 세계 시민학교로 떠나 다시 배움을 얻는 과정이 수기로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겼다. 세계 각지에서 온 어린 학생들, 선생님들과 함께 공동의 일상을 보내면서 나누고 배우고 또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생활한다. 40의 나이로 한참 어린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에 힘이 부칠 때, 또 자유롭지 못한 언어능력 때문에 '느린 학생'이 되어 힘들기도 했지만 그 역시 교사로서의 저자에게는 훌륭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그러니까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덴마크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여행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리프레쉬 되는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에 온 학생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만큼 그들이 논의하고 배워가는 주제들은 그야말로 세계적이고 현실적이다. 아무리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 사람에게 듣는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이점인가. 또 전혀 관심이 없어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는 과정이 참 좋아 보였다. 특히 일본 정부가 많은 역사적 사실을 교과 과정에서 숨기면서 전혀 배운 적이 없어 무지했던 일본 학생들과 위안부 문제를 나누고 이해시키는 과정은 읽는 동안 참 벅찼다. 정말 일본 정부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그 심각성이 절실히 와닿았다. 실제로 저자는 매 학기마다 새로 들어온 일본 학생들과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들은 잘못 알아서 미안해하고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했다. 내가 그 학교에 갔다면 하고 생각해 봤다. 내가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내 무지함이 너무도 아찔했다.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이 모인 만큼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인식에 대해 공부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조혼과 할례 등으로 잘 알려진 나라에서 온 친구는 초반에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자국의 여성인권을 높게 평가했지만 수업이 끝날 때쯤엔 생각이 바뀌는 부분 말이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문화였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생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들의 문화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서 생각이 많았는데, 이런 어려움도 모두 모여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놀랍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민주주의와 복지에 관한 교육관은 또 어떻고. 아, 내가 한 공부는 다 뭐지.

어릴 때 나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남은 게 별로 없는 느낌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과목(수학)이 확정되고 나서부터는 그랬다. 하지만 배움 자체는 좋아해서 지금도 책을 읽을 때 벅찰 때가 있다. 나는 주로 문학을 읽으며 아름다운 문장을 탐미하는 사람이지만, 어려워도 꾸준히, 모자란 역사나 인문사회 책을 읽으며 조금씩이나마 알아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이 책은 나에게 벅찬 마음을 느끼게 해 준 배움과 나눔의 이야기지만 여행을 다녀온 기분도 들어서 어쩐지 설레고 기분이 환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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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그 시절 나는 학생이 부러웠다. 그들은 내가 받아 보지 못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다. 학생들을 부러워하는 교사가 학생들 앞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중학생이 교사에게 분노를 발산할 때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나도 억울하다고!‘라고 속으로 외치는 사람이 교사를 해도 될까.
- P9

나의 배움은 이들의 일상을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며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도 역시 인간이라 때로는 얼굴이 굳어지고, 감정 기복이 드러나고, 걸음걸이에서 허무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불완전한 한 사람을 매일 밥 먹으면서 옆에서 볼 수 있다.
- P111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 한화로 2만원이 넘는 최저 임금, 주당 33시간 근무, 평균 55퍼센트에 달하는 높은 세율, 촘촘하게 짜여 있는 사회 안전망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함께 노르딕 여행을 떠나게 된 두 덴마크인 선생님들은 각종 복지 제도의 혜택과 그 바탕인 조세 제도에 대해서 덴마크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라 살림을 운영하는 정부를 신뢰하며 보호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 P224

민주주의와 복지 제도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교육하는 일이 중요해. 우리가 신경 써서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거든. 요즘 자라나는 덴마크 아이들은 복지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하고 싸워 왔다는 걸 교육해야만 해.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지. 그 옛날 농부들이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했다면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이, 여성들이 나섰고, 지금은 이민자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어.
- P230

이제는 나의 제자들이 부럽지 않았다.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먼 나라에 와서 열여덟 살 친구들 사이에서도 특히 말이 서투른 학생이 되어 보살핌을 받아보니, 내가 받아 보지도 못 했던 것을 제자들에게 주려고 아등바등했던 나 자신이 더는 처량하지 않았다.
- P258

호이스콜레의 교육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삶에 걸친 계몽, 대중 교육, 민주주의 소양 교육, 덴마크가 19세기에 호이스콜레를 만들고 지금까지 세금을 투입해 학교를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국민이 무지에서 깨어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넘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성숙함을 요구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끊임없는 재교육만이 민주적 질서로 작동하는 복지 제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게 덴마크 사람들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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