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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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구의 증명,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까지 정말 강렬하다. 이번 책은 재 출간되면서부터 너무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굉장히 몰입돼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다.

'간나' 이기도 '언나'이기도, 또는 '이년아'이기도 한 이름의 어린 소녀는 진짜 아빠를 가짜아빠로 만든 채 '진짜엄마'를 찾아 나선다. 황금다방의 장미 언니, 콧등치기 국수 할머니,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의 대장과 삼촌, 유미와 나리까지 소녀가 진짜엄마를 찾는 여정에서 만난 인연들도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었다. 소녀는 그들에게서 이전엔 알지 못했던 사랑과 유대를 느꼈지만 결국엔 진짜를 더 갈망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린 소녀에서 점차 성장하면서, 그러니까 후반으로 갈 수록 글을 읽는 것이 더 없이 막막하고 외로워졌다. 더이상 아이는 아닌 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이 세상의 바닥으로 함께 나가떨어지는 기분이 되었다. 소녀가 누군가를 만나고 경험할수록 '진짜엄마'가 재설정되는 것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독하게 슬픈 성장이었다.

콧등치기 국수 할머니와의 이야기가 가장 좋았고, 각설이패와 동행하는 이야기까지 읽었을 때는 천명관의 고래를 읽었을 때처럼 엄청난 흡입력이라고 생각했다. 결말까지 너무 강렬했다. 이정도는 돼야 수상작이 되는구나. 요즘 내가 가장 애정하는 한국 작가님이다.

내가 너무 좋았던 것에 대해서는 쓰기가 너무 힘든데, 이 병은 어떻게 고치나요?



* 인스타그램 -@morning.bookstore


나는 내 가짜 가족이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처럼 각자의 바람을 따라 멀리 날아가길 바랐다.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멈추지도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멀리, 아주 머얼리.
- P14

할머니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할머니보다 앞서갔다가,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할머니의 시간이 어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오후가 반복될수록 나는 자꾸만 진짜부모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까먹었다. 그 이유를 까먹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내 머릿속은 사정없이 느슨해져서 진짜엄마 생각 따위는 콸콸 새어 나갔다.
- P82

그때 처음 봤다. 할머니의 웃는 모습. 할머니가 웃으니까 나도 웃음이 날 뻔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하지만 웃음은 눈물과 달리 참는다고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주 조금 웃었다. 내가 웃는 걸 보고 할머니가 또 웃었다. 봄바람이 창문을 와르르 훑으며 지나갔다.
- P84

나는 할머니의 주름 속 응달까지 넘나드는 봄 햇살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진짤까? 할머니는 태워도 타지 않는 진짜가 맞을까? 진짜니까 영영 나와 함께할까? 진짜를 만나면 단번에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 P90

나는 간나. 예전 이름은 언나. 그전 이름은 이년아.
- P96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불행에 대한 예감은 실현되고야 만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불행을 자꾸 떠올리면 불행이 옳거니,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면서 냉큼 달려드니까.
- P200

그렇게 울고 웃는 사이 불행은 평범해졌다. 평범해진 불행엔 힘이 없다. 그냥 그까짓 것이 된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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