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 그전까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그렇지 못했다.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알겠다. 그건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은 불안 속으로, 자청해서 걸어들어가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p.325 작가의 말
서점사의 신간 리스트를 훑다가 눈에 들어와 바로 구매한 책이다. 레이디 맥도날드라고 하면 잘 몰라도 '맥도날드 할머니'라고 하면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텐데, 나 역시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유튜브에서 영상을 다시 보기도 했다. 이 책은 그 '맥도날드 할머니'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방송에서 할머니와 나눈 내용들이 책 전반에 걸쳐 그대로 들어 있고 대신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그런 인생을 살게 됐는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까 와 같은 할머니의 내면은 작가의 시선으로 채워졌다.
마이 시크릿.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노코멘트.
아마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알 텐데, 완벽한 트렌치코트 핏과 박식함, 유창한 영어 실력, 종이 가방에 가득 들어있는 영자신문, 호텔 레스토랑이 너무 익숙한 듯한 모습. 그녀의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면 '맥도날드 할머니'보다는 '레이디 맥도날드'가 확실히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더 살펴보면 몸 하나 뉠 곳 없이 스타벅스, 맥도날드, 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꾸벅꾸벅 앉아 조는 영락없는 노숙자인 것도 맞다. 한국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일했고 결혼은 한 적 없다. 그 시절 여성에게는 눈치는 좀 받았을지 몰라도 더없이 화려한 삶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듯 누렸던 삶이 퇴직으로 끝나버렸다. 이후 맞닥뜨린 노년의 새로운 삶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절을 배회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번에 방송을 찾아보면서 밑에 달린 지저분한 댓글을 보고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레이디의 인생을 보고 누군가는 허영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자존심이라고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몰라도 너무 지저분한 댓글이 많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단정 지을 수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앞으로 레이디 맥도날드 같은 사람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서 아주 먼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걸 알았을 때 아마 작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서 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화려했던 시절처럼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몸에 밴 태도와 삶의 방식을 버릴 수 없었던, 아니 버리고 싶지 않았던게 맞는 것 같다 많이 배웠고 일했고 그 시절 많은 여성들이 선택해야만 했던 길을 가지 않은 채 늙어간 여성, 노숙인이면서도 노숙자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사람.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왠지 모를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또 작가는 누군가의 불행, 숨겨진 사연을 캐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방송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시청률을 챙기는 방송가의 행태들 말이다. 뒤표지에는 실제 방송 PD가 당시 생각했던 것들이 이 책에 다 담겨 있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제 할머니는 세상에 없다. 작가는 자신의 미래가 맥도날드 할머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하는 것,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별거 아닌 사소한 부탁도 절대 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도 하면서 책을 덮고도 정리할 마음이 많았다. 책 속 김윤자가 민수경에게 건넨 블루베리 케이크는 내가 아는 가장 쓸쓸한 블루베리 케이크였다.
아침서가 @morning.bookstore
https://www.instagram.com/morning.bookstore
미스 김이 왜 결혼을 못 했는지 나는 이제야 알겠어. 장가를 갔으면 바로 갔을 텐데, 시집을 가야 해서 결혼을 못 한 거지. 안 그래? - P89
불행 포르노라고 아시나요? 불행 포르노란 남의 불행한 일상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하면서 그와 동시에 은밀한 기쁨을 느끼게 만들어진 선정적인 콘텐츠를 일컫는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 P145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트렌치코트를 벗고, 안에 입은 셔츠를 다시 매만진다. 분홍색이다. 엷은 분홍색의 빳빳한 셔츠. - P155
김윤자는 그런 걸 따지는 생활방식이 지금의 자신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자신을 바꾸려고 한 적이 없었고,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었다. - P196
레이디는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걸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남이 자기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 또한 견디지 못한다. - P214
무엇보다 자기들처럼 살지 않는 레이디의 방식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잘 참아내지 못하니까. 신중호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레이디가 여태까지 몰랐던 걸 계속 모르더라도 문제없었다. 레이디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말이다. 그는 레이디가 살아온 칠십몇 년간의 방식을 부정해버렸다. (...) 그건 열등감 때문이었다. 레이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잘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껴서였다. - P300
자신의 곤궁을 알아달라며 투정을 부리는 인간만은 되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바닥을 보이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 P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