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브루클린
제임스 맥브라이드 저자, 민지현 역자 / 미래지향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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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부터 강렬한 이 책의 배경은 1969년, 브루클린의 빈민가 커즈하우스라는 주택단지다. '스포츠코트'라 불리는 교회 집사이자 동네 야구팀 코치였던 늙은 남자가 주인공으로 자신이 가르쳤던, 한때 야구 유망주였고 현 마약상인 딤즈를 동네 한복판에서 총으로 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파이브엔즈' 라는 교회 사람들이자 동네 사람들, 그리고 형사, 마약상들까지 얽혀있는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 채로 읽다 보면 마지막엔 아.... 거대한 사랑이었구나 싶은 책. 초반부터 쏟아지는 인물들 때문에 정신 못 차릴 수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금방 적응하게 된다.

그 시절 브루클린의 모습, 유색인들, 노동을 위해 온 이탈리아계, 라틴계 인물들까지. 치열한 삶들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 사는 냄새 가득한 이야기였다. 스포츠코트란 인물 자체도 굉장히 독특해서 재밌었다. 술에 절어있는데다 대체 왜 그러는지, 아슬아슬하게 후반으로 갈 때까지 도통 알 수 없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이야기는 매우 독특하고 입체적이었다. 좀 더 짤막한 이야기로 새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은 인물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엘레판테였다.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강인한 캐릭터이면서도 그의 외로움과 내면의 연약함이 이상하게 정이 가서 엘레판테 이야기만 따로 빼서 써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엘레판테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궁금했다. 지 자매와 포츠 형사의 뒷이야기도 너무 궁금하다. 하긴 내가 궁금한 모든 뒷이야기까지 담으려면 1000페이지쯤 됐을지도 몰라. 이 책의 또 하나의 묘미는 역시 스포츠코트와 얼이 아닐까. 첫 장면 총격 사건 때문에 마약상에게 처리 대상이 되고 마는 스포츠코트. 그를 처리하기 위해 '얼'이라는 인물이 나서는데 이게 너무 코미디다. 데이먼 러니언의 유머러스한 코미디를 보는 느낌과도 비슷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작가가 별로 안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도 마지막에서야 나온, 너무 짧았던 감동이긴 했지만 그 모든 소동은 딤즈 하나만을 위해서도 너무나 멋진 일이었다. 이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마존에서 후기를 보는데 얼마 못 읽고 별로라고 후기를 썼던 고객이 끝까지 읽어보라는 다른 고객들의 권유에 결국 끝까지 읽고서 읽길 잘했다고 다시 후기를 쓴 게 재밌었다.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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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즈하우스 식구들 모두 각자 돌아버릴 만한 사연들이 있다. 대게 모든 일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 P23

탐욕은 병이야. 나도 그 병을 앓고 있잖아.
- P71

스포츠코트, 축복은 그것을 달게 받으려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법이야. 그것이 어떻게 오는지 캐려고 하지 말게. 축복이 내려진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
-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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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aeg 2022.4 - No 75
(주)책(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책(잡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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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문화, 예술을 담은 잡지 책(chaeg)

매거진 책 4월 호의 주제는 '우리가 함께라는 것'이다. 아침마다 매일 조금씩 읽었는데 집중도 잘 되고 잠도 깨고 책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니 기분도 좋은 시간이었다. 주제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다양한 우정, 사랑, 연대 등을 주제로 한 글들과 책을 소개하고 있다. 4월이라 그런지 이 주제가 더 따뜻하게 와닿았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우정을 표현하는 책 속의 구절과 일러스트들로 시작해서 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글로 넘어가는데 무척 좋았다. 이어령 님에 대한 글은 사진이 참 멋졌는데 한 번도 읽어보질 못해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흐와 고갱의 이야기, 알베르 카뮈와 시인 르네 샤르, 스콧 피츠제럴드와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 데이비드 호크니와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알려진 이야긴데도 참 흥미로웠다. 글 중에는 박지원 님의 <공유 공원>, 황민현 님의 <혼자였지만 함께였던>, 김광기 님의 <연결의 키워드, 이방인>, 이달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도 흥미로웠다. 아! 전지윤 에디터님의 <동화 꼬리 잡기> 코너도 너무 따뜻했다. 내 사랑의 표현 방식과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사랑엔 차이가 있다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랑하는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귀엽게 쓰인 글이었다. 그뿐 아니라 범위를 넓혀 동물들과의 우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생각을 넓혀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좋은 글들도 많았지만 결론적으로는 '이 책 궁금하네, 읽어봐야겠다.'가 되므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주 위험천만한 매거진이 아닐 수 없다. 글마다 부분적으로 인용되는 글들이 좋아서 체크하고, 책을 소개하는 글 자체가 좋아서 체크하다 보면 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 거의 모든 글이 책 소개이고, 그냥 모두 책 소개다. ^-^

체크해둔 책

유안진 <지란지교를꿈꾸며>

데이비드호크니 <봄은언제나찾아온다>

로빈던바 <프렌즈>

다이애나 하먼 애셔 <우리가함께달릴떄>

게일콜드웰<먼길로돌아갈까>

줌파라히리<내가있는곳>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무도대령에게편지하지않다>, <족장의 가을>

바버라 J. 킹 <동물은어떻게슬퍼하는가>

지지 파파차리시 <민주주의그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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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볼트 - 지구의 재앙을 대비하는 공간과 사람들
시드볼트운영센터.산림생물자원보전실 생물자원조사팀.야생식물종자연구실 지음 / 시월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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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재앙을 대비하는 공간과 사람들

지금 시드볼트에 저장되는 종자는 어쩌면 우리 세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100년간 우리는 다 함께 '힘을 합쳐' 이 지구를 아프고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시드볼트는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낸 우리 세대의 책임인 동시에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시드볼트에 있는 사람들은 이 자원을 다음 세대가 될지, 그다음 세대가 될지 모르지만 최대한 안전하게 넘겨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하고, 미안하지만 그 이후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 둘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보존뿐입니다. 적어도 사라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p.151-152

처음 우리나라의 시드볼트를 알게 된 건 '유퀴즈' 방송에서였다. 그런 시설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고 시드볼트의 존재 이유까지도 너무나 흥미로워서 이 책을 권해주셨을 때 당장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나에게는 현실 속 SF 물처럼 느껴졌다.

먼저 종자를 저장하는 '시드볼트'라는 시설은 전 세계에 딱 두 곳 있다. 노르웨이 스발바르에 하나, 그리고 우리나라 백두대간수목원에 하나 있다. 그러나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주로 작물 종자를 저장하고 우리나라 시드볼트는 야생식물 종자를 보관하므로 야생식물 종자 보관소는 결국 우리나라가 유일한 셈이다다. 종자를 저장한다는 기능을 생각하면 '시드뱅크'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시드뱅크는 수시로 저장하고 꺼내서 활용되지만 시드볼트에 보관하는 종자는 그 종자가 멸종 위기에 처했거나 지구가 멸망에 가까운 위기를 겪을 때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시드볼트는 당장의 이익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다. 이번 세대에서 쓰일지, 다음 세대에 쓰일지 또는 안 쓰일지 모르지만 그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왔을 때를 대비해 운영되고 있다.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신뢰성을 확보하고 홍보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나라의 많은 종자들이 보관되어야 그 존재 의의를 다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딱 한 번, 스발바르 시드볼트에서 종자가 반출된 적이 있다고 한다. 시리아 내전 때 시드뱅크들이 다 파괴되었지만 다행히도 스발바르 시드볼트에 종자들을 중복 보관하였기 때문에 시리아의 요청에 따라 종자를 반출하였다고 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기후 위기도 그렇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시드볼트의 존재가 왜 필요한지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종자를 직접 수집, 또는 각국의 기관에서 기탁하여 시드볼트에 보관되기까지 종자를 다루는 세밀한 과정과 데이터를 수집하고 저장하는 과정까지 사진자료와 함께 설명이 되어있다. 이 책이 이해하기 쉽게 쓰인 것은 전문가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시드볼트에 관심을 가지고 알리고자 했던 출판사 사장님께서 직접 1년간 취재하고 쓴 내용이어서다.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면에서 무척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추천하기도 좋다.

공룡이 살던 시대보다도 전부터 있었던 은행나무에 대한 이야기와 파나마 병에 걸린 바나나 나무의 위기와 관련한 것도 너무 흥미로웠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남자친구가 예전에 이야기해 준 적이 있어서 조금 알고는 있었는데 파나마 병에 내성을 가지고 있는 야생 바나나 나무는 이제 다섯 그루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에게 이런 위기가 있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마침 먹고 있던 바나나를 아껴 먹었....) 또 해인사의 전나무가 태풍 링링으로 부러졌을 때에도 시드볼트 팀에서 출동해 전나무의 씨앗을 가져와 시드볼트에 저장했다고 한다. '타미플루'가 중국에서 자생하는 팔각이라는 식물로 만들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이렇게 야생 종자들이 왜 중요한지, 어째서 보관해야 하는지 중요성을 함께 얘기해 주어 이해가 무척 쉬웠다. 거기다 미국인과 일본인이 우리나라에서 채집해간 야생식물들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야생식물인데 우리는 되려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일본인이 채취한 우리 야생식물 학명에 다케시마를 붙인 것과 관련한 일화는 어느 정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또다시 불끈 불끈.

마지막에 두 페이지를 가득 차지하고 있는 고사한 구상나무 사진들을 볼 때는 마음이 먹먹했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었다. 아직 사람들은 이런 시설이 우리나라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고 또 당장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운영하는지 의문을 가지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일도 허다하다고 한다. 아직 할 일도, 갈 길도 멀지만 당장의 이익을 바라지 않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구 재앙에 대비할 수 있게 후세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시드 볼트를 생각하니 지금도 너무 가슴이 먹먹하고 벅차고 자부심도 느껴진다. 그 어떤 환경문제를 다룬 책들보다 격렬히 와닿았고 가슴이 저릿했던 책이다. 올해 내 독서 리스트의 베스트에 꼭 넣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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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볼트는 물질적인 이득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나 기관을 통해 기탁 받은 종자의 소유권이나 이용할 권리 등은 온전히 종자를 기탁한 나라나 기관에 있습니다. 시드볼트는 그 종자를 열어 볼 수조차 없습니다. 시드볼트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뿐입니다. 언제까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보관이 영원히 끝나지 않아 씨앗이 다시 세상에 나올 일이 없을 수도 있겠죠.

시드볼트에 저장된 종자가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 식물을 더 이상 지구에서 볼 수 없을 때‘ 단 한 가지 경우뿐입니다. 그래서 특정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식물의 종자가 시드뱅크나 혹은 다른 곳에 있다면 최대한 그곳에 있는 종자를 쓰도록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시드볼트는 그 이후입니다. 정말 지구상에서 더 이상 그 종자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때 관계자가 모여 반출 심의를 진행합니다.
- P154

야생식물이 중요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생식물은 재배식물의 시작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배식물은 결국 야생식물이 있어야만 파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식물에는 그 식물에 기생하는 수많은 곤충이나 동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식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서식지가 파괴된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하면 그 식물을 둘러싼 생태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 P184

여전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악의 사태‘를 대비합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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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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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 서점 블로그에 썼던 리스트, 기억하세요?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라는 리스트였죠."

피터 스완슨의 신작이 나왔다.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정말 '핫' 했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읽었을 때 정말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출간되어 있는 다른 책들을 다 읽었는데(여기까지 쓰고 혹시 내가 안 읽은 책이 있나 싶어 서점사 검색해 보았다ㅋ) 피터 스완슨의 책 중 내가 제일 재밌었던 것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과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두 권이다. 근데 오늘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을 추가했다.

먼저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은 중고서점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맬컴이다. 그것도 추미스 장르만 취급하는 중고서점인 거다. 맬컴이 가장 좋아하고 심취했던 추미스 소설.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감추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FBI 직원이 서점에 찾아온다. 저 위 맨 처음에 써 놓은 질문과 함께. 오래전 서점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맬컴은 홍보를 위해 서점 블로그에 글을 썼다. 유명한 파워블로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가장 완벽한 살인이 나오는 여덟 권의 추미스 책을 소개하는 포스트였다. FBI의 말로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 포스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거였고 맬컴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알면 알수록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점점 더 사건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자, 어차피 스포 때문에 더 이상 쓸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점들이 몇 가지 있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일단 배경이 추미스 장르를 취급하는 중고서점이라는 점이 내 취향을 건드린다. 그리고 맬컴이라는 인물은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공감되고 정이 간다. 그리고 읽다보면 고전 격의 추미스 소설을 추천받게 된다는 것과 데니스 루헤인, 제임스 미치너, 애거서 크리스티, 존 르카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등 아는 작가들이 언급되는 점도 재밌었다. 성격적으로 조금 단조롭고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재능이 없는, 의뭉스럽긴 해도 선한 사람으로 느껴져서 어쩐지 굉장히 직업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재밌었다. 그러나 역시 누구나 비밀은 있고, 우리는 누구도 타인을 완벽히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작가의 위트 있는 문장 때문에 피식피식 거리게 된다.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언급한 것처럼 재미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캐릭터인데 아무래도 작가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래의 문장 같은 것들이다.

/ 누군가 내 리스트를 읽고 그 방법을 따라 하기로 했다는 겁니까? 그것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면서요? │p.33 (죽여마땅한 사람들ㅋㅋㅋ)

/ 나는 부엌을 둘러봤다가 타일이 깔린 아일랜드 식탁에 뚜껑이 열린 땅콩버터가 있고, 그 안에 나이프가 꽂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레인 존슨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고독사가 고소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p.146 (땅콩버터 ->고소 ㅋㅋㅋ)

/ 나는 후세에 영원히 남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순수문학 작가들이 늘 못마땅했다. 차라리 스릴러소설을 쓰는 작가들과 시인이 더 좋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질 게 뻔한 싸움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p.169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듯ㅋㅋㅋ)

나만 웃기냐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덟 건의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엄청 자극적인 소설은 아니다. 추미스이기는 하지만 그냥 재밌는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여러 건의 살인사건이 나오지만 사건이나 잔혹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특별히 피해자가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맬컴의 알 수 없는 생각들과 맬컴에게 있어 의미 있는 인물의 사건, 그 추적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후반에서야 진실을 알게 되는데 그마저도 어쩐지 맬컴스러워서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그게 또 좋았다. 그동안의 피터 스완슨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해서 인상적이었다. '죽어 마땅한' 코드는 익숙하지만 어쩐지 책을 좋아하는 맬컴에게 정이 간다. 기억에, 별로 미운 사람이 없는 책이다. 아, 한 놈 있다. 선생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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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이미 천직을 찾은 상태였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랬다. 나는 책을 파는 사람이었고, 하루에도 손님들과 수백 번씩 짧은 대화를 나누는 일상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독서를 제일 사랑했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천직이었다.
- P22

책은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독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책은 그 책을 쓴 시절로 우리를 데려갈 뿐 아니라 그 책을 읽던 내게로 데려간다.
- P48

당신을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다면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있는 셈이잖아.
- P94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결코 완전한 진실을 얻을 수 없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나 말을 나누기 전에도 이미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은 옷은 몸의 진실을 가리지만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준다. 옷은 직조이자 날조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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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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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전까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그렇지 못했다.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알겠다. 그건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은 불안 속으로, 자청해서 걸어들어가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p.325 작가의 말

서점사의 신간 리스트를 훑다가 눈에 들어와 바로 구매한 책이다. 레이디 맥도날드라고 하면 잘 몰라도 '맥도날드 할머니'라고 하면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텐데, 나 역시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유튜브에서 영상을 다시 보기도 했다. 이 책은 그 '맥도날드 할머니'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방송에서 할머니와 나눈 내용들이 책 전반에 걸쳐 그대로 들어 있고 대신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그런 인생을 살게 됐는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까 와 같은 할머니의 내면은 작가의 시선으로 채워졌다.

마이 시크릿.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노코멘트.

아마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알 텐데, 완벽한 트렌치코트 핏과 박식함, 유창한 영어 실력, 종이 가방에 가득 들어있는 영자신문, 호텔 레스토랑이 너무 익숙한 듯한 모습. 그녀의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면 '맥도날드 할머니'보다는 '레이디 맥도날드'가 확실히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더 살펴보면 몸 하나 뉠 곳 없이 스타벅스, 맥도날드, 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꾸벅꾸벅 앉아 조는 영락없는 노숙자인 것도 맞다. 한국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일했고 결혼은 한 적 없다. 그 시절 여성에게는 눈치는 좀 받았을지 몰라도 더없이 화려한 삶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듯 누렸던 삶이 퇴직으로 끝나버렸다. 이후 맞닥뜨린 노년의 새로운 삶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절을 배회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번에 방송을 찾아보면서 밑에 달린 지저분한 댓글을 보고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레이디의 인생을 보고 누군가는 허영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자존심이라고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몰라도 너무 지저분한 댓글이 많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단정 지을 수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앞으로 레이디 맥도날드 같은 사람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서 아주 먼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걸 알았을 때 아마 작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서 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화려했던 시절처럼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몸에 밴 태도와 삶의 방식을 버릴 수 없었던, 아니 버리고 싶지 않았던게 맞는 것 같다 많이 배웠고 일했고 그 시절 많은 여성들이 선택해야만 했던 길을 가지 않은 채 늙어간 여성, 노숙인이면서도 노숙자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사람.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왠지 모를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또 작가는 누군가의 불행, 숨겨진 사연을 캐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방송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시청률을 챙기는 방송가의 행태들 말이다. 뒤표지에는 실제 방송 PD가 당시 생각했던 것들이 이 책에 다 담겨 있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제 할머니는 세상에 없다. 작가는 자신의 미래가 맥도날드 할머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하는 것,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별거 아닌 사소한 부탁도 절대 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도 하면서 책을 덮고도 정리할 마음이 많았다. 책 속 김윤자가 민수경에게 건넨 블루베리 케이크는 내가 아는 가장 쓸쓸한 블루베리 케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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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김이 왜 결혼을 못 했는지 나는 이제야 알겠어. 장가를 갔으면 바로 갔을 텐데, 시집을 가야 해서 결혼을 못 한 거지. 안 그래?
- P89

불행 포르노라고 아시나요? 불행 포르노란 남의 불행한 일상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하면서 그와 동시에 은밀한 기쁨을 느끼게 만들어진 선정적인 콘텐츠를 일컫는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 P145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트렌치코트를 벗고, 안에 입은 셔츠를 다시 매만진다. 분홍색이다. 엷은 분홍색의 빳빳한 셔츠.
- P155

김윤자는 그런 걸 따지는 생활방식이 지금의 자신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자신을 바꾸려고 한 적이 없었고,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었다.
- P196

레이디는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걸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남이 자기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 또한 견디지 못한다.
- P214

무엇보다 자기들처럼 살지 않는 레이디의 방식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잘 참아내지 못하니까. 신중호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레이디가 여태까지 몰랐던 걸 계속 모르더라도 문제없었다. 레이디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말이다. 그는 레이디가 살아온 칠십몇 년간의 방식을 부정해버렸다. (...) 그건 열등감 때문이었다. 레이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잘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껴서였다.
- P300

자신의 곤궁을 알아달라며 투정을 부리는 인간만은 되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바닥을 보이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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