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다녀갔던 유랑이 또 왔네.

   前度劉郞(전도유랑)

 

당나라 순종(順宗)805년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 등을 전격 기용하여 이른바 영정(永貞) 혁신으로 불리는 개혁 정치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환관 세력의 저항은 의외로 막강하여 순종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개혁 인사들은 죄다 지방으로 쫓겨났다. 10년 뒤 다시 수도로 돌아온 유우석은 명승지 현도관(玄都觀)을 찾아 현도관에 심어진 흐드러진 복숭아나무는 모두 유랑(유우석)이 떠난 뒤에 심은 것들이라네라며 지난 10년을 회고했다. 그런데 권력을 진 소인배들은 이 시가 자신들을 풍자한 것이라 트집 잡아 유우석을 다시 강주(江州)로 좌천시켰다. 그로부터 14년 뒤 다시 현도관을 찾은 유우석은 복숭아나무는 다 어디 가고 풀만 무성하구나. 복숭아나무 심던 도사는 어디로 갔나, 지난번 다녀갔던 유랑이 다시 왔는데라는 시를 남겼다. ‘전도유랑은 다녀갔다가 다시 온 사람을 비유하는 시 구절이지만, 유우석의 강렬한 전투 정신이 묻어난다. 아무리 박해를 가해도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나 유우석이라는 자부심도 함께 배어 있다.

 

재유현도관(再遊玄都觀)

 

* 유우석

 

 

 

 

 

 

중국사의 오늘 :

19111010

무창기의(武昌起義)가 폭발했다. 아편전쟁 이래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을 식민지화하고, 청 왕조가 서양인의 조정으로 전락하자 중국 민중은 반봉건반제국주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 투쟁에 나섰다. 무창기의는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쇠로 만든 벼루가 다 닳고 구멍이 나다.

   磨穿鐵硯(마천철연)

 

오대 시대 상유한(桑維翰)이란 유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했다. 과거 시험을 치르는데 미신에 빠진 시험관이 상유한의 성을 보고는 ’()자와 ’()자는 음이 같아 불길하다며 이런 사람은 문장이 좋아도 절대 급제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상유한은 낙방했다. 이유를 알게 된 상유한은 일출부상부란 글을 써서 전설 속 신성한 나무인 부상(扶桑)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면서 그런 자가 어찌 불길할 수 있느냐고 했다. 누군가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는 길이 꼭 과거 급제만 있느냐고 하자 상유한은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면서 장인에게 쇠로 된 벼루를 하나 주조하게 해서는 친구들에게 보여 주며 이 쇠로 만든 벼루가 다 닳고 구멍이 난다면 내가 다른 길을 찾겠다고 했다. 쇠벼루가 닳고 구멍이 날 때까지 자신의 뜻을 꺾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 뒤 상유한은 그렇게도 갈망하던 진사에 급제했다. ‘마천철연은 정말 굳센 의지와 한마음으로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이나 그런 의지를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신오대사(新五代史) 상유한전(桑維翰傳)

 

 

 

 

 

중국사의 오늘 :

462109(남조 송 효무제 대명 69월 무인)

승려가 제왕을 만날 때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불교도들은 제왕에게 절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오랜 논쟁이 있었다. 송나라는 규정을 강행했지만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못을 앞에 두고 글씨를 배우다.

   臨池學書(임지학서)

 

동한 시대의 서예가 장지(張芝)는 이른바 금초’(今草)라는 자기만의 독특한 초서체를 창조한 사람이었다. 물이 흐르듯 유려하면서 힘이 넘치는 그의 서체는 당시는 물론 후대에 큰 영향을 주어 초서의 성인이란 뜻의 초성’(草聖)이란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서예의 성인 왕희지(王羲之)조차 자신의 초서는 장지만 못하다고 할 정도였다. 장지의 이런 서체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예를 연마하던 방법과 정신은 역사상 감동적인 일화로 남아서 전한다. 장지는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장환(張煥)은 아주 청렴한 사람이어서 장지에게 글씨를 연습할 천을 대 줄 수가 없었다. 장지는 하는 수 없이 옷을 깁는데 사용할 천 따위에다 연습했다. 특히 장지는 집 부근의 연못가에서 글씨를 연습했는데 연못의 물을 떠서 먹을 갈다 보니 연못의 물이 먹물처럼 검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서예를 임지’(臨池)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런 장지의 글씨를 너무나 아껴서 한 글자라도 얻으려고 기를 썼다. 여기서 장지가 쓴 글씨라면 단 한 치의 종이도 남기지 않았다촌지불유’(寸紙不遺)라는 성어도 파생되었다.

 

후한서(後漢書) 장환전(張奐傳)

 

 

 

 

 

중국사의 오늘 :

1643108(명 사종 숭정 16, 청 태종 숭덕 88월 정해)

청 세조 강희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1735년 이날에는 청 세종 옹정제가 세상을 떠났다.

 

* 강희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몸에 맞게 옷을 재단하다.

   量體裁衣(양체재의)

 

남조 시대 제나라의 장융(張融)이란 사람은 젊어서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조정에 중용되어 고위 관리가 되었다. 높은 관직에 올랐음에도 장융은 늘 검소한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의복은 늘 헌 옷만 입고 다녔다. 제나라 태조는 이런 그를 두고 이런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둘도 없는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태조가 허름한 옷만 입고 다니는 장융을 위해 특별히 사람을 보내 옷 한 벌을 내렸다. 그러면서 내가 전에 입던 옷을 한 벌 보낼 터인데 옷은 오래된 것이지만 입어보면 새 옷보다 나을 것이다. 내가 그대의 몸에 맞게 다시 고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입으면 분명 편할 것이야라는 조서를 함께 전했다. 황제가 내린 옷을 받아 든 장융은 감격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더욱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양체재의는 원래 키와 몸무게 및 체격 등 몸의 크기에 맞게 옷을 재단한다는 뜻을 가진 성어였다. 그 뒤 이 성어는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실제적으로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다.

 

남제서(南齊書) 장융전(張融傳)

 

 

 

 

 

중국사의 오늘 :

196107(동한 헌제 건안 원년 8월 경신)

조조(曹操)가 헌제(獻帝)를 허도(許都, 하남성 허창 동쪽)으로 옮김으로써 마침내 이곳이 동한 왕조의 도읍이 되었다. 이에 앞서 원소(袁紹)의 책사 저수(沮授)가 헌제를 업성(鄴城)으로 옮겨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자고 건의했지만 원소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 조조의 승상부(허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을 듣기보다 하는 일을 보는 것이 낫다.

   聽言不如觀事(청언불여관사)

 

()나라 때 사람 부현(傅玄)이 엮은 부자(傅子) 통지(通誌)에 나오는 한 대목인데, 이어지는 구절은 하는 일을 보는 것보다 하는 행동을 보는 것이 낫다는 대목이다. 그 사람 말만 듣고 살피지 않은 채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면 분명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상대에게 간파당하면 상대는 계속 교묘한 말로 나의 판단력을 어지럽힐 것이다. 부현은 진 무제(武帝) 즉위 초기에 여론은 전달하고 정책의 잘잘못을 직간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백성의 목숨이 관리에게 달려 있으므로 관리를 선발할 때는 반드시 그 말보다는 그 일을, 그 일보다는 그 행동을 살피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어떤 인재를 기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부현이 말을 듣기보다 하는 일을 보라는 것은 일할 때의 태도와 자세를 보라는 의미이며, 하는 행동을 보라는 것은 실제 드러나는 것을 정확하게 살피라는 의미이다. 그 행동에 따른 실질적인 능력, 즉 결과물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부자(傅子) 통지(通誌)

 

 

 

 

 

중국사의 오늘 :

1648106(청 세조 순치 58월 임자)

청 왕조가 만주족과 한족 간의 혼인을 허용했다. 1860년 이날 2차 아편전쟁 중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 서쪽 원명원(圓明園)을 침략하여 크게 파괴했다.

 

 

* 원명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