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는 담장 안에서 일어난다.

   禍起蕭墻(화기소장)

 

노나라의 실권자 계씨가 전유라고 하는 작은 속국을 정벌하려고 했다. 계씨 밑에서 일하던 염유와 계로가 이 사실을 공자에게 말하자 공자는 왜 말리지 않았냐며 두 제자를 나무랐다. 두 제자는 지금 전유를 빼앗지 않으면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계씨 편을 들었다. 그러자 공자는 내가 듣기에 나라와 가문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백성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공평치 않음을 걱정하고, 가난보다는 안정을 걱정한다고 한다. 공평하면 가난도 없고, 화합하면 백성 수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안정을 이루면 나라가 기우는 일도 없다라고 타이른다. 그런 다음 공자는 계손씨의 우환은 전유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담장 안에 있기에 내가 걱정이 된다라고 했다. 장성이 밖의 공격으로 무너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개는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논어』 「계씨(季氏)

 

 

 

 

 

중국사의 오늘 :

631611(당 태종 정관 55월 을축)

당나라에서 대량의 금과 비단을 주고 돌궐에서 중국인 8만 명을 귀국시켰다.

 

1898611

청 광서제가 변법유신을 선포했다. 무술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무술변법이라 부른다.

 

 

* 광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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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동자를 그리다.

   畵龍點睛(화룡점정)

 

당나라 사람 장언원(張彦遠)이 지은 역대명화기는 중국 역대 화가 371명의 전기(傳記)와 함께 회화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수록한 귀한 책이다. 여기에 보면 화룡점정이란 유명한 사자성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양나라 무제는 절을 엄청난 규모로 짓고 꾸미길 좋아했다. 절을 짓고는 장승요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장승요가 금릉 안락사에 네 마리의 용을 그렸는데 눈동자를 마무리하지 않은 채 놔두었다. 그러면서 매번 눈동자를 찍으면 용이 날아간다고 했다. 사람들이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하자 두 마리 용에다 눈동자를 찍었더니 정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후 화룡점정은 예술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비유하거나 그 부분에 심혈을 기울려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굴원을 기리는 단오에 중국 사람들은 용머리를 장식한 배를 젓는 용주(龍舟) 경기를 하는데, 그때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다름 아닌 용의 눈에 눈동자를 찍는 것이다.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7

 

 

 

 

 

중국사의 오늘 :

647610(당 태종 정관 215월 무자)

당 태종이 취미궁(翠微宮)에 행차했다. 이 자리에서 태종은 군신들과 치국 성공의 다섯 가지 원인을 종합했다. 당 태종은 자기 수양과 유능한 인재 기용 등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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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호

   投壺(투호)

 

병이나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의 일종인 투호는 일반적으로 중국 당나라 때 성행한 놀이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이 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들은 전한다. 조선 시대에 가장 유행하여 민속놀이로 정착했다. 그런데 후한서를 보면 동한 시대의 명장 제준이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와 투호 놀이를 병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간상 가장 이른 기록이다. 또 동방삭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신이경(神異經) 동황경(東荒經)에는 남자 신선들을 관장하는 동왕공(東王公)이 옥녀(玉女)와 더불어 투호 놀이를 했는데 적중시키지 못하면 하늘이 웃었다고 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하늘이 웃으면 번개가 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투호란 단어는 훗날 옥녀의 투호를 가리키는 전고가 되었고, 또 이를 빌려 번개를 가리키기도 했다.

 

후한서』 「제준전(祭遵傳)

 

 

 

 

 

중국사의 오늘 :

189869

청의 총리아문 대신 이홍장(李鴻章)과 주중 영국공사가 북경에서 홍콩 조계지 개척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구룡(九龍)을 영국에 조차지로 99년 할양하기로 했다. 홍콩은 99년 뒤인 199771일 중국에 반환되었다.

 

 

* 이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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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비서

   行秘書(행비서)

 

비서는 원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직속되어 중요한 문서와 사무를 보던 직위였다. 아는 것도 많아야 했고, 관련 업무들을 꿰뚫고 있어야만 맡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한때 차 심부름 따위나 하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했다가, 지금은 원래의 직무와 위상을 되찾고 있는 것 같다.

 

당나라 태종이 외출을 하려고 하자 관련 부서에서 책을 싣고 수행할까 물었다. 그러자 당 태종은 그럴 필요 없다. 걸어 다니는 비서 우세남(虞世南)이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우세남은 비서감(秘書監) 벼슬을 지낸 인재였다. 당 태종은 늘 그를 두고 덕행(德行), 충직(忠直), 박학(博學), 문사(文辭), 서한(書翰)의 다섯 가지에 모두 뛰어난 오절(五絶)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세남이 동행하기 때문에 서적을 별도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행비서는 훗날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을 두루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우세남 같은 비서가 필요한 곳이 많다.

 

수당가화(隋唐嘉話) 권중

 

 

 

 

 

중국사의 오늘 :

198868

인민일보는 이날 중국의 수학자(중국과학원 무한 수학물리소 소장 정하휴丁夏畦 )가 미분방정식과 관련된 난제를 해결하여 수리, 항공, 군사, 기상관측 등에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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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살게 한 다음 가르치면 인의가 따라 일어난다.

   富而敎之, 仁義以之興(부이교지, 인의이지흥)

 

이 대목에 이어 가난해져 도둑질을 하기 시작하면 형벌로도 멈출 수 없다라는 구절이 따라 나온다. 예로부터 의식 있는 지식인들은 경제와 삶의 질의 관계를 통찰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기풍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하면 남을 보살피는 어진 마음과 정의를 중시하는 정신이 진작된다. 반면 빈궁에 시달리면 남의 훔치게 되고, 이런 풍조는 엄벌로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통치의 핵심은 부민’(富民)에 있다. 생존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서로를 위해 좀 더 나눌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수서(隋書) 식화지(食貨志)

 

 

 

 

 

중국사의 오늘 :

171167(청 성조 강희 504월 경진)

강희제가 황태후를 모시고 열하(熱河) 행궁에서 피서했다. 열하 행궁이란 피서 산장을 말하는데 강희 42년인 1703년 건축을 시작하여 건륭 55년인 1790년 완성되었다. 공사 기간만 98년이 걸렸다.

 

1974년 이날 산동성 임기 은작산에서 발굴한 서한 전기 두 무덤에서 유명한 손자병법과 실전된 지 천 년이 넘은 손빈병법등 죽간 4,000여 매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 피서 산장

 

* 손빈병법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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