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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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그 자신으로의 끊임없는 침잠의 기록들을 살짝 엿본 기분이다. 그의 글들을 읽노라면, 이상의 글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는 자의식이 엄청 강했던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어둡고 날카로웠던 이십대 때 그의 작품을 읽었더라면, 아마 지금보다는 훨씬 더 열광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변신> - 재밌게 읽었다. 카프카는 역시 천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벗어 버리고픈 '나'의 무의식이 그 스스로를 해충으로 변하게 했을수도 있다. 혹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막중한 위치에서, 경제력을 잃은 후,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버린 '나'의 극적인 추락을, 벌레로의 변신으로 표현한 카프카의 발상이 정말 기발했다. '나'는 정말 말 그대로 가족들에게 미미하고, 피하고 싶고, 없어져 버렸음 하는 '벌레'같은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서서히 변해가는 가족들의 변신 과정을, 벌레가 되버린 '나'의 눈으로 묘사하는 것 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해로운 해충이 되버린 것은 '나'지만, 정작 혐오스럽고 징그러운 것은 가족들이다. 얼마간의 재산을 두고도, 아버지는 이를 숨긴 채, 자식의 외판원 수입에만 의존하며 무기력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아들이 벌레로 변해버리자 오히려 활기를 띠며 일을 시작하고, 어머니는 무정하다 싶을 만큼 벌레로 변해 버린 자식의 존재를 징그럽게만 여기며, 여동생 또한 서서히 오빠에게 무관심해지다, 결국 '나'를 죽음으로 내몬다. '가정'이라는 이름의, 그렇게 견고하고 사랑스럽게만 보이던 왕국이, 주인공의 경제력 상실에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가족들이 얼마나 철저히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존재로 변할 수 있는지, 그래서 인간이란 결국 외로운 존재임을 공포가 뒤섞인 기괴한 방식으로 잘 드러낸 작품.

 

<시골의사>와<판결> - 적어도 소설이라면, 독자와의 교감을 전제로, 어느 정도는 힌트라도 주면서 독자의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냥 작가의 일기나 독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카프카의 개인적 가정사나, 연애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도, 이 글을 읽고 그토록 깊이있는 철학적 해석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나의 독서 내공이 아직 부족한 탓이겠지. 그런 해석이 가능한 그들이 정말 신기하고 부러울 따름이다.

 

<학술원에의 보고> - 이 작품이 유명한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인 줄 몰랐다. 원숭이로서의 자신의 본성을 포기하고, 사람들 흉내내기로 출구를 찾아야 했던 원숭이 피터. 모방을 위해, 관찰하고, 배우고, 연습해서 유럽인의 평균치 교양에 도달 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 단지 출구에 불과했음을 그는 거듭 밝힌다. 그리고 자유란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언제나 전제로 했으므로, 어떤 인간의 심판도 바라지 않는다는 원숭이 피터. 인간은 교육과 노력을 통해 진보를 이뤘지만,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한, 그것은 결국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카프카의 생각이 드러난 작품. 

 

<굴> - 그의 자의식의 흐름을 쫒아가는데 상당한 에너지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품. '굴'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결과물들, 부와 명예와 지식의 집적일 수도 있고, 자기 존재의 본질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 굴을 기획하고, 만들고, 그 속에서의 안전과 평화를 사랑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외부 침입자에 대한 불안, 완벽하지 못한 건축에 대한 불안, 지키고 감시하고 허물고 쌓고, 그 위태로운 불안과 고독이 작품 전체에 지루하게 흘러, 읽는 독자마저도 지치고, 곤두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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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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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이미지는 꽤 이중적이고 혼란스럽다. 존재한다는 의식과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그에게, 이런 의지는 곧 자신의 정체성(= 존재의 의미, 실재,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의 견고한 실재를 상징하지만, 반대로, 그가 존재하는 방식인 텅빈 갑옷의 이미지는, 실체가 없고 공허하다. 또 그는 분해되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사라지기 쉬운 존재이면도, 부대에서, 누구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존재기도 하다. 이는 의식(의지)도 결국은 일종의 껍데기같은 허상임을 보여 주는 것인지, 아님, 의지(=정신)만 있고 육체(=행동)는 없는 현대인들의 공허한 삶을 보여 주는 것인지 모호했다.  

 

그와 대조되는 인물, 구르둘루는 육체뿐인 존재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역시, 개성없는 이름없는 현대인들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어떤 타자(사물, 자연을 포함한)와도 합일될 수 있는, 즉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는 자유롭고 포용력있는 인간이라는 이중적 이미지를 가진 것 같아 역시 모호했다.  

 

다만, 이 소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겠다. 좀 웃기긴 하지만, 아질울포의 정체성의 근원은 한 여자의 처녀성이며, 랭보와 토리스먼드는 전쟁과 사랑을 통해, 그리고 작가는 브라다만테의 펜을 통해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난 그들의 모험이 이탈로 칼비노 특유의 유머스럽고 환상적인 세상 속에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됨을 보며, 나도 새해 첫 날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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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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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한 죄인에서, 이제는 누구도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영원한 헤로인으로 자리매김한 헤스터 프린. 칠링워스는 왜 그녀를 홀로 방치했는지, 딤즈데일 목사와 헤스터는 어떻게 간음하게 되었는지, 나머지 이야기들도 궁금하다. 사랑이 죄가 아니라면 간음은 죄가 아닌가?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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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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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극이 뭔지 네이버에 물어봤다.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인간 존재와 삶의 문제들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등장 인물이 자기 동일성을 잃고, 시간-공간이 현실성을 잃고, 언어가 그 전달 능력을 상실하는 등,  연극 그 자체가 행위의 의미를 해체 당하는 부조리를 만들어 부조리성을 강조하는 '반 연극 기법'을 통해, 관객에게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목적없이 세계를 표류하는 존재"라는 사상을 전파하는 연극.  

 

위 기준에서 보면, <대머리 여가수>는 그 정의에 꼭 들어 맞는 작품이다. 등장 인물이 자기 동일성을 잃고, 시간-공간이 현실성을 잃고, 언어가 그 전달 능력을 상실하니까. 한 마디로 말해,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의 밑도 끝도 없는 대사들만 계속 되다 끝난다는 얘기지. 아무리 반 연극 기법이라고 해도, 무슨 내용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게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솔직히 어느 정도는 작품 해설이 궁금해,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었다고도 할 수 있다. 뭐 작품 해설을 읽어도, 그닥 공감되지는 않더라만. 울 신랑 표현을 좀 빌리자면, 이건 부조리극의 '삭힌 홍어' 같은 작품인가? 그 맛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못 먹는 사람들은 식겁하는.

 

그렇다면 <수업>이나 <의자> 는, 좀 덜 삭힌 홍어처럼, 나 같은 초보도 대충 그 맛이 뭔지 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한 인간 관계 단절과,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언어의 폭력성, 언어의 무의미함 같은 것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구나 하는 작가의 의도 정도는 읽으면서 파악이 됬으니까. 특히 <의자>의 독특한 무대 구성과 마지막 귀머거리 벙어리 변사의 등장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특이했다. 실제 연극 상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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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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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는 누구이며, 그들은 왜 고도를 기다리는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자신들의 기다림의 이유를 모른다. 그들은 고도가 오지 않는 이유도 모른다. 단지, 고도에 대한 습관적인 기다림을 무작정 반복할 뿐이다. 기다림의 지루함과 실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웃기고 슬픈 광대짓을 한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그 기다림을 함께할 동료가 있다는 것이랄까.

 

애시당초, 고도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없는 존재니 나타날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림은 계속될 것이고, 이런 습관적인 기다림 자체가 바로 그들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에스트라공이나 블라디미르이며, 이 기다림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모두 에스트라공이나 블라디미르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기다림의 지루함을 견디고, 우리는 모두 때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며 불안감을 지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고도를 기다린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답답하고 어리석고 웃기고 슬픈 우리는, 원래 있지도 않은 고도가 언젠가는 오리라 여전히 믿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 두 남자의 기다림이 이해하기 힘들고 말도 안되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상징적 으로 잘 표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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