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저 같은 목격자가 없더라도 피해자인 학생이 직접 추행범을 분명히 지목하고 신고하면 처벌할수 있어요. 권리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생각해보니 부장님 말씀이 맞아요. 여자들이 위험하게 맨살을 내놓고 다니면 안 되죠. 남자는 원래 여자 맨살만 보면자동으로 폭발하게 되어 있는 불쌍한 존재라면서요. 남자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어요." 박 판사의 목소리는 연극배우처럼 비장했다. "인간이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 건 정당한 일이니 괜한 욕망을 낳는 죄악의 씨앗들을 박멸해야 해요! 좋은 물건을 보면폭도로 변하는 게 당연하니 백화점도 폐쇄하고, 고객 눈앞에서 돈을 세는 은행원은 강도 교사범으로 처벌해야......"
박차오름 판사의 첫 재판 날, 한세상 부장이 법복을 입혀준다. ‘법복을 벗는다‘는 말이 판사의 직을 사직한다는 말로 쓰일 만큼법복은 판사의 직책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첫 재판을 마친 후, 재판장의 말씀이다. "고생했소. 사람들은문 판사라는 개인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법복이라는 옷을 보고 절을 하는 거요. 그걸 잊지 마시오." 법복을 입을 때마다. 이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
티끌 하나 없이 고결한 사람만 상대방 잘못을 물을 수 있는 건가요? 오십 보 백 보면 백 보가 두 배의 벌을 받아야죠. 그리고누구 몸에 묻은 게 겨고 누구 몸에 묻은 게 똥인지도 가려야죠. 이런 걸 가리지 않으면 누가 득을 보죠? 백 보만큼 나쁜짓을 한 인간, 몸에 똥 범벅된 인간들 아닌가요? 그런 인간들이 상대방에게도 서너 보 흠이 있으면 이걸 꼬투리 잡아 오십보 백 보 운운하다가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겨 묻은 개인 척하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요?" 한 부장의 매서운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박 판사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경위야 어쨌든‘으로 시작하는 건 사과가 아니죠. 귀찮으니 먹고 떨어지라는 수사일 뿐. 사과도 용서도 합의도먼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혀진 뒤에 하는 것 아닌가요? 정의도 한정된 자원이라고 말씀하셨죠. 맞아요. 세상의모든 시시비비를 끝까지 밝히는 건 불가능할지 모르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기준이 액수의 많고 적음인가요? 뻔뻔한 불의가 자행되고 있는지 여부가 더중요한 것 아닌가요? 소송 경제, 분쟁의 효율적 해결 다 필요하지만, 그전에 초등학생도 아는 정의를 제대로 선언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 임무 아닌가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언론에나오는 거창한 사건들, 튀는 일들뿐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는 대다수의 일하는 이들은 화려하지 않고 튀지도 않는 일들을 묵묵히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호들갑스러운 탄식과 성급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묵묵히 굴러간다.
"어, 내가 그 학교 교수랑 동창인데 내가 오름양 잘 좀 봐주라고 얘기해줄게. 내가 예술의전당 사장이랑 불알친구인데 한번 큰 무대에 서볼 생각 없어?" 어느새 카페 여사장도 박 판사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왠지 수컷 공작새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있잖아요 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호화찬란한 꼬리를 활짝 펴고 암컷에게 어필하려고 애쓰는공작새들, 무늬는 다양하더라고요. 인맥 자랑, 미국에서 박사 한 자랑, 집안 자랑, 몸에 걸친 명품 자랑……… 저보다 스무살, 서른 살 많은 어른들이 꼬맹이인 제 앞에서 필사적으로자랑들을 하시니 감탄해드리는 것도 지치던데요. 심지어는해외 출장 때 샀다는 명품 넥타이를 뒤집어 라벨까지 보여줘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대인관계몀에서는 특히 이성에 대해서는 미성숙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왜일까 생각해봤는데, 결국 이성을 대등한 존재로 존중하면서 관계를형성해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 같아요. 유혹이란 대등한 존재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행위예요. 상하관계에만 익숙한 사람들이 멋진 유혹자가 될 수 있을 리가요. 뭐, 중년뿐이겠어요? 클럽에서 여자 꼬시는 비법, 원나잇 비법을 가르치는 소위 ‘픽업 아티스트‘에게 비싼 수강료를 내는 청춘들이 과연 어떤 중년으로 늙어갈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우리 쪽팔리게 살진 말자."
위트 "사람 사는 세상은 정답만 있는 건 아니니 조급해하지 말아Q.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지요. 조금 억울해도 그 또한 다 지나갑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들 하잖아요?"
"아까 모범생으로 살아야 하는 소수자의 압박감 얘기를 들으며 머리가 어질어질했어요. 난 우연히 공부 하나 잘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직업을 갖게 되었죠. 온통 남자뿐인 환경에서 약점 하나 보이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내가 이 일을 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 속의 괴물을 들여다볼수록 내 안의 괴물이또렷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사람들은 내 겉만 보지 내 안에똬리를 틀고 있는 것들은 보지 못해요. 난 엄격한 가정에서모범생의 탈을 쓰고 자랐지만 속으로는 날 억누르고 괴롭히는 인간들 모두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어요. 체지가 바뀌었으면 나 또한 내가 재판하는 범죄자들과 같은 짓 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제2호 여성 대법관인 전수안 대법관은 2012년 퇴임사에서 "여성 법관들에게 당부한다. 언젠가 여러분이 전체 법관의 다수가 되고 남성 법관이 소수가 되더라도 여성 대법관만으로 대법원을 구성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헌법기관은 그 구성만으로도 헌번적 가치와 원칙이 구현돼야 한다."고 위트 있게 일침을 가했다.
"난 평소 궁금한 게 있어. 한국 사람들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만이 귀한 것이고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건 부당한 것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런데 전지현, 김수현 같은 타고난 외모에 대해서는 우월한 유전자라며 숭배하지. 김연아, 류현진 같은 스포츠 천재도 여신이나 영웅 취급하고, 물론 이들도 노력은 했겠지만 과연 타고난 재능이나 극히 예외적인 미모 없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현대 과학이밝혀낸 바에 따르면 지능은 물론 인내심이나 집중력같이 노력에 필요한 기질조차 거의 절반 정도는 유전되는 거야. 슬프게도 대자연은 원리적으로 불공평해.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유독 타고난 것 중에 부에 대해서만 이를 갈고 저주하는 거지?"
"선배, 나도 평소 갖는 의문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왜 우리나라는 상장회사에도 기업 오너라는 말을 쓰는 거지?" 민 선배는 무슨 소리냐는 듯 박 판사를 쳐다보았다. "회사법 어디를 봐도 주식회사에는 출자자인 주주가 있고집행기관인 이사, 대표이사는 있지만, ‘회장‘ ‘창업자‘에 관한규정은 없더라고, 선배네 집안이 창업자이고 회사 주식을 꽤갖고 있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백 퍼센트 갖고 있는 건아니잖아? 저번에 신문 보니 다 합쳐서 5퍼센트도 안 되는 것같던데."
우라고, 민법 공부할 때 처음 배우는 것 중 하나가 자연인과법인의 구분이거든." "그건 너무 단순 논리야. 자본주의의 엔진은 기업가 정신이야. 창업자에게는 단순 투자자와 다른 인센티브가 주어져야지." "물론이야. 그 인센티브는 기업 공개 후 발생하는 막대한 주가 상승으로 인한 이익, 대주주로서 이익 배당을 받을 권리, 그리고 경영자인 등기 이사로서 받는 보수겠지. 그게 글 로벌 스탠다드 아니야? 미국은 창업주 가문도 경영에 참여안 하면 이익 배당을 받을 뿐이고, 전 세계에서 온 탁월한 인재들이 최고경영자로서 막대한 보수를 받는다며,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업 지배권 때문에 주식을 팔지는 않고, 회사에 이익이 생겨도 미래 투자를 위한 자금이라면서 배당은 안 하고, 법적 책임을 지는 등기 이사로 이름을 올리지도 않는 경우가 많더라고 난 도대체 무슨 수입으로들 사시나 걱정했어. 요즘 뒤늦게 좀 알겠어."
"선배가 유학 다녀와서 차린 광고 회사, MJ그룹 광고 물량을 독점해서 이익도 엄청 내고 주가도 수십 배 올랐다며? 아까 승무원이 열심히 돌면서 판매하던 기내 면세품 판매 수입도 항공사가 아닌 선배네 가족 소유 별도 법인으로 들어간다고 들었어. 정말 치열한 기업가 정신이야. 선배네 같은 수준높은 집안은 안 그러겠지만 회장 일가 가정부에 운전기사, 안마사까지 회사가 직원으로 고용해서 월급 주고, 생활비에 유흥비까지 모든 걸 법인카드로 비용처리하며 사는 경우도 있다더라. 정말 미개하지 않아? 글로벌 스탠다드에 비춰보면." 박 판사는 돌아서며 덧붙였다. "아까 우월한 유전자 운운하며 궁금해하던 것 대답해줄게.. 대자연은 불공평하지만, 최소한 치사한 반칙은 하지 않아. 그래서 사람들이 승복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선배가 말한 ‘미개한 국민들이 내는 혈세로 월급 받는 공무원이라구. 회항 사고시 국내 항공사들의 보상 약관이외국 항공사와 달리 고객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저분들과 꼼꼼하 따져봐야겠어."
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인간 사회의 약속이다. 그런데, 나약한 인간을수렁 속에 방치하는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는 걸까.
판사로 일하다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밑바닥, 어둠을 많이 보게 된다. 처음에 분노하고 우울해하거나 냉소적으로 되는데, 계속 보다보면 그 사람들이 이상하고 나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상황이 나쁜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쁘거나 추한 사람들이 있는게 아니라 나쁘거나 추한 상황이 있는 거다.
"국민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면 늘 옳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진짜로? 유대인은 열등한 인종이니 살처분해야 한다는 것이 독일 국민 다수의 뜻이었고, 흑인은 백인과 같은 버스를 타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라는 나라 국민 다수의 뜻이었지. 여자아이를 강제로 할례하고 민간인을 납치해서 참수하고 고대 유적을 파괴하는 행위들도 진심으로 옳은 일이라 믿으며 열광하는 사람들의 지지 위에서벌어지지. 난 말이야, 소수의 악마들이 선량한 국민들을 총칼로 위협해서 인류의 어리석은 악행들이 벌어졌다는 식의 얘기는 모두 사기라고 생각해, 실은 선량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동참했었다고, 권력은 언제나 부패하니, 까 분리하여 서로 견제해야 한다는 권력분립론은 누구나 얘기하지만, 실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있어, 국민 역시견제 받아야 한다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철저한 불신 위에 국민, 의회, 정부, 법원, 언론, 정당 모두 서로가 서로를 견재하도록 정교하게 설걔된 것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인 거야"
"자기 자리면 바로 얘기흘 했어야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야. 너네 같은 꼬마들이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민법에는 취득시효라는 것이 있어. 남의 땅이라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평화롭게 20년간 점유하고 있으면 땅 주인이 되는 거야. 자기 땅을 방치하고 나 몰라라 했던 원주인은 땅을 뺏기는 거고, 알겠냐?"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 『미스 함무라비」에서도 재판부가화끈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하나도 없다. 항상 그런 식이다. 판사는 늘 벽에 부딪힌다. 햄릿처럼 갈등하고 고민한다. 정작 해결의 실마리를 쥐는 것은 시민들이다. 1번 배심원‘ 노인처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 가장 생각이 달랐던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판사들이 한 일은 없다. 사회가 실질적으로 바뀌는 것 역시 그런 방식이 아닐까.
법정 저 높은 곳에서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판사들이 실제로는 무력감을 느끼며 정답이 없는 안갯속을 헤쳐나간다. 판사는 도로,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일 뿐이다. 주어진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기능한다. 그 법을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결국 시민들이 쥐고 있다. 권리 위에 잠자지 말자, 주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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