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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 행복한 삶을 위한 인문학
김종엽 지음 / 가즈토이(God'sToy)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표지그림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제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삶을 사랑할 수 있다"라고 적힌 문구.
책날개에는 에드가 드가의 Mrs Jeantaud in the Mirror라는 간단한 소개만 적혀있을 뿐 설명 따윈 없었다. 당연하다. 이 책은 철학책이지 서양회화책이 아니니까. 비록 그림을 보는 방식이 틀렸다 할지라도 출판사의 전략은 적어도 나에게는 적중한 것 같다. 보자마자 덥석 물었으니까. 거울을 바라보는 여인의 옆모습은 정말 우아하고 품위있지만 거울 속의 여인은 낯빛이 어둡다 못해 저승사자럼 보인다.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가 다르게 표현된 이 그림을 보고 나는 자연스럽게 존재의 분열을 다룬 이상의 시 '거울'을 떠올렸다. 임신과 동시에 직장을 관두고 애 키운답시고 살림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밥만 축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이따금씩 던지는 나를, 그림과 부제가 강하게 끌어당겼다.
행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려고 오늘 이 순간도 달리고, 달린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행복을 느끼는가는 개인차가 매우 크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권력(외모, 집안배경, 학력, 직업, 소속 등)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고 사회적 권력에 연연해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서의 자신을 사랑함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다. 나를 둘러싼 외부 조건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누가 보아도 후자가 더 세련된 형태의 행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 자체로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이 타인에게 확대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먼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 그 자체로 생존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삶을 자리를 배려하는 '인정'의 행위인 것이다. 이 때의 '자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한 개인의 '하나밖에 없는 삶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의 형태를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으로 예를 들었다. 잘난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못난 자식의 죽음 앞에 하늘이 무너지는 부모이 심정이 바로 그것이다. 대기업 CEO의 자살과 노숙자의 자살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지점인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유용가치를 창출한 사람에게 더 크 사회적 존엄성을 부여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어느 누구도 노숙자의 죽음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사회적 조건은 확연하게 다르다. 하지만 대기업 CEO나 노숙자나 분명 동등한 인격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하나밖에 없음'이라는 존재의 인식만 가능하다면 둘의 정체성이 동등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와 동일시하는 풍조로 인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작은 배역을 맡은 사람은 인간적 가치도 작다고 평가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맡은 배역이 대통령이든 노숙자이든 각자의 삶은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대기업 CEO나 대통령과 같이 경쟁을 통해 우위를 점하고, 일정한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월한 사회적 조건을 가진 사람은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희생에 대한 유감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을 신이 연출하는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라고 볼 때, 비중있는 배역을 맡음으로 인해 갈채를 많이 받았음에도 베풀지 않았다면 그는 당연히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자신이 갈채받은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지은이는 철학사를 되짚어보며 '인간'에 대한 성철을 하고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현실과 동떨어져 관념적인 이론들만 늘어놓은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오히려 철학이야말로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동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아쉬웠던 점은 철학 강의서의 느낌이 컸다는 점이다. 물론 지은이가 밝혔듯 대학에서 진행한 철학입문 강의라고는 하지만 교양수업 교재로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통해서 얻은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알고 깨달았다기보다 잠시 망각하고 있던 어떤 것을 학문적 접근으로 상기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철학이었다는 것이 새롭다면 새로웠다고 굳이 말하겠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성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종교와 철학이 같은 범주에 속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이 우리 사회에서 너무 상아탑의 연구과제로만 취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