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페스트 속에 살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페스트를 읽는 순간, 우리가 메르스 바이러스에 휩싸였다는 점이다. 재앙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오랑 시민들은 휴머니스트들이다.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속보로 전해지는 감염자의 수 역시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세 명, 열 명, 삼 십명. 숫자는 통계일 뿐이고 아직은 나와 먼 이야기이며, 늘 그렇듯이 내일은 뭘하지 이사를 가야하는데 이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짜 놓는 것이다.


페스트 대응 초기 모습이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를바가 없고, 심지어 명칭인 `페스트`를 가지고서도 한참을 의논한다. 이미 사라져버린 질병, 그러나 무시무시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페스트. 페스트가 진행되면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영웅주의를 강조하지 않는 측면은 마음에 든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늘 영웅을 기대하는데, 선하면서 다른 사람에 맹목적으로 봉사하는 인간의 존재는 현실에서 믿기 힘들다.


어린아이가 죽어갈 때 느끼는 의사 리유의 분노, 그러나 이 마저도 신의 사랑으로 믿는 파늘루 신부. 신부의 죽음은 자신의 믿음을 철저하게 증명한다. 페스트가 아니면서 페스트에 걸렸던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범죄자인 코타르는 오히려 페스트 상황을 즐긴다. 정상이 아닌 상태가 그를 무엇보다 정상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관념 하나로 탈출을 시도한 랑베르,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타루.


메르스 바이러스 상황에서 <페스트>는 단 하나의 교훈을 보여준다. 그것은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예언은 아니다. 페스트를 이겨낼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근거 없는 희망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실성,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견디면 찾아올 마지막의 순간은 반드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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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신과 영혼에 관해 이성으로 묻다.


성찰의 초판 제목은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여기서 신의 현존 및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 증명됨>이다. 데카르트는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이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신과 영혼에 관한 문제는 `신학`이 아니라 `철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신이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제일철학으로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인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유명한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 책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dubito, ergosum)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지막에는 대화까지 인용한다.​ 폴리안데르, 에피스테몬, 에우도수스 세명의 대화 (특히 에우도수스에 주목할 것)를 통해 앞에서 말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글을 조목조목 하나씩 반박해주기도 한다. 이런 점을 보면 데카르트는 어지간히 시달렸겠구나싶다. 자신의 말을 오해한 사람들을 하나씩 상대하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일까.


그러나 데카르트의 성찰은 당대의 신학자가 보기에 오해할만한 소지를 가지고 있다.​ 신을 어떻게 `철학`으로 증명한다는 것인지! 불경스럽지 않은가,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간도 완전할텐데. 신을 `기만자`가 아닐까 하고 잠시나마 가정하는 부분이나 인간이 제한된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은 당대의 신학자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 있기 때문인데. 물론 데카르트의 결론은 신은 존재한다고 가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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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아홉인 여자 폴과 그의 오래된 연인 남자 로제, 그리고 폴 앞에 운명적으로 나타난 스물 다섯의 젊은 남자 시몽, 로제에게 지나가는 여자 메지. 폴은 고독한 여자이다. 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폴의 외로움을 방치하고 다른 여자와 밤을 즐긴다. 그러나 잘못은 폴에게도 있다. 단 한 번도 폴은 로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이 소설은 오래된 커플의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지만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급격하게 빠지는 열정같은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지도 보여준다. 결국 모든 `사랑`은 감정에서 한계가 있다. 예전에 사랑의 호르몬이 2-3년만 지속된다고 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면 나머지 기간동안 세상의 모든 커플은 `정`으로 산다는 것인가?



우리는 사랑이 두근거리고 설레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쾌감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의 개성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랑도 하나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가면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의 사랑도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썸`이라는 것처럼 무서운 단어가 없다. 상대방에게 느끼는 쾌감,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행동 하나하나를 관심있게 보고 불안에 빠지기를, 잔인함에서 오는 쾌감, 나는 너보다 사랑하진 않아, 자신감에서 오는 쾌감. 썸이 사랑이 되기 전에 썸으로 남고, 또 다른 썸을 찾아서 마치 추리소설처럼 짜릿함만 갈구하는 것이다.



물론 폴과 로제가 다시 맺어진 결말이 사랑의 완전한 모습이고 해피엔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욕할 수는 없다.



쪽지 하나를 받고 싶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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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망명자의 저승 여행기


읽기가 쉽지 않다. 아니, 읽기 어려운 책이다. 재미를 느낄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반감을 사기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고전 반열에 당당히 올라와있는 상당히 유명한 책인데, 아마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끝까지 읽을 노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은 길지 않으나 밑에 주석이 더 길고, 그리스 신화의 여러 에피소드가 들어 있으며, 당시 세계사(교황 관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면 주석을 일일이 보면서 봐도 덜 힘들 수 있다. 사실 굉장히 놀랐던 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그리스 신화가 함께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하느님`과 무리 없이 갈 수 있는 이유는 스콜라 철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사상들을 자신의 논거로 활용하여 기독교 신앙에 이성적인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 사상과 아울러 그리스 신화들이 자연스럽게 녹았다고 볼 수 있다.



단테는 지옥-연옥-천국 순으로 저승을 여행한다. 물론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과 연옥은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천국은 베아트리체의 도움으로. 저승을 여행하는 단테는 글을 쓰고 있는 현실에서 망명자의 신분이었다. 이 점에 주목해서 글을 읽다 보면, 결국 단테가 글을 쓴 목적이 명백해진다. `나는 죄가 없어, 그리고 구원을 받을 거야.`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단테는 신곡을 저술한 것이 아닐까.



지옥에서 단테는 여러 죄인들을 본다. 그들은 현실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단테는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옥은 천국을 가기 위해 머무르는 장소다. 그곳에서 단테는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만나게 된다. 저승은 영혼이 머무르는 곳인데, 특이한 것은 아직 육체가 지상에 있어도 영혼이 악마에게 빼앗겼다면 그 영혼은 저승에 있다. 즉, 몸이 죽지 않았어도 영혼이 저승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연옥에서 단테는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영혼들이 지켜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망명자라는 처지에서 단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는 따끔하게 혼내준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당당하게 네 갈 길을 가라고. 단테 본인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옥, 연옥보다도 천국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베아트리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단테가 사랑했으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여인, 그리고 너무 일찍 죽은 여인 베아트리체.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환상을 천국에서 보여준다. 그녀가 천국에 갈만큼 얼마나 뛰어난 행동을 했느냐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단테에게 있어서 단 몇 번의 만남이 평생을 갈 정도라면. 또 하나 단테는 저승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듣는다. 이는 망명자인 단테를 위로해주는 장치다. 이렇게 될 것임이 정해져 있었으며, 언젠가는 이 고생도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 그리고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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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망명자의 저승 여행기


읽기가 쉽지 않다. 아니, 읽기 어려운 책이다. 재미를 느낄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반감을 사기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고전 반열에 당당히 올라와있는 상당히 유명한 책인데, 아마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끝까지 읽을 노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은 길지 않으나 밑에 주석이 더 길고, 그리스 신화의 여러 에피소드가 들어 있으며, 당시 세계사(교황 관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면 주석을 일일이 보면서 봐도 덜 힘들 수 있다. 사실 굉장히 놀랐던 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그리스 신화가 함께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하느님`과 무리 없이 갈 수 있는 이유는 스콜라 철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사상들을 자신의 논거로 활용하여 기독교 신앙에 이성적인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 사상과 아울러 그리스 신화들이 자연스럽게 녹았다고 볼 수 있다.



단테는 지옥-연옥-천국 순으로 저승을 여행한다. 물론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과 연옥은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천국은 베아트리체의 도움으로. 저승을 여행하는 단테는 글을 쓰고 있는 현실에서 망명자의 신분이었다. 이 점에 주목해서 글을 읽다 보면, 결국 단테가 글을 쓴 목적이 명백해진다. `나는 죄가 없어, 그리고 구원을 받을 거야.`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단테는 신곡을 저술한 것이 아닐까.



지옥에서 단테는 여러 죄인들을 본다. 그들은 현실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단테는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옥은 천국을 가기 위해 머무르는 장소다. 그곳에서 단테는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만나게 된다. 저승은 영혼이 머무르는 곳인데, 특이한 것은 아직 육체가 지상에 있어도 영혼이 악마에게 빼앗겼다면 그 영혼은 저승에 있다. 즉, 몸이 죽지 않았어도 영혼이 저승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연옥에서 단테는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영혼들이 지켜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망명자라는 처지에서 단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는 따끔하게 혼내준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당당하게 네 갈 길을 가라고. 단테 본인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옥, 연옥보다도 천국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베아트리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단테가 사랑했으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여인, 그리고 너무 일찍 죽은 여인 베아트리체.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환상을 천국에서 보여준다. 그녀가 천국에 갈만큼 얼마나 뛰어난 행동을 했느냐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단테에게 있어서 단 몇 번의 만남이 평생을 갈 정도라면. 또 하나 단테는 저승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듣는다. 이는 망명자인 단테를 위로해주는 장치다. 이렇게 될 것임이 정해져 있었으며, 언젠가는 이 고생도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 그리고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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