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망명자의 저승 여행기


읽기가 쉽지 않다. 아니, 읽기 어려운 책이다. 재미를 느낄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반감을 사기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고전 반열에 당당히 올라와있는 상당히 유명한 책인데, 아마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끝까지 읽을 노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은 길지 않으나 밑에 주석이 더 길고, 그리스 신화의 여러 에피소드가 들어 있으며, 당시 세계사(교황 관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면 주석을 일일이 보면서 봐도 덜 힘들 수 있다. 사실 굉장히 놀랐던 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그리스 신화가 함께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하느님`과 무리 없이 갈 수 있는 이유는 스콜라 철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사상들을 자신의 논거로 활용하여 기독교 신앙에 이성적인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 사상과 아울러 그리스 신화들이 자연스럽게 녹았다고 볼 수 있다.



단테는 지옥-연옥-천국 순으로 저승을 여행한다. 물론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과 연옥은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천국은 베아트리체의 도움으로. 저승을 여행하는 단테는 글을 쓰고 있는 현실에서 망명자의 신분이었다. 이 점에 주목해서 글을 읽다 보면, 결국 단테가 글을 쓴 목적이 명백해진다. `나는 죄가 없어, 그리고 구원을 받을 거야.`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단테는 신곡을 저술한 것이 아닐까.



지옥에서 단테는 여러 죄인들을 본다. 그들은 현실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단테는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옥은 천국을 가기 위해 머무르는 장소다. 그곳에서 단테는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만나게 된다. 저승은 영혼이 머무르는 곳인데, 특이한 것은 아직 육체가 지상에 있어도 영혼이 악마에게 빼앗겼다면 그 영혼은 저승에 있다. 즉, 몸이 죽지 않았어도 영혼이 저승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연옥에서 단테는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영혼들이 지켜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망명자라는 처지에서 단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는 따끔하게 혼내준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당당하게 네 갈 길을 가라고. 단테 본인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옥, 연옥보다도 천국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베아트리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단테가 사랑했으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여인, 그리고 너무 일찍 죽은 여인 베아트리체.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환상을 천국에서 보여준다. 그녀가 천국에 갈만큼 얼마나 뛰어난 행동을 했느냐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단테에게 있어서 단 몇 번의 만남이 평생을 갈 정도라면. 또 하나 단테는 저승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듣는다. 이는 망명자인 단테를 위로해주는 장치다. 이렇게 될 것임이 정해져 있었으며, 언젠가는 이 고생도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 그리고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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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존재하고 있습니까?


데카르트라는 이름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선뜻 책을 잡기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책을 읽기도 전에 겁을 먹다니. 저자인 데카르트 이름 때문도 있지만, 제목 탓도 없지 않다. 방법서설이라니. 방법에 관한 이야기나 에세이 정도로 보면 되겠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구절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살펴보자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흔들리지 않는 철학의 제일원리는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된다.




융합의 시초, 데카르트

이상한 구분법이 있다. 문과와 이과. 나는 수학이랑 과학을 잘해서 국어랑 영어는 못해, 혹은 나는 국어랑 영어는 좋은데 수학이랑 과학은 싫어. 이런 이상한 구분법. 과목에 대한 취향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설픈 구분 짓기는 자신의 한계를 정해놓고 시야를 좁게 만든다.


스티브 잡스 이후로 융합이 강조되는가 싶더니, 융합 교육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놓고 두개를 섞는 것이 융합인가? 수학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는 아이를 키우려는 것은 대학교를 잘 보내려는 욕심이지 융합이 아니다. 진정한 융합이란 분야를 나누지 않고 편식하지 않는 넓은 지식을 갖추는 것이다. 지식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호기심만이라도 갖는 것.



공장이 분업화되고 사회가 전문화되어 나누어지더라도 인간의 이성마저 분업이 되어서야 되겠나. 우리는 기계의 부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대학교의 통폐합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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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 보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흡입력이 대단한 책이다. 동물농장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조지 오웰의 글은 쉽게 읽히는 동시에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에 대해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예전에 한번 읽은 기억으로는 분명 윈스턴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죽은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고 행복한 몽상에 잠긴 것이었다. 증오라고 믿고 있었던 빅 브라더에 대한 자기투쟁에서 그는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 본다. 북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우리는 종종 북한만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인지.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것은 싫어할 자유도 포함된다. 좋아할 자유도 있지만 싫어할 자유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 몇 개를 싫어하도록 `교육` 받았고 `감시`받고 있다. 학교 교육만이 아니라 사회화된다는 의미에서, 영화에서나 예능 프로에서나 어디서든 마찬가지다. 이 특정 몇 개의 논리는 사실 어떠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주류의 의견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의식이 없는 자는 억압에 세뇌를 당하였고, 의식이 있는 자 역시 억압에 저항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처단할 기회를 잃었고, 권력을 잡게 된 자들은 허물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의 증오심을 한 곳으로 모았다.



빅 브라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텔레스크린을 통해서, 주변에서 항상 감시하고 있는 가족과 동료들을 통해서. SNS를 카카오톡을 제외하고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검열`에 빠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소통이 가능한 공간에서 내가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고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고, 옳지 않은 확신을 줄 수 있다. 자기검열은 어이없는 곳에서도 이어지는데, 가령 사과 모양의 디자인을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과가 포함하고 있는 창의성, 독창성을 내가 즐긴다고 말하고 다니기에는 부끄럽다. 사과 모양 하나를 가진다고 해서 그것을 만든 사람의 독창성을 내가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싫어서 사과 모양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면 이것은 자기검열의 하나이다.



1984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언어의 기능이다. 언어는 곧 사고로 모든 것을 통제한다. 특정한 사고를 표현하는 언어가 없어진다면, 그것은 특정한 사고 자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언어는 무서운 것이다.



요즘에야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가 바뀌었더라.
ㆍ초기 맹세문 :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ㆍ1974년 이후 맹세문 :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ㆍ2007년 이후 맹세문 :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과연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가능할까? (몸과 마음을 바치지 않고 충성만 다하면 되니 다행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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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18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명시성이야말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인데, 문장을 살짝씩 바꾼 거 웃프네요-_-;
절대 삭제하지 않는 `충성`에 이미 몸과 마음이 다 포함되니 중복을 빼버린 문장 만들기가 점점 탁월해지는 지도요;
평서문이 계속 명령문으로 도착하는 시대.

방랑 2015-05-18 12:51   좋아요 0 | URL
사실 바뀐 것도 몰랐어요,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알더라구요. 의외인 것은 예전처럼 초등학교 때 강제로 외우게 하진 않나봐요.

AgalmA 2015-05-1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방랑님이 올리셔서 바뀐 거 알았어요. 강제로 외우게 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저런 명시가 있다는 게 이미 강제적 의미를 띄고 있잖습니까...국가보안법이니 이적행위니 해서 법으로 재단 들어가고... 보네거트 책처럼 정말 <나라없는 사람>이고 싶어요. 나라없는 설움 땜에 다들 이 체제를 감수하는 참 복잡한 삶의 당위...
 
파우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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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순간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집착.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었다. 순간을 향해 집착을 하는 순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노라. 아마 자신이 있었겠지, 순간을 향해 집착하지 않을 자신의 이성에 대한 믿음. 혹은 쾌락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그 힘을 믿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잡아두고 싶은 장면들. 순간은 지속되지 못하고 찰나에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후회를 하고 변명을 한다.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의 눈에는 파우스트의 집착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왜 순간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지를. 가련하고 불쌍한 인간. 왜 어떤 쾌락에도 계속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쾌락을 자꾸 찾는 것인지.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방황이 노력이 일부인 것인지를. 방황을 해도 결국은 모두 자신만의 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길에 책임을 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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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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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순간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집착.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었다. 순간을 향해 집착을 하는 순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노라. 아마 자신이 있었겠지, 순간을 향해 집착하지 않을 자신의 이성에 대한 믿음. 혹은 쾌락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그 힘을 믿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잡아두고 싶은 장면들. 순간은 지속되지 못하고 찰나에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후회를 하고 변명을 한다.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의 눈에는 파우스트의 집착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왜 순간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지를. 가련하고 불쌍한 인간. 왜 어떤 쾌락에도 계속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쾌락을 자꾸 찾는 것인지.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방황이 노력이 일부인 것인지를. 방황을 해도 결국은 모두 자신만의 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길에 책임을 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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