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이책을 읽었던 감상을 말하자면 `너무나 우아하고 고매하다`였다. 나로선 채식=인간적, 육식=야만적이라는 작품속 이분법적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채식주의자의 절망과 슬픔이 오늘도 한끼를 에우려 질낮은 육식을 하는 이들의 고충보다 크게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초탈한 고상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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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6-05-1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나에게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오래전에 읽기는 읽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 오래 아끼고 기억할 소설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은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과 찰스 부코스키의 ˝팩토텀˝을 읽어보셨나요? 부코스키는 인간은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반 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셔야 글을 더 잘 쓸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누군가 보기에는 이것이 난폭한 발언일지 모르나, 나에겐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절실한 외침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 읽지는 않았지만(영화로만 보았지만..) 상징의 상투성 때문에 읽고 싶단 생각이 별로 안 들더군요. 눈에 보이잖아요.. 글구 저는 부커 상에 세계 3대 문학상인 줄은 어제 처음 알았습니다.

글구 이게 본상도 아니잖습니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와 똑같은 구조이던데..
솔까말 영어로 쓰여진 소설에서 엄선하는 문학상에 3대 문학상이라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죠..

수다맨 2016-05-19 10:12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상징의 상투성 때문에 약간은 거부감이 들지요. 저는 한강을 나름대로 괜찮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만 범속한 현실과 맞지 않는 고상하고 식상한 상징적 구도(채식주의에는 인간적이고 특권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육식주의를 문명적/야만적/억압적인 문화로 치부하는 태도)를 작품에 세우는 데에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습니다.
어제 신문을 일독하니 한강이 받은 상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라 합니다. 말씀하신 본상은 영연방 작가들(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인도, 남아공 등)에게 돌아가는 상이고, 인터내셔널 상은 비영연방 작가들에게 수여된다고 하네요. 두 상의 상금은 차등 없이 똑같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권위가 좀 더 높은 것은 본상일 겁니다. 인터내셔널 상은 어떻게 보자면, 작가의 내공(본상은 이것만 있어도 충분하죠)보다도 번역자의 솜씨에 더 무게중심이 쏠릴 수도 있으니까요.

교외 2016-05-3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바 성과 속이라는 구도, 육체와 정신, 영원과 순간 같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한강의 오랜 주제인 듯해서 어디서부터 문제를 삼아야 될지 모르겠더라구요.(이런 오래된 이분법을 플라톤 철학에서 읽어내는 가라타니의 철학 비평처럼 누가 한강의 문학에 대해서도 비평해줄 수 없을까요^^) 수다맨님 코멘트처럼 한강은 너무나 우아해서, 세상의 더러움과 고통과 천함에 대해서 말할 때 그런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런 걸 초월하고 싶어하지 제대로 말할 줄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제가 부코스키를 잘 몰라서인지 ˝부코스키야말로 인간적인 절실한 외침이다˝라는 말씀은 한강에 대한 또 하나의 이분법적 대립각 세우기로 보이네요. 그러고 보면 가라타니의 지적은 모든 이분법이 <진정한 나>와 그에 못미치는 남이라는 구도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거였던 듯합니다...

수다맨 2016-06-01 14:19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돌이켜 보자면 제가 부코스키(좋은 작가) VS 한강(좋지 않은 작가)이란 구도를 과하게 강조하는 댓글을 남겼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에도 특정 작가에 대해서 비판적 논평을 남기고자 한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해당 작가가 구축한 문학적 세계의 허점이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해당 작가의 문학적 지향점보다는 좀 더 깊고도 색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작가를 비교/고찰해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비교/고찰이 저처럼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그칠 수 있기도 합니다만, 얼마큼 필요한 작업이란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대로 한강은 세상의 고통과 천박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초월적 입장에 서 있는 듯합니다. 부언하면 작가는 수려한 문체로 인간의 아픔과 슬픔을 말하려고 하는데, 정작 그 아픔과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불충분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네요. 예컨대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영혜라는 인물은 육식(하기)에 맞서서 채식에 기초한 식습관을,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식물적인 삶을 추구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원인(도마를 보면 겁에 질리는 것,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고 자란 것, 수시로 피 묻은 고기 꿈을 꾸는 것, 아버지가 반강제로 탕수육을 먹인 것 등)을 톺아보면 뭐랄까, 다분히 평면적이고 나이브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박하게 말해서 저는 작가가 육식주의의 세상 VS 육식에 반항하는 사람의 구도를 굳이 세우고자 했다면, 이 구도를 지탱할 수 있는 보다 철저하고 근본적인 동인을 찾았어야 했으며, 이것을 찾는데 실패했다면 작가가 사람 삶에 대한 이해를 표층적으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부코스키는 자기 삶을 그대로 소설에 투영하는 작가입니다. 부코스키의 창작 방법과 소설 경향에 대해선 여러 단점도 있겠지만(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가 비슷비슷한 얘기를 끊임없이 나열하고 있으며 절제미와 창발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가지 막강한 장점은 나이브한 초월적 입장을 취하진 않는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체험과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작가로 보입니다. 작가가 식물적 인간과 폭압적 세상을 상정하고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 작가가 자신이 피부로 겪었던 세속에 대해서 (비록 헛소리에 가까울지라도) 가감없이 발언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