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꼬 미싱

                        백무산

옛집 어둑한 방 구석진 곳에 칠이 벗겨진 발재봉틀 한 대
일찍 집 떠나 삼십 년은 넘게 보지 못한
나와 동갑내기 레이꼬 미싱

전쟁 통에 서로 곁을 잃고 빈자리만 보고 만나
내가 태어나던 그해 전쟁을 깁고 새살림 일궈볼 꿈으로
읍내 공설시장 작은 가게 창가에 처음 놓였던
신식 미인처럼 반짝이던 그 미싱

알록달록 다홍실 명주 무명 색실과 나일론 옥양목 포플린
색단추와 동정 리본들이 어우러져 강강수월래
춤추듯 돌고 돌아 크고 작은 날개를 잣던 그 미싱

짐꾼들의 남루에 누비천 덧대어 누비고
코흘리개 아이들 내리닫이 개구멍바지가 되고
헐벗음에도 있어야 할 품위 한 조각 깃을 세우기도 하고
능금밭 과수원집 처녀들 설레는 바람을 꾸밈실로 그려넣고
폐허의 거리에 다홍실 풀어 박음질하던 그 미싱

어머니 버선발로 미싱을 타는 밤이면
처걱처걱 드르륵 처거처걱 드륵 드르륵─
멀리 기관차 소리가 나고 종일 목구멍 깔딱이던 
우리들 갈대 기둥 하나에 매달린 비비새 둥지 같은 집으로 먹을 걸 싣고
밤길 고갯길 가윗밥 날리며 숨가쁘게 달려오던 그 미싱

내 꿈을 동무들은 부러워하였지
순사나 특무상사가 되고 싶다던 아이들에게
내는 말이다 증기기관차 기관수가 될 끼다
압록강 건너고 만주벌판 달려가는 기관수 말이다
시베리아까지도 달려갈 끼다, 자랑을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마이 멀리나? 천리만리도 넘겠제? 눈길에도 갈 수 있나?
마치 곧 떠나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게 묻곤 하였지
꿈길에 달려가던 기관차 소리에 깨어보면
늦은 밤 돌아가던 그 미싱

그 소리에도 몰랐던 한숨이 배어들고
슬픔이 물컹물컹 묻어나곤 할 무렵
내 꿈도 질척질척 폐허를 달리고
쌍엽기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공회당 담벽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담화가 나붙고
군용차 들이닥친 꼭두새벽 군홧발들이 마을을 뒤지고
밤새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던 눈 내리던 새벽에도
야밤 사이렌 소리 가슴 태우며 애를 끓이듯 돌아가던 그 미싱
조각 천 이어 눈물 많던 이웃들 눈물수건이 되곤 하던
그 세월 깁고 이어 박음질하였지만 어머니
정작 기운 것 하나 없다 하시네
그 아픈 상처 하나 깁지 못했다 손 놓으시네
한 몸에 난 조각들조차 알록달록 살아보지 못했다 맥을 놓으시네
아, 일찍이 그 일은 우리들 몫이었으나
그 어둡고 거친 노동으로도 다 이어 넘지 못해
더 긴 세월을 짐 지시게 하였네 그 시절 더욱 눈물겹게 하였네

어머니의 근대가 그렇게 저물고
어둑한 방 구석진 곳에 다소곳이 앉은 나의 슬픈 동무
차갑게 숨죽였으나 꿈꾸듯 뜨거움 깊이 감추고
손끝 가 닿으면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 덥석 잡고
옛길 그 푸르고 슬픈 길을 다 보여줄 것 같은 
동갑내기 계집아이 레이꼬 미싱


-백무산 "거대한 일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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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정서도, 탁월한 감각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에 나왔던 시들 모두가 명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를 만나면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아득한 과거의 한쪽을 돌아보게 된다. 백무산은 이 땅에서 보기 드물게, 시를 아주 정직하게 쓰는 시인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대로, 본 대로, 느낀 대로 쓴다. 때문에 기교를 탐하거나 별다른 감각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조선소 노동자로서 험난하게 살아온 자신의 과거와, 지금은 산속 깊은 절간에서 살아가는 나날의 일상을 꾸밈없이 쓴다. 그럼에도 그는 남진우나 (최근의 고은처럼) 천상의 도인 같은 시를 쓰려고 하지는 않는다(물론 아예 안 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가 살아온 나날이 그만큼 험하고 굴곡졌던 탓이리라. 

어쨌거나 이 시는 명편의 반열에 들 만하다. 이웃인 곰곰발님 말씀처럼 시는 (감각이나 기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심이 반영된 진술'로 쓰이는 것이라는 오래된 (그러나 지금은 진부해진) 진리를 다시금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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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부터인가 수사가 화려한 시에 대한 의심이 들고는 해요.
솔직하게 말해서 수사가 화려한 시'를 쓰는 능력, 어렵지 않습니다.
전 시에 수사가 잔뜩 붙으면 마치 사탕에 침 바른 상태에서 설탕가루까지 잔뜩 입힌
맛 같아서 싫더군요. 과잉이란 말이죠. 과잉...

수다맨 2014-01-04 15:1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요즘 시를 잘 안 읽습니다. 손에 잡히는 걸 멏 권 읽기는 하는데 솔직히 다 그게 그거 같더군요. 수사의 과잉이나 말장난의 극치로 가던데, 이런 방식의 시 쓰기가 특색은 있을지라도 별다른 감응은 없더군요.
이제는 뭐랄까, 소박한 글들이 그립습니다. 사탕가루 많이 바른 글 말고 담백한 밥상 같은글이 생각납니다. 차라리 요즘은 부족이 과잉보다는 낫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