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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어디에 있나 2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공중변소 속에서
공중변소 속에서 만났지. 그녀
구겨버린 휴지조각으로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어.
가는 눈발 들릴 듯 말 듯 흐느낌 흩날리는 겨울밤
무작정 고향 떠나온 소녀는 아니었네.
통금시간을 지나온 바람은 가슴 속 경적소리로 파고들고
나 또한 고향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미아,
배고픔의 손에 휴지처럼 구겨져, 역 앞
그 작은 네모꼴 공간 속에 웅크려 있었지.
사방 벽으로 차단된 변소 속,
이 잿빛 풍경이 내 고향
내 밀폐된 가슴 속에 눈발 흩날려와, 어지러워
그 흐느낌 찾아갔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 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미아처럼
하얀 백색가루로 녹아서 내 핏줄 속으로 사라져간
그녀,
독한 시멘트 바람에 중독된 그녀.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
그녀의 품 속 밖에 없네.
-김신용, "개 같은 날들의 기록" 중에서
그 공중변소 속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문 열어! 임검 왔어!"
한참동안 머뭇거리다가 달깍 하고 문고리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 속엔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여자는 그 공중변소의 구겨버린 휴지처럼 더러웠다...
나는 범인을 수색하는 경찰관처럼 그녀의 외투 주머니 속도 뒤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돈을 지니고 있었다면 빼앗았을 것이다. 이번엔 여자의 품속을 뒤졌다. 그때 유방이 뭉클 만져졌다. 그녀가 약간 몸을 뒤틀었다. 가만 있어! 나는 낮게 소리치며, 옷 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따뜻했다. 다시 한 번 애무하듯 움켜쥐었다.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그 무저항에 용기를 내어 나는 한 손을 내려 그녀의 바지 단추를 끌렀고,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까끌한 감촉의 매끄러운 음모는 내 입에서 뜨거운 숨결을 터트리게 했다. 나는 그녀의 바지를 엉덩이에서 끌어내려 한쪽 발만 가랑이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뒤, 그 빼낸 다리를 내 한쪽 손으로 받쳐 들고, 이미 터질 듯이 팽창되어 있는 내 몸을 그녀의 몸속에 심었다.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그녀의 피부는 각질처럼 딱딱히 느껴졌으나, 내 몸은 각질을 뚫으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을 따라 그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흔들리면서도 그녀는 무표정했다. 그녀는 그렇게 강간을 당하면서, 내 항문 속을 파고들던 그 우산 끝과 같은 이물질을 몸 속에 받아들이면서도 식물처럼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 공중변소가 배설을 위해 만들어졌듯이, 그녀도 배설을 위해 흔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서둘렀다. 그 서두름은 너무도 싱겁게 빠른 배설을 가져왔다. 나는 오줌을 누고 난 뒤처럼, 등덜미를 후두둑 떨고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내가 자던 변소 칸으로 돌아와 다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김신용 "달은 어디에 있나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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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의 삶은 고통의 누적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김신용은 소설을 쓸 때건 시를 쓸 때건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도 않고 전략적인 포즈를 취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삶을 단어 몇 마디에 응축하면 그것이 시가 되고, 긴 글로 죽 풀어 놓으면 그것이 소설이 된다. 시인은 시에서건 소설에서건 자신의 황량했던 삶을 수수히 열어 보인다. 이것은 자신의 삶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할 때만 쓸 수 있는, 가장 고수의 수법이다.
"달은 어디에 있나2"를 읽는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다. 나는 이 소설을 언제나 공복(空腹)일 때 읽는다. 배부르거나 기쁠 때 이 소설을 읽으면 죄책감이 밀려들고, 문장의 맛을 잘 느낄 수 없다. 작가가 자신이 겪어낸 처절한 허기를 말하고 있으니, 독자 역시 위장을 텅 비우고 읽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소설은 매혈, 구걸, 구속, 노역, 절도(아리랑치기)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얘기한다. 이것은 찰스 부코스키가 섹스, 도박, 음주를 지치지 않게 말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다만, 김신용에게는 부코스키와 같은 순간순간의 짤막한 유희의 모습이 별로 없다. 시인은 "한 인간이 배고픔 앞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퇴화되어 갔는가 하는 이야기(142쪽)"를 끊임없이 말한다. 그의 글은 인간이 어디까지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지, 거기서 어떻게 벌레처럼 뒹구는지를 가장 사실적인 문장으로 기술한다.
나는 이 소설을 한국 최고의 소설이라 감히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내 일천한 독서 경험을 되돌아 봤을 때, 이 소설보다 더 강렬하고 어둡고 처절한 (한국)소설을 본 적은 없다. 조세희의 "난쏘공"이나 최서해의 '박돌의 죽음', 백신애의 '꺼래이'나 이범선의 '오발탄' 같은 작품들조차도 이 소설보다 처절하지는 않다(그나마 비견될 수 있는 작품은 손창섭의 '인간동물원초' 정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일부러 기괴한 풍경을 만드는 몇몇 작가군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지옥에서 한 송이 '악의 꽃'을 틔우는 저자의 내공을 알고 싶다면, 이 소설을 꼭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유한다. 이 뛰어난 소설에 한 마디 평도, 한 문단의 리뷰도 없다는 것은 정말로 서글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