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말년의 정운영은 급격히 휘어졌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이었던 그는 중앙일보라는 보수신문(?)으로 흘러가 왕년의 성격(변혁적 마르크시즘)과는 다른 칼럼을 써댔다. 몇몇 동료들은 정운영을 '훼절한 맑시스트'라 탄식했고(솔직히 나는 이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민족주의자들(일례로 조정래)은 전향한(?) 정운영을 반기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여기에 실린 칼럼들 모두를 좋게만 생각하진 않는다. 정운영의 굴절된 생각이나 어긋난 판단이 이 책의 몇몇 구절에서 감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좋은 기분으로 읽었다.

내 생각에 말년의 정운영이 싫어했던 것은 -이념의 성향이나 사고의 깊이를 떠나서ㅡ 인간의 '부정직성'이었던 것 같다. 그는 노무현을 탄핵한 수구 세력들을 질타하면서도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한테도ㄱ곱지 않은 눈길을 던진다. 그는 이미 거기에도, 어떤 부정직한 야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듯하다.
맑시스트 정운영은 말년에 '인간 정운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경제학을 논하기 보다는 자신이 감동적으로 읽었던 책에 대해, 대중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고도 멍텅구리 짓을 자행한 386에 대해, 루쉰이 앙숙인 동료들과 나눴던 우정에 대해, 부화한 말들만 넘실대는 세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 놓는다. 인간이 경직된 이념을 넘어설 때 그는 세상의 이치를 다시 파악하고, 재단하게 된다. 말년의 정운영은 이념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해서 마냥 좋게만 보지 않았고, 인품이 훌륭한 몇몇 이들에게 스스럼없이 호감을 드러냈다.
그는 훼절한 맑시스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천품이 훌륭한 사람들, 우정과 인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한테 눈길을 기울인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 (거창히 말해) 한 인간의 진화라 말하련다. 이 노인은 자신의 마지막 칼럼인 '영웅본색'에서 '여기 눈을ㄱ감고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인간'들과 386세력의 정치적 무능을, '영웅본색과 같은 영화'로 위안을 얻으려는 부류를 신랄하게 공박한다. 그는 인간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공정성'과 '정직성'이라고, 병상에서 구술한다.

정운영의 문장은 나이가 들수록 멋있고 아름다워진다. 어쩌면 그는 왕년의 기개를 버리고 사소한 '유미'로 도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그는 이제 '보수든 진보든 그것이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시인을 꿈꾸었던) 이 훼절한, 그러나 인간을 끝내 믿었던 맑시스티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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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을 때는 열정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에 온몸을 바치고는 합니다.
전공투'가 20대인 이유는 아마 젊음의 무모한 열정 떼문이지만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이 열정이 지나치게 거칠고 설 익었다 믿는 거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인간에 대한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잖습니까.

그나저나 수다맨 님은 참 엄청난 독서량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수다맨 2013-11-24 13:31   좋아요 0 | URL
ㅎㅎ 아닙니다. 곰곰발님 독서량에 비하면 제 독서량은 소략한 편이죠.

저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보다 '자기 회의를 하는 사람'에게 더 신뢰가 가더라구요. 열정이 넘쳤던 사람들이 외려 '열정과 욕망만 주체할 수 없이 커져서' 이상하게 변질되거나 타락하는 꼴을 많이 봐서요. 이런 사람들이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극좌'였다가 '극우'가 되고, '열정적 활동가'였다가 '부패한 정치인'으로 변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