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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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글에 대해 평을 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것도 좋은 평이 아니라, 혹독한 평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을 넘어서서 어렵고 난감한 일이다. 서유미의 소설은 더욱이 그렇다. 책의 앞날개에 수줍게 웃고 있는 작가의 사진을 보며, '좋지 않았다'라는 글을 쓴다는 건 미안한 일이다. 뭐 너야 어찌 생각하든, 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면 상관 없겠으나 그 사진은 독자에게 조심스레 읽어달라는 표정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보관함의 책들을 제치고, 미안해 내가 먼저 팔릴께라는 말도 없이, 장바구니에 이 책이 들어간건, '창비'였으며, '창비장편소설상'이었으며, 그것도 '제1회 수상작'이라는 것이었다. 표지가 유치한데, 혹은 제목이 뭐 이래, 라는 어설픈 선입견은 충분히 무시될만 했다.

책의 두 페이지가 넘어가서는, 좀 의아하긴 했지만 모든 소설이 처음부터 땡기라는 법은 없으니까 패스. 몇 페이지 더 읽어보자. 그러다가 맨 뒷표지로 마음을 달랬다. '모든 시대'가 나오고, '서사'가 나오고, 변곡점, 풍속, 세밀화 등등. 이만큼의 단어를 동원하며 심사평을 썼다는 건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리라. 책 페이지가 '20'이 넘어가고 나는 작가의 말을 찾았다. "이 책을 읽게 될 분들을 떠올려본다. (중략) 읽을 만하군, 정도의 평이라면 힘이 날 것 같다." 이런 겸손함이라면 좀 더 기대를 가져도 될 것 같다. 딱 50페이지까지만 읽어보자. 50페이지에 다다를때즈음이었던가, 아님 그 전이었던가. 이제야 작가의 역량이 나오는가 기대를 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내 호흡이 끊겼다. 50폐이지 만으로 판단하기가 아쉬워서, 무언가 있을지도 몰라하는 기대, 나는 20페이지 넘게를 더 읽었다.  

오로지 주관적이지만 좋은 소설이란 다음의 몇 가지 중에 하나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읽을 맛이 난다. 문장의 맛깔남,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 기발한 상상력. 세 가지가 어우러진다면야 그야말로 좋은 소설이겠지만, 그게 안된다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꿰차고 있어야 독자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끌 수 있다. 그런데 '쿨하게 한걸음'은  그러하질 못하다.

문장은 지극히 평범했고-괜찮은 문장이 있었다. "부글거리던 연애만 국자로 걷어내도 인생은 참 단출해진다.(p. 24)"  이 정도-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며-비슷한 류의 소설인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와 비교하면 명확하다.- '고추 사건'을 빼면 상상력 또한 빈곤했다.

결국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 거의 하지 않던 말 ' 이 정도면 나도 쓴다'라는 망발-그 말이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말인지를 나는 안다- 을 내 입에서 나오게 했다.  그 말을 들은 내 친구는 "그 정도야?"라며 반문을 했다. 책이 재미 없어 안 읽는 것과는 다르다.

별을 안 줄까도 고민했으나-지금 해보니 안 줄 수는 없게 되어 있더군- '그래. 이제 한걸음이잖아'하며 별 하나를 매겼다. 그래도 아직 젊으니까, 작가한테까지 실망하기는 이르다.  서유미 작가한테 미안하다. 분명히 리뷰를 찾아볼 것 같다. 

 

ps. 어쩌다보니 카테고리와는 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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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3-19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를 주시다니.. 냉정하세요. 으흐 제가 안 본 책이지만. 표지는 나름 귀여운데요.

밤바다 2008-03-19 22:52   좋아요 0 | URL
저를 제외하고 다른 분들이 다 호평을 써주신듯 하여 좀 뻘쭘하긴해요...

2008-03-20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1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5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5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 가끔씩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쯤, 착 감기는 소설이 있다. 일상 속에서 내가 캐치하지 못했던 내 생각들이나 느낌들을, 작가가 풀어놓은듯하여 내 속속들이 보이는 소설이 말이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 역시 그런 소설이다.

 

o 더 기막힌 건 앞으로 살다보면 그런 일이 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것이다. p13.

- 나는 거짓말이 되어버릴 다짐을 하곤했다. 그냥 다짐만으로 끝나면 좋겟지만서도, 그 괴로움을 못 이겨 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 선언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좀 도와달라거나- 어떻게? 나도 모르는 방책을 상대방에게 요구해버리는 무대책이 이런 시기엔 나올 수 있다- 제발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스스로의 바람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그 다짐이나 선언 역시 하지 않는다,  다음 문장을 보자.

 

o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p13.

-어쩔 수 없지, 라는 체념,

 

o 누군가가 아름답다든가,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일이 나로서는 쉽지 않다.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불현듯 그 규정의 한 모서리가 대상과 어긋나는 듯한 불편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하여 대상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대신,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라든지 매력이 없는 건 아니라든지 하는 조잡한 이중부정을 각주처럼 달아놓고서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식이다. p14.

-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예쁘진 않은데 예쁜편이라거나, 객관적으로 미인형은 아니지만 주관적으로는 예뻐 보여라거나.

 

o 실연이라는 말에 나는 기습을 당한 듯 움찔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가 나를 떠났다는 단순한 사실이 새삼스레 상기되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독초처럼 쓰디쓴 고통의 싹이 쏟아나는 느낌이었다. p18.

- 찹찹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도 없었던 내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게 부당한가. 

 

o 고통은 무례를 용서하게 만드는 법이다. p21.

- 하지만 그 무례를 용서해주고 내 고통을 묵묵히 받아줄줄 알았던 사람이 그렇지 않다면 어떠할 것인가. 충분히 그럴만한 관계에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 그 무례함에 자신이 다쳐버렸다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으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면, 게다가 왜 지나간 사랑한테 화 한 번 못 내고 어설픈 자기한테 푸냐며 길길이 화를 낸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많이 서운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대방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나오는 무례함을 용서하고 애닲아하는 것이다. 그것조차 되지 않은채, 상대방이 안스럽다거나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하다.   

 

o 넌 그때 어땠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계속 숨을 쉬고 살 수가 있는거야? p21.

- 질문이 잘못됐다. 오히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는거야, 가 맞다. 여전히 살아있지 않은가. 소설 속의 문장대로 그런 질문은 '충분히 희망이 있다는 증거(p20)'니까.  

 

o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p23.

- 나의 경우 '사랑-실연-업무몰입'의 반복이다. 우연일지 몰라도, 아니면 평소에 내가 일을 쌓아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연을 겪고나면 일거리는 항상 많았다. 오히려 고맙다. 그다음 수순은 '체력저하'인데,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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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3-15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연을 겪었을 때 일거리까지 많다면, 저의 경우라면 돌아이가 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네요. ㅋㅋ 보통의 경우, 전 실연의 아픔에 푹 빠져버리기 때문에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는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했거든요. 그래서 일도 거의 손을 놓고 지냈었죠. 얼마전에도 그랬구요.

이제 숨도 잘 쉬고, 밥도 잘 먹고,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다시 사랑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다 다시 실연을 당하면 그 땐, 또 모든 것을 멈추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반복 -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

밤바다 2008-03-15 18:08   좋아요 0 | URL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 힘들지요. 아니 숨을 쉬고 있고 적은 양이나마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지요. 업무는 손을 놓게된다면 다른 이들에 피해를 주게 되니, '다행히도' 하게 됩니다. 죽으려면 남에게 피해나 주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 가끔씩은 죽고싶을 때 죽기 위해 업무를 매일 매일 확실히 끝내고 정리하며, 인수인계 매뉴얼까지 매일 업데이트 해놓아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 온건 일을 미루어놓는 게으름이 아닌가싶네요.
 

사랑을 믿는 것이 쉬울까, 믿지 않는 것이 쉬울까. 내 경우를 말하자면, 믿지 않는 쪽이 더 쉽다. 그렇지만 번번이 믿고, 그래서 어려워지며, 다친다. 친하지 않던 사이끼리 어쩌다 그 상처의 무늬들에 대해 털어놓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급격한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껴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간 사랑의 역사에 대해 회상하면서 늘 제 쪽에서 먼저 떠나왔다 말하는 사람과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후회와 눈물, 회한과 반성, 체념과 절망 같은 말들의 반대편에 있는 단어는 오직 오만뿐이니까. 다시 한번 내 심장에 철철 붉은 피 넘쳐흐르는 순간 오만한 친구는 불필요하다. “넌 그때 어땠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계속 숨을 쉬고 살 수가 있는 거야?” 그를 붙들고서 이렇게 물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소설 <사랑을 믿다>의 화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는 서른다섯 살의 남자다. 이 문장은 명확한 의미를 품고 있다. 사랑을 잃는다 해도 결코 모든 것을 잃는 건 아니라는 것. 지당하신 말씀이다. 시간에 맡기라는 경구는 사랑을 잃어본 적 있는 모두가 씁쓸히 끄덕일 수밖에 없는 조언이다. 동시에, 그러니 어떻게든 꾹 참고 견뎌보라는, 결국 지금은 그 무모한 방법 말곤 없다는 뼈저린 충고이기도 하다.

남자는 3년 전에 이별했다. 왜, 무슨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별에 닿았는지 남자는 구태여 밝히려 들지 않는다. 사랑을 믿은 적이 있고 (믿었기에/상대가 아닌 사랑에) 당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는 게 전부다. 그리고 소설은 3년 전 그가 실연 당했을 때, 그보다 3년 전에 연락 끊긴 ‘아는 여자’를 다시 만나 술 마셨던 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기의 실연 극복기에 대해 천천히 들려준다. 아니, 극복이란 말에는 무언가를 이겨내거나 굴복시켰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으므로 왠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실연이라는 거창한 고통을 지나 보잘것없는 일상의 세계로 마음의 각도를 살짝 기울였는지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두자.



맥주와 섞인 안동소주를 마시며, 제육과 해물을 반반씩 볶은 안주를 먹으며, 남자는 여자의 덤덤한 고백을 듣는다. 이윽고 여자의 이야기 안에서 남자는 자신의 고통이 서서히 무뎌지는 걸 느낀다. 그건, 고통은 고통을 알아본다는 것, 그리고 제 안의 괴로움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있을 때는 죽어도 안 보이던 타인들의 하찮으며 지독한 아픔들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기적인 치유법인가? 그래도 좋다. 목으로 밥알을 넘길 수 있고, 오늘 밤 얕은 잠이라도 들 수 있다면 …. 타인과 내가, 세상과 내가, 투명하고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실감. 그 남자도 우리도 극한 환란 중에서나 그걸 깨닫는다.

3년이 지나고 ‘괜찮아졌다. 모든 것이 소소한 과거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마지막 독백을 들어보자.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더 이상 믿지 않는다니 그가 부럽고 가여우며 또 아리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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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 분노의 칼은 나의 내면을 향했다. 나는 나를 처형대에 세웠다. 그녀를 미워할 수 없으니 피고는 나일 수밖에 없었다... ... 내가 무심코 했던 모든 발언, 모든 행동들이 심판대에 올랐다. 내가 했던 발언들을 복기해보니 거의 모든 발언들이 유죄였다. 어떤 발언들은 너무 감상적이었고, 어떤 발언들은 유치했으며, 또 어떤 발언들은 부적절했다. 술을 마신 것도 유죄, 손을 잡은 것도 유죄, 심지어 어디 사는지를 물어본 것조차 유죄였다. p177

- 그렇게 사랑의 상처는 안으로 곪아간다. 사랑에 실패한 영혼에게 동정을 줘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은 그 관계가 끝난 후에도 철저히 '을'이 되어버린다. 하루 두 번씩 꼬박꼬박 휴가를 내야하나 고민을 하게되고, 수마에 빠진 듯 잠은 많아지며, 미안하게도 친한 사람들에게 날카로워진다. 나중엔 그래서 그 친한 사람들에게 더더욱 미안해진다. 존재의 무가치함도 느끼게 된다. 말이 법정에 세운다는 것이지, 그 재판은 눈 깜짝하기도 전에 끝나고, 어느새 나는 집행단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책을 더 읽어야 될지 고민이다. 민수는 지원을 만나게 될텐데. 소설 속 주인공한테도 난 열등감을 느낀다. (참고로 형사법정에서는 '피고'가 아닌 '피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냥 그렇다는거다.)

 

o 그러나 나는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수컷들이 우울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내 옆에 누워 있는 이 멋진 여자를 감당할 수 없다... ... "잘될 거야. 다 잘될 거야. 넌 늘 자신을 비하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이제 겨우 시작이잖아. 이제 겨우 인생의 삼분의 일 지점을 지나왔을 뿐이야. 내가 네 편이 돼줄게." p276

- 드디어 민수가 지원과 섹스를 했다. 부럽다. 섹스를 했다는게 부러운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현재 그 자체에 전념할 수 있다는게 부러웠다. 그리고 그 후 찾아온 우울함을 내 사랑하는 사람이 함꼐 해 준다니. 그게 너무나도 부러웠다. 난, 아니 나와 만났던 여인들은 항상 미래를 걱정했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말을 먼저 들었었다. 처음엔 상대방이 왜 걱정하는지 몰랐었다, 난 단순히 사랑하면 된다고 믿었었고, 모든 사람이 나 같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사람이 훨씬 많았고, 내게 지원과 같은 여자는 없었다, 언젠가는 상대방이 좀 가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세자매가 한 방을 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모를 안도감... 그런데 그 집에서 어릴적부터 살았으며, 그 중간에 집을 신축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하늘이 거뭇거뭇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네 편이 되어준다는 말, 이 말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들으면 어떨까? 난 네 편이야. 넌 잘 될거야. 너무도 많이 들어왔던 말이지만, 그걸 말했던 사람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편이 되어버렸던,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이 말들, 언젠가 내가 들었던 "네 여자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내가 지금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말이야."라거나 "내가 나이는 얼마 안 되지만 참 괜찮다고 생각한 사람이 몇 명 있어. 그 중에 한 명이 너야. 자신감 100배 가져도 돼" 같은 말들, 얼마나 눈물겹도록 고마운 말들인가. 하지만 그녀들은 역시 유일한 자기 편을 정한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괜찮다고 다 사랑에 빠지진 않는다. 그리고 내게 그런 말들을 해줬던 그녀들, 참 고맙고 감사하며 평생 친구로 옆에 두고 싶은 이들이다. 다만 나는 객관적으로 괜찮은 인간일지는 몰라도-그녀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싶지 않다- 주관적으로 괜찮은 인간이었던 적은 없었던게다.      

 

o 그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달콤했다. 멀리서 대형트럭의 경적소리가 길고 요란하게 울렸다. 우리는 그대로 오래 있었다. p440

- 끝이다. 장편소설을 끝까지 본 게 얼마나 될까? 누구한테 그랬든 나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소설은 그 자체로 대단한거다. 결국 해피엔딩이군. 슬프게도 말이다. 민수는 좋겠지만 나는 슬펐다. 나보다 잘 난 놈이 또 한 놈 있었던거다. 수평적 비교프레임은 버리는 게 좋다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라 나는 문득 생각한다. 지금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전자에 속한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줄 알았다. 대학 때는 내가 사법시험에 붙으면 생길 줄 알았다. 사법시험을 접고,  정말 운이 좋게도 신이 숨겨둔 직장이라는 데를 들어갔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곧 생길 줄 알았었다. 정말로 곧 생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 어머님의 반대로 헤어졌다. 그 사람에게 많이 매달렸었다. 나중엔 메일이 왔다. 이거 스토킹에 해당한단다. 아마 나는 그 사람이 아니면 나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거다. 그냥 실패겠지, 라고 애써 넘겼다. 하지만 그 후로도 쭈욱 사랑은 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내가 사법시험에 붙었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생기지 않았을거라는 슬픈 결론을 떠올렸다. 내 머리 속에서 '연애에 대한 갈망'이라는 칩을 빼버리고만 싶다. 어쩌면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동정하듯 사랑해줘도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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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이 쉬는 상태’라고 한다. 비슷한, 아니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 ‘수면’은 ‘잠을 자는 일’로 표현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잠은 상태적 측면, 수면은 행위적 측면이라고 하겠다.

‘눈이 감긴 채’라는 어구에 다시 채여 ‘눈 감고 자는 동물’로 다시 검색을 해보니 많은 질문은 이렇다. “기니피그(애완용 고슴도치란다. 다시 검색해봤다)는 눈 뜨고 자나요?” 아무래도 이런 질문은 끝을 올리며 눈을 땡그랗게 뜨고 해야만 할 것 같다. 탤런트 김민정만큼은 못 되어도 말이지. 답은 이랬다. “기니피그도 눈을 감고 잠을 잡니다. 이 질문은 기니피그를 데려다 처음 키우시는 분들이 많이 하시는 질문이지요. 낯선 장소라 처음 며칠간 잠을 못 자는 겁니다. 기니피그가 많이 예민하거든요.” 그러니까 애완용일게다. 예민하니 살이 안 찌고, 그래서 쳬격이 자그마하니 유지될테니.

어라? ‘의식활동이 쉬는’ 상태? 꿈은 뭐다냐. 며칠 전엔 이틀 연속으로 고현정이 꿈에 나오더만. 다시 네이버에 따르면 ‘단순한 자연적 요구에 입각한 자발적 행동이 아니라, 의도에 입각하여 자기결정을 하는 목적 추구행동을 일으키는 작용’이란다. 하긴 꿈이 목적 추구 작용은 아니니까. 목적 추구 작용이라면 고현정이 내 꿈에 등장할 리가 없잖아?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3당4락’, ‘4당5락’ 이런 말들이 돌았었다. 3시간 자고 공부하면 대학에 붙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 이런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4당5락이더니, 중학교 때는 3당4락이었다. 어찌하여 초등학생, 중학생 때 그런 단어를 알았냐고? 우리 땐 다 알았다. 우리 세대가 잘 나서 안 게 아니라, 그 단어를 알 수 밖에 없던 환경이었던게다. 그러다가 2000년 즈음에 나는 깜짝 놀랐다. in서울대가 ‘서울의대’이며 서울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이 ‘서울상대’라니!! 우리 세대가 기존 윗세대의 사고 틀에 맞추기 위해 피똥 싸게 노력했다면, 우리 밑세대들은 윗세대의 사고를 비틀어버린게다. 마치 박민규가 1위~6위의 프로야구 순위를, 거꾸로 늘어놓으며 ‘프로’라는 단어의 비인간성을 파헤쳐놓은 것처럼. (2007.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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