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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어느 극좌파가 본 진중권 – 『폭력과 상스러움』 비판>>
<<어느 극좌파가 본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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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80년대 자신이 운동권 서클에서 배웠던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90년대부터 한국에는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당원들의 글이 많이 소개되었다. 토니 클리프,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의 책이 상당히 많이 번역되었다. 그들의 글 특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스탈린, 마오쩌뚱, 김일성 등의 체제가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과 얼마나 무관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비슷한 점은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가 썼던 용어들을 쓴다는 점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만 ‘한국적 민주주의’를 운운했던 박정희의 유신 체제도 민주주의 체제다. 진중권은 진정한 혁명가였던 마르크스, 레닌, 그람시, 트로츠키 등과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스탈린(적어도 1917년경까지는 이 인간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였지만 그 후 배신했다), 마오쩌뚱(그는 중국의 민족해방 전쟁을 이끈 지도자였지만 마르크스주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김일성 등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한다. 따라서 진중권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백만 우크라이나인을 굶겨 죽인 스탈린의 무혈 폭력?(35쪽)
‘사자 숭배’는 전통이나 기성 체제에 복종하라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게 어디 우익만의 일일까? 하나의 권력을 파괴한 힘이 자기를 권력으로 조직해야 하는 모든 사회에는 사자 숭배가 존재한다. 가령 레닌, 마오 쩌둥, 김일성. 유리관에 든 이 시체들이 산 자를 지배하지 않는가.(65쪽)
‘연대성의 철학’의 주창자 리처드 로티(1931년~. 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자)가 얼마 전 <공산당 선언> 발표 150주년을 축하했다. <신약>과 <선언>, 이 두 텍스트는 예언서다. 그것도 무참하게 빗나간 예언서. “속히 오리라”던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이 넘도록 다시 오시지 않았고,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자유와 평등의 무계급 사회도 자본주의 생산력이 150년이 넘도록 비약적으로 발전했어도 아직 올 기미가 안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은 타락한 성직자계급과 부패한 노멘클라투라(특권계급), 끔찍한 이단 사냥과 잔혹한 KGB와 굴라크(교화노동수용소)의 디스토피아도 끝났다. 그리하여 그는 말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별은 오늘날 이단과 기독교인의 구별만큼이나 낡았다.” 맞다.(75쪽)
라고만 말하면 마르크스주의가 비판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진중권이 보기에는
오늘날 소렐이나 벤야민처럼 총파업[마르크스주의적 혁명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이덕하]에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38쪽)
오히려 그런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최근에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은 보잘 것 없는 규모지만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1000 명 정도의 회원이 있는 <다함께>가 있다. 영국의 SWP는 당원이 1만 명이 된다고 한다.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선거에서 5% 정도를 득표했다. 이탈리아의 재건 공산당 역시 만만치 않은 세력이 있다. 이 규모가 수십 년 전의 각국의 공산당에는 훨씬 못 미친다고 반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동구의 공산당은 지배 계급의 정당이었으며 서구의 공산당은 유로 꼬뮤니즘 이전에도 이미 개량주의 정당이었다. 각국의 혁명 조직들은 1917년 혁명 이후 몇 년 간 꽃피우다가 그 때 사실상 사망했다. 그 후로 유감스럽게도 각국의 공산당들은 구소련의 똘마니 역할을 했다.
심지어
다 죽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대비 속에서만 설득력을 퍼올리는 복거일의 낡은 자유주의 버전은 이제 업그레이드돼야 한다.(82쪽)
에서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복거일도 가뿐히 상대할 정도의 허수아비가 되어 버렸다.
또한
‘힘’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다. 그래서 난 벌거벗은 ‘힘’의 원시적 충동을 이성적 ‘대화’로 바꾸는 기제로써 의회주의를 옹호한다.(39쪽)
한편,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이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나아가 자유를 억누르며 관철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97쪽)
진중권에 따르면 레닌은 파시스트가 되며 공산주의는 자유를 억누른다. 하지만 구소련에서 왜 지배자들이 자유를 억눌렀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소련 공산당은 경제적 평등을 위해 자유를 억누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누린 경제적 특권을 지키기 위해 자유를 억눌렀다.
가령 프롤레타리아의 특수이익이 결국은 인간 일반의 보편이익과 합치한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목도한 오늘날,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이해가 보편이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는 못한다.(288쪽)
여기에서 진중권은 우파 이데올로그와 똑 같은 말을 한다.
마르크스주의 깔아뭉개기에 여념이 없는 진중권이 보기에는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했지만, 그때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단지 관념의 차원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이데올로기는 단지 벌어진 사실을 해석하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적극적 기제를 갖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존재 사실의 당파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을 생성하는 힘이다.(284쪽)
하지만 어이없게도 몇 쪽 후에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이제까지는 철학자들이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변혁시키는 것이다.(292쪽)
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