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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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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행성 2번째 이야기


쥐가 세상을 장악했습니다. 쥐는 압도적인 숫자와 남다른 진화로 인류를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제 쥐는 티무르의 지도 아래 전 세계를 발 아래 넣으려고 합니다. 제 3의 눈을 가진 티무르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을 완전히 축출하고 세계 정복 야망의 방점을 찍으려고 합니다. 누가 과연 막을 수 있을까요?


쥐를 물리치려는 많은 시도와 노력을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쥐들의 최후 공격을 앞두고 모두가 자포자기합니다. 더 이상의 노력과 수고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으니까요. 바스테트는 마지막 순간에도 지혜를 짜내어 인류와 다른 종의 생명을 구하려고 합니다. 바스테트의 아이디어는 정확하게 들어맞았고 소수의 인류와 다른 종은 살 수 있는 길을 얻었습니다. 보기엔 고작 생존하는 것이 전부처럼 보입니다. 2보 전진을 향한 1보 후퇴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또다시 티무르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내부 분열도 심각하게 일어났으니까요. 





절체절명의 순간 바스테드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소통하며 연대를 이루어 중과부적 쥐에 대항하면 승산이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이 생각은 나중 더 확장됩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소통하고 연대를 이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비전입니다. 


이 비전에는 식물까지도 포함합니다. 그야말로 모든 생명체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비전입니다. 아쉽게도 이 의견은 묵살되지만 궁극적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생각하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스케치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책 후반부에는 지금 인류의 모습에 대한 진단이 나옵니다. 먼 미래에서 지금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지 비추어 보는 방식입니다. 바스테트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생명체에 고통을 가하면 반드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모두가 깨닫게 할 것입니다... 닭을 대량 사육하는 양계장은 조류 독감의 온상이 되어 그 피해는 결국 인간에게 돌아오죠.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사육하는 소는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박쥐와 천산갑, 뱀 같은 야생 동물의 도축과 거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어요. 단일 경작 충심의 농사 방식은 메뚜기 떼의 창궐을 불러오죠. 어류의 남획으로 바다에서는 해파리가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고 있어요. 지나친 벌목은 공기 중 탄소의 비율을 증가시켜 기후 이변을 심화하고 과도한 석유 채굴은 지진 발생의 원인이 된다고 하죠. 이렇듯 모든 것은 상호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는 한, 쥐가 아니더라도 다른 동물이 분명히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바퀴벌레일 수도 있고, 비둘기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식물일 수도 있어요. 가령 가죽나무 말입니다. 이 식물은 무서운 번식력을 가졌죠."



소설 행성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책이며 인류의 고질적인 문제를 꼬집은 다큐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직면한 환경문제(지구온난화)는 인류가 얼마나 탐욕적인지 보여줄 뿐 아니라 어리석은지 고발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이키려는 태도는 고사하고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는 기분입니다. 


쥐라는 다소 혐오스러운 생명체가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고 고양이와 인간, 개와 말과 돼지 등 다른 생명체들이 맞서 싸운다는 개념이 생소해 보이지만 지금 우리 사는 현실을 보면 현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서로를 존중하는 길을 찾아내고 걸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공멸이 아닌 공존의 세상을 꿈꾸고 인간이 주도적으로 그 일에 앞장 서고 헌신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행성을 읽으며 오늘 우리의 어리석음을 직면하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로 말입니다. 





#행성 

#베르나라베르베르

#공멸이아니라공존

#상호소통 

$생명존중 

#살기좋은세상

#더나은세상을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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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메타포 꿈 - 생애 말 영적 돌봄에 대하여
켈리 버클리.패트리샤 버클리 지음, 윤득형 옮김 / 샘솟는기쁨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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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죽음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는 죽음이다. - 159p.

"개꿈 꿨어" "꿈은 반대야" 꿈을 가볍게 여기는 말 중 하나입니다. 모든 꿈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태몽인 것 같아!" "그 꿈 나에게 팔아~" 꿈이지만 꿈을 진지하게 여기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담겨 있는 문장입니다. 

사람은 꿈을 꿉니다. 밤새 꿀잠을 자는 경우도 있지만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고, 달콤한 그래서 깨기 싫은 꿈을 꿀 때도 있습니다. 어떤 꿈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도 하고, 어떤 꿈은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하고, 어떤 꿈은 꾸고 나면 가슴이 아릿하기도 합니다. 꿈을 꾸었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꿈도 있고, 생생하다 못해 직접 경험한 것 같은 꿈도 있습니다. 꿈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성경을 보면 꿈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요셉과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자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별스러운 꿈을 꾸었고 눈치 없이 그것을 이복 형님들에게 자랑하듯 떠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 꿈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다 애굽으로 끌려가는 동안, 애굽에서 눈물을 쏟으며 사는 동안 그 꿈을,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꿈을 곱씹어 보았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을 것 같습니다. 

꿈꾸는 자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꿈을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생긴 능력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꼬이고 꼬이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누군가의 꿈을 해몽합니다. 그것이 연줄이 되어 수 년 후 그는 애굽 최고 통치자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 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약 애굽의 넘버 2(애굽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결국 현실이 되었지요. 

다니엘 역시 꿈을 해몽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자신이 꿈을 꾸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꿈 많은 십 대 왜 꿈이 없었을까요. 살고 싶은 곳,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꿈,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이웃을 얻으며 사는 꿈은 사치가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그의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십 대 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거세를 당했고 결혼이나 자녀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원치 않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그의 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그곳에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합니다. 다니엘의 탁월하고도 명쾌한 해석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총애했습니다. 다니엘은 그곳에서 일생 충성스럽게 살았습니다. 


켈리 버클리와 패트리샤 버클리가 함께 쓴 삶과 죽음의 메타포, 꿈은 꿈과 죽음에 관한 책입니다. 꿈을 통해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할지, 죽음으로 꿈을 해석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둘 다라고 해야 할지 경계선이 명확하진 않습니다. 죽음과 꿈, 꿈과 죽음을 따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을 선택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무리도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기록하고 그들과 주변 사람이 꿈에 보인 반응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이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지나치게 꿈에 함몰될 이유는 없겠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꿈을 내팽개치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공평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가치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고독사처럼 안타까운 죽음은 없으니까요. 책을 읽는 동안 죽음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 꿈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 고심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저의 언어로 조금 각색했습니다. 

엄마 뱃속에 있던 쌍둥이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기가 너무 좋아. 편안하고 위험도 없지. 그런데 다른 세상이 있는 것 같아. 더 큰 세상,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세상. 진짜 세상이 있는 것 같아. 여기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맛볼 수 있지만 어쩌면 더 실제 같은 세상이 있는 것 같아."

"그런 세상은 없어. 지금 여기가 전부야. 여기보다 더 좋은 세상은 없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해.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여기 삶에 만족해야 해"

"아니야. 더 큰 세상. 진짜 멋있고 아름다운 세상, 더 크고 놀라운 세상이 있는 것 같아. 우리 함께 나가자"


하나의 비유와 같은 이야기지만 힌트를 제공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엄마의 자궁만큼 편하고 안전하고 따뜻한 곳은 없겠지만 진짜 세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지금 우리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 여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세상.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고,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해 그곳을 향해 가는 거라고. 꿈이 어쩌면 죽음 넘어의 진짜 세상에 대해 우리에게 힐끔 보여주는 잠망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라는 말처럼 삶과 죽음의 메타포 꿈을 읽으면서 삶에 대해 한 번 더 진지하게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길이 있다는 것도 배우고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죽음과 관련한 일에 종사하시는 분이나, 호스피스 사역을 하시는 분, 죽음을 직면하신 분이나 애도 중에 있는 분, 꿈에 관해 연구하시는 분이 읽으면 참 유익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진리를 대면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하시는 분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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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드이발소 7 : 베이커리타운 테일즈 브레드 이발소 7
(주)몬스터스튜디오 지음 / 한솔수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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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 이 책 학교에 가져가서 볼래요!"

브레드 이발소 7권 베이커리 타운 테일즈를 보자마자 딸 유은이가 쏟아낸 말입니다. 표지가 아이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 가져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표지가 아니라 속지입니다. 가볍게 책을 휘리릭 넘겨보더니 "글 책인 줄 알았는데 그림도 많아요. 만화책은 아닌데 왠지 더 재밌고 신날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학교에 가져가 독서시간에 단박에 다 읽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유은아 브레드 이발소 어땠어?"

"아빠도 읽어보세요. 엄청 재밌어요."

딸의 강력 추천으로 식탁에 앉아 책을 펼쳤습니다. 왜 유은이가 이 책을 좋아했는지, 재밌다고 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이지마다 그림이 가득합니다. 글 밥 내용을 앙증맞은 그림으로 기막히게 표현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도 기승전결이 선명합니다. 책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이커리 타운에 나타난 쥐 떼를 물리치는(?) 내용을 담은 고양이 컵케이크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잭과 콩나무를 패러디한 윌크와 콩나무 이야기입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첫 번째 이야기는 고양이 컵케이크입니다. 베이커리 타운에 느닷없이 쥐 떼가 나타났습니다. 쥐 떼는 마을 주민의 머리 장식만 집중 공략하고 망가뜨리지요. 갑작스러운 쥐 떼의 습격 때문에 국민의 원성이 점점 높아집니다. 여왕은 쥐 떼 퇴치 명령을 내리는데 신하들을 마땅한 대안이 없어 쩔쩔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브레드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는데... 놀랍게도 브레드의 아이디어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쥐 떼를 퇴치하고야 맙니다. 브레드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쥐 떼가 어떻게 퇴치되는지 궁금하다면 꼭 책을 펼쳐보세요. 멋진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윌크와 콩나무는 말 그대로 잭과 콩나무의 패러디입니다. 기후 이상으로 미용재료 값이 폭등하고, 재료관리에 실패한 윌크는 브레드 사장님의 엄명을 받고 미용 재료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콩을 파는 할머니를 만나지요. 우여곡절 끝에 윌크는 십만 원을 주고 콩알 세 개를 구매합니다. 화가 난 브레드는 콩알을 바깥으로 던져버리고 윌크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용 재료를 구해오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합니다. 윌크는 어제 브레드 사장님이 버린 곳에서 커다랗게 자란 콩나무를 발견합니다. 윌크는 콩나무 꼭대기에서 값비싼 미용 재료를 마음껏 구합니다. 미용재료의 출처가 궁금해진 브레드가 콩나무 꼭대기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기막힌 반전이 또다시 생깁니다.




어린이 책이 가진 고유의 따뜻함과 소박함, 아름다움과 위트가 곳곳에 가득합니다. 가독성이 좋을 뿐 아니라 앙증맞은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어서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바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머리에서 그림을 그려가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위트가 있고, 반전이 있어서 재밌습니다. 초등학생 어린이를 둔 부모님이라면 브레드 이발소 시리즈를 하나씩 구입해서 자녀에게 선물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마음에 든 페이지를 펼치고 함께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좋은 활동이 될 것 같습니다. 이후에 잭과 콩나무를 보여줄 수도 있을 테고요.

브레드 이발소 7권 베이커리 타운 테일즈, 즐거운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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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세우는 신앙을 찾아서 - 종교사회학자의 가정교회 DNA 해석서
이성우 지음 / 샘솟는기쁨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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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여전히 세상의 소망일까?

아직도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을까?

서울 강남에 자리 잡은 초대형 교회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 목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강화군 하점면에 자리 잡은 작은 봉천 교회 이야기가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 더 나아가 내일을 생각하게 한다면 지나친 이야기일까요? 얼토당토 없는 황당한 이야기일까요?




말로만 들었을 뿐 나는 강화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강화군에 하점면이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곳에 봉천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이쯤 되면 강화군 하점면에 있는 봉천 교회는 듣보잡(?) 교회라고 불러도 모욕(?)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봉천 교회의 역사를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빨갱이가 많아 교화를 위해 세워진 교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시작한 교회니까요. 실제 탈북민이 거쳐가는 곳이었습니다. 정주하는 교회가 아니라 남한에 정착하기 위한 거점이나 수단과 같은 곳으로 봉천 교회가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지역 주민들이 머물렀던 교회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이 있었고, 싸우는 교회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목회자들의 잦은 이동도 교회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처럼 보입니다. 목사와 그의 가족이 머물 곳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목회자의 잦은 이동은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터를 잡고 사는 사람과 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몇몇 사람이 실권을 장악하는 교회이며, 목사는 바지사장 노릇 하는 교회일 따름입니다. 봉천 교회의 과거 이력을 살펴보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봉천 교회의 이력은 나쁜 의미로 무척 화려해 보입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봉천 교회 이야기를 책으로 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생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봉천 교회 이야기를 읽을 이유도 없었겠지요. 기막힌 반전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높고 깊은 계획과 섭리의 결과라고 해야 할까요? 봉천 교회는 전혀 다른 교회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이재익 목사님이 있습니다.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교회에 부임한 이재익 목사님 역시 교회의 이력과 DNA와 말도 안 되는 구조에 눌리기도 하셨습니다.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 다른 곳에서의 청빙도 있었으니 그 유혹의 강도는 결코 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재익 목사님은 봉천 교회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하고 그곳에 머무는 길을 걷습니다.

이재익 목사님이 사활을 걸었던 것은 가정교회이며,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원칙입니다. 나는 그것을 아드 폰테스(AD FONTES-다시 원천으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책에서는 원형 목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봉천 교회 성도가 삶공부라고 부르는 목장 모임 역시 변화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봉천 교회는 처음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당혹스러움을 느낄 정도의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삶 공부 시간을 통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교회로 탈바꿈했습니다.




교회의 리더십도 색다른(?) 모습입니다. 목회자는 설교하는 일에서 리더로 설 뿐 다른 분야에서는 그 분야에 더 탁월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리더십 구조입니다. 목회자의 제왕적 리더십은 산산조각 나고 없으며 섬김의 리더십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설교 후 앞치마를 두르고 설교하는 담임목사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봉천 교회가 그런 교회라고 하니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만드는 일에 일정 부분 기여할 것 같습니다.

봉천 교회 성도들이 가진 하나님 이미지에 대한 조사도 흥미롭습니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 이유는 대다수 한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 이미지와 상당히 겹치기 때문입니다. 봉천 교회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이미지는 "딱 요만큼 채우시는 하나님"과 "가족 일상에 계신 하나님"입니다(다른 이미지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특히 "딱 요만큼 채우시는 하나님"은 봉천 교회 성도들이 크게 공감하는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가진 하나님 이미지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봉천 교회가 좋은 교회로 탈바꿈한 것은 사실이지만 봉천 교회 역시 흠결이 있는 교회라는 점도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봉천 교회가 가진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만 바꿔보자는 생활신앙 태도입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습득하고 머리만 키울 것이 아니라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살아내 보자는 신앙 태도(그들은 이런 태도를 생활 신앙이라 부릅니다. 흔히 사용하는 신앙생활이란 단어의 어순을 바꾸었을 뿐인데 어감은 상당히 다르고, 방향성도 무척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를 지향합니다. 나는 이 단어를 살아낸 신앙으로 이해했습니다. 말로만 떠들어 댄 신앙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낸 신앙이 결국 우리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세상 속에서 교회(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입니다)를 교회되게 만드는 차이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과 시원한 마음이 공존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봉천 교회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모교회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로 갈등하기도 하고, 텃세를 부려 목회자를 바지 사장으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몰아내기도 했던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회자의 실수와 실패, 자질 부족으로 빚어진 갈등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할 수는 없습니다. 전능한 목사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가 슈퍼 목사, 전능한 목사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불편한 사실은 목사의 부족한 점을 크게 부각시킵니다. 여기에 목사의 실수와 실패가 겹치고 불성실한 태도가 겹친다면 교회는 더 큰 갈등을 겪습니다. 결국 목회자가 쫓겨가거나 분열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봉천 교회 이야기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어디에서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우리의 민낯을 봉천 교회 이야기에 빗대어 낱낱이 까발린 저자의 담대함에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교회가 세상에 소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방향성을 제시한 책으로 다가왔습니다. 환골탈태의 정신과 수고가 필요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한 명 두 명 그 길을 걷는 목회자와 그 길에 참여하는 성도가 있다면 여기저기서 작은 불씨를 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지난한 작업을 위해 목회자는 자신의 소명을 다시금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대로 왜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지, 어떤 교회를 세워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한국 개신교회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바닥을 파고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봉천 교회 이야기를 통해 처음 접한 단어 "사회 안의 교회"처럼 교회가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세상 속 교회로 이해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는 진리를 견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그 지역 속으로 들어가 지역 사회 속에서 자신을 녹이고 태워 지역사회를 섬기고 살리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섬기는 교회, 세상과 적극 소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요. 이 지점에서 전도해서 예배당에 앉히려는 생각은 저기 저 안드로메다로 던져버려야 할 테고요.

강화군 하점면에 자리 잡은 성도가 채 100명도 되지 않는 봉천 교회의 역사, 봉천 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나의 실패를 곱씹어 보고, 한국 교회가 걸어가야 할 방향성을 조율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득 안은 교회가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담아내고 지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런 식으로 담아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지금 추락한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나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나 텁텁하고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그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교회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장밋빛 상상도 펼쳐보았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목회자,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목회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고민하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 교회의 교회다움에 관심을 가진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봉천 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속한 교회의 이야기를 읽어내고, 지역사회 속에서 어떤 교회로 자리매김해야 할지 고민하고, 이 난리 법석인 시대 속에서 회복해야 할 교회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교회는 또다시 세상의 소망이 될 테니까요.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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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된다는 것 - 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아닐 세스 지음, 장혜인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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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

너 자신이 돼라"


종종 들었던 문장입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 자주 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누군가가 나에게 너 자신이 되라고 할 때면 참 멋진 말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참 어려운 말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다른 사람을 향해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하고 있으니 뭔가 역설적입니다.


생각이 이 지점에 이르니 더 궁금해집니다. 자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이 되는 길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답게 사는 걸까요? 이 질문은 엄청나게 철학적이며 사색적인 질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우 과학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대답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아부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뇌 과학자 아닐 세스입니다. 아닐 세스는 내가 된다는 것(Being You)라는 책에서 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과한 대답을 "의식"에서 찾습니다.





아닐 세스는 천재적인 뇌 과학자 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의식을 찾아 탐구하는 그의 열정과 수고는 혀를 내두를만합니다. 실은 과학 언어가 많아서 읽는 동안 처음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닐 세스가 쉽게 쓰고 설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나의 과학 상식과 지식 부족이 걸림돌로 작용했을 따름이었습니다. 덕분에 과학 공부도 했다고 할까요.


1부는 의식의 수준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의식이 무엇인지 본격적인 탐구를 하기에 앞서 약간의 설명과 의식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를 주로 다룬 챕터입니다. 의식에 관심 있는 과학도라면 이 챕터에서부터 매료되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2부는 의식의 내용입니다. 이 챕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유튜브를 찾아보기도 하고, 보고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 챕터에서 깨달았습니다.


3부는 자기(Self)입니다. 자기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심도 있게 다룬 챕터입니다. 섬망, 자기 예측, 동물 기계 되기(이런 연구와 실험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 자유도라는 소제목을 달고 많은 뇌 과학 이야기를 만나는 챕터입니다.


4부는 또 다른 것들이란 이름의 챕터입니다. 인간 너머, 기계의 마음에 관한 아닐 세스의 생각을 모은 챕터입니다. 인공지능이나 기계도 의식을 가질 수 있을지 아닐 세스의 견해를 들어볼 수 있는 챕터입니다.





책을 시작하면서 강력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아닐 세스가 '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문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문장의 들어보시죠.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 있는 생물에게는 그 생물이 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당신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양이나 돌고래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그 무엇이다." (27p.)


책의 끝자락에서도 의식에 관한 아닐 세스의 주장을 요약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이 방대한 연구의 끝에 아닐 세스가 의식에 관해 요약정리한 문장을 읽어보시죠.

"의식과 지능은 같지 않으며,

의식은 지능보다 살아 있다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

지능이 많지 않아도

의식이 존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으로 지능도 의식 없이 존재할 수 있다." (309)





팔다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도 나는 나입니다. 건강해도 나이고, 심지어 아파도 나입니다. 알츠하이머나 기억 상실증을 앓는다면 어떨까요? 그때도 여전히 나는 나일까요? 아니면 나를 잃어버린 또 다른 나가 되는 걸까요? 의식에 관한 과학의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아직 명쾌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과학이 더 발전하고 의식이란 것에 감춰진 것을 모두 읽어낸다면(그런 날이 올지 오지 않을지 미지수지만) 나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길이 더 활짝 열릴까요?


내가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는 분명 구별된 존재로서의 인식이겠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과 환경과 긴밀하게 엮여 있기 때문에 결국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 나고 자란 시대 배경과 내 안에 흘러들어온 인류 문화와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철학적인 질문을 한껏 끄집어내 준 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은 어렵습니다. 뇌와 의식에 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상태라면 읽어내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낸다면 뇌와 의식에 대해 나다움에 대해 더 무겁고 깊은 질문을 쏟아낼 가능성도 높습니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에 대한 과학의 대답과 그 대답을 탐구하고 싶은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독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소 수준 높은 독서를 요구하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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