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떠올려라. 힘든 시기는 좋아질 수 있으며, 무거운 압력은 느슨해지며, 수고스러운 짐은 가벼워진다. 사람들은 언제나 적절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해, 10.4b
36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은 패배를 예감하는 자신의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이길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겼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훨씬 더 포괄적으로 말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올바르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왕궁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거기서도 올바르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16
자연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로 하라. 그것이 당신의 능력이라면 그대로 하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마라. 플라톤의 ‘공화국’ 같은 완벽함을 기다리지 마라. 앞을 향해 내딛는 작은 발걸음에 만족하고 작은 결과에도 감사하라.
(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9.29.
세상을 더 나은 장소로 만들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하다
. ‘상황이 좋지 않다’, ‘조금 더 좋은 기회를 엿보자’는 식의 변명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후, 전망은 유지하면서도, 결과를 지나치게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첫 인상이 전달해주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마라. 누군가 너를 험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너에게 전해진 것은 그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으로 네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아들이 병에 걸린 것을 보았다. 병에 걸렸을 뿐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첫 인상 안에 머물러라. 머릿속에 어떤 것도 보태지 마라. 이것이야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49
철학자들이 소유하라고 한 능력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니체는 말했다. "대담하게 멈추어 서서, 표면에만 머물러라." 평범한 시선으로 객관적인 형태를 관찰하라는 의미다. 그 이상도, 그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를 "표면적"이라고 했고, 니체는 "깊이에서 벗어나기"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지나치게 몰두하는 동안 우리는 이것을 훈련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용주의의 일종이다. 최초로 주어진 인상 그 너머에는 진실이 아닌 다른 것이 도사릴 수 있다.
습관이나 이론 중 어떤 것이 덕성을 함양하는 데 좋은지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론은 우리에게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습관은 행동이 그 이론과 조화를 이루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내 생각으로는 습관이 더 효과적이다.
무소니우스 루푸스, 강의록, 5.17.31-32, 5.19.1-2
우리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말을 기꺼이 배우고 개인적 취향대로 인용해 쓸 수 있다. 그들은 죽었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마음대로 수정하고 편집해서 실세계에 응용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고 쓴 것을 올바르게 이해했는가’는 ‘그것을 실행했는가’에 달렸다. 그것이 우리를 원본으로 만든다. 그러니 행동으로 말하도록 하라.
당신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합리적 이성이 자신의 본성대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9.26
철학은 재주도 마술도 아니라네. 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지. 하루가 가기 전에 어떤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도 아니고 여가의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한 것도 아니지. 영혼을 만들고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라네.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행동을 안내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네. 운명의 불분명함에 흔들리기 마련인 우리를 안내하는 방향타이지. 철학 없이 두려움 없는 삶,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네. 매 시간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이 조언을 필요로 하지. 그런 조언은 철학에서 찾아야 하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16.3
스토아 사상가들에게 있어 모순되는 개념에 대해 한가하게 토론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짓이다. 그들에게 철학은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몇 가지 말로써 재빨리 가르칠 수 있다네. 덕이 유일한 선이라네. 덕이 없다면 선도 없지. 덕은 우리 안의 고귀한 곳에 거주하는데 그곳을 이성이라고 부른다네. 덕이란 무엇일까? 진실과 변함없는 판단력이지. 이것으로부터 모든 정신적 작용이 일어나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충동을 맑고 깨끗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71.32
사람들이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한때 용감했기 때문도 아니고, 한때 강인했기 때문도 아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그가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를 얻는 일관성은 태도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모임이나 조직에서 리더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대부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한다. 규칙적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휴식 시간도 대체로 정해져 있다. 그들은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자연이 자신의 힘을 모든 사물에 나누어 준 것처럼 우리 또한 그에게서 이성을 나누어 받았다. 자연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떤 장애물에도 질서를 부여하고 모든 경쟁물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이성적 인간인 우리도 모든 장애물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바꾸어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35
삶의 목적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가진 신체적인 조건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사람들이 단점이라 부르는 것조차 장점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합리적 선택에 속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를 방해하고 해를 입힐 수 있지만, 합리적 선택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네. 만약 우리가 실패했을 때, 혹은 스스로를 탓하고자 할 때, 불안과 걱정의 원인을 끊임없이 되뇔 때 합리적 선택에 기댈 수 있다면… 신께 맹세코, 나는 우리가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3.19.2-3
집을 샀는데 집값이 떨어졌다면, 그것은 집을 사라고 부추긴 부동산 중개인의 잘못일까? 믿었던 부하직원이 지시한 일을 망쳤다면, 그것은 일을 수행한 부하직원의 잘못일까?
나쁜 일은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 소재는 대부분 불분명하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집값 하락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지시한 일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도 부하직원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잘못된 결과의 원인을 분석하고 명확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을 제외시키고 다른 이를 넣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내 삶의 방식은 결코 나아질 수 없다. 다른 이를 탓하지 않을 때라야 잘못된 내 삶의 방식을 개선할 수 있다.
선한 사람들은 난공불락이라네. 왜냐하면 자신이 최고가 아닌 곳에선 경쟁에 뛰어들지 않기 때문이지. 자네가 그들의 자질을 원한다면 갖게나. 그들의 지팡이, 직업, 신체 모두를 갖게나. 하지만 자네는 그들이 움직이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네. 그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에 함정을 팔 수도 없을 것이야. 오직 선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쟁은 그들 자신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을 천하무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에픽테토스, 대화록, 3.6.5-7
마음이 평화를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일만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공익을 위해 이성적 존재에게 요구되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일을 적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도 좋지만 옳은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는 위대하다. 사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상당 부분은 불필요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울타리에 가두는 것으로 풍부한 여가와 평정을 얻을 수 있다. 매 순간 ‘이것은 불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사고까지 울타리 안에 가두어야 한다. 불필요한 행동은 불필요한 사고에 뒤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24
스토아 사상가들은 수도승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도원이나 사원과 같은 성소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인, 사업가, 군인, 예술가 들이었다. 지금 이 책을 읽는 우리들처럼 그들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 자신의 철학을 연마해야 했다
성취와 달성의 핵심은 우리 삶에 기초적이지 않은 것들을 가차 없이 몰아내는 데 있다. 자만심이 요구하는 것, 탐욕이 주장하는 것, 잘못된 원칙으로 몰아가는 것, 용기의 부족으로 거절하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울타리 안에 가두어야 한다.
내적인 성향에 있어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달라야만 하네. 하지만 우리의 외양만은 저 군중들과 한가지여야만 하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5.2
자네는 선조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겠는가? 나는 기꺼이 이 오래된 길을 걸어갈 것이네. 그리고 더 짧고 더 밝은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오솔길을 태워버릴 것이야. 이 길을 개척한 선조들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안내자이기 때문이지. 진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이 아니니까.
세네카, 윤리적 서한, 33.11
새로운 사고를 실험하고 탐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 우리에게는 에픽테토스, 세네카, 아우렐리우스의 저작이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2천년 전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들 또한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안내자일 뿐이다.
나는 배에 승선하기도 전에 난파당하고 말았네··· 하지만 그 여행이 내게 가르쳐주었지.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갖고 있는지를, 상실의 고통 없이 그것들을 얼마나 쉽게 내다버릴 수 있는지를.
세네카, 윤리적 서한, 87.1
"난파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정말 훌륭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다른 기록에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출세했다. 운명이 나를 철학으로 데려갔으니!"
스토아 사상가들은 우리에게 전환점이 왔을 때 행동하라고 말한다. 가장 불운한 사건이라도 최상의 것으로 변모할 수 있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대중 속으로 갈 때마다 울었고 데모크리토스는 웃었다. 한 사람은 세상을 불행의 연속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은 어리석음의 연속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벼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유연한 정신과 함께해야 삶을 인내할 수 있다. 삶을 애도하는 것보다 웃는 것이 더 인간적인 것이다.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해, 15.2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절망과 분노로 눈물 쏟기를 바라는 운명 앞에서도 웃음을 선택했다.
데모크리토스처럼 웃자. 증오와 슬픔이 가득한 상황에도 웃을 수 있는 유머가 숨어 있다. 그리고 유머는 생산적이다. 무거움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건 유머뿐이다
우주의 창조자는 우리에게 삶의 법칙을 부여했고 올바르게 살도록 규정했네. 향락과 사치에 빠져 살라고 하지 않았네. 우리의 행복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삶은 불행과 걱정을 그러모을 뿐이라네. 자연이 준 이 선물을 누리도록 하세. 가장 위대한 것들 중의 하나이니.
세네카, 윤리적 서한, 119.15b
"바라는 것을 바꿈으로써,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갖고자 하는 것을 바꿈으로써 결핍은 충족된다."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던 존 록펠러도 스토아 사상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인간의 부는 욕망과 지출 사이에서 결정된다. 10달러 만으로도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는 진짜 부자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려 할 때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유사한 결점은 없는지 살펴보라. 돈, 쾌락, 작은 명성과 같은 것들을 탐닉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라. 이렇게 반성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빨리 잊게 된다. 충동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라고 어쩔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관용을 배움과 동시에 자신의 태만까지 고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충동을 없앴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0.30
자신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들을 평가절하하지도 낙인찍지도 않아야 한다. "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나와 타인 모두에게 관대할 수는 있다
영혼은 어떤 운명보다 강하다네. 영혼은 선과 악 어디로든지 자신을 스스로 이끌어가며 행복한 삶이나 불행한 삶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야.
세네카, 윤리적 서한, 98.2b
젊은이들이여, 철학자의 강의실은 병원이라네. 즐거운 감정으로 이곳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을 것이야. 고통과 함께 들어와 고통과 함께 나가게 되겠지. 왜냐하면 여기에 들어올 때 이미 병들어 있었거든.
에픽테토스, 대화록, 3.23.30
우리는 혹독한 겨울 훈련을 한다네. 준비되어 있지 않은 군인이 전쟁에 뛰어들 수는 없으니까.
에픽테토스, 대화록, 1.2.32
한 번도 불행 속에 살아본 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불행하다고 말하겠다. 적대자와 마주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행운 속에서만 살아왔다면 누구도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조차도!
세네카, 섭리에 대해, 4.3
힘겨운 시기를 이겨낸 사람들은 훗날 그 시절을 영광의 상처로 기억하곤 한다. "옛날이 좋았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지라도 그들은 그 시절을 잊지 않는다. 이겨낸 고난은 궁극적으로 긍정적 경험이 된다.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은 그 시절의 고난이다.
불운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또 다른 혜택이 있다. 세네카의 말처럼 경험하고 이겨냄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내면의 장점을 발견하게 된다. 또 매서운 시련은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수 있는 그와 유사한 역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 준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고, 상황이 녹록치 않다고 불평하지 말자.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 니체의 말이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역경에 감사한다.
기억하라. 자연에 굴종함으로써 자유를 얻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당신은 예속될 것이고 불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신과 운명과 다른 이를 비난하게 될 것이다. 오직 자신의 것만을 소유하려고 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은 다른 이에게 돌리는 사람만이 누구의 강압도 받지 않는다. 누가 당신을 비난하고 누가 당신을 고소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은 없으며 당신을 해롭게 할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해로움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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