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 깊이 읽기 우리 문학 깊이 읽기 10
김사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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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박상륭이라는 작가가 있다. 뭐 자신은 소설가도 아니며 그저 잡설꾼에 불과하다고 설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최근에 <잡설품>이라는 소설집을 엮어내기도 한 작가다. 도스토예프스기 전집을 보면 작가 소개란에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라는 문장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도끼에게 붙잡아 맨 수사들과 동등한 수사를 받을 수 있는 작가가 박상륭이라고 생각하는데 김정란은 박상륭에게 ' 그는 당대에게 벅찬 작가다 그는 당대에는 가장 고독하고 그리고 후대에는 가장 오랫동안 무덤에서 불려나올 작가다. 그의 무덤 자리는 편하지 않으리라'고 했다. <박상륭 깊이 읽기>는 박상륭이 말해주지 않는 그의 글에 대한 이야기다.
 

<박상륭 깊이 읽기>는 말그대로 깊이 읽기이다. 조금더 탐구해본 사람들이 그들이 알아낸 박상륭의 편린들을 자신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해준다. 사실 이 책을 좀 읽어볼 사람이라면 박상륭이라는 작가의 책들을 지나가는 눈으로나마 통독이라도 해두어야하는데 박상륭의 작품 세계를 크게 <죽음의 한 연구>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눠 놓았기 때문이다. <박상륭 깊이 읽기> 전반부는 연작소설에 나타난 다양한 단상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고 후반부는<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을 중심으로 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알아두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전후기로 작품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초기작 <아겔다마>에서부터 시작해서 최근- 이 책에서 최근은 <평심>까지인듯 하다 - 까지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존재의 탐구'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국 작가 중에 하나의 문제에 천착하여 지난한 작업을 하는 몇 안되는 작가중의 한 사람이 박상륭이다.

 

박상륭의 문학은 신화의 바다에서 신화를 재구성한 문학이라고 한다. 정해지지 않은 공간에서 그로테스크한 혹은 몽환적인 이미지로 박상륭의 글들이 시작되고 끝나기 때문인데 사실 박상륭의 문학에서 끝이란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것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박상륭의 글을 읽으면서 종교와 신화에 많은 지식들이 쌓여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깊이있는 공부가 바탕이 되어 소설이 완성되어 간다. 그래서인지 박상륭의 소설은 어렵다. 따분하다. 모르겠다. 힘들다라고 말하는 독자들이 많다. 이러한 독자들의 투덜거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뚝심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박상륭이다. 또한 박상륭은 문학은 쉽게 이해되기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는데 그의 문학에는 많은 주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상륭의 글을 읽다가보면 과격한 언사와 종잡을 수 없는 비유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미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탄생의 비의라도 훔쳐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문장을 구사한다. 문장들은 마치 구렁이처럼 꾸물거리며 또아리  튼 뱀이되어 혀를 낼름거리기도 한다. 이러한 환상과도 같은 하상을 까부시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박상륭식의 비유의 껍질을 벗길 수 있는 상징의 해석이 필요한데 그런 작업들은 이 책의 전반부가 해 주고 있는 듯 해서 초보자들이 읽기에는 조금힘들지만 살짝이라도 박상륭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막막했던 비의들이 조금은 풀려서 봄가뭄을 살작 해갈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박상륭 문학의 최고 정점은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이다. <칠조어론> 이후로 나온 책들은 저급한 독자 - 이것은 김현이 고급 독자들을 운운했기에 일반 독자라는 개념으로 한 번 써보는 것이다. -들을 위하여 <칠조어론>의 요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라고 보면  된다. <평심>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꾼다> <산해기> <소설법> 그리고 <잡설품>까지가 그러하다.

 

이건 책하고 좀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박상륭 깊이 읽기에는 박상륭의 사진들이 몇 장 소개되어 있는데 숀 코넬리처럼 늙으면서 더 멋있어지는 것 같다. 관록이 내공이 안으로 갈무리되어 밖으로 베어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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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항재.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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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에프스끼는 러시아 인들의 긴 이름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이게 순서에 상관없이 세번 째 읽는 그의 이야기이긴 한데 식겁했다. 책 한 권에 11 편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럴만도 하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리고 책 날개에 위로의 말처럼 이런 말들이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작가 , 평론가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라고 적혀있다. 책을 읽고 난 후에야 독자들을 위로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끼 -도스토예프스끼라고 쓰려니 힘들다 앞으로는 그냥 도끼 선생이라고 하기로 한다 - 선생의 글을 세번 째 읽는 건데 쉽지 않다. 어지간 하면 잘 쓰려고 하지 않는 '책 읽기의 지난함'이라는 표현을 써보기로 한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한 편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지면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으나 그 속에 많은 이야기와 많은 문장들이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는 소리다. 이걸 희화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도끼 선생의 문장은 매우 수다스럽다 정도라고 해도 좋겠다. 뭐 입담이 좋은 진행자라고 해야하나 수다스럽긴 한 것 같은데 그 수다스러움이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눈이 아파서 오래 지켜볼 수 없어서 독자들의 애간장을 좀 태운다는 소리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이러한 것들이 도끼 선생 뿐아니라 러시아 문학 전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 같으니 말이다.

 

도끼 선생은 적어도 두번 째 이야기집에서는 로멘티스트인 것 같다 11편의 이야기 중에 여러편이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니 그러하다. 그런데 도끼 선생의 사랑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이루어지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 남자들은 이상하게 수다스럽다. 사랑 앞에서 과묵한 남자들은 수다쟁이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도끼 선생이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써본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리마리오의 느끼함이 베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여자들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지 좀 더 담백한 문장으로 작업을 했으면 이야기 속의 남자들은 해피한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장 중에서 평론가들을 물먹이는 작가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실 논쟁거리를 많이 주는 작가인 것 같다. 몇 몇 작품은 '음 이 작품은 이렇게 비틀어지고 바뀌어서 다른 작품에 사용된 것 같아'라는 생각을 읽는 독자에게 암시하는 것 같으니 평론가들은 얼마나 그  과정에 대해 할 말이 많겠는가? 도끼의 글은 평론가들이 놀기 좋은 놀이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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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여행자 - 손미나의 도쿄 에세이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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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여행자  - 손미나 - 삼성출판사

 

사실 읽어보고 싶은 것은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라는 여행 에세이였다. 손미나가 처음으로 책을 출간한 것이기도 했지만 손미나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한 알지못하는 설레임과 방송매체들이 만들어 놓은 포장된 이미지 덕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을 전문적으로 쓰지 않는 사람들의 글은 어딘가 좀 어설프다라는 몹쓸 고정관념이 몸에 기생하고 있던 터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방법은 기다리는 것 뿐이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들어보면 그 책이 그나마 읽기가 지난하지 않을지 혹은 지락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데 < 스페인 너는 자유다>의 경우는 나쁘지 않고 사진도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두번 째 몹쓸 버릇 애둘러가는 것 대표작을 보지 않고 주변 작품부터 읽어간다는 것 , 그래서 손미나가 두번 째로 쓴 <태양의 여행자>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여행이라는 것은 혼자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 손미나의 여행기를 보면서도 홀가분한 개인의 아름다움 혹은 자유로움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정해진 지역 도쿄를 패키지 여행 상품처럼 투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에 맞추어 여행하는 것 여행이 은밀하고 내밀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일련의 시간과 공간에서 빠져나와 다른 공간 절대 시간 -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을 이탈한 것은 맞지만 시간도 다르게 흘러가지만 시간은 결국 흐르고 있으므로 절대시간은 변하지 않고 흐른다고 생각한다. - 을 살아보는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자기의 내면과 대면하는 것 , 사소한 것들이 다양한 아우라를 가진 울림으로 퍼져나간다. 결국 외부의 대상에게 많은 말을 전달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화두가 되어 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것이 여행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게 되면 많은 사진을 찍게 된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여행지에 다녀갔음을 확인해주는 확인증처럼 똑같은 장소에 사람들만 바꾸어 찍어서 간직한다. - 정말 간직할까? 잊혀지고 지워지지 않을까? - 손미나의 책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나오고 다양한 편린들을 찍은 사진들이 제법있다. 손미나는 사건과 기억을 붙답아두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다녀간 흔적을 남기려고 사진을 찍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라 자신의 행로와 그 여행 중간에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했던 것 같다.

 

어떤 곳을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 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둘러봐야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떼를 이루어 다니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다녀도 꼭 둘러 봐야할 곳을 둘러보기위해 분주히 움직일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여행지를 가더라도 개인이 즐거운 여행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해진 공간 자신만의 여행 표면을 휘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표피를 뚫고 들어가 그 이면 생활에 밀착된 그 공간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손미나에게 도쿄는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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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끽연자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8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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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 오년 전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해비 스모커였다. 모든 플라스틱 패트병은 물통이 아니라 목이 댕강잘려 구더기가 넘쳐나는 것처럼 담배꽁초가 넘쳐나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으며 공원이나 야외에 공공시설로 설치해 놓은 휴지통을 오로지 담배재떨이로 사용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혐연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금연이 봄바람처럼 와싸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니 대표작 <최후의 끽연자>라는 제목에 약간의 흥미가 동하는 것이다. 금연을 하고 있으나 예전을 추억하는 단어를 만난 샘이라고 할까?

 

오랫만에 소설을 읽었고 게중에 일본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최근에 개인적인 방침이겠지만 번역문학을 조금 멀리하려고 했던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먹는 간식처럼 소설을 읽기에는 일본 소설만한 것도 없지 않나싶다. 통통튀는 소재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포장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책에 시선이 갔던 것은 장편 소설이 아니라 단편들을 여럿 모은 단편집이라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장편보다는 깔끔한 단편들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더 많으니 말이다.

 

<최후의 끽연자>는  표제작 <최후의 끽연자>를 비롯해서 <급류> <노경의 타잔> <혹천제> <야마자키> <상실의 날 > <평행세계> <망엔원녁의 럭비>로 채워졌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싶지만 궁금하면 사서 읽어보시면 될테니까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넘어가기로 해보자 살짝 찝어주는 정도로만 넘어가보기로 한다.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급류> ,상황이 만드는 처절한 웃음을 보여준 < 최후의 끽연자> -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끽연이라는 말은 흡연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 타잔이라는 정의의 이미지가 어떻게 전복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노경의 타잔> 어떻게 보면 심각한 상황을 코믹하게 그려낸 <상실의 시간>등은 참신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사람의 존재가 하나가 아니라는 가정을 보여준 <평행세계> 그리고 <야마자키>라던지 <망엔 원녀의 럭비>의 경우 역사와 픽션이 팩션이 된느 것이 아니라 현대와 어떻게 만나는짇를 볼 수 있어서 매우 기발한 착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살짝 언급하고 나니 모든 것을 말해버린 느낌이다.

 

츠츠이의 작품은 일단은 실실거리면서 웃거나 키득거리면서 웃을 수 있는 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단지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재미만 추구했다면 츠츠이 마니아를 생산할 수 없었을테니까 츠츠이의 글에는 흔히 블랙유머라고 하는 것이 있긴 한 모양이다. 왠지 웃고 있어도 웃는게 웃는게 아닌 씁습한 기분을 나도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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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의 그림책 - 오늘의 눈으로 읽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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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을 잘 볼지 모른다. 식견이 없다고 해야 명확한 표현이다. 사실 그림이라는 것이 화가나 전문적인 해설자가 없으면 쉽게 다가오지 않는 까탈스러운 예술의 한 장르이지 않는가? 현대의 미술 작품도 그러한데 고미술 작품은 말해서 무엇할까? 현대 미술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고미술은 현대미술보다 갑절정도 더 이해할 수 없다. 이럴 때 보게 되는 것이 전공잗들의 해설서인데 , 전공자들의 책을 읽어봐도 그 명쾌함을 찾을 수는 없다. 보통 전문가들의 이야기 속에는 전문가들이나 알아먹을 통용어들이 나오기 마련이어서 그 세계의 언저리에도 못 가본 사람들은 그저 읽히는 것은 글이고 들리는 것은 소리였구나 하는 식으로 어물정 넘기게 된다. 몸에 착감기는 그런 해설서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정조 시대에 단원 김홍도라는 화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호가 단원이라는 것까지도 자세히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술 시간에는 단원 김홍도 앞에 한가지 더 수식어가 붙는데 그것이 풍속화의 거장 단원 김홍도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단원 김홍도의 작품은 생각나는대로 말해보자면 <씨름> < 무동 > < 서당> <빨래터>정도가 기억이 나는데 단원은 평생 4가지 그림을 그렸을가? 물론 아니다. 우리 대중에게 알려진 대표작품 말고도 많은 작품이 존재하기도 하고 풍속화도 있고 문인화도 있고 초상화도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원의 일부분만 보고 단원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원 그림책>은 단원의 풍속 화첩에 대한 그림 해설서이다. 최석주는 전문가가 아님을 공언하면서 단원의  그림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문장에서 학자의 힘을 뺐다. 담백하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날렵하기도 한 것 같기도 진솔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 낡은 비유인지 모르겠다. 최석주는 펜을 검으로 쓰는 사람이고 , 전문가들은 펜을 도로 쓰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칼은 상대방의 베는 것을 주로하는 형태다. 하나의 대상을 완전히 분해하는 전문가들의 시선과 글쓰기다. 검은 상대방을 찌르는 공격이 적당하다. 하나의 대상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풀어내어 그 그림에 대한 전체적인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칫 잠오고 읽지 않게 될 글들을 가볍게 쿡쿡 지르듯 써서 그림에 관심이 없든 있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글 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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