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서상국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러시아 문학을 읽는 일은 잘 없는데 도스토예프스끼의 전집을 가끔 하나씩 읽는 것과 칭가즈아이트마토프 <백년보다 긴 하루>를 읽었고 아 고골의 <외투>를 읽었다. 그리고 지금 읽은 책은 톨스토이의 <부활>이다. 그러니까 러시아 작가 중에는 네번 째로 만나는 것이 된다. 순서를 따지는 것은 서열을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읽은 작가가 들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말머리에 객적은 소리를 해봤다.

 

러시아 문학에서 최초의 난관은 아마도 이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여기서 꼭 집어서 정하고 이야기를 해보는게 좋을 것 같다. 여자 주인공은 카츄사로 하고 남자 주인공은 네흘류도프라고 하고 가자 워낙 부르는 말이 많으니 이 사람이 저사람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이니 말이다.

 

네흘류도프가 법정 배심원으로 참석한 공판에서 예전에 만난 기억이 있는 카츄사를 보게 되고 법정오류로 인해서 시베리아 유배형이 결정되고 네흘류도프가 카츄사를 위해 힘쓰고 결국 시베리아 행까지 따라나선다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부활>은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작가정신 판 800페이지 조금 더 된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뼈대만 이야기한 것이고 그 사이에 많은 에피소드와 진정으로 해볼만한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궁금하신가 그럼 어떻게 하라고 직접 읽어보시면 된다. 그저 나는 약간의 헛다리만 짚어볼 모양이니까......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흥미로운데 , 역시 문학이라는 것은 그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작가의 생각을 등장인물을 통해 드러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시대상황은 참으로 참혹하다. 감옥에 들어오는 것은 잘못된 판결로 인한 사람도 있고 논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결국 논리와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네흘류도프가 범죄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해소하는 방법은 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직위를 이용한 권위의 작용이고 범죄자들이 귀족들의 말 한마디에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볼 때 불합리한 사회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톨스토이의 생각은 어쩌면 네흘류도프라는 한 인물에게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네흘류도프의 많은 생각들이 다분히 교조적이면서 구구절절 생각이 많은데 아마도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의 페르소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귀족사회에 대한 환멸이라든지. 토지의 무상 분배라든지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라든....... 모든 것이 네흘류도프의 생각에서 드러난다.

 

제목이 <부활>이니까 누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꺼야라고 생각하신다면 큰일이다. 죽음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치르고 다시 태어나긴 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겠는가 두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추샤지 

 

네흘류도프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카츄샤를 법정에서 보는 순간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낮은자의 입장에서 낮은자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으로 전환한다. 시베리아가지 따라가면서 겪게되는 많은 일들이 네흘류도프가 비유적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에 대한 비의적 대속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점점 변해가던 사람이 정점에 이르러 다른 사람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츄샤는 어떻게 부활을 이룰까 카츄사는 네흘류도프와의 관계후 거리의 여자가 되어서 도덕적 해이상태에 빠지고 자폭적이고 자괴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리의 여자가 되어있는데 네흘류도프를 만나고 다시 유형을 떠나면서 환멸적인 과거에 대해서 반성하고 새로운 인물로 태어난다. 그 방법은 나름 부활에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여기선 잠깐 비켜가야겠다. 

 

<부활>을 읽으면서 사실은 다분히 교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만든 소설같다는 말이다. 과도기의 정점에 있는 것 같다. - 러시아의 역사를 잘 모르니 어찌 말해야할지를 정확하게 모르겠다. - 발칙한 상상이지만 <부활>을 읽으면서 나는 이광수의 <무정>이 생각났고 심훈의 <상록수>가 생각났다. 왜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페이지 수가 많기는 하지만 그다지 지루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올 여름 추리소설도 괴기 소설도 좋지만 진득하게 세숫대야에 발담그고 더위 속에서 진득하게 <부활>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나는 긴 글은 경기를 일으키는 탓에 800페이지를 100페이지 나눠서 일주일 읽었다.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고 장편 좋아하는 분들은 하루 놀잇감도 안돼는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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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세트 - 전6권 아사노 아쓰코 장편소설 13
아사노 아쓰코 지음, 양억관 옮김 / 해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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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배터리 1~6

 

일본 사람 야사노 아쓰코가 쓴 청소년 성장 장편 소설이다.이 책을 추천한 지인이 매우 유명한 책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읽기를 시도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장편을 죽어라고 싫어하고 끈기도 없어서 잘 못 읽는 유랑인이다.

 

사실 유랑인은 배터리의 '배'자도 모른다. 배터리라고 하길래 난 뭐 처음에는 미스테리를 가미한 SF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책을 딱 펼쳐보니까 어라 야구 이야기네 그랬다. 배터리는 던지는 놈 , 받는 놈을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용어였다. 청소년 성장 장편이라며. 야구에 관심없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은 이게 야구 이야기라고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싶다. 뭐 굳이 주석을 다는 것이 주요 독자층에 더 어필하지 않겠냐고 말은 하지 않겠다. 뭐 이미 제목이 이렇게 나왔으니 뭐 유랑인 더이상 뭐라해봐도 입만 아프다.

 

이야기 속으로 좀 들어가 볼까 하라다 다쿠미라는 순수함 , 겸손함 , 발랄함 그런 것들은 어디다 버리고 온 -  3권 59페이지에 친절하게 써 놨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유랑인이 했으면 그냥 싸가지 밥 말아먹은 녀석이라고 한다-  놈이다. 참고로 이야기가 시작될 때 중학교 1학년이 된다. 1권부터 6권까지 주구장천 일관된 포스를 보여주시는데 권수가 더해갈수록 쬐금 모기 눈물만큼 심리변화가 생기는 인물이다. 천하제일 자타공인 최고의 공을 던지는 투수라는 자뻑에 하루 하루를 견디는 가련한 인물되시겠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생각안하겠지만 , 오로지 공던지는 것만 생각하고 사니 요즘으로 치자면 인터넷에 자기 기사 악플 보지 않는 것과 같다. 무시무시한 놈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긴 하다. 아 밥맛 없는 녀석이다.

 

나카구라 고라고 하는 덩치 좋은 포수인데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 중에 하나다. 하라다 다쿠미의 공은 자기만이 받을 수 있다고 역시 자뻑한다. 물론 하라다 다쿠미 최고의 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고밖에 없다. 근데 자뻑의 반전은 후반부에 나오는데 최고의 공만을 받고싶어한다는 문제에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실제 야구경기보니까 뭐 한 포수가 여러 투수의 공을 잡드라 고도 생각해봐야한다. 하라다 다쿠미 공만 받다가 다른 투수 공 화딱지 나서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결국 초반에 하라다 다쿠미와 나가쿠라 고는 서로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같은 중학교에서 야구를 하는데 오로지 자신들만의 힘과 스피드를 믿으며 학교 야구부원들을 개무시한다. 물론 개무시하는 것은 까칠 대마왕 다쿠미다. 조금씩 팀원들에 대해서 다쿠미가 인식하는 것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그 인식이 시작될 즈음 끝나버리니까 기대하지 말고 보시길 바란다.

 

다쿠미와 고는 말이다. 저거들만 알았지 야구가 여러명이서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사탕까먹듯이 낼름 까먹어 버린 것이 병증이라면 병증이거든. 이야기를 쓴 사람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겠는 것 같은데 집단이라는 것은 개인의 개성이 우선되지만 그 개성이 모여서 어우러져 하나의 집단을 구성한다. 각각이 잘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며 함께 도우면서 이루어나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요런걸 이야기하고 싶었지 싶단 말이거든 (슬슬 유랑인 시동걸리나보다 이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어쩔 도리 없다 그냥 가보는 거지 모 아니면 도다) 다른 것으로 이야기를 해도 될 것인데 차라리 배터리가 아니라말이지 야구부 전체를 가지고 서로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씨부려대면 더 아그들 독자들이 더 이해해 먹기 편했을 것이다. (요즘 아들 떡 말고 피자 좋아하더란 말이지 칼칼칼 )

 

유랑인이 장편을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는 늘어지는 서사때문이기도 한데 6권으로 읽는 배터리는 여름날 늘어진 엿가락같다. 설겅설겅 건너 뛰어도 될 부분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유랑인의 사팔뜨기 눈은 그 부분에 갑갑증을 일으켜 휘리릭 넘어가라고 얼마나 내 머리통을 두드려대는지 눈을 달래느라 식겁했다. 군더더기가 있어보니 뭐 하겠나 싶기도 하거니와 군더더기도 군더더기 나름인데 후반부로 갈 수룩 필요 없어 보이는 부분도 기워 넣은 것 같아보이기도 하더란 말이지

 

김빼는데는 뭔가 있어보여서 말이지 뭔가 재미있어질라카는데 끝을내뿌는 바람에 껄쩍지근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거든 하기사말이지 거기서 더 나갔다가는 완전히 '공포의 외인구단' 이야기가 될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가 없는데 말이지 6권까지 읽어도 성장소설다운 교훈이라거나 감동은 벼룩이 간만큼도 없어보이거든입지. 유랑인은 읽으면서 다쿠미를 몇번이나 죽이고 살렸는지를 모르겠거든 뭐 싸가지 없이 살지 마라라는게 이글의 주제라면 뭐 너무나도 잘 쓴 글이긴 한데 말이야 잘못 읽으면 부모나 선생에게 반항 때리자로 오독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거든 칼칼칼 쬐끔 걱정이 되기는 해서 말이지 그냥 한 번 지껄여 봤는데 저기 저 도랑물에라도 가서 귀라도 씻을 사람이 있으면 얼른 가서 귀가 아니라 눈을 씻고 돌아오지 않아도 좋단 말이거든입지

 

이 글이 말이지 영화나 드라마 만화로 만들어졌단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정말이지 고로코롬 짧은 두 시간 안에 이야기할 분량이었단 말이지 , 6권 2시간씩이라고 해도 12시간이니 하루의 반나절 , 하루의 반 나절을 오롯히 고 베터리에 투자를 할 수 있으려나 며칠에 걸려 읽었더란 말이거든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2시간 꺼리도 안 되는 것 같아보이더란 말이거든 칼칼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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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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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풍문은 예전부터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작품을 잘 안다고 보기는 뭣하고 심윤경이라는 작가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심윤경의 <달의 제단>을 읽고나서부터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으면서 달의 제단에서 보여주었던 서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서사의 흔적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지 모르겠지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가진 문체를 가졌다. 이러한 문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작가는 복받은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하 정원) 의 정확한 작품명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지인이 책을 소개해주면서 왜 저 말줄임표가 사용되었는지는 읽어보면 안다고만 했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그 이유를 들어버려서 맥이 살짝 빠져버리기도 했지만 책의 초입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작가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서술해간다. 중반쯤 읽었을 때 아 저것이 단순한 말줄임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우리들의 동구다. 중반까지 읽어보면 동구와 영주는 남매지간이지만 집안에서조차 극점에 서 있다. 한 사람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깨치지 못한 아이이고 한 사람은 3살에 이미 한글을 읽는 아이다. 당연히 집안에서 대우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동구는 질투를 느낄만도 하지만 동구는 제 동생을 업고 마을을 돌며 자랑을 한다. 박선생님에게도 자랑을 한다.

 

      <정원>에서는 시대사를 품어내고 있기도 한데 광주의 기억을 박영은 선생님을 통해 보여주고 그 당시에 학생운동 대오의 투사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과 타협한 모습을 보여준다. 박선생에게 투쟁을 접었다고 힐난하던 선배도 이제는 고시에 목을 매는 수 많은 고시생 중에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작가는 작가가 살아낸 시대적 상황을 박선생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구는 동경의 대상이던 3층집 아름다운 정원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 정원을 볼 수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정원에 작별 인사를 한다. 자신이 스스로 정했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란 말을 남긴다. 가족들 간의 균형을 생각해서 동구가 중간에서 완충의 역할을 한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에게 희망을 줄려고 했던 행동일지도 모른다. 아무 희망도 없는 할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할머니에 대한 선물이기도 했지만 엄마와 아빠 할머니 동구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건사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동구는결론을 내린 것이다. 할머니가 살고 싶어하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그렇게 지내는 것이다. 깨어진 가족을 부여잡고 스스로의 상처가 나아지기를 자연치유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치 동물처럼 각자의 방법으로 상처를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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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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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 황정은 - 문학동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는 11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그것을 나열해 보자면 < 문> <모자>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무지개풀> <모기씨> <초코맨의 사회> <곡도와 살고 있다.> <오뚝이와 지빠귀> <마더> <소년> <G>다. 황정은의 작품은 두가지 방향으로 자기분열을 한다. 몽환적이고 환상성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뉘어진다.

 

<문>은 자신의 뒤에 문이 있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죽은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한 일종의 영계의 문이다.  < 모자>는 아버지가 모자가 되어버리는 이야기이고 < 모기씨>는 주인공과 모기와의 대화가 그 중심에 있고 < 곡도와 살고 있다>는 것은 곡도라는 애완동물에 대한 이야기다. <오뚝이와 지빠귀>는 주인공 여자가 점점 오뚝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마더>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고 <소년>은 버림받을 것을 걱정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무지개풀>은 거실만한 풀을 사서 물을 채워 놀다가 돌려주려는 이야기다.

 

<초코맨의 사회>와 <G>는 아주 짧은 엽편 소설이다. 아주 짧지만 그냥 넘기지 못하는 아차하고 무릎을 치거나 다시 곰곰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글들이다.. 글은 짧고 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함을 짧은 글로 보여준다.

 

몽환이라던지 환상성은 황정은 소설의 전반적인 곳에서 발현되는데 이러한 몽환적 환상성은 그러나 완전히 긍정성을 획득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여서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그 부정적 환상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마도 <모자>라는 글이 아닐까 싶은데 모자가 되어버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존재의 외소함이라고 해야할 것들을 살펴보아야한다. 아버지가 모자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딸들이 부정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존재하면서도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순간 생물에서 무생물로 역진화하는 것이다. 모자또한 생활 용품 중에서 혹은 패션 용품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모자의 등가관계는 존재의 외소함이 아닐까?

 

<오뚜기와 지빠귀>의 경우에도 기조라는 여인이 점점 오뚝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여 서술하는데 남편의 시선을 빌어서 이야기한다. 일종의 변신담인데 그리스 신화에서인가 제우스를 피해가다가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러한 전설은 나름대로의 환상성과 아름다움을 담보하고 있지만 기조가 오뚝이가 되는 것에서는 전혀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이라거나 환상성을 찾을 수 없다. 그저 유정물에서 무정물로 변해가는 것에 중점이 맞춰져있다.

 

<마더> <소년> <무지개풀>의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부정적 환상성으로 가득한 글들과 또 다른 맛을 내는데 현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환상성의 거품을 완전히 걷어내고 매마르고 건조한 문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간다. 환상성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최근에 약진하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개괄적으로 봤을 때 혹시 우리나라 문단이 서서히 과도기를 거쳐 선배작가와 신진작가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보게 되는데 신진작가들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현실과 이념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했던 선배작가들의 어깨에서 그 짐을 내려놓게 만들었고 신진작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금 이 시대를 증거하고 표현하는데 이념과 무거운 주제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기들의 이야기들으 바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생겨서 단선적이 획일적이던 한국 문단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듯 하다 .

 

두 갈래로 자아분열한 모습을 보여준 황정은의 글들에서 다음이 기대된다. 다음에 나올 글들은 어느방향으로 자가증식할지 궁금해진다. 사실 두 부분에 균형을 이루면 좋겠지만 황정은의 강점은 비관적 환상성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다음 작품집에서는 좀더 다체로운 비관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글들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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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시작시인선 82
길상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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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잊고 산 날이 제법 오래되었다. 시를 쓰는 것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며 구겨버린 종이들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나의 마른 언어들은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나의 언어들은 길상호가 말하는 <이런 언어들 중 시라는 걸 쓰는 놈이 있는데 시라는 게 썩은 물고기 살점을 받아 먹으며 만들어 낸 것이라 기우뚱 바로 서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나의 언어는 길상호의 언어 물고기의 썩은 살점보다 더욱 더 힘이 없었다.

 

     시라는 것은 언어로 마음을 매만지는 일이다. 마음을 매만지는 방법에는 벼락을 내리쳐 일순간 깨닫게 만드는 것이 있는가하면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처럼 점점 깨닫게 하는 방법이 있다. 길상호가 선택한 방법은 벼락같은 깨달음이 아니라 가랑비에 젖는 관조의 방법을 택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관조를 넘어서 애정을 쏟아내고 있다.그러나 격렬하지 않게 은은하게 풀어낸다.

 

    길상호의 시는 따뜻하다. 읽으면서 체감할 수 있는 서정성은 그가 얼마나 인간이 없는 세상에 - 인간은 그에게 그리 긍정적 이미지가 아닌 것 같다. 하물며 자기 존재 자체도 비관적이다. - 대한 찬미로 넘쳐난다. 서정성을 넘어선 경외에 가까운 언어의 육즙들이 베어나온다. 자고로 시의 언어는 깨물었을 때 육즙이라는 것이 한 움큼이라도 베어나와야 제 맛이다.

 

     시집을 읽고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나는 안다. 사실 나는 시집을읽고 뭐라 무러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써내려가는 내 자신이 무섭다. 쥐뿔도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무섭고 미안하다. 그냥 시를 못쓰는 사람의 질투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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