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 황정은 - 문학동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는 11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그것을 나열해 보자면 < 문> <모자>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무지개풀> <모기씨> <초코맨의 사회> <곡도와 살고 있다.> <오뚝이와 지빠귀> <마더> <소년> <G>다. 황정은의 작품은 두가지 방향으로 자기분열을 한다. 몽환적이고 환상성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뉘어진다. <문>은 자신의 뒤에 문이 있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죽은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한 일종의 영계의 문이다. < 모자>는 아버지가 모자가 되어버리는 이야기이고 < 모기씨>는 주인공과 모기와의 대화가 그 중심에 있고 < 곡도와 살고 있다>는 것은 곡도라는 애완동물에 대한 이야기다. <오뚝이와 지빠귀>는 주인공 여자가 점점 오뚝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마더>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고 <소년>은 버림받을 것을 걱정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무지개풀>은 거실만한 풀을 사서 물을 채워 놀다가 돌려주려는 이야기다. <초코맨의 사회>와 <G>는 아주 짧은 엽편 소설이다. 아주 짧지만 그냥 넘기지 못하는 아차하고 무릎을 치거나 다시 곰곰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글들이다.. 글은 짧고 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함을 짧은 글로 보여준다. 몽환이라던지 환상성은 황정은 소설의 전반적인 곳에서 발현되는데 이러한 몽환적 환상성은 그러나 완전히 긍정성을 획득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여서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그 부정적 환상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마도 <모자>라는 글이 아닐까 싶은데 모자가 되어버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존재의 외소함이라고 해야할 것들을 살펴보아야한다. 아버지가 모자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딸들이 부정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존재하면서도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순간 생물에서 무생물로 역진화하는 것이다. 모자또한 생활 용품 중에서 혹은 패션 용품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모자의 등가관계는 존재의 외소함이 아닐까? <오뚜기와 지빠귀>의 경우에도 기조라는 여인이 점점 오뚝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여 서술하는데 남편의 시선을 빌어서 이야기한다. 일종의 변신담인데 그리스 신화에서인가 제우스를 피해가다가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러한 전설은 나름대로의 환상성과 아름다움을 담보하고 있지만 기조가 오뚝이가 되는 것에서는 전혀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이라거나 환상성을 찾을 수 없다. 그저 유정물에서 무정물로 변해가는 것에 중점이 맞춰져있다. <마더> <소년> <무지개풀>의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부정적 환상성으로 가득한 글들과 또 다른 맛을 내는데 현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환상성의 거품을 완전히 걷어내고 매마르고 건조한 문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간다. 환상성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최근에 약진하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개괄적으로 봤을 때 혹시 우리나라 문단이 서서히 과도기를 거쳐 선배작가와 신진작가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보게 되는데 신진작가들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현실과 이념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했던 선배작가들의 어깨에서 그 짐을 내려놓게 만들었고 신진작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금 이 시대를 증거하고 표현하는데 이념과 무거운 주제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기들의 이야기들으 바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생겨서 단선적이 획일적이던 한국 문단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듯 하다 . 두 갈래로 자아분열한 모습을 보여준 황정은의 글들에서 다음이 기대된다. 다음에 나올 글들은 어느방향으로 자가증식할지 궁금해진다. 사실 두 부분에 균형을 이루면 좋겠지만 황정은의 강점은 비관적 환상성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다음 작품집에서는 좀더 다체로운 비관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글들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