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선배 부친상을 다녀 오면서 친구들끼리 우리 또래의 부모님과 우리들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비슷했는 데, 자녀인 우리들의 모습은 비슷하지 않았다.그것에 대한 이유? 아니면 적당한 변명거리가 될 수도 있을 책이었다. 또 한편으로 개인적으로 내 맘속의 응어리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P256 장 피아제는 자신의 관점을 인지하게 되면 그 관점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점의 변화는 기존의 시각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되고, 자신을 향한 관점이 변화되면 자존감도 변화한다. 과거의 나를 보던 관점(“내면아이”, ex 스스로 비하하는 아이 등) 을 언어화해서 알아차리고, 내면아이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이 관점에 대한 변화를 꾀함으로써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좁고 편향되었던 시야를 넓히고, 내가 빠져있던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왜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지와 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다양한 사례와 쉬운 문장으로 일러 준다특히나 가족 앞에서 감정통제가 잘 안 되는 이유로 “자아분화가 발달되지 않은 사람”의 특징으로 설명하는 부분과 어린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자아분화를 성인이 된 지금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P286 & 289)저자가 쓴 다른 책으로도 관심이 가고, 가족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P281 심판하지 않으면 진보도 없다
P286 슬기로운 사람은 유언비어를 들어도 전하지 않는다.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고, 꾸며된 자나 퍼뜨린 자의 주관과 목적만 되풀이 강조되는 그런 종류의 뜬 소문을 다시 전하는 것은 잘해야 용기 없는 정의의 주관에 뇌동하는 것이 되고 자칫하면 악당을 쓰러뜨리기 위한 다른 악당의 계교를 도와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P215 사람의 그릇이 크고 작음은 그 지위가 높고 귀해질 때에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P228 유비는 알고 있었다. 모든 종교 집단에서처럼 황건적도 출발은 베품의 원리에 바탕하였다. 처음 한동안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앓는 자에게 치유를,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을 약속했고, 그 단계에서는 작은 베풂만으로 민중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권력 추구의 집단으로 변질하면서 그 원리도 베품에서 다스림으로 바뀌자 사정은 변했다. 다스림이란 말에 포함된 요구에 비례해 그들을 따라가는 민중의 요구도 커지기 때문이다.P229 이제 민중을 자기편으로 잡아두는 길은 물욕과 권력을 이용해 달래거나 공포로 묶어두는 따위 세속적인 길 밖에 남지 않는다. 이른바 신정국가 (神政)가 보편적으로 걷게 되는 길로 몰락의 징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부의 달램이나 위협에 익숙해지는 만큼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