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P249 맹자 이루 상 離婁 上 ( 떠날 이, 별이름 루)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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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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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P236 맹자: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양)으로 큰 것(소)을 바꾸라고 (以小易大) 하셨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중략- 그런데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있습니까?

P237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見, 만나고 友, 서로 안다 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중략-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 중략 -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 중략 –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에서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서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P242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 (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서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하기 어려워한다>
P243 盡心 上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 魯 (노둔할 노) 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 太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 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 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 (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일월 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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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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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맹자,
<여럿이 함께 하는 즐거움, 與民同樂>

P219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 한 대목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양혜왕 上)

현자는 여민동락하는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게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 중략 –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동류라는 안도감과 동감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화살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P232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P233 반구제기 反求諸己 (되돌릴 반) 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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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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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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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P191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P192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 宥化(용서할 유) 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P193 모든 사상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당시의 언어로 읽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입니다.

<광고카피의 약속>

P194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빛날 빈) – 雍也 (누그러질 옹, 화할 옹)

바탕이 문채 文彩 (색채 채) 보다 승 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거칠게 되고, 형식이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면 공동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P198 상품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세포라고 합니다. 세포의 본질이 사회체제에 그대로 전이되고 구조화되는 것이지요. 형식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는 그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과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공자의 모습>
P206 원래 주나라의 정치구조는 천자를 정점으로 한 제후국 연방제입니다. 제1의 제후인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이러한 연방제적 구도가 주나라의 종법제도입니다.

천자는 제후들에게 중립적이어야 하고 제후는 대부들에게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러한 사회체제의 정치론이었습니다. 중립적이지 않으면 그러한 질서가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중국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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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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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천의 통일>

P179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爲政
사 思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전 田 + 심 心 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 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P180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P181 경험과 실천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직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 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 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 임에 비하여 사 思는 특수한 것 (specialism) 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P182 세상이란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 大同은 멀고 소이 小異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 學과 사 思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학이편에 학즉불고 學則不固 (固 굳을 ‘고’) 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한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에 전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P186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잘 아는 지 知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경우의 우 愚는 그 속에 대지 大知를 품고 있는 우입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어리석은 척 하는 것입니다.

P187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P188 무욕과 무사 無慾, 無私를 설파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P189 마치 맨홀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치부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모든 타인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잡단적 타자인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사실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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