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 심리학의 눈으로 보는 두 나라 이야기
한민 지음 / 부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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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아는 범위 안에서 머무르는 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도 자아의 확장도 요원한 일일 겁니다. 벽 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들은 무작정 나를 죽이려는 존재가 아니며 그들과 함께 얼마든지 어울려 지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찾게 되는 날이 있을까요. (p.345)

 

이 문단으로 리뷰를 시작함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보며 늘 단절, 철벽 등의 단어를 느껴왔는데 그것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민족적, 문화적 등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문단을 읽은 후에야 '선을 긋는 일본인'이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작년, 한 책을 읽고 “우리 깊숙이 들어있는 공통의 감정 중, 반일 혹은 혐일 감정은 아마 그리 낯선 일이 아닐 것이다. -@책과함께 #한국과일본은왜 의 리뷰 참조-” 라고 썼다. 리뷰 끝에 “이 한 권으로 모두의 사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듯, 지금도 한국과 일본은 평행선을 걷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에는 미움으로 등 돌린 평행선이었다면, 요즘은 너는 너, 나는 나. 같은 느낌이랄까. 일본의 참혹함을 겪은 세대들이 팔순이 되어 미움도 사그라든 것인지, 우리나라의 분골쇄신 덕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과거의 미움보다는 새로운 무엇인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자리에 채워야 할 것은 묵은 감정이 아니라, 올바른 마침표와 선한 경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큰 의미가 있다. 지피지기를 제대로 실천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가득 들어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교”가 아니라, “이해” 관점이다. 특히나 좋았던 점은, 단순한 현상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대중심리, 민족심리 등을 반영하여 그것이 끼치는 영향과 결과를 자세히 분석해냈다. 단순히 '먹방의 나라'와 '야동의 나라'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심리에서, 어떤 욕구에서 기인했는지를 제대로 풀어냈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피드백하며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사회적 교류의 방법입니다. 각자의 영역에 선을 긋고 그 안으로 침범하는 것을 꺼리는 일본인들과는 다른 방식이죠. (p.25)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상대방을 위한 또 다른 모습을 내세우는 일본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비교적)솔직하게 드러내는 한국인. 이러한 차이는 한국과 일본의 '나와 타인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p.107)

 

한국과 일본을 이야기하는 책 중,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가장 쉽다는 생각을 했다. 문화와 유행, 그 요소들이 일상적이어서였을까. 재미있게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 되면, 냉철한 어퍼컷 한 방에 얼얼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강의하면 일타강사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재미있는 주제를 미끼로 던지고, 핵심으로 낚아채는 기술이라니. 

그야말로 백전백승의 문장력이다. 

 

작가가 이 책이 무심히 보아온 문화적 요소들에 숨어 있는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 (p.99)가 되기를 바랐듯,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이 꽤 감정적이었고, 그들을 다소 곡해해왔음을 깨달았다. 물론 모든 독자의 깨달음은 다를 테고, 때때로 어떤 사례는 들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것이 '옳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거나 나도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문화가 옳고 무엇을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p.189)”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차이를 아는 것 아닐까. 너와 내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해하는 것 아닐까. 그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그 가치를 다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일 문화의 맥을, 심리적 차이를 정확하게 짚어낸 책이다. 

 

'지피지기'는 작가가 도와주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백전불패'를 할지, '이해와 발전'일지 결정하는 것 역시 각자 몫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나아감을 위해 후자인 편이 좋겠지만 말이다. 

훌륭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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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인생문답 - 100명의 질문에 100년의 지혜로 답하다
김형석 지음 / 미류책방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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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성공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능력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결국 떨어지고 말거든요. 그러면 만회하기가 힘듭니다. 천천히 능력을 갖춰가면서 올라가면 오래갈 수 있어요. 성장하는 기쁨도 누리고요. (p.118) 

 

이 책을 단 한 줄로 표현하자면, “천천히 읽으며 종종 눈물을 훔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 연휴가 끼어서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읽었는데, 그렇게 읽어 더 의미가 있던 책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아마도 내가 잘 나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 종종 이 책을 뒤적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김형석 철학자님의 책을 꽤 많이 읽었다. (내가 알기로는 다 읽은 것 같다) 그동안의 책들도 다 좋았지만, 이 책은 현인의 말씀을 듣듯 그저 편안하게, 오늘 몇 장 읽고 내일 또 몇 장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아서 “나도 올해에는 책 좀 읽어볼까?” 하는 마음을 가진 누구라도 아이스크림을 고르듯 31개의 문답을 뒤적여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103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매일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러나 꼰대가 아닌 “오호 그랬구나. 그럼 이렇게도 생각해볼까.” 하며 따뜻한 손바닥으로 등을 쓸어주는 할아버지가 딱 이 책의 느낌 아닐까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나조차 알 것 같은 그런 따뜻함.

 

인생은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주는 것까지가 내가 내 인생을 완성하는 길이에요. (p.29)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말고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과 우정을 나눠야 해요. (p.97)

 

사실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세수하며, 밥을 먹으며, 청소하며 여러 번 곱씹어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계산 없이 주는 마음과, 온전하게 받는 태도 모두가 중요하겠다고. 내가 가진 행복을 계산하지 않고 잘 퍼주는 것도 중요한데, 누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때 그것이 행복인지 알고 온전하게 받는 태도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잘 받아야 주는 사람도 더 행복해지고, 나도 더 잘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든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이래서 현인이구나. 이래서 현답이구나 하고. 그의 지혜가 몽매한 내게도 이런 깨달음을 주는 것은 정말 깊은 생각이라서가 아닐까. 우직하게 책을 읽어온 이유가 이거다. 너무나 부족하고 모자란 나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키우기 때문에. 인생의 좌표로 잡아 온 '우공이산'에 김형석 철학자님이 몇 삽을 보태어 주신 것 같다.

 

사람은 자기 인생의 길에서 스스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복을 누리면서 살면 됩니다. 내 인생의 잣대를 갖고 남을 평가하거나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에요. (p.48)

 

매일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매일 흔들리며 살아온 나지만 이제는 정말 좀 많이 괜찮아졌다. 이제야 헐벗은 나를 제대로 마주하고 있고, 이제야 내가 가진 아픔을 스스로 물 위로 꺼냈으니 말이다. 괜찮다는 말로 덮어두기만 했던 나에게 이 책이 말한다.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라고, 조금 돌아가도 괜찮고,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위로받았다.  

 

 

추신) 당신이 올해는 책을 한 권쯤 읽어볼까 생각했다면, 이 책이 참으로 그럴듯하겠다. 책을 너무 오래 읽지 않아 읽을 자신이 없어도 되고, 이해력이 없어도 된다. 이 책이 당신에게 어린 시절 이후 다시 읽는 “컴백도서”가 되어도 되고, 올해의 마지막 책이 되어도 좋다. 일단 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만이라도 가졌다면, 이 책의 목차를 펼쳐 제일 마음이 닿는 물음을 먼저 읽어라. 나머지는 이 책이 알아서 해준다. 책이 알아서 그 누구라도 천천히 편안하게 읽어놓고 때로는 빙긋 미소가 지어지는 문장이나 눈물이 울컥 차는 문장을 만나게 하는 마법을 부려줄 테니 당신은 그저 목차만 펼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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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구를 망치는가 - 1%가 기획한 환상에 대하여, 2022 우수환경도서
반다나 시바.카르티케이 시바 지음, 추선영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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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의 머리말로 이 리뷰를 시작하는 것은 책을 읽은 후 이 말이 내내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꽤 많은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편이기는 하나 정말 나의 복지가, 나의 자유가 “자연”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깊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저 빨대를 쓰지 않고, 텀블러를 사용하는 등의 행위를 벗어나 의식적으로 진짜 “웰빙”을 지켜왔던가. 그래서 오늘의 리뷰는 반성문이 될 지 모른다는 말로, 또 함께 진짜 더불어 사는 것을 생각해보자는 권유로 시작하고 싶다. 

 






오늘날을 지배하는 체계는 삶의 터전에서 사람들의 뿌리를 뽑아내는 일을 진보의 길이라고 간주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람들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는 일이 오늘날의 '발전' 모델에서 가장 폭력적인 측면으로 자리 잡았다. (p.44)

 




저자를 급진주의자라 불러야 할지 보수주의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저자는 극과 극, 전혀 다른 방향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녀는 둘 다라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는 점에서는 보수주의자이며, 그것을 전파하는 강인함은 급진적임에 가깝다. 사실 환경의 심각성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나의 시야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우물 안에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기도 했고, 인류가 만나게 될 심각한 미래에 대해 서늘함이 들기도 했다. 

 


진정한 지성, 진정한 종자, 진정한 식량, 진정한 부, 진정한 자유의 부활은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자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자각할 때 우리의 상상력을 못 쓰게 만들고 우리를 노예로 전락시킨 1퍼센트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p.53)

 


그렇다면 그 1%는 누구인가? 맞다. 금융이고 기술이다. 물론 조금 보태자면 자연이 인간의 것이라는 오만한 착각으로 착취하고 있는 일부 금융과 기술로, 우리에게 깊숙이 교육된 기계론적 사고방식이 우리의 잠재력을 축소해 모든 자연이나 인간을 “금융의 원료”로 환원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정체성을 바로잡으면 기술과 금융이 환경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공상과학에서 늘 이야기해왔듯, 화성 등 “지구의 대체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지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 책을 읽으며 다소 불편한 마음을 느낄지도 모르고, '빌런'처럼 거론된 몇몇은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소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싶다. 우리는 사실 어릴 때부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언제인가 지구가 그 생명을 다하면 화성 등의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날 만큼 과학이 발전했으리라고 학습 당해왔다. 그러나 지구가 목숨을 다한 시점에 인류가 살아 있으리라고 누가 보장하는가? 또 다른 행성은 지구인들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보장은? (만약 내가 지구라면 그 행성에 카톡을 보내줄 것 같다. 나를 이렇게 만든 빌런들이 너에게 가고 있다고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다시 한번 우리가 지구에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나와 자연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 역시 재화로 평가되고 있음도 씁쓸했고. 


 

나는 '보호주의'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구, 가정, 가족, 문화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생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있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p.223)

 


이 문단을 풀어보자면 지구, 가정, 가족, 문화를 보호하는 것을 나의 삶을 생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탱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내가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살아가려면 지구를, 가정을, 가족을, 문화를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하냐고? 그 당연한 것을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무시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환상을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쉬이 배워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와 같은 방향에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와 지구의 상관관계만큼은 다시 정립해봐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해졌다.

 




자. 이제 당신에게도 이 책을 권하는 나의 당부와 함께 질문을 하나 던진다. 

“산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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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려는 관성 - 딱 그만큼의 긍정과 그만큼의 용기면 충분한 것
김지영 지음 / 필름(Feelm)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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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는 안다. 좋아하는 것은 결코 잘하는 것과 같지 않으며, 돈 버는 것과는 더더욱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P.103)

 

솔직히는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했었다. 이런 종류의 책을 너무 읽다 보니 사실 그 말이 그 말 같고, 다 비슷한 말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는 “매일 쉬지 않고 걷는 삶과 가끔 뛰더라도 종종 멈추어 쉬는 삶.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택의 문제일 뿐. 그러니 오늘이 혹시 그런 날이라면 오늘 당신, 잠시 쉬어 가도 괜찮다. (p.143)”라는 말을 읽다가 울어버렸다. 늘 “오늘 걷지 않으면 뛰어야 한다”는 사회적 풍토 속에서 정말 매일매일 부지런히 걷던, 때로는 경보라도 하듯 숨차게 걷던 내게 남은 것은 디스크뿐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지금 멈춰 있는 것이 종종 불안했는데. 마치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괜찮다는 말을 건넨다.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나를 달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나를 위로한다. 

 

 

오늘도 내게는 바람이 차다. 

아무래도 나의 봄은 좀 더 더디게 오려나보다. (P.30)  

 

 

돌아보면 나란 아이는 참으로 꾸준했다. 아니 좋은 말로는 꾸준하고 나쁜 말로는 징글징글하다. 뭘 하나 좋아하면 미련하게도 놓지를 못한다. (이놈의 책도 글씨를 읽을 수 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있으니 참으로 한결같다. 한때는 이것으로 밥을 벌어 먹고살고 싶었고, 그러지 못해 꺼이꺼이 운 날도 있었으나 나도 이제는 안다. 좋아하는 것은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 남겨둘 때 아름다움을) 취미도, 사람도, 옷도, 성향도 참으로 한결같아서 사실 나는 휴직을 결정하고 마지막 근무를 하던 날 아무와도 인사를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상사의 말도 몸이 안 좋다며 거절했다. 솔직히는 내일의 나를 만날 자신이 없어서였다. 출근의 관성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회사에 가지 않는 내 모습이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다음날이 되니 아무렇지 않더라. 그저 커피도 맛있고, 햇살도 좋았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쳇바퀴를 벗어나 진짜 사람답게 사는 길을 향해 걸을 준비를 한 것 같다. 

 

작가는 말한다. 멍때리는 것도 건강에 좋으니 죄책감은 내려놓으라고. 시간에도 여백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지금의 나처럼 이래저래 놀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나는 나의 단단한 행복을 위해 내 멋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고작 커피 한 잔으로도, 고작 책 한 권으로도, 고작 햇빛 쐬기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며 더 잘 놀아보기로 했다. 뭐 어때. 

 

이 “뭐 어때”라는 말이 딱 이 책의 느낌이라고 하면 작가님이 섭섭하실까. 그러나 내가 느낀 이 책의 감상은 엄마가 아닌 이모다. 엄마의 잔소리보다 조금 더 유하고, 조금 더 느슨하고 한발 물러서 있는 그런 것. 이런 류의 다른 책에 비해 작가는 잔소리를 덜한다. 대신 그래도 괜찮아, 하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문장이 많다. 그래서 편안하게 읽어지기도 하고, 작가가 묻는 말들에 그저 잠시 시간을 내어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도 편하게 할 수 있다. 

 

 

마지막 말은, 작가의 말을 빌려 적어보려 한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했던가. (...) 새날에 내어줄 심신의 공간을 '버리기'를 통해 미리 마련해보는 건 어떨까. 비는 시간은 많고 불필요한 만남은 적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은 없다. 머지않아 분명히 올봄, '진짜 봄'을 그리며 오늘도 먼지 쌓인 집과 마음을 쓸어 담는다. (P.177)

 

맞다. 내 쉼의 시작이 나였든, 타의 의도였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정말 온전히 내가 쉬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기회를 통해 버릴 것과 취할 것이 분명해지니 이보다 더할 나위는 없다.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내게 주어진 오늘을 더 천천히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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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 당신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조종하는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방법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 지음, 이진 옮김 / 수오서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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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실은, 가스라이터는 한번도 당신의 친구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p.268) 

 


이토록 자극적인 문장으로 이 책의 리뷰를 시작함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혹시라도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으면서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는 이가 있다면, 부디 하루라도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문장을 택했다. 사실 스스로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은 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다만 받아들이지 못할 뿐. 

 


우리가 그들의 가스라이팅을 쉬이 가스라이팅이라고 판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그들은 당신이 괴로워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러나 증명하기엔 불충분할 정도로만 괴롭힌다. (p.117)” 그래서 스스로도 이게 정말 가스라이팅인지, 내가 가스라이터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지 헷갈려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 반복적으로 내 마음을 힘들게 한다면 그 사람이 내게 좋은 사람이 맞을까? 그 선상에서 생각해보면 결론을 내는 일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이 책을 쉽게 읽지 못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사람도 가스라이터일까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열었고, 이 책을 덮을 때에는 이 사람은 가스라이터이자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딱한 영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민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내가 이 말을 굳이 적는 이유는, 사실 대부분 가스라이팅에 노출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특별히 나약한 누군가만 당하는 일도 아니고, 특별히 사악한 누군가만 가하는 일도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두 가스라이터가 되기도 하고,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되기도 한다. 그게 이 책을 더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을 더욱 권하고 싶은 이유는 구성이 너무나 좋다. 이 책의 저자가 서문에서 굳이 차례대로 모든 장을 읽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이유를 너무나 절절히 알겠더라. 감정적 호소에서 전문적 지식까지를 모두 담아냈기에, 정말 누군가에게는 한줄기 빛이 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흔들리고 있던 내게도 저자는 계속 말했다. “stop. 너 자신을 위해서 이제는 stop.”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 책을 읽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고 당신의 감정을 인정해줌으로써 이해받는다는 기분이 들도록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다. 가스라이터는 당신에게 얻을 게 있을 때에만 사과한다. (p.28)

 


가스라이팅에서 우리는 “후버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당신이 멀어진다 싶을 때, 가스라이터가 당신을 다시 흡입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말이다. (p.69)






 

만약 가스라이터를 향한 애정이, 가스라이터로 인한 괴로움보다 큰 상태라면 이 책은 다소 아프게 읽힐 수도 있다. 저자는 끈임없이 그 덫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로움이 즐거움보다 큰 관계라면 당장 아플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벗어나야하기에, 치유되어야 하기에 이 책이 던지는 쓴소리는 약이 될 것이다. 아주 작은 의심의 씨앗이라도 든 채 이 책을 찾은 것이라면, 꼭 그 약을 먹고 더는 아프지않기를 바란다.

 


책의 말미에 치유법이 담겨있는데, 이 파트의 소제목이 “당신 스스로를 도와라”였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도울 생각이 없을 때 주변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그것은 마음에 닿지 못하기에 이 소제목은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 파트는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꽤 다양한 치료법을 담고 있기에 각각에게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주리라 생각된다. 우리 사회가 발달하면 할수록 각기의 성향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고, 우리가 맺는 관계들도 과거의 그것과는 점점 다른 양상으로 바뀌어간다. 그러나 절대 바뀌지 않을 한가지는 “나를 도울 절대적 한 사람은 나”라는 것이다. 김혼비 작가가 한 말처럼 누구에게도 늦지 않게 이 책이 건네져야 하는 이유도 아마 그 점에서 일 것이다.  

 


세상에는 분명 다양한 가스라이터가 존재한다. 그들은 때때로 선의 얼굴을 쓰고 있고, 내게 필요한 것을 제시할 때도 있겟지만 그렇다고해서 당신이 그들을 참아줘야 하는 건 아니다. (p.252)”는 말을 부디 그냥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이 책이 쓰지만 좋은 약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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