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기 좋은 시간
김재진 지음 / 고흐의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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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이파리가 윤슬에 반짝일 때

가을엔 외로움도 눈부시다. (p.46 '가을 미술관에서' 중)

 

 

언제인가 그의 시에서 “당신이 만약 혼자라서 외롭다면 외로움의 크기만큼 당신은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수록 '혼자라고 느낄 때' 중에서)”라는 문장을 읽고 외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일이 있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철없이, 외로움은 타인이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문장을 읽은 후 사실 외로움은 내 내면의 일이구나, 느꼈던 것 같다. 몇 년이 흘러, 다시 만난 그의 시집 『헤어지기 좋은 시간』은 나에게 그런 고민을 또다시 던진다. 사람과의 '이별'은 참으로 작은 한 부분이며, 사실은 추억이나 시간, 사물, 자연 등과도 잘 이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번 시집, 『헤어지기 좋은 시간』에는 칠십 여천의 시가 담겼다. 3페이지에 달하는 시도 있고 50여 글자의 짧은 시도 있다. 그러나 역시 시는, 분량과 관계없이 읽는 사람에 따라 깊이가 다르게 읽힌다. 나 역시 학창시절 내내 시를 쓰던 사람이지만, 또 한 번 시만큼 '읽는 이'의 입장에서 읽히는 문장들이 또 있던가 생각하게 된다. 문득, 시는 세상 모든 것의 노래이고 이야기임을 깨닫는다. 『헤어지기 좋은 시간』을 통해 나는 김재진이라는 사람의, 바람의, 시간의, 달력의, 고양이의 시를 들었다. 사실은 나의 언어도. 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즐기는 나의 팁을 나누자면, 그저 노래라고 생각하라는 것. 우리가 가요를 흥얼거리며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시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그 문장들이 알아서 나만의 이야기로 읽혀줄 것이다. 

 

김재진의 시집 『헤어지기 좋은 시간』 역시 그저 편안하게 넘기다 보면, 내가 추억과 헤어지는지, 과거와 헤어지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시가 좋은 이유는 참 많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영상 같은 문장'을 꼽고 싶다. 이번 『헤어지기 좋은 시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 “바람은 몸이 없어 꽃 지는 소리나 창문을 두드리는 손가락 예쁜 저녁의 발자국에 얹혀서 온다('바람의 시 1' 중)” 역시 꽃잎이 지고, 땅거미가 넘어가는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넘치는 수식이 없어 오히려 내 머릿속 어느 장면을 쉬이 꺼내게 만든다. 

 

그가 기록한 '최선을 다해 죽는다'라는 말이 오히려 최선을 다해 산다는 말보다 절실히 느껴진다.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깨달았기에 나도 마지막을 향해 성실히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장들은 이렇게 무슨 말인지 다 알 것 같다. 아니, 그가 어떤 의도로 말했든 나의 마음, 생각 어딘가 딱 필요한 곳으로 잘 배달된다. 무릇 시는 이렇게 쉬이 읽혀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그에게 감히 질투를 느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헤어지기 좋은 시간』을 덮은 후 문득 내다보니, 아, 진짜 가을이구나! 

그래, 가을은 꽤 많은 것들과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다. 그러나 어떤 시에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름의 마지막 날은 가을의 첫날이라고 했다. 과거를 떨치는 마지막 날은 다시 새로운 날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지. 어쩌면 김재진 시인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아팠어도 다시 새로운 날이라는 것 아니었을까. 그래서 『헤어지기 좋은 시간』을 다시 고쳐 써본다. 시작하기 좋은 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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