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색 갈증 ㅣ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평점 :

정상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내가 지금까지 미루어놓았거나 실패했던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과의 내기 같은 거였다. 터무니없어도 한 번쯤 믿어보는 거.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듯 가슴이 벅찼다. (p.55)
녹색과 갈증. 어떻게 이 두 단어를 합쳐놓았을까.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 했던 생각 그거였다. 해설에서 소유정 문학평론가가 풀이해두었듯 에드워드 윌슨은 녹색 갈증을 '다른 형태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욕구'라고 한다는데, 내가 읽은 최미래의 녹색갈등은 에드워드 윌슨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자연으로의 회귀본능을 담고 있으나, 그녀의 갈증은 한결 목이 마르다. 바싹 말라버린 낙엽 같다.
사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이나 내가 이 책을 읽은 소감을 기록할 수 있을지 망설였다. 이 책의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호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이 책의 '막힘 속의 해소감'을 내가 스포일러 없이 잘 이야기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점을 정리하자면, “미칠 것 같은 나날들 사이에 마신 놀랍도록 차가운 맥주의 맛” 같았다. 건조하고 결핍된 이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살아가는 이유, 숨을 쉴 수 있는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 각박한 삶 속에서도 살아가게 하는 이유는 존재하는 것. 이 책에서 나는 결핍과 생, 둘 다를 느꼈다.
어렴풋한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했고 분명히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던 것 같지만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있지도 않은 윤조의 할머니가 종종 저 멀리서 나를 불러내던 것과 같이. (p.144)
다르게 보면 다르지만, 또 비슷하게 보면 비슷한 것도 같았다. 자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힘도 사람에 포함된다면. (p.97)
고요하고 어떤 의미로는 평온했다. 일정한 균열감이 스트레스가 시야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안개처럼 낮게 깔린 나날이었다. (p.87)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삶의 힘든 순간은 안개와 같다고. 거기를 지나올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미칠 것 같지만, 막상 그곳을 지나와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구름이나 수증기, 그런 것일 뿐이라고.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내가 안개에 발을 디딜 때의 기분, 그 안개 속을 걷던 답답한 심정,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돌아보며 느낀 시원하고도 허전한 이상한 기분.
사실 이 책을 읽은 후, 이 책이 어쩌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작가가 겪은 갈증과 간절히 바라던 해소. 그리고 그것들이 묘하게 얽혀 마치 우리 사는 세상처럼 갈증과 해소 그 어딘가에 머무른 현실.
읽기에 결코 쉬운 책은 아니었으나, 소설이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고 생각을 하게 한다니 묘한 일이다. 나의 솜씨가 짧아, 이 책을 더 매력적으로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그러나 자그마한 책에는 훨씬 큰 세상이 담겨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