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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안시내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5월
평점 :

엄마는 하루의 나열 대신 감정을 끄집어내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계속해서 나를 끄집어냈다. 교묘하게 엉킨 생각의 끈들은 활자를 통해 쉬이 배출되고, 나는 자연스럽게 내 삶을 밝히는 사람이 되었다. (p.5)
이런 글을 읽을 때면 나는 괜한 핑계를 대고 싶어진다. 나는 너무 굴곡 없는 삶을 살아서, 아무래도 이런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싶어진다. 아마 굴곡졌어도 이렇게 쓰지 못했을 거면서, 이렇게 너무 잘 쓴 글들을 만날 때면 괜히 그러고 싶어지는 거다. 이 책은 진즉에 훌쩍 다 읽어놓고 여전히 리뷰를 마무리하지 못했던 것은, 너무 잘 쓴 글에 대한 먹먹한 마음이 남아있어서였다. 온 마음에 그녀의 감정이, 문장이 그대로 칭칭 감겨 내 마음을 꺼내지도 못하겠더라. 나는 이렇게도 쉬이 물드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온갖 물이 들었다. 때로는 푸른 바다 빛이었다가, 어느 날은 잿빛 같았다. 맑은 하늘이 되는 문장도 있었고 엉엉 울고 싶어지는 문장도 있었다. 아직 어린, 아니 젊은 그녀의 마음 어디에 이토록 짙은 우울함이 들어있을까. 또 어디에 이렇게 깊은 마음이 들어있을까. 그녀는 때론 버찌였다가, 때론 어른이 되고, 또 때론 자연의 어느 순간이 되어 자신의 마음을 순서 없이 꺼내놓는다. 그런데 그 마구 꺼내놓은 마음이 오히려 너무 가지런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먹먹한 마음을 준다. 처음에는 그저 잘 쓴 문장이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이건 그냥 잘 쓰기만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 사이사이 그녀의 무뚝뚝한 진심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아서 중간쯤 읽었을 땐 질투도 나지 않았다. 나의 시답잖은 문장은 그녀의 문장을 질투할 수도 없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이들에는 그녀 자신이 없는 것 같아서. 또 반대로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자신인 것 같아서 글을 읽으며 괜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다고 믿는 순간들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일까, 그때의 나를 사랑한 것일까. 지나온 내 시간을 가만히 돌아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그녀처럼 언젠가는 다시 가겠다고.
단순한 여행기라고 생각하고 펼쳐 든 책에서 허를 찔린 기분으로 책을 읽고, 가만히 표지를 쓸어보았다. 이 책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여행에세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깊고, 감성에세이라고 부르기에는 또 유쾌하다. 그래서 인생 같은 문장들.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우는 우리 사는 시간이 이 책에는 꼭꼭 눌러 담겨있다. 그래서 나처럼 가벼이 여기고 책을 펼쳤다가는 그저 우는 것 말고는 방어할 방법이 없다. 웃기게도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이야기 때문에 울었다. 그녀의 문장들 사이에서 내 시간, 내 기억들을 떠올리며 울었다.
당신들에게서 졸업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문장을 읽을 때쯤이야 나는 꽤 후련해졌다. 하긴 그 정도 울었으면 후련해질 만도 하다. 내 안에 가득 남아있던 감정들이 이제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끼며, 새로운 감정들을, 더 좋고 보송보송한 것들을 조심조심 담아야지 생각해본다. 나도 그녀처럼 더욱 섬세한 눈으로, 내 주변을 곱게 눌러 담아야지.
쓸쓸한 계절이 아닌 봄에 읽어서 천만다행인 책이었다. 가을의 끝자락이었다면, 나는 울다가 드러누웠을지도 모를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