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황제
셀마 라겔뢰프 지음, 안종현 옮김 / 다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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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황제’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도 한순간 이 책이 포르투갈 역사나 대항해시대를 다룬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을 펼쳐 보니 차갑고 가난한 북유럽의 시골 마을, 스웨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 낯선 조합이 오히려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목의 비밀을 떠올리자면, 먼저 이 이야기를 쓴 셀마 라게를뢰프라는 작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닐스의 신기한 모험』으로 잘 알려진 스웨덴의 국민 작가이자,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가난한 농촌과 종교, 민담과 환상, 그리고 사회의 약자들을 끌어안는 이야기를 평생 써 왔고,

이 작품 역시 그런 세계관의 연장선에 있다.

라게를뢰프가 살던 시기의 스웨덴은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북유럽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19세기 중반의 스웨덴 농촌은 빈곤과 계급, 이민으로 몸살을 앓던 사회였고,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는 곧 지금의 삶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상상 속 출구였다.

포르투갈은 스웨덴에서 가장 먼 유럽의 끝에 있는 나라였고,

한때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바다를 지배했던 “황제의 나라”였다.

스웨덴 농부들에게 그곳은 가 본 적도 없지만 풍요와 이국적 화려함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얀이라는 가난한 머슴이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버티기 위해 상상 속에서 선택한 나라가 바로 그 포르투갈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목 ‘포르투갈 황제’에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되어 보고 싶은, 가난한 인간의 비밀스러운 욕망과 동경이 담겨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외딴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머슴 얀은 처음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생겼다며 투덜거리는, 그저 평범하고 소심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딸 클라라를 품에 안는 순간,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낀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클라라 이전”과 “클라라 이후”로 나뉜다.

그는 딸의 성장 하나하나를 일기 쓰듯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세례를 받던 날, 예방 접종을 맞던 날, 첫 생일, 첫걸음…

소설 초반부를 읽고 있으면 마치 한 아버지가 써 내려간 딸의 성장일기를 훔쳐보는 듯하다.

가난하지만 그만큼 애틋한 나날들이다.

문제는 세상이 이 부녀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새 농장주 라스가 탐욕스럽게 이들의 오두막을 노리면서 집안에 큰 위기가 닥친다.

얀은 늘 그랬듯 딸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고,

클라라는 그 기대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결국 가족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스톡홀름으로 떠나 돈을 벌어 오겠다고 나선다.

그 장면은 한편으로는 클라라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하는 모습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를 위해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딸의 선택처럼 보인다. 얀은 끝까지 딸을 붙잡고 싶어 하지만, 누구보다도 “내 딸만큼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결국 떠나보낸다. 그리고 바로 그 선택이 얀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첫 순간이 된다.

약속한 날이 와도 클라라는 돌아오지 않고, 편지 한 장 오지 않는다.

시간이 몇 달, 몇 해를 지나 15년에 이르렀을 때, 얀은 현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때 그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포르투갈 황제라는 망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요하네스 황제라고 부르고, 클라라는 머나먼 포르투갈 제국의 여황이 되었다고 믿는다.

마을 사람들 눈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망상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너무도 절절해서 차마 웃을 수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그 환상 속에서 클라라는 실패한 딸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부터 존중받는 존재가 되고, 얀 역시 아무것도 아닌 머슴이 아니라 딸을 지켜보는 당당한 황제가 된다.

저자는 광기를 조롱하지 않고, 사랑이 만든 마지막 피난처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진짜 어른을 위한 동화로 만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얀의 부인이 사람들에게 “그가 미친 게 아니라, 주님이 차라리 눈을 가려 주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차라리 그 정도로 멀어져야 견딜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것,

그 지점이 이 소설의 슬픔과 위로가 만나는 곳 같다.

얀은 눈을 가렸지만, 사랑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

딸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든, 어떤 삶을 살았든, 그는 끝까지 딸의 편에 서려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망상이고 광기지만, 소설 속에서 그것은 끝까지 상대를 믿으려는 사랑의 완고함이었다.

반대로 클라라의 입장에서 보면 얀의 사랑은 부담과 굴레이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을 전부로 여기고,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해 버릴 아버지의 시선 앞에서,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삶과 실수를 솔직하게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듯 도시로 떠났고, 돌아가기를 미뤘고, 끝내 너무 늦게 돌아오고 만다.

이 소설이 단순히 ‘착한 아버지와 못된 딸’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는,

사랑이 때로 상대를 숨막히게 할 수 있다는 점까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무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클라라는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든, 아버지는 그저 딸의 곁에 머물며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이라는 문장은,

이 이야기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해 주는 듯하다.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이 문장을 읽으면 마음이 한동안 먹먹해진다.

부모의 사랑은 늘 거기에 있었지만, 우리는 대개 그 사랑을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하게 본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보여 준다.

읽는 내내, 나 역시 내 삶의 얀과 클라라를 떠올리게 했다.

아직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마음들, 시간이 나면 해야지!하고 미뤄 둔 전화 한 통, 여행 한 번, 식사 한 끼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자는 한 농장의 머슴과 그의 딸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너무 늦게 이해하지 말 것, 고마움과 애정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려준다.

그 점에서 『포르투갈 황제』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을 넘어,

우리가 지금 누구에게 어떻게 사랑을 건네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스웨덴의 가난한 농촌, 이름 없는 머슴의 이야기 속에 포르투갈 황제라는 장엄한 타이틀이 얹혀 있는 이유가 이제는 조금 이해된다. 그 이름은 허세나 과장이 아니라, 사랑이 짊어진 꿈의 크기를 나타내는 상징 같다. 죽음으로서 재회한 노부부가 마침내 그들의 포르투갈에서 영원한 황제가 되었을 거라고 믿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는 끝내 닿지 못했던 존엄과 평온을, 라게를뢰프는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끝까지 지켜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나면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하다.

사랑이 만든 꿈과 그리움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다시 펼쳐질 이야기다.


'다반/디페랑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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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모리오카 마사히로 지음, 이원천 옮김 / 사계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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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카 마사히로의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는 제목만 보면 반출생주의를 옹호하는 책인가? 싶지만, 실제로는 “태어나고, 살아 있고, 언젠가는 죽게 되는 이 삶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를 아주 길게,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생명철학 입문서에 가깝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부터 드라마 같다. 이라크 전쟁을 앞둔 2003년, 쿠웨이트의 어느 공군기지에서 누군가 영어로 “philosophy of life(생명철학)”를 검색해 모리오카의 웹사이트에 접속한다. 내일 전투에 나갈지도 모르는 군인이었을 그 사람을 떠올리며, 저자는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책을 언젠가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책은 그때의 다짐에서 출발한, 앞으로 이어질 ‘생명철학’ 시리즈의 첫 권이다.

모리오카가 말하는 생명철학은 단순히 삶의 의미를 묻는 철학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 존재하는 것과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의 차이, 몸과 생명의 관계, 다른 생명들과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를 희생시키기도 하는 이유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다루려 한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 철학계에는 언어철학, 마음철학, 역사철학은 있어도 “생명철학”이라는 확립된 분야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유럽만이 아니라 고대 인도·중국·지중해·불교·그노시스주의까지 엮어내는 “세계 철학”의 틀 안에서 새로 짜 보려 한다.

책의 큰 흐름은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어떻게 반복 등장해 왔는지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래도 태어났으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빼놓지 않는 구조다. 먼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시작한다. 삶의 의미를 잃은 파우스트는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절규한다. 반대로 악마 메피스토는 “애초에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리오카는 이 둘을 구분한다. 전자는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개인적 절망이고, 후자는 “이 우주 자체가 생겨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전면적인 존재 부정이다. 괴테는 이 극단적인 부정 속에서, 파우스트가 사랑하는 그레트헨에게 “너는 살아야 해!”라고 외치는 장면을 통해 삶의 긍정으로 방향을 틀어 버린다. 모리오카는 이 대사가 탄생 부정의 바닥에서 끌어 올린, 가장 힘 있는 삶의 긍정이라고 읽는다.

이후에는 고대 그리스와 쇼펜하우어로 넘어간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시인 테오그니스의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 그 다음 좋은 것은 빨리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구절들, 그리고 코로스의 합창에 담긴 “생을 얻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노래를 통해,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고대 그리스의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상은 유대교·기독교 세계로도 흘러 들어간다. 구약의 코헬렛(전도서)에서 “나는 살아 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낫다고 하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가 더 복되다고 하였다”, 심지어 “사산된 아이가 장수한 어른보다 더 복되다”는 구절까지 등장하는 것은 그런 흐름 속에 있다.

이 표현은 솔직히 지금 읽어도 숨이 막힌다. 특히 유산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잔인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모리오카도 그 충격을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이것을 “정말 태어나지 않는 게 좋다”는 차가운 선고라기보다, “사람이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고통받는데, 누가 감히 이 현실을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절규로 읽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더 복되게 보일 만큼, 이 세계의 악과 부조리가 크다는 고발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코헬렛은 결국 “그 생애 동안 즐기고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며, 헛됨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찾아가는 태도를 말한다. 모리오카는 코헬렛을 “탄생 부정과 그래도 살아 있는 동안 작은 기쁨을 찾으려는 마음이 함께 담긴 글로 받아들인다.

이후 책은 반출생주의의 계보를 폭넓게 펼친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삶은 결국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삶은 즐겁다가도 금방 괴로워지고, 괴로워지면 또 지루해지는, 그런 상태가 계속 오가는 진자 같은 것으로 보였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를 반복해서 섹스와 번식을 향해 몰아가지만, 섹스 이후에 남는 것은 기쁨보다 비애와 후회라고 묘사한다. 종(種)의 생존을 위해 개체가 한없이 소모되는 구조 속에서, 그는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들 중 최악”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단지 감성적인 투정이 아니라, 꽤 치밀한 세계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대에 이르면 에밀 시오랑과 데이비드 베네타가 등장한다. 시오랑은 “진짜 불행은, 태어나 버린 그 자체”라고 말하며 인생 전체를 저주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세상 모든 것이 꿈처럼 멀게 느껴지는 순간을 겪고는 결국 그냥 살아가기로 한다. 모리오카는 이 사례를 통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와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한탄이고, 후자는 지금 여기에서 실행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둘을 그대로 이어버리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실제 삶에서도 위험한 혼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는다.

베네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주장하는 “벤타식 반출생주의(‘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해악이며, 태어나지 않는 편이 언제나 더 낫다’고 보는 입장)”는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아무리 행복한 삶이라도 조금이라도 고통이 섞여 있다면, 고통이 전혀 없었던 태어나지 않은 상태보다 나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류가 자살로 한 번에 사라지는 대신, 서서히 출산을 줄여 단계적으로 멸종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인간뿐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동물 전체가 없는 우주, 산과 나무와 바람만 있는 고요한 지구를 이상적인 미래로 그려 보기도 한다.

모리오카는 베네타의 시도 자체에 대해서는 “만용에 찬 시도이지만, 삶의 긍정과 부정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베네타의 탄생해악론은 그 깊은 곳에서 본질적으로 잘못된 논리”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탄생해악론은 “사상으로서 어느 정도 성립할 수는 있지만, 베네타가 제시한 논증 자체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일관되고 매끄러워 보이지만, 인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복잡하고 깊은 차원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그래도 삶은 소중해요라고 훈계하며 끝나는 것도 아니다. 모리오카는 쇼펜하우어, 부처, 니체, 베네타, 시오랑, 토마스 베른하르트, 그리스 비극, 성서와 그노시스주의, 공리주의 논쟁등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불러내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는 목소리를 정면으로 듣는다. 동시에 니체의 “영원회귀”와 “운명애”처럼, 삶에 “예스”라고 말하려 했던 시도들, 다자이 오사무의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뒤에 놓인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간절함도 함께 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반출생주의냐, 출산 찬성론이냐” 같은 단순한 입장 싸움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마음에 남는 것은, 확실히 누군가에게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어떤 순간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미 태어나 버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삶을 긍정하거나 최소한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리오카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탄생 부정”과 “탄생 긍정”을 끝까지 함께 바라보는 태도를 제안한다. 태어나는 것이 항상 옳다고도, 항상 틀렸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철학, 불교와 성서에 이르기까지 2,500년에 걸친 생각들을 빌려 “그럼에도 나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내용은 깊고, 글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라는 문장을 쉽게 입에 올리지도, 쉽게 부정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책이다.

'사계절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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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탄식은 문학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표현입니다. 일본 문학에서는 다자이 오사무의 "태어나서 죄송합니다"<20세기 기수>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에는 "아, 인간의 삶은 너무 비참해. 다들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21세기 철학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좋았다’라는 사상은 일반적으로 ’반출생주의, Anti-natalism’라고 불립니다. 반출생주의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인간을 출산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반출생주의에는 몇 가지 변형이 있어서, 한마디로 그 사상을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데이비드 베네타의 탄생해악론도 반출생주의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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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라는 세계 (트윙클 에디션)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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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기록을 이렇게 어렵게 느낄까?

좋았던 순간이나 마음이 울적했던 날도, 되돌아보면 ‘그때 그 감정’을 떠올리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는데, 막상 노트를 펼치고 쓰려고 하면 괜히 귀찮고,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왕 기록할 거면 잘 써야 한다”,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꾸준해야 의미가 있다” 같은 생각들이 시작도 전에 지치게 한다. 마음속에 기록하고 싶은 의지는 분명 하지만, 완벽함을 향한 부담감 때문에 한 줄조차 쉽지 않은 날이 반복된다.

리니 작가의 『기록이라는 세계』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다.

“기록이 어렵죠? 귀찮고, 막막하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왜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지, 저는 그걸 직접 경험했어요.”

이 책은 그 경험에서 출발한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인생 노잼 시기’를 지나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졌던 경험을 들려준다. 아무것도 즐겁지 않고, 마음의 용량이 꽉 차 더는 어떤 감정도 저장되지 않는 시기를 지나며 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노트 한 권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행복했고 무엇을 불행하다고 여겼는지, 문제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풀어왔는지를 조금씩 적어 나가자, 그럼에도 내 인생을 잘 살아보고 싶은 의지와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서서히 돌아왔다고 이야기한다.

본문에서 리니 작가는 기록을 길이·넓이·깊이로 나누어 25가지 방식으로 소개한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짧은 메모’다. 기록은 원래 ‘굳이’ 하는 수고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처음부터 매일 빠짐없이 쓰겠다는 각오부터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노트나 자주 쓰는 앱에 단어 하나, 간판 이름 하나라도 ‘뭐라도 그냥’ 써보는 것, 거기서 모든 기록이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친구가 손바닥만 한 노트에 그런 메모를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브런치에 몇 편의 글을 완성하고, 생각지도 못한 작가의 꿈을 꾸게 됐다는 에피소드는 사소한 메모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 책이 반복해서 던지는 메시지는 기록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비싼 노트를 갈아 치우며 첫 페이지를 망쳤다는 이유로 다시 시작하던 완벽주의 경험담은 우리 모두의 다이어리에서 본 장면 같아 웃음이 나면서도 뜨끔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며 시작을 미루고, 실수 없는 결과만 원하고, 비교하느라 정작 나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마음이 기록 앞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완벽주의 때문에 발을 떼지 못할 때 필요한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글씨를 틀리더라도, 페이지를 망치더라도 일단 써보는 것, 기록의 어원이 ‘다시 마음에 새기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음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에 새기고 싶은 순간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또한, 포스터형 달력인 ‘연력’에 하루 한 줄씩 적어 나가는 기록법도 소개한다.

저자는 벽에 붙여둔 연력의 작은 칸마다 그날 기억에 남는 일을 한 줄씩 적는다. 새해 첫날 분위기 좋은 카페를 발견한 일, 엄마 손을 잡고 기도하던 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와 나눈 대화 같은 사소한 조각들로 칸을 채운다. 하루만 보면 별것 아닌 날들이지만, 365개의 칸이 모두 채워진 연력을 한눈에 보면 힘들었던 날도, 무의미해 보였던 날도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루 1분, 1년에 365분을 투자해 얻는 이 통찰이야말로 기록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날것의 일기’와 ‘셀프 탐구 일지’, ‘미래 일기’는 기록이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적다 보면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어떤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어떤 순간에 에너지가 차오르는지 나만의 감정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늘 작심삼일로 끝내는 사람’처럼 단정하기보다 실제 상황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쓰다 보면 생각보다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래전부터 꿈꾸던 국토대장정 완주를 미래 일기 속에 먼저 써두고, 시간이 흐른 뒤 실제로 그 꿈을 이뤘다는 경험담은 기록이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고정해주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가 실제로 사용하는 펜과 노트, 다이어리가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매일 들고 다니기 좋은 노트, 잉크 번짐이 적어 필사하기에 좋은 펜, 월간과 주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이어리까지, 기록 습관을 돕는 도구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평소 내가 자주 사용하는 펜도 있어서 페이지를 넘기며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기록하는 사람이 어떤 도구를 어떻게 쓰는지 엿보는 재미까지 더해져 기록 덕후라면 특히 좋아할 만한 구성이다.

『기록이라는 세계』는 기록을 잘하는 요령을 가르치기보다, 기록을 통해 다시 나를 살아보게 하는 책이다. 완벽한 노트와 예쁜 글씨를 준비한 뒤에야 시작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오늘의 마음을 조금 덜 잃어버리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한 줄이라도 적어보자고 등을 떠미는 책이다. 기록이 막막한 사람에게는 가장 친절한 첫 안내서가 되어주고, 이미 오래 기록해온 사람에게는 왜 쓰기 시작했는지 그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나도 모르게 노트 한 권을 꺼내 제목을 붙이고, 오늘 하루의 퍼즐 조각을 한 칸 적어 넣고 싶어진다.


오퀘스트라 2기 활동으로

'더퀘스트 출판사'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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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일기를 쓴다는 건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예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면 굳이 오늘을 기록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 매일 쓰지 못할 때도 있고 한 줄 겨우 쓰는 날도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일기장을 펼쳐요. 이 작은 기록들이 저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걸, 일기장 속에 쌓여가는 하루하루가 모여 새로운 희망이 되어 준다는 걸 아니까요.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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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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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아티초크가 펴낸 해즐릿 3부작 중 마지막 권이다.

앞선 두 권이 인간의 욕망, 혐오, 일상의 자잘한 감정과 사고를 파헤쳤다면,

이 책은 해즐릿이라는 인물을 이루는 가장 깊은 층(정치적 신념, 인간에 대한 불편한 진실, 청춘과 시간에 대한 통찰)을 한 권에 응축해 보여준다.

해즐릿의 글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그의 사유 방식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이미 앞선 두 권을 읽어 그의 문장에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해즐릿이 어떤 신념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해즐릿은 19세기 초 영국 사회가 보수주의로 돌아서던 시대에 급진적 공화주의자로 살았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체를 흔들었고, 영국은 혁명 사상이 퍼질까 두려워 억압적으로 변하던 때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군주제와 귀족제를 부패한 봉건의 잔재라 비판했고,

나폴레옹을 세습 권력의 사슬을 끊은 인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상주의자들이 자주 빠지는 ‘현실을 무시하는 태도’는 경계하면서도, 지켜야 할 원칙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해즐릿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말하는 급진성이라는 것이 빠르게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끝까지 깊이 생각하고 따져 보려는 태도에 가깝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저자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은 바로 ‘진부한 비평가’에 관한 부분이다.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이 한 말이나 유행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마치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말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위대한 작가지만 기복이 있다”고 쉽게 단정하고,

『맥베스』의 성공 역시 “음악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단편적으로 해석한다.

고전 희극에 대해서도 아무 고민 없이 “저속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남의 생각을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는 통찰력 있는 평가를 한다고 믿는 모습이,

해즐릿이 이 글에서 가장 경계하고자 한 지점이다.

그들의 문제는 틀린 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읽다 보면 200년 전의 풍자가 지금 우리의 인터넷, SNS, 댓글 현실까지 그대로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생각 없이 따라가는 사람’의 특징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정보 과잉 시대의 문제와 정확히 겹쳐 보였다. 진짜로 아는 사람보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더 눈에 띄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까지 흔드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강렬했던 부분은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이다.

저자는 겉으로 늘 부드럽고,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언제나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자기 문제와 관계없는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나고 누가 학살당하고 어떤 민족이 고통받아도 자신의 삶에 직접 닿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식사를 망친 작은 그을음 하나에는 하루 종일 예민해지는 존재다.

이런 묘사는 처음엔 과한 일반화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온화한 사람은 이기적, 까칠한 사람은 정의롭다”라는 구도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타인의 고통에는 차갑지만 자기 불편에는 과도하게 민감한 인간의 모습)을 읽다 보면, 이 글이 단순한 흑백 논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기 중심성을 들춰내는 분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겉으로 까칠하고 불편해 보이는 사람 중에는 타인을 위해 끊임없이 신경 쓰고,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대목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앞부분만 보면 너무 단정적인 주장처럼 느껴졌지만, 뒤에 이어지는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정작 나는 내 일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라는 부끄러운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저자는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넘겨온 마음의 구조를 차분히 해부한다. 이런 통찰이야말로 읽는 사람을 한 번 멈춰 서게 만드는 힘이다.

‘인격을 안다는 것은’에서는 사람의 외모나 첫인상이 의외로 정확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말은 꾸밀 수 있지만, 표정과 태도는 쉽게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인간은 너무 복잡해서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떠올려 보면, 누군가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판단을 쉽게 할 수 없다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저자는 이 모순을 “판단의 유보”라는 태도로 정리한다. 어느 하나의 행동만으로 사람을 단정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인격은 수많은 조각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시 깨닫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의 작은 단면만 보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만, 해즐릿은 그 단면 너머를 생각하게 만든다.

표제작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청춘을 다룬다. 해즐릿에게서 청춘은 단순히 젊은 나이가 아니라, 삶의 모든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기를 의미한다. 그때의 열정, 기대, 실망, 좌절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 기억은 오래 남아 우리를 만든다. 이 대목은 한국 청년 세대의 현실과도 대비된다. 요즘 청춘은 세계가 나를 위해 열려 있다는 느낌보다는 세계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압박을 더 크게 느끼고 살아간다. 하지만 저자는 청춘의 순간이 지나도 그때의 흔적은 우리 안에 남아 계속해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책은 해즐릿 3부작의 마지막 권으로서,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생각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치 비평, 인간 심리, 도덕 판단, 청춘의 기억까지 주제가 넓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들이민다는 점이다. 진부한 비평가를 읽으면 ‘나도 생각 없이 말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돌아보게 되고,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에서는 ‘나는 얼마나 작은 불편에 집착하며 살았나’ 돌아보게 만든다. 해즐릿의 문장은 200년 전의 것이지만 놀라울 만큼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티초크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첫인상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첫인상을 그럴듯한 말이나 행동에 속아 잊어버렸다가, 결국 대가를 치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한다. 한 사람의 얼굴은 오랜 세월이 만든 결과물이며, 그의 삶 전체가 표정에 새겨져 있다. 아니, 그것은 자연이 직접 찍어낸 흔적이며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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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문체부 제작지원 선정작
복일경 지음 / 세종마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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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기억』은 첫 소개를 읽는 순간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의 자살, 시어머니의 치매, 친정어머니의 암까지.

이렇게만 나열해도 숨이 턱 막히지만,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감정의 방향이 조금 달라진다.

이게 소설 속 과장된 비극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내 주변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치매와 암, 상실과 희생을 한 가족 안에 모아 둔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저자는 감정을 억지로 부풀려 눈물을 강요하기보다 담담한 톤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주인공이 “아버지가 꿈에 나오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회상하는 대목에서부터, 독자는 이미 좋지 않은 소식을 예감하게 된다.

불길함을 알고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서서히 다가오는 구조 덕분에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는데, 그 불안이 곧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끝까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되어, 결국 쉼 없이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중심에는 교사로 일하며 딸 예린을 키우는 윤주가 있다.

젊은 시절 여행사 일을 하던 남편 재훈은 말레이시아 출장지에서 폭력 사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윤주의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남긴 채 사고사로 위장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뒤, 윤주는 딸 하나를 붙들고 겨우 생계를 이어 가며 버티다가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도움에 기대어 조금씩 삶을 이어 간다.

\하지만 그 시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낯선 언행과 망상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중증 치매 판정을 받으면서 그나마 유지되던 가족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평생 칼국숫집을 하며 살아온 친정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고도

딸과 손녀를 돕겠다며 집으로 들어와 가사와 간병을 도맡는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와 암을 앓는 친정어머니, 이 두 사람이 끝내 저수지에서 서로의 운명이 교차하게 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지만, 막상 그 장면에 도달했을 때의 충격과 먹먹함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게 다가왔다.

또한, 이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건, 이 소설 속 세계가 거의 온전히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남편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겨진 윤주와 두 명의 어머니, 그리고 딸 예린이 서로를 의지한 채 간신히 버티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그 안에서 사랑, 동정, 책임, 죄책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서로를 지탱해 주던 돌봄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의 삶을 서서히 갉아 먹는 족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가족의 풍경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 가장 섬뜩했다.

누군가를 위해 애쓴다는 이름으로, 정작 자기 자신은 잃어 가는 삶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미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치매와 암이라는 소재 때문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적인 가족 드라마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 소설은 그런 단순한 감정 소비를 거부한다. 오히려 평범한 부엌, 좁은 거실, 병실, 학교 교무실 같은 일상 공간을 무대로, 가족과 돌봄이라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너무나 힘든 현실을 정면으로 끌어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비극은 상상 속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동네 어딘가에서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현재 진행형처럼 느껴졌다.

저수지에 가라앉은 두 개의 달과, 그 뒤에 다시 떠오르는 또 하나의 달이라는 이미지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처음 두 개의 달은 마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삶, 끝까지 짊어진 채 저수지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 두 어머니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윤주가 대청호를 지나며 창밖으로 비친 달빛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이미지에 또 다른 결을 더한다. 예린은 전화 너머에서 “엄마, 나 결혼 안 하고 엄마 옆에 있을 거야. 나중에 엄마 아프면 내가 다 돌볼게”라고 말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또 다른 돌봄의 굴레 위에 올려놓으려 한다. 그때 윤주는 “엄마는 네가 짊어질 짐이 아니야”라고 조용히 말하며, 딸의 그 다정한 마음을 서서히 방향을 바꾸어 준다. 예린이 “엄마도 이제 엄마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 그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뒤로 밀어 두었던 윤주 역시 비로소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소설이 말하는 희망이 거창한 기적이나 완벽한 회복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꼈다. 큰 상실을 겪은 뒤에도 그저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 보기로 마음먹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 더 잘 돌보려는 작은 결심. 그 소박한 다짐이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는 ‘다시 살아감’에 가장 가까운 모습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말미에서 이 소설의 시작이 한 편의 신문 기사였다고 밝힌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을 보다가, 고단한 딸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노인이 결국 사돈을 살해했다는 짧은 기사.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순간적인 비극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돌봄의 무게와 사랑, 원망, 죄책감이 뒤얽힌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 이야기가 단지 상상력으로만 만들어진 비극이 아니라 실제 기사 한 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이 특별히 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엄마와 딸, 며느리의 얼굴과 자연스럽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치매와 노인 돌봄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지적한다. 평균 수명은 길어졌고 치매 환자는 늘어났지만, 그 무게는 여전히 대부분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다. 어린 자녀를 돌보는 일에서 병든 부모를 부양하는 일까지, 여성은 평생을 당연한 돌봄의 역할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때로 그 희생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작품이 단지 눈물 나는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돌봄 구조’를 문학의 언어로 해부해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분명 사랑이지만, 그 사랑으로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잠식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미덕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집요하게 보여 준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도 언젠가는 부모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버티기 힘들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돌봄을 의무처럼 주고받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을 핑계로 누군가의 삶을 조금씩 소모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결국 무엇이 남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돌봄 속에서 쌓인 시간과 감정, 후회와 다짐이 남은 이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계속 흔적을 남기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기억』은 쉽게 읽어 보라고 권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읽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책이다.

읽는 동안 적지 않은 상처와 피로를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을 외면하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한번쯤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일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내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가족 돌봄을 경험해 본 사람,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 고령화와 치매 사회를 단순한 통계나 뉴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마주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오래 마음속에 남는 이야기가 되어 줄 것같다.

두 개의 달은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빛은 여전히 윤주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오래도록 잔잔히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배워가고 싶었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잃지 않는 법과, 책임과 존재 사이에서 자신을 놓치지 않는 법을. 자신을 살피는 일은 결코 이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어머니가 남긴 삶의 방식에 대한 응답이자, 예린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조용한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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