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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문체부 제작지원 선정작
복일경 지음 / 세종마루 / 2025년 11월
평점 :

장편소설 『기억』은 첫 소개를 읽는 순간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의 자살, 시어머니의 치매, 친정어머니의 암까지.
이렇게만 나열해도 숨이 턱 막히지만,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감정의 방향이 조금 달라진다.
이게 소설 속 과장된 비극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내 주변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치매와 암, 상실과 희생을 한 가족 안에 모아 둔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저자는 감정을 억지로 부풀려 눈물을 강요하기보다 담담한 톤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주인공이 “아버지가 꿈에 나오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회상하는 대목에서부터, 독자는 이미 좋지 않은 소식을 예감하게 된다.
불길함을 알고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서서히 다가오는 구조 덕분에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는데, 그 불안이 곧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끝까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되어, 결국 쉼 없이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중심에는 교사로 일하며 딸 예린을 키우는 윤주가 있다.
젊은 시절 여행사 일을 하던 남편 재훈은 말레이시아 출장지에서 폭력 사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윤주의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남긴 채 사고사로 위장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뒤, 윤주는 딸 하나를 붙들고 겨우 생계를 이어 가며 버티다가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도움에 기대어 조금씩 삶을 이어 간다.
\하지만 그 시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낯선 언행과 망상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중증 치매 판정을 받으면서 그나마 유지되던 가족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평생 칼국숫집을 하며 살아온 친정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고도
딸과 손녀를 돕겠다며 집으로 들어와 가사와 간병을 도맡는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와 암을 앓는 친정어머니, 이 두 사람이 끝내 저수지에서 서로의 운명이 교차하게 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지만, 막상 그 장면에 도달했을 때의 충격과 먹먹함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게 다가왔다.
또한, 이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건, 이 소설 속 세계가 거의 온전히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남편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겨진 윤주와 두 명의 어머니, 그리고 딸 예린이 서로를 의지한 채 간신히 버티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그 안에서 사랑, 동정, 책임, 죄책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서로를 지탱해 주던 돌봄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의 삶을 서서히 갉아 먹는 족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가족의 풍경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 가장 섬뜩했다.
누군가를 위해 애쓴다는 이름으로, 정작 자기 자신은 잃어 가는 삶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미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치매와 암이라는 소재 때문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적인 가족 드라마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 소설은 그런 단순한 감정 소비를 거부한다. 오히려 평범한 부엌, 좁은 거실, 병실, 학교 교무실 같은 일상 공간을 무대로, 가족과 돌봄이라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너무나 힘든 현실을 정면으로 끌어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비극은 상상 속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동네 어딘가에서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현재 진행형처럼 느껴졌다.
저수지에 가라앉은 두 개의 달과, 그 뒤에 다시 떠오르는 또 하나의 달이라는 이미지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처음 두 개의 달은 마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삶, 끝까지 짊어진 채 저수지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 두 어머니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윤주가 대청호를 지나며 창밖으로 비친 달빛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이미지에 또 다른 결을 더한다. 예린은 전화 너머에서 “엄마, 나 결혼 안 하고 엄마 옆에 있을 거야. 나중에 엄마 아프면 내가 다 돌볼게”라고 말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또 다른 돌봄의 굴레 위에 올려놓으려 한다. 그때 윤주는 “엄마는 네가 짊어질 짐이 아니야”라고 조용히 말하며, 딸의 그 다정한 마음을 서서히 방향을 바꾸어 준다. 예린이 “엄마도 이제 엄마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 그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뒤로 밀어 두었던 윤주 역시 비로소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소설이 말하는 희망이 거창한 기적이나 완벽한 회복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꼈다. 큰 상실을 겪은 뒤에도 그저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 보기로 마음먹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 더 잘 돌보려는 작은 결심. 그 소박한 다짐이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는 ‘다시 살아감’에 가장 가까운 모습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말미에서 이 소설의 시작이 한 편의 신문 기사였다고 밝힌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을 보다가, 고단한 딸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노인이 결국 사돈을 살해했다는 짧은 기사.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순간적인 비극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돌봄의 무게와 사랑, 원망, 죄책감이 뒤얽힌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 이야기가 단지 상상력으로만 만들어진 비극이 아니라 실제 기사 한 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이 특별히 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엄마와 딸, 며느리의 얼굴과 자연스럽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치매와 노인 돌봄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지적한다. 평균 수명은 길어졌고 치매 환자는 늘어났지만, 그 무게는 여전히 대부분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다. 어린 자녀를 돌보는 일에서 병든 부모를 부양하는 일까지, 여성은 평생을 당연한 돌봄의 역할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때로 그 희생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작품이 단지 눈물 나는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돌봄 구조’를 문학의 언어로 해부해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분명 사랑이지만, 그 사랑으로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잠식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미덕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집요하게 보여 준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도 언젠가는 부모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버티기 힘들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돌봄을 의무처럼 주고받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을 핑계로 누군가의 삶을 조금씩 소모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결국 무엇이 남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돌봄 속에서 쌓인 시간과 감정, 후회와 다짐이 남은 이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계속 흔적을 남기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기억』은 쉽게 읽어 보라고 권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읽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책이다.
읽는 동안 적지 않은 상처와 피로를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을 외면하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한번쯤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일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내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가족 돌봄을 경험해 본 사람,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 고령화와 치매 사회를 단순한 통계나 뉴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마주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오래 마음속에 남는 이야기가 되어 줄 것같다.
두 개의 달은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빛은 여전히 윤주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오래도록 잔잔히 머물러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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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배워가고 싶었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잃지 않는 법과, 책임과 존재 사이에서 자신을 놓치지 않는 법을. 자신을 살피는 일은 결코 이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어머니가 남긴 삶의 방식에 대한 응답이자, 예린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조용한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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