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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황제
셀마 라겔뢰프 지음, 안종현 옮김 / 다반 / 2025년 10월
평점 :

‘포르투갈 황제’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도 한순간 이 책이 포르투갈 역사나 대항해시대를 다룬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을 펼쳐 보니 차갑고 가난한 북유럽의 시골 마을, 스웨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 낯선 조합이 오히려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목의 비밀을 떠올리자면, 먼저 이 이야기를 쓴 셀마 라게를뢰프라는 작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닐스의 신기한 모험』으로 잘 알려진 스웨덴의 국민 작가이자,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가난한 농촌과 종교, 민담과 환상, 그리고 사회의 약자들을 끌어안는 이야기를 평생 써 왔고,
이 작품 역시 그런 세계관의 연장선에 있다.
라게를뢰프가 살던 시기의 스웨덴은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북유럽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19세기 중반의 스웨덴 농촌은 빈곤과 계급, 이민으로 몸살을 앓던 사회였고,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는 곧 지금의 삶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상상 속 출구였다.
포르투갈은 스웨덴에서 가장 먼 유럽의 끝에 있는 나라였고,
한때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바다를 지배했던 “황제의 나라”였다.
스웨덴 농부들에게 그곳은 가 본 적도 없지만 풍요와 이국적 화려함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얀이라는 가난한 머슴이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버티기 위해 상상 속에서 선택한 나라가 바로 그 포르투갈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목 ‘포르투갈 황제’에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되어 보고 싶은, 가난한 인간의 비밀스러운 욕망과 동경이 담겨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외딴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머슴 얀은 처음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생겼다며 투덜거리는, 그저 평범하고 소심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딸 클라라를 품에 안는 순간,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낀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클라라 이전”과 “클라라 이후”로 나뉜다.
그는 딸의 성장 하나하나를 일기 쓰듯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세례를 받던 날, 예방 접종을 맞던 날, 첫 생일, 첫걸음…
소설 초반부를 읽고 있으면 마치 한 아버지가 써 내려간 딸의 성장일기를 훔쳐보는 듯하다.
가난하지만 그만큼 애틋한 나날들이다.
문제는 세상이 이 부녀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새 농장주 라스가 탐욕스럽게 이들의 오두막을 노리면서 집안에 큰 위기가 닥친다.
얀은 늘 그랬듯 딸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고,
클라라는 그 기대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결국 가족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스톡홀름으로 떠나 돈을 벌어 오겠다고 나선다.
그 장면은 한편으로는 클라라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하는 모습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를 위해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딸의 선택처럼 보인다. 얀은 끝까지 딸을 붙잡고 싶어 하지만, 누구보다도 “내 딸만큼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결국 떠나보낸다. 그리고 바로 그 선택이 얀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첫 순간이 된다.
약속한 날이 와도 클라라는 돌아오지 않고, 편지 한 장 오지 않는다.
시간이 몇 달, 몇 해를 지나 15년에 이르렀을 때, 얀은 현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때 그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포르투갈 황제라는 망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요하네스 황제라고 부르고, 클라라는 머나먼 포르투갈 제국의 여황이 되었다고 믿는다.
마을 사람들 눈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망상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너무도 절절해서 차마 웃을 수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그 환상 속에서 클라라는 실패한 딸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부터 존중받는 존재가 되고, 얀 역시 아무것도 아닌 머슴이 아니라 딸을 지켜보는 당당한 황제가 된다.
저자는 광기를 조롱하지 않고, 사랑이 만든 마지막 피난처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진짜 어른을 위한 동화로 만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얀의 부인이 사람들에게 “그가 미친 게 아니라, 주님이 차라리 눈을 가려 주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차라리 그 정도로 멀어져야 견딜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것,
그 지점이 이 소설의 슬픔과 위로가 만나는 곳 같다.
얀은 눈을 가렸지만, 사랑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
딸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든, 어떤 삶을 살았든, 그는 끝까지 딸의 편에 서려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망상이고 광기지만, 소설 속에서 그것은 끝까지 상대를 믿으려는 사랑의 완고함이었다.
반대로 클라라의 입장에서 보면 얀의 사랑은 부담과 굴레이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을 전부로 여기고,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해 버릴 아버지의 시선 앞에서,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삶과 실수를 솔직하게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듯 도시로 떠났고, 돌아가기를 미뤘고, 끝내 너무 늦게 돌아오고 만다.
이 소설이 단순히 ‘착한 아버지와 못된 딸’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는,
사랑이 때로 상대를 숨막히게 할 수 있다는 점까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무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클라라는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든, 아버지는 그저 딸의 곁에 머물며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이라는 문장은,
이 이야기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해 주는 듯하다.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이 문장을 읽으면 마음이 한동안 먹먹해진다.
부모의 사랑은 늘 거기에 있었지만, 우리는 대개 그 사랑을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하게 본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보여 준다.
읽는 내내, 나 역시 내 삶의 얀과 클라라를 떠올리게 했다.
아직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마음들, 시간이 나면 해야지!하고 미뤄 둔 전화 한 통, 여행 한 번, 식사 한 끼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자는 한 농장의 머슴과 그의 딸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너무 늦게 이해하지 말 것, 고마움과 애정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려준다.
그 점에서 『포르투갈 황제』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을 넘어,
우리가 지금 누구에게 어떻게 사랑을 건네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스웨덴의 가난한 농촌, 이름 없는 머슴의 이야기 속에 포르투갈 황제라는 장엄한 타이틀이 얹혀 있는 이유가 이제는 조금 이해된다. 그 이름은 허세나 과장이 아니라, 사랑이 짊어진 꿈의 크기를 나타내는 상징 같다. 죽음으로서 재회한 노부부가 마침내 그들의 포르투갈에서 영원한 황제가 되었을 거라고 믿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는 끝내 닿지 못했던 존엄과 평온을, 라게를뢰프는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끝까지 지켜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나면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하다.
사랑이 만든 꿈과 그리움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다시 펼쳐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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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디페랑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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