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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ㅣ 윤혜정의 예술 3부작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평점 :

윤혜정의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현대미술 서적의 구성에서 벗어나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작품을 단순히 해설하거나 연대기적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저자가 직접 방문한 공간과 그곳에서 만난 작가, 컬렉터, 미술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이 전개된다. 각 장은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면서도,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작가나 작품들을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며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방식 덕분에 독자는 각 장에서 새로운 화두를 만나면서도, 예술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선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벨기에 출신의, 세상을 ‘묘사’ 혹은 ‘재현’하지 않고 ‘창조’하는 예술가인 리너스 반 데 벨데,
가상현실과 3D 기술을 활용해 감시와 정체성, 권력 구조를 탐구하는 권하윤,
슬로우 모션 영상 설치로 인간의 감정과 죽음, 탄생의 순간을 명상적으로 그려낸 빌 비올라,
단색화 속에 자연과 존재의 철학을 담아낸 이우환(부산시립미술관 별관에 ‘이우환 공간’이 있다—글쓴이),
공공 장소에 발화되는 문장을 통해 언어의 힘과 정치성을 직시하게 만드는 제니 홀저,
세탁망, 인조 머리카락 등 일상의 재료를 반복 구조로 엮어 낯선 감각을 만드는 양혜규,
꿀벌 군집, 바이오로봇, 실시간 데이터 등을 활용해 생명과 인공지능,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피에르 위그,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의 흐름을 연결하며 예술과 제도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큐레이터 김승덕,
흑인 정체성과 식민주의 시각 체계를 전복하는 점묘적 회화로 저항의 풍경을 펼쳐 보이는 다니엘 보이드,
엮고 짜는 노동과 색채의 물성을 통해 촉각적 감각을 시각화하는 조각가 김윤신,
빛과 안료, 깊이를 삼켜버리는 블랙으로 물성과 무형성의 경계를 탐색하는 아니쉬 카푸어 등—매 장마다 등장하는 작가들은 서로 다른 배경과 장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란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 저자의 경험담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에디터로서 활동했던 저자는 당시의 취재 경험과 현장 에피소드 그리고 예술가들과 나눈 대화를 토대로 책을 구성했다. 특히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에 참여했을 때 느꼈던 불안한 감정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그밖에도 전시장에서 새로운 개념의 움직임을 발견한 순간의 쾌감과 해외 미술관에서 마주한 세상의 단편들, 도서관에서 포착한 일상 예술에 대한 사유, 그리고 현대미술의 추상성을 해설하고 알리는 역할에 대한 소회까지— 이 책에는 저자가 실제로 예술을 접하며 느낀 사적인 감정과 사유가 진솔하게 담겨 있다.
많은 이야기들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은 6장 “인생 전시”였다.
여기서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개인전과 그의 대표작 <비르케나우> 연작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리히터는 자신의 대표작 100점을 모국에 기증하여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 상설 전시되도록 했는데, 이는 예술이 단순히 소유의 대상이 아닌 공공의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특히 <비르케나우> 연작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몰래 촬영된 사진을 바탕으로 한 추상회화로, 그는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덧칠과 긁어내기를 반복하며 고통과 비극을 시각화했다. 관람자는 작품 앞에 놓인 거울 속에서 자신이 ‘역사의 목격자이자 방관자’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감상자의 위치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자 예술이 가진 윤리적 힘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테칭 시에(Tehching Hsieh)의 이야기는 리히터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이면서도, ‘예술과 삶이 하나 되는 순간’이라는 공통된 메시지를 던진다. <점프 피스>에서 시작해 <타임 클록 피스>, <아웃도어 피스>, <로프 피스>, <노 아트 피스>에 이르기까지, 시에는 극한의 육체적·정신적 도전을 통해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나는 시간을 열심히 허비한 겁니다”라고 말하며 예술의 본질을 ‘시간의 체험’으로 정의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온 카와라의 <날짜 회화> 시리즈처럼 ‘시간을 기록하는 예술’과도 맞닿아 있으며, 예술을 하나의 존재 증명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작가들을 나란히 소개하며, 때로는 서로를 비교하고, 때로는 공통점을 찾아가면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양혜규의 반복적이고 구조적인 설치 작품은, 이우환의 절제된 조형 언어와 여백을 강조한 작업과 비교되며 공간과 물질, 반복과 침묵이라는 주제를 서로 다른 감각으로 풀어내는 두 작가의 차이를 통해 예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 밖에도, 빌 비올라의 명상적인 영상 작업은 권하윤의 기술 기반 영상 설치 작업과 매체적 공통점 속에서 연결되며, 제니 홀저의 텍스트 작업은 리너스 반 데 벨데의 픽션이 담긴 드로잉 작업과 나란히 떠올리게 되는데, 이 둘을 통해 언어나 이야기 같은 텍스트가 시각 예술에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처럼 각 장은 서로 다른 작가와 작품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에는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로 이어지며 책 전체가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것’이다.
기억에 남은 한 장의 그림, 잊히지 않는 전시장의 공기, 혹은 어떤 퍼포먼스가 남긴 감정처럼
—그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면 그 예술은 이미 사라지지 않는 것이 된다.
저자는 에디터로서, 전시를 찾는 관람자로서, 그리고 예술과 함께 삶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그때그때 마주한 예술의 장면과 감정들을 이 책에 차곡차곡 담아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예술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기록이다.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품을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보다 ‘그 감정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다. 미술관에서 스쳐 간 그림 한 장도, 작가의 강렬한 퍼포먼스도, 그 순간 당신 안에 무언가를 남겼다면, 그 예술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감정을 어떻게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예술은 결국 그것을 진심으로 마음에 담는 사람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있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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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Art creates empathy, empathy changes everything." 이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두 문장이, 각각의 단어가 나를 둘러싼 껍질을 깨뜨리며 확 헤집고 들어와 한 자 한 자 꼭꼬개 새겨지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예술은 공감을 만들고, 공감은 모든 걸 바꾼다는 말. 이는 예술 언저리에서 일과 삶을 ‘꾸리는’ 내가 희망하거나 열망하던 바로 그것입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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