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툰 2 - 경제 고전툰 2
강일우.김경윤.송원석 지음 / 펜타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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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재미와 정보를 주는 영상들을 떠올리며 책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엔 이타적인 콘텐츠 같지만, 대부분의 유튜버들은 더 많은 구독자와 광고 수익, 인지도를 얻기 위해 영상을 만든다. 자기 이익을 좇아 움직이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웃음과 지식을 나눠 준다는 점에서, 이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는 좋은 비유다. 사람들은 각자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만, 경쟁과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에서는 그 이기심이 전체의 부와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스미스의 핵심 주장이다.

이 책은 이 추상적인 개념을, 스미스의 삶을 따라가며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자란 소년 스미스는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지만, 동시에 항구에서 석탄을 나르고 흥정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할까, 가격은 어떻게 정해질까?”를 궁금해했다. 글래스고 대학에서 계몽주의 철학자 허치슨에게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도덕적 존재”라는 사상을 배우며, 인간이 과연 이기적인가 도덕적인가라는 평생의 질문을 품게 된다. 옥스퍼드에서 경쟁 없는 교육 현장을 보며 경쟁이 사라지면 사람은 게을러진다는 통찰도 얻는다.

교수가 된 뒤 급격히 변하는 글래스고의 무역과 산업 현장을 직접 목격한 스미스는, 인간 노동과 생산, 무역이 만들어 내는 부의 메커니즘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도덕감정론’으로 공감 능력을 가진 인간을 그려낸 그는, 이후 유럽 여행에서 계몽주의자와 중농주의자들을 만나 “부는 농업만이 아니라 모든 생산적인 노동에서 나온다”는 확신을 굳힌다. 새벽 다섯 시 산책과 집필을 반복한 끝에 완성한 『국부론』에서 그는 국가의 부가 금과 은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에서 나오며,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질 때 무역은 상호 이익이 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행동이 시장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조정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국방·사법·도로·항만 같은 공공재는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보며, 시장을 만능으로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책의 다음 장면에서는 ‘지혜의 광장’이라는 가상의 북토크가 펼쳐진다. 진행자 아고라가 애덤 스미스, 케인스, 리카도를 불러 “시장은 정말 만능인가?”를 두고 토론을 연다. 스미스는 자신이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무조건적인 해결사가 아니며, 공정한 경쟁과 충분한 정보, 올바른 제도가 있을 때에야 시장이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정부의 역할 역시 국방과 사법, 공공사업 등에서 분명히 인정했음을 환기한다. 케인스는 대공황과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시장의 자율 조정만 기다리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파국을 맞게 된다고 반박하며, 정부의 적극적 재정 지출과 공공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리카도는 장기적으로는 자유무역과 비교우위에 기반한 경쟁이 전체 부를 극대화한다며, 과도한 보호와 보조금이 오히려 비효율을 낳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세 사람의 대화를 통해 독자는 ‘시장 vs 정부’라는 흑백 구도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과 균형을 생각하게 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스미스의 낙관을 뚫고 나온 다른 목소리들도 차례로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돈이 돈을 낳는” 구조 속에서 노동자가 아무리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파헤치며, 자본주의의 축적 메커니즘과 착취 구조를 비판한다.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 소유의 불평등과 불로소득이 진보 속에서 오히려 빈곤을 심화시키는 핵심 원인이라고 보고, 토지에서 생기는 이익을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명품과 SNS 과시, 유행 쫓기를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으로 분석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비이성적 욕망이 어떻게 계급과 모방을 통해 재생산되는지 보여준다. 조선의 박제가는 절약만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를 비판하며, 합리적 소비와 활발한 교류가 생산을 일으키고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책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출발해, 케인스와 리카도, 마르크스·헨리 조지·베블런·박제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대와 사상을 교차시킨다. 그 과정에서 시장과 국가, 노동과 자본, 소비와 욕망, 토지와 불평등 같은 문제들이 한 권의 ‘경제 고전툰’ 안에서 입체적으로 엮인다. 결국 독자에게 남는 질문은 단순히 시장에 맡길 것인가, 국가가 개입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누구를 위한 경제를 만들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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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재미와 정보를 주는 영상들을 떠올리며 책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엔 이타적인 콘텐츠 같지만, 대부분의 유튜버들은 더 많은 구독자와 광고 수익, 인지도를 얻기 위해 영상을 만든다. 자기 이익을 좇아 움직이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웃음과 지식을 나눠 준다는 점에서, 이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는 좋은 비유다. 사람들은 각자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만, 경쟁과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에서는 그 이기심이 전체의 부와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스미스의 핵심 주장이다.

이 책은 이 추상적인 개념을, 스미스의 삶을 따라가며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자란 소년 스미스는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지만, 동시에 항구에서 석탄을 나르고 흥정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할까, 가격은 어떻게 정해질까?”를 궁금해했다. 글래스고 대학에서 계몽주의 철학자 허치슨에게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도덕적 존재”라는 사상을 배우며, 인간이 과연 이기적인가 도덕적인가라는 평생의 질문을 품게 된다. 옥스퍼드에서 경쟁 없는 교육 현장을 보며 경쟁이 사라지면 사람은 게을러진다는 통찰도 얻는다.

교수가 된 뒤 급격히 변하는 글래스고의 무역과 산업 현장을 직접 목격한 스미스는, 인간 노동과 생산, 무역이 만들어 내는 부의 메커니즘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도덕감정론’으로 공감 능력을 가진 인간을 그려낸 그는, 이후 유럽 여행에서 계몽주의자와 중농주의자들을 만나 “부는 농업만이 아니라 모든 생산적인 노동에서 나온다”는 확신을 굳힌다. 새벽 다섯 시 산책과 집필을 반복한 끝에 완성한 『국부론』에서 그는 국가의 부가 금과 은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에서 나오며,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질 때 무역은 상호 이익이 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행동이 시장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조정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국방·사법·도로·항만 같은 공공재는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보며, 시장을 만능으로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책의 다음 장면에서는 ‘지혜의 광장’이라는 가상의 북토크가 펼쳐진다. 진행자 아고라가 애덤 스미스, 케인스, 리카도를 불러 “시장은 정말 만능인가?”를 두고 토론을 연다. 스미스는 자신이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무조건적인 해결사가 아니며, 공정한 경쟁과 충분한 정보, 올바른 제도가 있을 때에야 시장이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정부의 역할 역시 국방과 사법, 공공사업 등에서 분명히 인정했음을 환기한다. 케인스는 대공황과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시장의 자율 조정만 기다리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파국을 맞게 된다고 반박하며, 정부의 적극적 재정 지출과 공공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리카도는 장기적으로는 자유무역과 비교우위에 기반한 경쟁이 전체 부를 극대화한다며, 과도한 보호와 보조금이 오히려 비효율을 낳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세 사람의 대화를 통해 독자는 ‘시장 vs 정부’라는 흑백 구도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과 균형을 생각하게 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스미스의 낙관을 뚫고 나온 다른 목소리들도 차례로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돈이 돈을 낳는” 구조 속에서 노동자가 아무리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파헤치며, 자본주의의 축적 메커니즘과 착취 구조를 비판한다.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 소유의 불평등과 불로소득이 진보 속에서 오히려 빈곤을 심화시키는 핵심 원인이라고 보고, 토지에서 생기는 이익을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명품과 SNS 과시, 유행 쫓기를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으로 분석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비이성적 욕망이 어떻게 계급과 모방을 통해 재생산되는지 보여준다. 조선의 박제가는 절약만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를 비판하며, 합리적 소비와 활발한 교류가 생산을 일으키고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책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출발해, 케인스와 리카도, 마르크스·헨리 조지·베블런·박제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대와 사상을 교차시킨다. 그 과정에서 시장과 국가, 노동과 자본, 소비와 욕망, 토지와 불평등 같은 문제들이 한 권의 ‘경제 고전툰’ 안에서 입체적으로 엮인다. 결국 독자에게 남는 질문은 단순히 시장에 맡길 것인가, 국가가 개입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누구를 위한 경제를 만들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바로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핵심 주장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좇지만, 경쟁과 교환이 이뤄지는 시장에서는 그 행동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런 자율적 조정의 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체계적으로 펼친 ’국부론’은 한 괴짜 교수의 날카로운 관찰력 18세기 스코틀랜드의 급격한 경제 변화, 그리고 유럽 전역을 훱쓴 계몽주의 사상이 뒤섞여 빚어낸 산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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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툰 1 - 정치 고전툰 1
강일우 외 지음 / 펜타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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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툰 1: 정치』는 제목만 보면 청소년용 교양 만화처럼 가볍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정치철학 입문서 + 토론 교재 + 시대 읽기 안내서가 한 권에 들어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큰 장점은 한 고전을 네 가지 층으로 나눠 보여주는 구성이다.

먼저 ① 히스토리에서는 고전이 쓰인 시대와 저자의 삶을 함께 보여준다. 플라톤을 예로 들면, 페리클레스 시대가 저물고 전쟁과 혼란 속에서 민주정이 타락해 가는 아테네의 분위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플라톤에게 어떤 충격이었는지를 차근차근 짚어 준다. 그래서 『국가』가 “철학자의 어려운 책”이 아니라, 무너지는 조국 앞에서 ‘정의로운 나라는 가능한가?’를 묻는 한 인간의 절규로 다가온다.

② 다이제스트는 그 고전의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주는 파트다. 정의란 무엇인지, 이상적인 국가는 어떻게 구성되는지, 왜 플라톤이 철학자 왕을 주장했는지, 동굴의 비유가 어떤 뜻인지 등을 한 번에 정리해 주어, 원전의 숲을 보기 쉽게 “지도”처럼 펼쳐 준다.

③ 고전툰은 이 내용을 만화 형식으로 다시 풀어낸다. 이미 한 번 읽은 내용을 또 보는데, 장면과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개념이 이미지와 함께 기억에 남는다. 철학 이야기가 머리로만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처럼 느껴져, 고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훨씬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백미는 ④ ‘북토크 – 지혜의 광장’이다. 여기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뿐 아니라 밀, 홉스, 롤스 같은 사상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시대를 초월한 토론을 벌인다. 중요한 건, 이 대화들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각 사상가의 실제 저작과 맥락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이 북토크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고전의 논쟁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던져 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엘리트인가, 민중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플라톤은 전문가의 정치, 밀은 개인의 자유, 홉스는 질서를 강조하며 맞선다.

- 능력주의와 교육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한국 사회의 입시 현실을 예로 들며, “각자의 재능에 맞는 교육”과 “누가 재능을 판단할 것인가”라는 서로 다른 관점을 비교하게 한다.

-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방역 정책, AI·빅데이터·가짜뉴스 문제를 놓고는 자유와 안전, 기술과 민주주의의 균형을 세 사상가의 언어로 설명해 주어 훨씬 이해가 쉬웠다.

이 책이 좋은 점은, 플라톤 『국가』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한비자 『한비자』, 마키아벨리 『군주론』, 루소 『사회계약론』까지 함께 다룬다는 것이다. 각 장의 도입부에서 헬조선, 법이 부자에게는 솜방망이·약자에게는 쇠망치가 되는 현실, 분열된 나라와 외세 의존, 자유로운 줄 알았더니 점점 노예처럼 느껴지는 삶 등 아주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고전 속 고민이 자연스럽게 오늘의 문제와 연결된다.

결국 『고전툰 1: 정치』는 다섯 명의 사상가의 삶과 고민만 보여주는 책이 아니라, 이 고전들을 연결고리 삼아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주제를 두고 고민했던 여러 사상가들을 한 번에 만나게 하는 책이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정치 지식을 외웠다가 아니라,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을 조금씩 세워 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고전을 처음 만나는 청소년에게도, 정치철학 기본기를 다시 다지고 싶은 성인에게도, 고전의 지혜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펜타클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채성모의손에잡히는독서 #채손독 인스타 @chae_seongmo




정의로운 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영혼을 올바르게 다스릴 때, 비로소 정의로운 국가가 가능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철학자가 되어,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진정한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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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색
추설 지음 / 모모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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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색』은 표지부터 내용까지, 말 그대로 “감정의 색”으로 가득한 로맨스 소설이다.

한국 남자 현서와 일본 여자 유카리가 일본의 어느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단 이틀 동안 서로의 세계를 바꾸어 버리는 이야기. 줄거리만 들으면 흔한 여행 로맨스처럼 들리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소설의 핵심이 사랑의 결말이 아니라, 한 사람이 색을 잃고 다시 색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추설 작가는 1997년 9월생으로, 무용을 거쳐 패션과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감각적인 작업을 이어온 사람이다.

현재는 콘텐츠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SNS 디자인, 그래픽 작업, 앨범 커버 제작 등 시각적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없던 색』에서 ‘색·공간·움직임’은 그저 장면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마음을 설명해 주는 또 다른 언어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현서는 힘든 일이 닥치면 그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마치 완성된 그림 위에 검은 물감을 통째로 부어 버리듯 자신의 감정을 한꺼번에 가려 버리는 사람이다. 상처받은 마음도, 실패한 순간도, 관계의 틈도 차분히 들여다보기보다 애써 없는 일처럼 덮어두며 버텨 온 인물이다.

반대로 유카리는 하얀 종이 위에 글을 한 줄씩 남기며, 어떻게든 지금의 자신을 기록해 두려고 애쓴다. 잊히지 않기 위해, 무너진 마음의 모양을 최소한 문장으로라도 붙들어 보려는 사람인 것이다.

이 서로 다른 태도는 두 사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비가 된다. 같은 상처를 안고도 정반대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두 사람이 만나 만들어 내는 감정의 대비는, 한 화면 위에서 전혀 다른 두 색이 섞이며 이전에 없던 새로운 톤을 만들어 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소설의 시작에서 현서는 버거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일본행 비행기부터 끊어 버린다.

연인과의 이별 때문도, 대단한 목표가 있어서도 아니다.

한국에서의 삶이 더는 손쓸 수 없을 만큼 뒤엉켜 버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힘든데도, 계속 여기 있어야 하나?”라는 질문만 남은 채,

그는 그 엉망진창이라는 감정 하나를 들고 도망치듯 떠난다.

뭐라도 바꾸지 않으면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아서, 충분히 준비하지도 못한 채 비행기에 오른다.

유카리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차분한 일본 여성처럼 보이지만, 속은 오래된 상처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두 사람이 낯선 술집에서 우연히 부딪히듯 만나, 번역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툰 대화를 시작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건, 보통 로맨스에서 기대하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고백 대신,

번역기를 타고 오가는 어색한 문장과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만 조용히 오간다는 점이다.

화려한 말을 주고받기보다는, “지금 나는 어디가 아픈지”, “어디까지 버텨 왔는지” 같은 진짜 속마음이 서툰 문장으로 흘러나온다.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군더더기 말은 줄고, 남겨진 표정과 몸짓, 침묵의 온도가 두 사람의 색을 대신한다.

읽다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정”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변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품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금 사회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아무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세상…

내용도 없이 결말만 있는 책은 없잖아요.

책은 결국 과정으로 이루어진 거니까요."

이 대목에서 저자가 겨냥하는 건 단순히 연애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 자체다.

결과만 남기고 과정을 지워 버리려는 태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저자는 현서와 유카리의 관계를 통해 천천히 보여 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번에 ‘연인’이 되지 않는다. 불신과 도망, 두려움과 망설임이 계속해서 끼어든다.

하지만 바로 그 흔들리고 엇갈리는 순간들, 실패처럼 느껴지는 선택들까지도 모두 모여 두 사람만의 색을 만들어 간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말하는 사랑은, 완성된 결말이라기보다 불완전한 과정이 겹겹이 쌓여 남긴 흔적에 가깝다.

도피와 불신을 다루는 방식도 솔직하다. 현서는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도망치는 사람이다. 또 상처받을까 봐서라기보다, 이미 충분히 망가졌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는 버틸 자신이 없어서 뒷걸음치는 인물로 보인다.

그에게 일본은 누군가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장소라기보다, 잠깐이라도 숨을 수 있는 어둑한 공간에 가깝다.

반면 유카리는 두렵지만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사람이다.

이미 아픈 기억을 겪었음에도, 그 기억을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한 사람은 더 짙은 어둠 쪽으로 몸을 숨기고, 다른 한 사람은 여전히 흰 바탕을 남겨 두려 한다.

이 대비를 가장 압축해서 보여 주는 문장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검은색을 그렸고, 그녀는 흰 바탕 위에 글을 새겼다.

나는 덮어버렸고, 그녀는 기록했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이 로맨스가 ‘국경을 넘는 사랑’이라는 설정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 단 이틀의 만남, 번역기라는 장치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저자는 그쪽으로 과하게 치우치지 않는다. 대신 언어와 문화의 간극을, 잘못 번역된 문장 하나를 붙들고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나, 서로의 말투와 표현 습관을 천천히 배워 가는 과정 속에 담아낸다.

낯선 언어 덕분에 오히려 더 솔직해지는 순간들, 어딘가 잘못 이해했지만 그 오해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이 이 소설의 큰 매력이다. 읽다 보면 일본 소설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와 한국 소설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이 동시에 느껴져, 두 나라의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 같다는 인상도 남는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이 소설이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문장을 너무 쉬운 운명론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과정에는 분명 우연이 있지만, 그 우연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기적이라기보다, 서로를 잊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꾸역꾸역 버텨 왔기 때문에 가능해진 재회처럼 느껴진다.

단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은 두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다시 마주했을 때, 그들은 같은 사람인 동시에 이미 다른 색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다.

사랑이 둘의 인생을 통째로 구원했다기보다, 각자가 자기 안의 어둠을 인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조금씩 얹어 갈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쪽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무용과 디자인을 해 오던 사람이 처음으로 온전히 하나의 세계를 소설로 구현해 보고 싶었을 때,

그 결과물이 이런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인물의 심리 변화가 춤의 동선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페이지 위에 깔리는 색감이 조금씩 달라진다.

목차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무채색’에서 시작해, 점점 더 짙고 따뜻한 색들이 등장한다.

책을 읽고 나면, “이건 그냥 일본 배경 로맨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팔레트를 다시 섞어 보는 이야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남는다.

읽는 내내 마음에 오래 남았던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사랑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피난처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와 두려움을 솔직히 바라볼 때 맺어지는 불완전한 약속이라는 것!

이 소설의 사랑은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그림 같은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쉽게 다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했다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래서 더 따뜻하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세상에 없던 색』은 단순히 일본을 배경으로 한 설레는 로맨스를 기대하고 읽어도 좋고,

결과 중심적인 세상에서 조금 비켜난 과정의 이야기를 찾는 마음으로 읽어도 좋은 소설이다.

무채색처럼 느껴지던 하루에 다른 색을 살짝 섞어 보고 싶은 날,

조용한 밤에 천천히 읽기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모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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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황제
셀마 라겔뢰프 지음, 안종현 옮김 / 다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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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황제’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도 한순간 이 책이 포르투갈 역사나 대항해시대를 다룬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을 펼쳐 보니 차갑고 가난한 북유럽의 시골 마을, 스웨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 낯선 조합이 오히려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목의 비밀을 떠올리자면, 먼저 이 이야기를 쓴 셀마 라게를뢰프라는 작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닐스의 신기한 모험』으로 잘 알려진 스웨덴의 국민 작가이자,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가난한 농촌과 종교, 민담과 환상, 그리고 사회의 약자들을 끌어안는 이야기를 평생 써 왔고,

이 작품 역시 그런 세계관의 연장선에 있다.

라게를뢰프가 살던 시기의 스웨덴은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북유럽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19세기 중반의 스웨덴 농촌은 빈곤과 계급, 이민으로 몸살을 앓던 사회였고,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는 곧 지금의 삶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상상 속 출구였다.

포르투갈은 스웨덴에서 가장 먼 유럽의 끝에 있는 나라였고,

한때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바다를 지배했던 “황제의 나라”였다.

스웨덴 농부들에게 그곳은 가 본 적도 없지만 풍요와 이국적 화려함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얀이라는 가난한 머슴이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버티기 위해 상상 속에서 선택한 나라가 바로 그 포르투갈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목 ‘포르투갈 황제’에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되어 보고 싶은, 가난한 인간의 비밀스러운 욕망과 동경이 담겨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외딴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머슴 얀은 처음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생겼다며 투덜거리는, 그저 평범하고 소심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딸 클라라를 품에 안는 순간,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낀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클라라 이전”과 “클라라 이후”로 나뉜다.

그는 딸의 성장 하나하나를 일기 쓰듯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세례를 받던 날, 예방 접종을 맞던 날, 첫 생일, 첫걸음…

소설 초반부를 읽고 있으면 마치 한 아버지가 써 내려간 딸의 성장일기를 훔쳐보는 듯하다.

가난하지만 그만큼 애틋한 나날들이다.

문제는 세상이 이 부녀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새 농장주 라스가 탐욕스럽게 이들의 오두막을 노리면서 집안에 큰 위기가 닥친다.

얀은 늘 그랬듯 딸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고,

클라라는 그 기대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결국 가족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스톡홀름으로 떠나 돈을 벌어 오겠다고 나선다.

그 장면은 한편으로는 클라라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하는 모습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를 위해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딸의 선택처럼 보인다. 얀은 끝까지 딸을 붙잡고 싶어 하지만, 누구보다도 “내 딸만큼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결국 떠나보낸다. 그리고 바로 그 선택이 얀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첫 순간이 된다.

약속한 날이 와도 클라라는 돌아오지 않고, 편지 한 장 오지 않는다.

시간이 몇 달, 몇 해를 지나 15년에 이르렀을 때, 얀은 현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때 그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포르투갈 황제라는 망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요하네스 황제라고 부르고, 클라라는 머나먼 포르투갈 제국의 여황이 되었다고 믿는다.

마을 사람들 눈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망상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너무도 절절해서 차마 웃을 수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그 환상 속에서 클라라는 실패한 딸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부터 존중받는 존재가 되고, 얀 역시 아무것도 아닌 머슴이 아니라 딸을 지켜보는 당당한 황제가 된다.

저자는 광기를 조롱하지 않고, 사랑이 만든 마지막 피난처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진짜 어른을 위한 동화로 만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얀의 부인이 사람들에게 “그가 미친 게 아니라, 주님이 차라리 눈을 가려 주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차라리 그 정도로 멀어져야 견딜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것,

그 지점이 이 소설의 슬픔과 위로가 만나는 곳 같다.

얀은 눈을 가렸지만, 사랑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

딸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든, 어떤 삶을 살았든, 그는 끝까지 딸의 편에 서려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망상이고 광기지만, 소설 속에서 그것은 끝까지 상대를 믿으려는 사랑의 완고함이었다.

반대로 클라라의 입장에서 보면 얀의 사랑은 부담과 굴레이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을 전부로 여기고,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해 버릴 아버지의 시선 앞에서,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삶과 실수를 솔직하게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듯 도시로 떠났고, 돌아가기를 미뤘고, 끝내 너무 늦게 돌아오고 만다.

이 소설이 단순히 ‘착한 아버지와 못된 딸’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는,

사랑이 때로 상대를 숨막히게 할 수 있다는 점까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무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클라라는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든, 아버지는 그저 딸의 곁에 머물며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이라는 문장은,

이 이야기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해 주는 듯하다.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이 문장을 읽으면 마음이 한동안 먹먹해진다.

부모의 사랑은 늘 거기에 있었지만, 우리는 대개 그 사랑을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하게 본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보여 준다.

읽는 내내, 나 역시 내 삶의 얀과 클라라를 떠올리게 했다.

아직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마음들, 시간이 나면 해야지!하고 미뤄 둔 전화 한 통, 여행 한 번, 식사 한 끼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자는 한 농장의 머슴과 그의 딸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너무 늦게 이해하지 말 것, 고마움과 애정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려준다.

그 점에서 『포르투갈 황제』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을 넘어,

우리가 지금 누구에게 어떻게 사랑을 건네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스웨덴의 가난한 농촌, 이름 없는 머슴의 이야기 속에 포르투갈 황제라는 장엄한 타이틀이 얹혀 있는 이유가 이제는 조금 이해된다. 그 이름은 허세나 과장이 아니라, 사랑이 짊어진 꿈의 크기를 나타내는 상징 같다. 죽음으로서 재회한 노부부가 마침내 그들의 포르투갈에서 영원한 황제가 되었을 거라고 믿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는 끝내 닿지 못했던 존엄과 평온을, 라게를뢰프는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끝까지 지켜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나면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하다.

사랑이 만든 꿈과 그리움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다시 펼쳐질 이야기다.


'다반/디페랑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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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모리오카 마사히로 지음, 이원천 옮김 / 사계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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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카 마사히로의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는 제목만 보면 반출생주의를 옹호하는 책인가? 싶지만, 실제로는 “태어나고, 살아 있고, 언젠가는 죽게 되는 이 삶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를 아주 길게,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생명철학 입문서에 가깝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부터 드라마 같다. 이라크 전쟁을 앞둔 2003년, 쿠웨이트의 어느 공군기지에서 누군가 영어로 “philosophy of life(생명철학)”를 검색해 모리오카의 웹사이트에 접속한다. 내일 전투에 나갈지도 모르는 군인이었을 그 사람을 떠올리며, 저자는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책을 언젠가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책은 그때의 다짐에서 출발한, 앞으로 이어질 ‘생명철학’ 시리즈의 첫 권이다.

모리오카가 말하는 생명철학은 단순히 삶의 의미를 묻는 철학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 존재하는 것과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의 차이, 몸과 생명의 관계, 다른 생명들과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를 희생시키기도 하는 이유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다루려 한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 철학계에는 언어철학, 마음철학, 역사철학은 있어도 “생명철학”이라는 확립된 분야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유럽만이 아니라 고대 인도·중국·지중해·불교·그노시스주의까지 엮어내는 “세계 철학”의 틀 안에서 새로 짜 보려 한다.

책의 큰 흐름은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어떻게 반복 등장해 왔는지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래도 태어났으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빼놓지 않는 구조다. 먼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시작한다. 삶의 의미를 잃은 파우스트는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절규한다. 반대로 악마 메피스토는 “애초에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리오카는 이 둘을 구분한다. 전자는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개인적 절망이고, 후자는 “이 우주 자체가 생겨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전면적인 존재 부정이다. 괴테는 이 극단적인 부정 속에서, 파우스트가 사랑하는 그레트헨에게 “너는 살아야 해!”라고 외치는 장면을 통해 삶의 긍정으로 방향을 틀어 버린다. 모리오카는 이 대사가 탄생 부정의 바닥에서 끌어 올린, 가장 힘 있는 삶의 긍정이라고 읽는다.

이후에는 고대 그리스와 쇼펜하우어로 넘어간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시인 테오그니스의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 그 다음 좋은 것은 빨리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구절들, 그리고 코로스의 합창에 담긴 “생을 얻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노래를 통해,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고대 그리스의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상은 유대교·기독교 세계로도 흘러 들어간다. 구약의 코헬렛(전도서)에서 “나는 살아 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낫다고 하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가 더 복되다고 하였다”, 심지어 “사산된 아이가 장수한 어른보다 더 복되다”는 구절까지 등장하는 것은 그런 흐름 속에 있다.

이 표현은 솔직히 지금 읽어도 숨이 막힌다. 특히 유산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잔인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모리오카도 그 충격을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이것을 “정말 태어나지 않는 게 좋다”는 차가운 선고라기보다, “사람이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고통받는데, 누가 감히 이 현실을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절규로 읽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더 복되게 보일 만큼, 이 세계의 악과 부조리가 크다는 고발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코헬렛은 결국 “그 생애 동안 즐기고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며, 헛됨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찾아가는 태도를 말한다. 모리오카는 코헬렛을 “탄생 부정과 그래도 살아 있는 동안 작은 기쁨을 찾으려는 마음이 함께 담긴 글로 받아들인다.

이후 책은 반출생주의의 계보를 폭넓게 펼친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삶은 결국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삶은 즐겁다가도 금방 괴로워지고, 괴로워지면 또 지루해지는, 그런 상태가 계속 오가는 진자 같은 것으로 보였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를 반복해서 섹스와 번식을 향해 몰아가지만, 섹스 이후에 남는 것은 기쁨보다 비애와 후회라고 묘사한다. 종(種)의 생존을 위해 개체가 한없이 소모되는 구조 속에서, 그는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들 중 최악”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단지 감성적인 투정이 아니라, 꽤 치밀한 세계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대에 이르면 에밀 시오랑과 데이비드 베네타가 등장한다. 시오랑은 “진짜 불행은, 태어나 버린 그 자체”라고 말하며 인생 전체를 저주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세상 모든 것이 꿈처럼 멀게 느껴지는 순간을 겪고는 결국 그냥 살아가기로 한다. 모리오카는 이 사례를 통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와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한탄이고, 후자는 지금 여기에서 실행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둘을 그대로 이어버리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실제 삶에서도 위험한 혼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는다.

베네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주장하는 “벤타식 반출생주의(‘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해악이며, 태어나지 않는 편이 언제나 더 낫다’고 보는 입장)”는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아무리 행복한 삶이라도 조금이라도 고통이 섞여 있다면, 고통이 전혀 없었던 태어나지 않은 상태보다 나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류가 자살로 한 번에 사라지는 대신, 서서히 출산을 줄여 단계적으로 멸종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인간뿐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동물 전체가 없는 우주, 산과 나무와 바람만 있는 고요한 지구를 이상적인 미래로 그려 보기도 한다.

모리오카는 베네타의 시도 자체에 대해서는 “만용에 찬 시도이지만, 삶의 긍정과 부정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베네타의 탄생해악론은 그 깊은 곳에서 본질적으로 잘못된 논리”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탄생해악론은 “사상으로서 어느 정도 성립할 수는 있지만, 베네타가 제시한 논증 자체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일관되고 매끄러워 보이지만, 인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복잡하고 깊은 차원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그래도 삶은 소중해요라고 훈계하며 끝나는 것도 아니다. 모리오카는 쇼펜하우어, 부처, 니체, 베네타, 시오랑, 토마스 베른하르트, 그리스 비극, 성서와 그노시스주의, 공리주의 논쟁등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불러내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는 목소리를 정면으로 듣는다. 동시에 니체의 “영원회귀”와 “운명애”처럼, 삶에 “예스”라고 말하려 했던 시도들, 다자이 오사무의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뒤에 놓인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간절함도 함께 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반출생주의냐, 출산 찬성론이냐” 같은 단순한 입장 싸움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마음에 남는 것은, 확실히 누군가에게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어떤 순간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미 태어나 버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삶을 긍정하거나 최소한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리오카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탄생 부정”과 “탄생 긍정”을 끝까지 함께 바라보는 태도를 제안한다. 태어나는 것이 항상 옳다고도, 항상 틀렸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철학, 불교와 성서에 이르기까지 2,500년에 걸친 생각들을 빌려 “그럼에도 나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내용은 깊고, 글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라는 문장을 쉽게 입에 올리지도, 쉽게 부정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책이다.

'사계절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는 탄식은 문학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표현입니다. 일본 문학에서는 다자이 오사무의 "태어나서 죄송합니다"<20세기 기수>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에는 "아, 인간의 삶은 너무 비참해. 다들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21세기 철학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좋았다’라는 사상은 일반적으로 ’반출생주의, Anti-natalism’라고 불립니다. 반출생주의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인간을 출산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반출생주의에는 몇 가지 변형이 있어서, 한마디로 그 사상을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데이비드 베네타의 탄생해악론도 반출생주의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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