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필사 - 오늘의 태도로 내일을 읽는 시간
김동완 지음 / 양양하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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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무언가를 빨리 결정해야 할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것만 같은 마음이 자주 든다.

그런데 정작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주역 필사』는 바로 그런 순간에 조용히 말을 건네는 책이었다.

오래된 고전인 『주역』을 어렵게 풀어 설명하기보다, 주역의 64괘를 따라 삶의 흐름을 천천히 짚어 가며, 삶의 갈림길 앞에 선 사람이 문장을 따라 쓰면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든 필사 노트다.

이 책은 흔히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주역을 한층 가까운 자리로 데려온다.

주역이라고 하면 먼저 한자와 해석, 난해한 철학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이 책은 그 부담을 조금 내려놓게 한다. 주역은 누군가에게 정답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 변화하는 삶의 흐름 속에서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비춰주는 책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기다려야 할 때인지, 나아가야 할 때인지, 잠시 물러서야 할 때인지 섣불리 답을 내리기보다,

지금의 형국을 찬찬히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주역 필사』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읽기’보다 ‘쓰기’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필사는 단순히 문장을 베껴 적는 일이 아니라, 눈으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문장을 손으로 붙잡아 마음속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하는 방식이다. 의미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오히려 또렷하게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 줄 한 줄 따라 쓰다 보면, 문장이 어느 순간 내 마음의 상태와 맞닿으며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이 책은 주역의 64괘를 필사라는 형식으로 차근차근 만나게 하면서, 고전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시간으로 바꾸어 준다.

이 책에 실린 괘들의 문장도 무척 단단하게 느껴진다.

건괘는 스스로 움직이며 멈추지 않는 하늘의 리듬을 통해 삶에서 끝까지 바름을 지키는 태도를 이야기하고, 곤괘는 앞서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부드러움과 수용의 힘을 말해준다. 또한, 둔괘는 시작의 혼란을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흐름이 열리기 전의 자연스러운 진동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쓰는 시간은 고전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수괘의 문장이었다.

수괘 |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기다림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 빛나고 형통하며,

바름을 지키면 큰 내도 건널 수 있다.

수(需)는 하늘 위의 구름처럼

멈추어 있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형상이다.

길은 막힌 듯 보여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멈춤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때를 모으는 과정이다.

수는 말한다.

때는 스스로 무르익으며,

성급함은 흐름을 거스른다고.

막혀 있던 물도 자연스레 흐르듯이

믿음을 갖고 준비하면

기다림 끝에 큰 내도 건널 수 있다.

이 문장은 요즘의 내 상황을 떠올리게 하며 유난히 깊이 들어왔다.

조바심은 나는데, 그렇다고 분명한 방향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닌 시간을 지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한데, 그렇다고 무작정 서두를 수도 없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럴 때 기다림은 자꾸 공백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은 기다림을 멈춤이나 지체가 아니라, 때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내면에서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고,

믿음을 잃지 않고 바름을 지키며 준비하는 시간이 결국 큰 물길을 건너게 한다는 뜻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좋은 구절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처럼 느껴졌다.

『주역 필사』는 삶을 선명하게 정리해 주는 책은 아니다. 대신 복잡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스스로에게 한 번 더 질문하게 만든다. 오늘 나는 어떤 시작 위에 서 있는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어떤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주역이 64괘의 문장을 따라 쓰는 과정을 통해 조금 더 가까워지고,

낯설었던 문장이 어느새 내 하루를 붙잡아 주는 힘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참 조용히 깊은 울림을 남긴다.

'헤세드의 서재' 님을 통해 '양양하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5. 수괘 |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기다림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 빛나고 형통하며,
바름을 지키면 큰 내도 건널 수 있다.

수(需)는 하늘 위의 구름처럼
멈추어 있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형상이다.

길은 막힌 듯 보여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멈춤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때를 모으는 과정이다.

수는 말한다.
때는 스스로 무르익으며,
성급함은 흐름을 거스른다고.

막혀 있던 물도 자연스레 흐르듯이
믿음을 갖고 준비하면
기다림 끝에 큰 내도 건널 수 있다.

기다릴 줄 아는 용기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내면을 다지는 시간이다.

오늘의 사유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이 시간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지금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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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소란한 삶이 고요해지는 순간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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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톨레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출간 20주년 기념 한영 합본판)』은 바쁘게 흘러가는 현대의 삶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전 세계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영향을 준 『지금 이 순간의 힘』의 저자인 톨레가 전하는 사유가 담긴 이 책은 긴 설명이나 논리를 앞세우기보다 짧은 문장과 자연 사진, 그리고 사색적인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어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와 영문판 『Eckhart Tolle’s Findhorn Retreat』이 한 권에 담긴 독특한 구성 역시 이 책의 특징이다. 앞부분에서는 한국어로 톨레의 사유를 읽고, 뒤쪽에서는 그가 직접 촬영한 자연 사진과 함께 영문 원문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이해인 수녀의 추천사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만드는 책이다. 화려한 이론이나 복잡한 철학 대신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결국 우리가 충실하게 살아야 할 시간은 오직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톨레는 삶의 본질적인 평화와 행복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책의 시작은 스코틀랜드 핀드혼 공동체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1960년대,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모래와 자갈뿐인 황무지에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꿈꾸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연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척박한 땅에 생명을 불러왔고, 그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의 연결을 다시 발견했다. 톨레 역시 핀드혼 숲에서 머무르며 새와 나무, 꽃과 바람, 강물과 숲을 스승처럼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연은 그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법’을 가르쳐 준 존재였다. 고요하게 자연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생각의 소음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톨레는 현대인이 과거와 미래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지나가 버린 과거를 아쉬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동안 정작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현재’는 놓쳐 버린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물건이 정말 삶을 충만하게 만들 수 있을까.

책 속에서 톨레는 정보와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를 날카롭게 바라본다. 우리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미 정보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묻는다.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물건이 과연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더 크고 화려한 쇼핑몰과 더 많은 소비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까. 더 많이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 ‘더 많이’라는 욕망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현대 소비 사회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또한 이 책은 사랑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특정한 사람이나 형태 속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톨레는 진정한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상대 안에 있는 ‘형태 없는 본질’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 안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이 깨달음은 자연 속에서 더 쉽게 느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자연을 바라보며 고요하게 머무르는 순간 우리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게 되고, 그때 존재 자체를 느끼게 된다. 그 경험을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가져올 때 관계 역시 달라진다. 상대를 바꾸려 하거나 판단하려 하지 않고, 자연을 바라보듯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톨레는 또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그것을 얻은 뒤에도 또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와 성공을 이루어도 여전히 불안과 결핍 속에 머무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더 원하게 만드는 마음의 구조라는 것이다. 생각과 욕망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결핍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는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것’에서 찾는다.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존재 자체를 바라볼 때 삶은 훨씬 단순해진다. 특별해져야 한다는 압박도,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망도 서서히 사라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게 되고 비교나 경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문장 “당신은 하늘이고 구름은 그저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라는 비유는 이 책의 메시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사건들은 하늘을 스쳐 지나가는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의식, 즉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삶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 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빠르게 읽고 지나가는 책이라기보다 잠시 멈추어 곱씹게 만드는 책이다.

페이지마다 짧은 문장과 자연 사진이 배치되어 있어 마치 한 편의 명상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자기계발서라기보다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게 만드는 작은 쉼표 같은 책에 가깝다. 책을 읽고 나면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걱정과 집착, 그리고 수많은 생각들은 결국 구름처럼 지나가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 구름을 바라보는 하늘 같은 존재,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다. 그래서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삶의 의미는 더 많은 것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산북스(다산초당)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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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를 지닌 건 모두 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변해가는 모습 사이로 변치 않는 생명의 빛이 배어 나옵니다. 이제 겉모습은 어떻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너머의 진짜 모습이 투명하게 비치기 시작하니까요.

우리의 모습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가만히 앉아 있느느 나 자신에게 집중해 보세요. 무언가 맑고 투명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고요함이라 부르든, 깨어 있음이라 부르든, 내가 존재한다는 깊은 자각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겉모습 너머에 있는 나의 진짜 모습입니다. 이전에는 복잡한 서사와 수많은 생각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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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원시인 - 10만 년을 되돌려 되찾는 뇌 설계도
자청 지음 / 필로틱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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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인간은 왜 점점 더 불행해질까.”

기술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왕보다 많은 것을 소비하고, 훨씬 빠르게 이동하며, 훨씬 오래 산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유 없이 지치고 불안하며 무기력하다고 느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완벽한 원시인』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그리고 예상 밖의 답을 제시한다. 인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의 왕국에서 추방했고, 그 추방을 진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자연의 설계도를 무시한 채 살아가는 동안 몸과 뇌가 작동해야 할 기본 조건들을 하나씩 잃어버렸다. 이 책은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인간의 삶을 10만 년 전 설계도라는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책의 핵심 개념은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버튼’이다. 사자에게 고기를 주면 생명력을 되찾고, 사슴에게 풀을 주면 고요함을 되찾으며, 보더콜리에게 초원을 주면 이상행동이 사라진다. 버튼 하나만 눌러도 존재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그런 버튼이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인간의 몸과 뇌에도 10만 년 전부터 존재해 온 15개의 버튼이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버튼을 거의 누르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데 있다. 햇빛을 보지 않는 아침,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의자 위의 시간, 화면 속 관계로 대체된 인간관계, 자연식 대신 가공식품으로 채워진 식탁. 이런 조건 속에서 인간이 정상적으로 행복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른다.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개인적 경험은 이 주장에 현실적인 무게를 더한다. 철학을 공부하며 행복을 탐구했고 사업적으로도 성공을 경험했지만, 군 복무 시절 강직성척추염이 발병하며 삶은 급격히 무너진다. 몸은 아팠고 사업은 빼앗겼으며 관계까지 흔들렸다. 남들 눈에는 짐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이 고장 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군병원에서 수많은 책을 읽으며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생물학, 진화, 뇌과학, 역사, 심리학을 넘나드는 책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인간의 뇌는 10만 년 전에 설계되었고 그 이후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의 상태를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뇌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뇌가 정상 작동할 조건이 완전히 꺼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햇빛을 보고, 절뚝거리며 걷고, 식습관을 바꾸고,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하나씩 버튼을 눌러가기 시작했을 때 삶의 감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책에서 특히 강렬하게 남는 장면은 멍게 이야기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당신은 지금 의자라는 암석에 달라붙은 멍게다. 움직임을 멈춘 존재.”

멍게는 태어날 때 올챙이처럼 생긴 유생으로 태어난다. 이 시기에는 원시적인 뇌와 척수를 가지고 바다를 헤엄쳐 다닌다. 그 뇌는 정착할 암석을 찾고 이동 경로를 결정하며 위험을 피하고 먹이를 탐색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정착할 곳을 찾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멍게는 자기 뇌를 스스로 먹어치운다.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몇 가지 생각이 이어졌다.

우리는 하루 동안 얼마나 움직이고 있을까?

출근해서 의자에 앉고, 일을 하며 의자에 앉고, 집에 와서 소파에 앉고, 밤에는 침대에 눕는다.

하루 대부분을 앉아서 보내는 삶이 과연 인간의 기본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멍게는 움직임이 끝나는 순간 뇌를 먹어치운다. 인간은 뇌를 실제로 먹어버리지는 않지만, 움직임이 사라진 삶 속에서 집중력과 창의력, 의욕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을 경험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라 몸과 뇌의 구조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적인 존재라고 믿지만, 생각 자체가 움직임과 연결된 활동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걸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운동을 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자연 속에서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은 왜 반복되는 걸까. 혹시 현대인의 삶은 똑똑한 존재의 삶이 아니라, 정착한 멍게의 삶에 더 가까워진 것은 아닐까 싶다. 움직임이 사라진 대신 정보와 자극만 넘쳐나는 삶. 그 속에서 우리의 뇌는 어떤 상태로 변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런 질문들을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뇌과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데 있다.

많은 자기계발서는 생각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순서를 완전히 뒤집는다.

자기계발서의 변화 공식

생각 → 감정 → 행동 → 인생

뇌과학의 변화 공식

환경 → 화학물질 → 감정 → 생각 → 인생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마음을 바꾸려 한다.

긍정적인 말을 반복하고 결심을 하고 자신을 설득한다. 하지만 햇빛을 보지 않고, 거의 걷지 않고, 사람과 깊이 연결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는 뇌가 행복을 만들어낼 재료 자체가 부족하다. 텅 빈 창고에 제품을 만들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생각을 바꾸기 전에 환경을 바꾸라고 말한다. 햇빛을 보고, 움직이고, 숨을 고르고, 물을 마시고,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 너무 단순해서 사소하게 느껴지지만 인간의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설명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이 메시지는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우리는 역사상 가장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불완전하다고 느낀다. 스마트폰 하나로 도파민 체계는 흔들리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화면의 빛은 수면 리듬을 깨뜨리며, 움직임이 줄어든 생활은 몸과 뇌를 점점 더 위축시킨다. 인간은 더 똑똑한 도구를 만들었지만 정작 인간 자체는 덜 걷고 덜 햇빛을 보고 덜 연결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기술을 멈출 수 없다면 인간을 다시 복원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완벽한 원시인』은 성공 비법을 과장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이 말하는 변화는 매우 단순하다. 아침이 덜 무겁고 이유 없이 몸이 무기력하지 않고, 우울과 불안이 삶 전체를 삼키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하루를 버티는 대신 살아가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그 변화는 거대한 결심이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작은 버튼 하나를 누르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남는다.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어쩌면 이미 알고 중요한 사실들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햇빛을 보고 걷고 숨 쉬고 사람과 마주하는 삶. 너무 평범해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사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단순한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 『완벽한 원시인』이라는 책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아닌가 싶다.


'100인의 비밀 독서단' 활동을 통해

'필로틱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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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틀렸다. 뇌는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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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영화 속 기후환경 빼먹기
루카 지음 / 글씨앗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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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가 무너지고, 해류가 멈추고, 동물과 식물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장면은

더 이상 영화 속 상상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졌다.

기록적인 폭염과 한파,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이변,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의 출현은

이미 현실의 뉴스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묻기 시작한다.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아온 재난은 정말 허구일까, 아니면 가까운 미래의 예고편일까.

루카의 『재난영화 속 기후환경』은 바로 이 불안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재난 영화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기후과학과 생태계의 질서를 차근차근 짚어 주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재난 영화는 왜 늘 지구의 끝을 이야기할까?

거대한 해일이 도시를 삼키고, 빙하가 무너지고, 인간은 얼어붙은 세상에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장면들을 출발점 삼아 영화 속 재난이 어디까지 상상이고 어디부터 현실과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히 영화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장면 뒤에 숨어 있는 기후 변화와 생태계의 변화 과정과 과학적 배경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책의 첫 부분에서는 영화 〈투모로우〉를 통해 기후 재앙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영화에서는 북대서양 해류가 멈추면서 지구가 순식간에 빙하기로 들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영화처럼 단 며칠 사이에 지구 전체가 얼어붙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저자는 그 배경이 되는 과학적 현상, 즉 폴라 볼텍스와 북대서양 해류 순환 같은 실제 기후 시스템을 설명하며 우리가 이미 극단적인 기상이변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최근 수십 년 사이 극한 한파와 폭염이 증가하고 있으며, 해류 순환 역시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설명은 영화적 상상을 현실의 문제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이 책은 재난 영화를 과장된 허구로만 보지 않게 만든다.

오히려 영화가 현실의 경고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지구 역사 속 빙하기와 대멸종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구는 이미 여러 차례 빙하기와 생물 대멸종을 겪었고, 과학자들은 지금 이 시대를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작점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그 위기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인간은 지구 전체 생물량에서 아주 작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인간이 길러 온 가축까지 포함하면 지구 동물 생물량의 대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한 종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때 생태계의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책의 중반부에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보여준다.

늑대나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인간 사회 가까이 내려오는 이유도 결국 인간이 서식지를 파괴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자연은 인간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반응할 뿐이라는 메시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부분에서 내가 가장 깊이 읽은 대목은 범고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범고래를 오래전부터 매우 똑똑하고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 범고래는 돌고래과에 속하는 해양 포유류로, 매우 높은 지능과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가진 동물로 알려져 있다. 무리를 이루어 협력 사냥을 하며 지역과 집단에 따라 서로 다른 사냥 방식과 의사소통 체계를 갖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종으로도 연구되고 있다.

그래서 범고래를 떠올리면 강력한 포식자, 때로는 먹이를 몰아붙이고 괴롭히는 잔혹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소개되는 범고래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인상과는 조금 달랐다.

죽은 새끼를 며칠 동안 물 위로 떠받치고 다니며 쉽게 놓지 못하는 행동, 가족 단위의 유대 속에서 드러나는 애도의 장면은 범고래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단순히 무서운 포식자가 아니라, 높은 지능과 함께 깊은 유대와 감정까지 지닌 존재일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면서도 묘한 감동을 주었다. 강한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을 본 느낌이었다.

또 하나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사람의 신경계를 교란해 극단적인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 〈해프닝〉처럼 식물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설정은 처음에는 황당한 상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은 실제 자연 속에도 강력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 존재하며, 일부는 심장과 신경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투구꽃에 들어 있는 아코니틴, 자살 나무로 불리는 식물의 치명적인 독성 물질, 환각과 방향 감각 상실을 유발하는 성분들에 대한 대목은 읽는 내내 서늘한 기분을 남겼다.

평소 식물을 조용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여겼던 나에게, 식물 역시 살아남기 위해 정교하고 강력한 방어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자살을 유발할 정도로 위험한 식물 이야기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돌아보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남은 생각은 자연이 인간에게 복수한다는 말이 사실은 충분히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해 분노를 품는 것이 아니라, 훼손된 환경과 깨진 균형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숲이 사라지고 서식지가 잘게 끊기면 야생동물은 먹이를 찾아 인간의 공간 가까이로 밀려오고, 기후 변화가 심해질수록 생태계의 질서도 함께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결국 인간의 삶을 다시 위협하는 재난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영화 속 장면과 연결해 보여주면서, 오늘의 기후 위기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현실임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재난영화 속 기후환경』은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물론이고,

환경과 과학을 어렵게 느끼는 독자에게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영화 속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후 변화와 생태계 붕괴, 인간의 책임과 선택이라는 더 큰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영화는 이미 끝났지만 현실의 지구는 아직 결말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재난을 구경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어떤 미래를 써 내려갈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으로 오래 남는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꼭 그렇지도 않아. 식물들도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식물을 몰아내는 전략을 쓰기도 하거든.
앞에서 말한 화학적 방어를 곤충이나 미생물이 아니라 다른 식물을 견제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걸 타감작용Allelopathy이라고 불러. 영어 단어를 풀어보면 접두어 ‘alle-‘는 ‘서로’를, 접미사 ‘-patchy’는 ‘영향,작용‘을 뜻하지. 따라서 타감작용이란 말은 한 생물이 분비한 물질이 다른 생물의 발아, 생장, 생존, 생식 등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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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동해 - 동해 예찬론자의 동해에 사는 기쁨 언제라도 여행 시리즈 2
채지형 지음 / 푸른향기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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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룬 책은 많지만, 어떤 도시를 이렇게 오래 바라보고 천천히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담아낸 책은 흔치 않다. 채지형의 『언제라도 동해』는 단순한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는 과정을 담은 여행 에세이다.

동해라는 도시를 빠르게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오래 머물며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의 경험을 보여 준다.

묵호항, 논골담길, 북평민속시장, 해파랑길, 한섬해변 같은 장소들은 관광지 정보처럼 나열되기보다

저자가 실제로 걸어 다니며 느낀 생활의 풍경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 책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려 주기보다,

한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 볼 수 있는지를 전하는 책에 가까웠다.

이 책의 시작에서 저자는 동해를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동해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동해 어디요?”라고 묻고, “묵호”라고 덧붙이면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고 한다.


묵호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항구의 지명이고,

동해시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에게 동해는 행정구역의 이름보다 훨씬 따뜻한 의미로 다가온다.

일 때문에 잠시 방문했던 바닷가 도시에서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조금 더 머물게 되고,

어느 순간 이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동해 생활은 결국 여행 책방 ‘잔잔하게’를 여는 일로 이어진다.

우연처럼 시작된 선택들이 쌓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동해와의 첫 인연은 ‘동해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서 시작된다.


누군가 “동해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저자는

새벽에 찍은 일출 사진을 보여 주며 매일 아침 감동을 선물 받는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다라고 답한다.

처음에는 동해가 그저 낯선 지역이었지만, 한 달 살기를 권해 준 사서의 다정한 한마디와

신청 링크 하나가 새로운 삶의 문을 여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동해에 언제 오실 건가요?”라는 전화 한 통은

단순한 일정 확인이 아니 삶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처럼 다가왔다.

묵호에서의 첫날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태풍이 몰아치고, 강풍이 문을 흔들며, 파도와 바람의 소리가 밤을 가득 채운다.

낮에 아름답게 보였던 유리창은 밤이 되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잔잔해진 묵호항과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는 순간 저자는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그 장면은 여행이 결국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묵호의 풍경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곳은 바람의 언덕이다.

바람의 언덕에서는 쪽빛 동해와 짙은 산자락, 부지런히 오가는 고깃배, 알록달록한 지붕의 산동네가 한눈에 펼쳐진다. 한때 명태를 말리던 덕장이었던 공간이 지금은 누구나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할 수 있는 장소로 바뀌었다. 한낮의 푸른 바다, 새벽 어부들의 불빛, 저녁이면 별자리처럼 반짝이는 산동네 불빛까지 시간마다 달라지는 풍경이 한 도시의 깊이를 보여 준다.

바람의 언덕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달빛 아래 묵호를 예찬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인상 깊다.


비올리스트와 지휘자를 만나 음악과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언젠가 이곳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여행지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

동해에서의 생활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풍성해진다.

‘동해 한 달 살기’ 공간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과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같은 공간에서 머물며 자연스럽게 이웃이 된다.

태풍이 불어오는 밤 좁은 방에 모여 모히토를 나누며 각자의 삶과 여행 이야기를 풀어 놓는 장면은 여행지에서 만들어지는 특별한 공동체의 느낌을 전한다.

다음 날 바닷가에서 게를 잡으러 갔다가 거센 파도만 보고 돌아오는 경험조차 또 하나의 추억이 되는 곳이었다.


동해 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물회 덕후라고 말할 만큼 물회를 좋아한다.

싱싱한 회와 새콤한 국물, 바다의 향이 어우러진 물회는 동해에서의 삶을 대표하는 맛으로 등장한다.

묵호의 물횟집에서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물회를 먹는 순간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바닷가 생활의 감각을 그대로 전한다.


장칼국수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추장을 풀어 칼칼하게 끓인 장칼국수는 추운 겨울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들이 빠르게 몸을 녹이기 위해 먹던 음식에서 시작되었다.

소박한 한 그릇의 음식에 동해 사람들의 생활과 시간이 담겨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북평민속시장 이야기를 통해 동해의 또 다른 풍경도 드러난다.

3일과 8일에 열리는 북평장은 바다의 해산물과 산의 나물이 함께 모이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오일장이다. 시장 골목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머리국밥을 먹고, 친구와 바다를 바라보며 음식을 나누는 순간 저자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다 앞에서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동해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바다와 산이 가까이에 있고, 시장과 골목이 살아 있으며,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도시로 그려진다. 저자는 여행자로 머물던 시간을 지나 남편 브루스와 함께 동해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작은 책방을 열어 동네의 시간을 살아 간다. 책방에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새로운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며 골목은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렇게 동해에서의 삶은 풍경과 사람, 일상과 여행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언제라도 동해』는 동해라는 도시를 소개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삶을 발견해 가는 기록이다. 여행지를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도시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살아 보는 여행의 의미를 보여 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동해는 단순히 한 번 다녀오는 바닷가 도시가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남는 장소로 자리 잡는다. 제목처럼 정말 언제라도 떠나 보고 싶은 도시가 되고, 가능하다면 한 번쯤 살아 보고 싶은 도시로 기억된다.


'푸른향기 서포터즈 13기' 활동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1937년 묵호항 개항 이후, 묵호는 넘치는 물고기 덕분에 무럭무럭 성장했다. 묵호가 커지자, 명주군(현재 강릉시)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을 통합해 동해시를 만들었다. 즉, 동해는 강릉의 남쪽과 삼척의 북쪽을 합한 신생 도시인 것. 강원도를 대표하는 오일장인 북평장은 이름에 ‘북’이 들어 있지만, 동해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 넓은 뜰’이라는 뜻의 북평은 과거 삼척 소속이었다. 여전히 ‘동해시’보다 ‘묵호’와 ‘북평’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동해가 살기 좋은 동네로 소문나면서 ‘동해시’를 아는 이도 빠르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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