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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색
추설 지음 / 모모북스 / 2025년 9월
평점 :

『세상에 없던 색』은 표지부터 내용까지, 말 그대로 “감정의 색”으로 가득한 로맨스 소설이다.
한국 남자 현서와 일본 여자 유카리가 일본의 어느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단 이틀 동안 서로의 세계를 바꾸어 버리는 이야기. 줄거리만 들으면 흔한 여행 로맨스처럼 들리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소설의 핵심이 사랑의 결말이 아니라, 한 사람이 색을 잃고 다시 색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추설 작가는 1997년 9월생으로, 무용을 거쳐 패션과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감각적인 작업을 이어온 사람이다.
현재는 콘텐츠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SNS 디자인, 그래픽 작업, 앨범 커버 제작 등 시각적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없던 색』에서 ‘색·공간·움직임’은 그저 장면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마음을 설명해 주는 또 다른 언어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현서는 힘든 일이 닥치면 그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마치 완성된 그림 위에 검은 물감을 통째로 부어 버리듯 자신의 감정을 한꺼번에 가려 버리는 사람이다. 상처받은 마음도, 실패한 순간도, 관계의 틈도 차분히 들여다보기보다 애써 없는 일처럼 덮어두며 버텨 온 인물이다.
반대로 유카리는 하얀 종이 위에 글을 한 줄씩 남기며, 어떻게든 지금의 자신을 기록해 두려고 애쓴다. 잊히지 않기 위해, 무너진 마음의 모양을 최소한 문장으로라도 붙들어 보려는 사람인 것이다.
이 서로 다른 태도는 두 사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비가 된다. 같은 상처를 안고도 정반대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두 사람이 만나 만들어 내는 감정의 대비는, 한 화면 위에서 전혀 다른 두 색이 섞이며 이전에 없던 새로운 톤을 만들어 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소설의 시작에서 현서는 버거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일본행 비행기부터 끊어 버린다.
연인과의 이별 때문도, 대단한 목표가 있어서도 아니다.
한국에서의 삶이 더는 손쓸 수 없을 만큼 뒤엉켜 버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힘든데도, 계속 여기 있어야 하나?”라는 질문만 남은 채,
그는 그 엉망진창이라는 감정 하나를 들고 도망치듯 떠난다.
뭐라도 바꾸지 않으면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아서, 충분히 준비하지도 못한 채 비행기에 오른다.
유카리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차분한 일본 여성처럼 보이지만, 속은 오래된 상처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두 사람이 낯선 술집에서 우연히 부딪히듯 만나, 번역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툰 대화를 시작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건, 보통 로맨스에서 기대하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고백 대신,
번역기를 타고 오가는 어색한 문장과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만 조용히 오간다는 점이다.
화려한 말을 주고받기보다는, “지금 나는 어디가 아픈지”, “어디까지 버텨 왔는지” 같은 진짜 속마음이 서툰 문장으로 흘러나온다.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군더더기 말은 줄고, 남겨진 표정과 몸짓, 침묵의 온도가 두 사람의 색을 대신한다.
읽다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정”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변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품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금 사회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아무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세상…
내용도 없이 결말만 있는 책은 없잖아요.
책은 결국 과정으로 이루어진 거니까요."
이 대목에서 저자가 겨냥하는 건 단순히 연애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 자체다.
결과만 남기고 과정을 지워 버리려는 태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저자는 현서와 유카리의 관계를 통해 천천히 보여 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번에 ‘연인’이 되지 않는다. 불신과 도망, 두려움과 망설임이 계속해서 끼어든다.
하지만 바로 그 흔들리고 엇갈리는 순간들, 실패처럼 느껴지는 선택들까지도 모두 모여 두 사람만의 색을 만들어 간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말하는 사랑은, 완성된 결말이라기보다 불완전한 과정이 겹겹이 쌓여 남긴 흔적에 가깝다.
도피와 불신을 다루는 방식도 솔직하다. 현서는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도망치는 사람이다. 또 상처받을까 봐서라기보다, 이미 충분히 망가졌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는 버틸 자신이 없어서 뒷걸음치는 인물로 보인다.
그에게 일본은 누군가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장소라기보다, 잠깐이라도 숨을 수 있는 어둑한 공간에 가깝다.
반면 유카리는 두렵지만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사람이다.
이미 아픈 기억을 겪었음에도, 그 기억을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한 사람은 더 짙은 어둠 쪽으로 몸을 숨기고, 다른 한 사람은 여전히 흰 바탕을 남겨 두려 한다.
이 대비를 가장 압축해서 보여 주는 문장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검은색을 그렸고, 그녀는 흰 바탕 위에 글을 새겼다.
나는 덮어버렸고, 그녀는 기록했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이 로맨스가 ‘국경을 넘는 사랑’이라는 설정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 단 이틀의 만남, 번역기라는 장치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저자는 그쪽으로 과하게 치우치지 않는다. 대신 언어와 문화의 간극을, 잘못 번역된 문장 하나를 붙들고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나, 서로의 말투와 표현 습관을 천천히 배워 가는 과정 속에 담아낸다.
낯선 언어 덕분에 오히려 더 솔직해지는 순간들, 어딘가 잘못 이해했지만 그 오해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이 이 소설의 큰 매력이다. 읽다 보면 일본 소설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와 한국 소설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이 동시에 느껴져, 두 나라의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 같다는 인상도 남는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이 소설이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문장을 너무 쉬운 운명론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과정에는 분명 우연이 있지만, 그 우연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기적이라기보다, 서로를 잊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꾸역꾸역 버텨 왔기 때문에 가능해진 재회처럼 느껴진다.
단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은 두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다시 마주했을 때, 그들은 같은 사람인 동시에 이미 다른 색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다.
사랑이 둘의 인생을 통째로 구원했다기보다, 각자가 자기 안의 어둠을 인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조금씩 얹어 갈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쪽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무용과 디자인을 해 오던 사람이 처음으로 온전히 하나의 세계를 소설로 구현해 보고 싶었을 때,
그 결과물이 이런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인물의 심리 변화가 춤의 동선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페이지 위에 깔리는 색감이 조금씩 달라진다.
목차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무채색’에서 시작해, 점점 더 짙고 따뜻한 색들이 등장한다.
책을 읽고 나면, “이건 그냥 일본 배경 로맨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팔레트를 다시 섞어 보는 이야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남는다.
읽는 내내 마음에 오래 남았던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사랑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피난처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와 두려움을 솔직히 바라볼 때 맺어지는 불완전한 약속이라는 것!
이 소설의 사랑은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그림 같은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쉽게 다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했다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래서 더 따뜻하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세상에 없던 색』은 단순히 일본을 배경으로 한 설레는 로맨스를 기대하고 읽어도 좋고,
결과 중심적인 세상에서 조금 비켜난 과정의 이야기를 찾는 마음으로 읽어도 좋은 소설이다.
무채색처럼 느껴지던 하루에 다른 색을 살짝 섞어 보고 싶은 날,
조용한 밤에 천천히 읽기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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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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