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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 - 김주하 앵커가 단단한 목소리로 전하는 위로
김주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2월
평점 :

카메라의 붉은 불이 꺼지고 스튜디오의 조명이 모두 내려앉은 뒤, 김주하는 어디로 향했을까?
우리는 늘 그의 이름 앞에 ‘앵커’라는 수식을 붙여 왔고, 그 단단한 직함 뒤에 숨은 한 인간의 얼굴은 좀처럼 묻지 않았다. 완벽해 보이는 아이콘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상처 따위는 없을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착각의 반대편이다.
이 책은 강철 같은 평정심이 벼려진 시간들을 되짚으며, 한 인간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혹독한 시절을 통과해 결국 타인을 위한 등불을 선택하기까지의 기록이다. 유명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한 줌의 빛을 길어 올려 삶의 이유로 바꾸는지에 대한 투쟁기다.
그 시작은 의외로 아주 아날로그적인 감각에서 비롯된다.
어린 시절 “신문 왔냐~?”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던 조간신문,
종이와 잉크가 뒤섞인 냄새, 펼칠 때마다 들리던 바스락거림.
저자는 그 냄새를 ‘세상으로 통하는 첫 번째 창’이라 부른다. 활자의 뜻을 다 알지 못해도, 그 글자들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몸에 먼저 각인된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꿈은 직업이기 전에 존재의 방향이었다. 189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을 오가며 선망했던 여성 앵커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전문성으로 당당히 목소리를 낸 선구자들이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건네던 말도 오래 남는다.
“여자 선생님은 커피 안 타잖아. 김 양, 박 양 이렇게 불리지도 않고…”그 시대의 차별을 몸으로 겪었던 어머니의 현실 감각은, 저자로 하여금 단지 앵커가 아니라 바른 말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앵커를 꿈꾸게 했다. 그 꿈은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소명 의식의 씨앗이 된다. 저자는 꿈을 내면에 엔진을 장착하는 것에 비유한다. 추진력이 되기도 하고,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되기도 하는 엔진 말이다.
여고 시절 신문반의 경험은 그 엔진에 연료를 붓는다. 신문반 기자의 눈에 세상은 질문투성이였다.
왜 불공평한 일이 이렇게 많은지, 진실은 왜 여러 겹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얇은 교지 한 권이, 저자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창문이자 탐험 지도였다.
직접 기사 쓰고 제목 뽑고 사진 배치하며 지면을 완성하던 과정은, 놀이가 아니라 첫 번째 외침이었다.
그러나 ‘쓰레기는 쓰레기통에!’라고 교지에 크게 썼어도 다음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공감과 실행은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배운 순간이다.
따뜻하던 선생님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한 사람과 한 사건이 시선의 각도에 따라 얼마나 달리 보이는지도 알게 된다. 이때 생겨난 ‘줏대’는 훗날 그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남들이 모두 ‘예’라 말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말하는 용기는 거창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들의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익혔다.
그 용기가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앵커가 되려면 어떤 과가 유리한지 알고 싶어 방송사 인사부에 전화를 걸던 일이다.
6층 교실에서 쉬는 시간 10분, 몇 번의 ‘뺑뺑이’ 끝에 겨우 연결된 전화.
“저… 저는 고등학생인데요… 정말 죄송한데, 앵커가 되려면 대학교에서 무슨 과를 가야 제일 유리한가요?” 그 대답은 어쩌면 대단한 정보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에게는 짙은 안개 속에 한 줄기 빛이었다. 질문을 적은 종이 위에 전화번호가 촘촘히 채워지고, 막연했던 꿈의 지형도에 몇 개의 지명이 찍힌 느낌. 그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되는 법을 그때 배운다.
대학에 들어서고, 꿈은 더 치열한 현실이 된다. 안락함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던지는 선택, 그리고 혹시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를 대비해 ‘다음 길’을 함께 준비하는 전략. 무조건 도전을 미화하지 않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노력은 중요하지만, 먼저 그 일이 나에게 맞는지 알아보는 과정부터가 노력이라는 말은, 꿈을 낭만으로만 소비하지 않게 붙잡아 준다.
취업 준비는 생활의 압력과 함께 온다. 장학금, 생활비, 과외와 학원 강사, 때로는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까지. 돈을 벌기 위해 필요했던 차, 기름값과 보험료까지 스스로 감당하며 수동 변속기를 택했던 현실은 꿈을 향한 고생담이 아니라, 꿈을 현실로 지탱하는 일상의 기반에 가깝다.
카메라 앞에서의 공포도 나온다. 마이크로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는 고백과 저음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던 시간, 앵커 멘트가 아니라 기자 멘트처럼 들린다는 지적. 그는 모방을 택한다. 좋아하는 앵커의 목소리를 카세트에 녹음해 따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제 목소리도 아나운서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강연장에서 철제 필통을 천장으로 던질 만큼 절박해진다.
“좋은 목소리, 나쁜 목소리는 없습니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겁니다.”
그 한마디가 다시 전진할 이유가 되어 준다.
합격 뒤에도 그는 기적을 말하면서, 동시에 재능과 노력에 대한 솔직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노력하면 다 된다”는 말은 거짓일 수 있고, 간절함은 맞는 길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끝까지 밀어붙이게 하는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는 균형감은 책 전반을 단단하게 받친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꿈을 이룬 뒤에 찾아온 더 큰 시련이다.
앵커 데스크가 삶의 전부였던 시간, 붉은 불이 켜지는 순간이 존재 이유였던 시절을 지나,
개인의 가장 내밀한 아픔이 세상의 가십이 되어버린 순간들.
남편의 외도와 폭력, 그리고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앵커의 얼굴을 유지해야 했던 현실은 숨을 턱 막히게 한다. 특히 ‘좋은 엄마 콤플렉스’는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을 택하고,
아이 앞에서 행복한 부모인 척 연기하던 나날.
감정의 파급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은 오히려 내면을 병들게 했고,
불행한 결혼이라는 현실과 행복한 엄마여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인지 부조화가 깊어졌다.
“이 정도 불행은 참고 사는 거야” 같은 자기 설득은 독처럼 쌓여 영혼을 잠식한다.
그 장면들은 가엾고 슬프다. 한 사람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오래 속여야 했는지,
그 버팀이 얼마나 외로운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야기 중 마음이 가장 복잡해졌던 대목이 있었다. 남편과 이혼을 고민하던 와중에도, 첫째 아이가 “동생을 갖고 싶다”고 말했을 때 둘째를 선택한 부분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애쓰다 보니, 그 선택은 현실을 외면한 결정이라기보다 아이에게만큼은 결핍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 깨진 관계의 진실을 아이 앞에서만큼은 지우고 싶었던 절박함, 그리고 어쩌면 ‘이번만큼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해본 희미한 희망이 겹쳐진 결과에 가까웠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결정은 사랑이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였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선택을 두고 쉽게 탓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뒤로 미뤄왔는지, 그리고 그 미룸이 결국 어떤 대가로 되돌아왔는지를 더 또렷하게 보게 되었다.
시련이 한 개인의 사생활을 넘어 ‘스펙터클’로 소비될 때, 저자는 진실과 공감의 윤리를 묻는다.
클릭 수와 속도 경쟁 속에서 무죄 추정은 쉽게 무너지고, 여론 재판은 먼저 돌을 던진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2차 피해를 겪는다.
그가 말하는 공감은 단지 감정을 느끼는 수준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려는 연민의 태도다.
그리고 그 연민은 마침내 ‘레거시’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앉았던 자리가 아니라 누구의 손을 잡아주었는가. 상처를 자기 안에 가두지 말라는 부탁은 경험에서 나온 현실적인 제안이다. 상처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고, 이해가 다시 세상의 그늘에 손을 내미는 약속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
그가 자립준비청년들과 연결되며 발견한 생산성의 의미는 삶의 목적을 다시 쓰게 만든다.
더 이상 트로피나 헤드라인이 아니라, 제도의 구멍이 메워지고 누군가가 덜 울게 되는 변화가 그의 유산이 된다.
결국 이 책이 도달하는 곳은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라!는 메시지다.
침묵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결혼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목소리를 다시 찾아내는 과정은, 한 앵커의 성공담이 아니라 한 인간의 생존기다. 그리고 그 생존은 타인을 비추는 등불로 확장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간다’는 문장이 단순한 유명 멘트가 아니라, 얼어붙은 삶 위를 끝내 건너가겠다는 결심처럼 들린다.
붉은 불이 꺼진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다시 누군가의 길을 밝히는 불빛이 되는 과정을 담았다.
김주하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번져 온다. 얼음 위를 걷는 존재는 흔들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결국 세상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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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사(매경출판)'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어머니는 아마 모르셨을 것이다. 그 신문 ‘쪼가리’가 딸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문이자, 딸이 답을 찾아 나서는 탐험의 지도였다는 것을. 한 달에 한 번씩 나온 36페이지짜리 얇은 교지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치열한 첫 번째 외침이기도 했기에 직접 기사를 쓰고, 제목을 뽑고, 사진을 찍고, 사진을 배치하며 하나의 지면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은 그 어떤 놀이보다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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