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못한다는 착각 - 우리 스스로 수학 지능을 구축하는 놀라운 생각의 기술
다비드 베시 지음, 고유경 옮김 / 두시의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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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한 번 막히기 시작하면, 그 뒤로 오래 힘들어진다.

수학 시간, 칠판에 적힌 문제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던 날이 있고, 시간 안에 못 풀어 연필만 만지작거리던 날도 있다. 시험 성적을 확인하고 한숨이 쌓이다 보면 결국 마음속에는 한 문장이 남는다.

“난 원래 수학이랑 안 맞아.”

다비드 베시의 『수학을 못한다는 착각』은 바로 그 문장부터 다시 묻는 책이다.

프랑스에서 순수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와 교육을 해온 저자는,

우리를 수학에서 멀어지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공식이나 계산 자체가 아니라 수학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아인슈타인과 데카르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수학에 대해 우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믿어버린 세 가지를 내려놓자고 권한다.

수학은 논리로 푸는 것이라는 생각, 어떤 사람은 숫자에 강하고 어떤 사람은 도형에 강하지만, 대부분은 애초에 수학이 어렵다는 생각, 위대한 수학자들은 애초에 우리와 다른 뇌를 타고났다는 생각이다.

이런 믿음들이 쌓이면 우리는 수학을 ‘배워야 하는 과목’이 아니라,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가르는 기준처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수학은 어느 순간부터 괜히 손대기 무서운 과목이 되버린다.

다비드 베시의 『수학을 못한다는 착각』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놓쳐왔던 사실을 다시 꺼내 보여준다. 수학의 중심은 논리보다 직관에 가깝고,

그 직관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연습으로 조금씩 키울 수 있는 감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마음부터 닫아버린다.

“나는 안 되는 쪽이구나.” 저자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질문을 한 번 더 던진다. 우리가 수학 잘하는 사람이라고 떠올리는 이미지 자체가 애초에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학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논리로 완벽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직관을 붙잡고 그것을 조금씩 키워가는 사람에 가깝다.

실제 수학자들은 처음부터 깔끔하게 논리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보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상상하며 “이쪽이 맞는 것 같은데?”라는 느낌을 먼저 붙잡는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논리를 꺼내어 그 감각을 단단히 묶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게 정리한다.

즉, 논리는 출발점이 아니라 마지막에 붙는 설명의 언어에 가깝다. 이런 흐름을 알게 되는 순간, 수학은 더 이상 ‘나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누구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훈련의 영역으로 돌아온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수학을 두 갈래로 나눈다. 교과서에 적힌 기호와 증명으로 이루어진 공식 수학, 그리고 수학자들의 머릿속에서 먼저 움직이는 비공식 수학, 즉 직관의 수학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둘의 순서를 거꾸로 배워왔다는 데 있다.

음악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악보 해독부터 배운 셈이다.

그러니 수학이 재미있을 리 없고, 살아 움직일 리도 없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직관이 중요하다”는 말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직관이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자라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수학자들의 비밀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수학은 머리만 쓰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동작을 반복하는 신체 활동에 가깝고,

수학을 잘하는 데는 학교에서 거의 가르치지 않는 방법이 있으며,

위대한 수학자들의 뇌 역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정신적 습관과 태도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장 피에르 세르(Jean-Pierre Serre)다.

이 책에서 세르는 ‘보는 법을 가르쳐준 수학자’로 소개된다.

세르는 추상적인 수학 개념을 다룰 때도 언제나 공간적 이미지와 감각적 직관을 놓치지 말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어떤 복잡한 수학적 대상을 상상할 때, 그것을 손바닥 위의 작은 물건처럼 떠올릴지, 사람 크기의 구조물처럼 볼지, 혹은 그 안을 직접 걸어 다니는 공간처럼 볼지에 따라 사고의 깊이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크게 상상할수록 뇌는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해 사고한다는 것이 세르의 통찰이다.

베시는 이 점을 빌려 말한다.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대상이 너무 작게, 너무 납작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숫자와 기호를 언어처럼만 대하면, 실제 대상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그래서 그는 숫자 3을 볼 때도 ‘기호 3’이 아니라 오렌지 세 개를 떠올리라고 권한다.

아이처럼 추상적인 대상과 물리적으로 관계 맺는 태도, 이것이 바로 올바른 수학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세르의 기법은 결국 수학을 다시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다.

책 중반에 등장하는 다차원 이야기나 정이십면체의 투영 사례도 같은 맥락에 있다.

우리는 2차원 사진을 보면서도 자연스럽게 3차원 공간을 재구성한다.

심지어 머릿속으로 입체를 돌려볼 수도 있다.

이 능력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상상력이다.

수학은 이 능력을 억누르는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이 사용하는 학문이다.

후반부에서 저자는 수학의 또 다른 얼굴도 조심스럽게 꺼낸다. 수학은 어딘가 ‘좀 다른 사람’에게도 성취의 길이 열려 있는 드문 분야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사고를 한쪽으로만 밀어붙여 취약한 균형을 더 흔들어놓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 예로 책에서 언급되는 인물이 테드 카친스키, 이른바 ‘유나바머’다.

그는 IQ가 높아 어린 나이에 학년을 건너뛰고 하버드에 들어갔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UC 버클리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학계를 떠나 몬태나의 외딴 오두막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기술 문명’에 대한 증오를 앞세워 우편 폭탄을 보내는 테러를 이어갔다. 그 폭탄은 여러 사람을 다치게 했고, 일부는 목숨까지 잃었다. 1995년에는 자신의 선언문(일명 ‘유나바머 선언’)을 신문에 실어 달라고 요구하며 폭력을 멈추겠다고 협박했고, 결국 1996년 체포된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넣는 의도는 수학이 위험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수학이 가진 강력한 몰입과 사고의 힘이, 현실과 관계, 감정 같은 안전장치와 분리될 때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이 대목은 수학을 두려워하라는 경고가 아니라, 깊이 몰입하는 힘에는 균형도 함께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수학을 못한다는 착각』이 끝까지 전하려는 말은 분명하다. 수학은 재능을 가르는 시험이 아니라, 직관을 키우는 연습이다. 변화는 느리고 처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치 운전이 갑자기 손에 익듯이, 사고의 방식이 달라진다. 중요한 건 빨리 가는 게 아니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수학이 당신을 밀어낸 적은 없다. 다만 우리는 수학을 너무 빨리 정답부터 보게 배웠고, 너무 일찍 스스로에게 한계를 붙였다. 이 책은 그 한계를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기호를 읽기 전에 상상하고, 틀리면서 감을 만들고, 조금씩 직관을 키우는 것!

그렇게 수학은 다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세계가 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두시의나무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정신적 가소성의 법칙을 무시하면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과소평가하게 된다.
정신적 가소성의 핵심은 뻔뻔함을 자신감으로 바꾸는 것이다.
과정은 느리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처음에는 성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게 바로 우리의 학습 메커니즘이 가진 생물학적 현실이다.
안타까운 우연의 일치지만, 이는 좌절을 부르는 완벽한 공식이기도 하다.
혼란스럽고 느리고 불확실한 과정을 끝까지 해내려면 상당한 자기 통제력과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공식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입문 강좌나 직업 훈련 과정), 타인을 모방해 배울 수 있는 것, 혹은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것만 배우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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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라고 했지만 왜라고 했다 - 논술과 토론에 강해지는 바칼로레아 철학 토론서
배진시 지음 / 탐구당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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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라고 했지만 왜라고 했다』는 제목 그대로, 오랫동안 우리 교육에 익숙했던 “외워서 맞히는 공부”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철학 개념을 많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데 초점을 둔다. 그래서 이 책이 논술과 토론에 강해지는 바칼로레아 철학 토론서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프랑스의 국가 졸업·대학입학 시험으로, 특히 철학 논술 시험이 유명하다. 프랑스 학생들은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철학을 필수로 배우고, 시험에서는 정답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진리는 최종적인가?”, “이성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가?” 같은 질문을 놓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맞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이해하고, 근거를 제시하고, 반론을 검토하며, 스스로의 결론에 이르는 사고의 과정이다. 『외우라고 했지만 왜라고 했다』는 바로 이 바칼로레아식 철학 사고 훈련을 한국 독자에게 가장 친절한 언어로 옮겨온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배진시는 프랑스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인문학자이자 작가다.

현재 몽테뉴인문학연구소 소장이며, 몽테뉴해외인문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기업, 도서관, 학교 등 다양한 기관에서 철학과 토론, 인문 교육을 주제로 강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과 시민이 함께 사유하고 토론하는 인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생각하는 힘과 질문하는 용기’를 키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이력만 보아도 이 책이 단순한 철학 입문서가 아니라 실제 교육 현장에서 오랜 시간 다듬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 책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몸으로 익힌 프랑스식 철학 교육의 핵심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이 책의 첫 장은 ‘진리와 인식’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토머스 쿤은 과학적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가 공유하는 인식의 틀, 즉 패러다임 속에서 성립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진리는 쌓이는 것이 아니라 전환된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정답’에 균열을 낸다.

이어 블레즈 파스칼은 이성이 강력한 도구임을 인정하면서도, 이성만으로는 감정과 신앙, 인간의 내면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그의 말은, 논리 중심 사고에 익숙한 독자에게 중요한 균형을 제시한다.

르네 데카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신보다 의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 본 끝에 도달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스스로 사고하는 주체로 서는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존 로크는 인간의 인식이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감각과 경험이 앎의 출발점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은 경험 역시 오류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을 함께 짚으며, 경험과 이성이 함께 작동해야 함을 강조한다.

‘자유’에 대한 장으로 넘어오면 질문은 훨씬 현실적인 무게를 갖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조건이며, 선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미셸 푸코는 기술과 제도가 자유를 확장하는 동시에 감시와 통제를 강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과연 얼마나 자율적인지 묻는다.

장 자크 루소는 자유를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법을 따르는 상태로 정의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자유를 더욱 엄격하게 사유하며, 진정한 자유란 욕망이 아니라 이성이 세운 도덕 법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에서 자유는 더 이상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선택과 규범, 책임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로 드러난다.

‘노동과 기술’ 파트에서는 현대 사회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룬다.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이 본래 인간의 자아를 실현하는 활동이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는 구조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자크 엘륄은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낙관에 의문을 제기하며, 기술 자체가 하나의 체계로서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권터 안더스는 기술 발전 속도를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지적하며, 인간이 스스로 만든 기술 앞에서 도덕적 판단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세 철학자의 논의는 기술이 편리함을 넘어 인간의 삶과 사고방식 자체를 어떻게 바꾸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예술’에 관한 장에서는 사고의 결이 또 한 번 달라진다. 넬슨 굿맨은 예술 작품의 의미가 작품 그 자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체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본다. 플라톤은 예술을 모방으로 보며,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경계의 시선을 던진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말하며, 작품의 의미가 창작자의 의도를 떠나 독자의 해석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이 장에서 규칙과 의미, 통제와 해석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사유된다.

‘도덕과 사회’에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가 중심에 놓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준을 통해 도덕을 사유하며,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이익 사이의 균형을 고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하며, 공동체 안에서 덕을 실천할 때 비로소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몽테스키외는 법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분산함으로써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정치’의 장에서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가 질문의 중심에 선다.

토머스 홉스는 자연 상태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존 롤스는 공정성의 원리를 통해 민주주의가 정의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법이 정의롭지 않을 때 시민의 불복종이 도덕적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며, 개인의 양심을 정치의 한가운데로 끌어온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자아’에서는 질문이 다시 개인에게 돌아온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물음을 통해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개념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데이비드 흄은 기억이 자아를 구성한다고 보며, 우리가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경험과 기억의 연속 속에서 형성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외우라고 했지만 왜라고 했다』에서 철학자들은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어 온 생각을 흔들고, 질문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들어 주는 사유의 도구로 등장한다. 저자 배진시는 청소년과 시민이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는 현장에서 쌓아 온 경험을 바탕으로, 철학을 시험을 위한 과목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언어로 다시 살아나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철학자 이름을 많이 외우게 되기보다, 내 생각을 말과 글로 정리하고, 근거를 세우고, 다른 관점도 함께 살피며 토론하는 힘이 자란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공부는 암기가 아니라, 끝까지 “왜?”라고 묻는 태도다. 그 태도가 쌓일수록 논술과 토론은 물론, 내 삶의 선택까지도 더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이 책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탐구당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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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이 무서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게 더 무섭지 않을까?"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결정이란 자유 속에서 불안을 감수하는 용기"라고 했다. 나도 아직 어리지만, 그 말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뭔가를 결정하는 건, 나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나 자신을 믿어보는 일이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중요한 건, 큰 결심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는 습관, 오늘은 휴대폰을 조금 덜 보겠다는 다짐, 친구에게 먼저 인사하기,부모님께 고맙다고 말하기 ㅡ 이런 일상의 작은 결심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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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인두투스 : 입는 인간 - 고대 가죽옷부터 조선의 갓까지, 트렌드로 읽는 인문학 이야기
이다소미 지음 / 해뜰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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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한다.

“입을 옷은 많은데, 왜 입을 게 없지?”

옷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기분과 만날 사람,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게 어떤 느낌으로 보이고 싶은지를 생각하다보면 선택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옷은 단순히 몸을 덮는 천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 주는 표식이자 언어에 가깝다. 말하기 전에 이미 나를 소개하고, 때로는 내가 의식하지 못한 내 욕망과 관계의 거리까지 드러낸다. 그래서 누군가의 옷차림을 보면 취향이나 직업뿐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시대의 규범과 분위기, 즉 그 시대의 공기까지 함께 느껴지기도 한다.

『호모 인두투스, 입는 인간』은 우리가 평소 막연하게 느끼던 이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옷을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의미를 담아 말하는 하나의 언어로 풀어낸다.

저자 이다소미는 옷의 1차 목적이 맨몸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외부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도, 인류는 곧 옷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고 신분과 욕망, 바람을 표현해 왔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옷을 언어적 기호로 보았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옷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 한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적 문서이며 이런 복합성을 담아 저자는 ‘입는 인간’—호모 인두투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책은 인간이 언제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는지라는 질문을 창세기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엮는 장면은 옷의 시작이 부끄러움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 신이 두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히는 대목에서 옷은 보호와 생존을 위한 도구로 확장된다. 인간은 강한 신체를 타고난 존재가 아니라, 취약함을 도구로 보완해 온 존재였고, 옷은 태초부터 그 곁을 지켜온 가장 오래된 기술이었다.

바지의 변천사는 옷이 어떻게 문명을 바꾸었는지를 보여준다.

말 위에서 살아야 했던 스키타이 유목민에게서 시작된 바지는 실용성과 기동성이라는 필요를 충족시키며 퍼져나갔고, 제국의 확장과 함께 동서로 전파되었다.

처음에는 ‘야만인의 옷’으로 배척되었지만, 결국 군사 개혁과 혁명을 거치며 평등과 저항의 상징이 된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귀족의 무릎 바지를 거부한 ‘상퀼로트’는, 옷 한 벌이 정치적 선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옷이 사회의 규범을 얼마나 강하게 조여오는지도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날씬한 체격임에도 코르셋을 조여 입는 장면은,

미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한 여성성의 표준을 따른 결과다.

코르셋은 몸을 꾸미는 장치이자, 자세와 행동을 규율하는 통제의 도구였다.

옷은 자유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억압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산업혁명은 옷의 세계를 다시 흔들었다. 직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며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실크와 레이스가 시민들에게 확산되었고, 화학 산업의 발전은 염색의 가능성을 폭발적으로 넓혔다. 그러나 화려함에는 대가가 따랐다. 비소가 포함된 셸레 그린, 에메랄드 그린 염료로 만든 ‘죽음의 초록 드레스’는 실제로 건강과 생명을 위협했고, 결국 역사 속에서 퇴출되었다. 아름다움의 이면에 기술과 윤리의 문제가 늘 함께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트렌치코트의 역사 역시 옷이 기능에서 상징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호전의 진흙과 냉기 속에서 병사를 보호하기 위해 탄생한 트렌치코트는 전쟁 이후 거리와 스크린으로 옮겨가며, 품위와 쓸쓸함을 동시에 상징하는 클래식이 되었다.

실용이 시간이 지나 미학이 되는 순간이다.

이 흐름은 에르메스와 버킨백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1984년, 제인 버킨이 비행기에서 에르메스 CEO 장 루이 뒤마에게 가방 사용의 불편함을 털어놓자,

그는 즉석에서 냅킨 위에 새로운 가방을 스케치한다.

그렇게 탄생한 버킨백은 기능성과 세련미를 동시에 갖춘 아이콘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명품 시장의 정점에 서 있다. 에르메스의 가치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수작업을 고수하는 장인 정신과 흔들리지 않는 경영 철학에서 비롯된다.

대량생산 대신 희소성을 택하고, 가족 지분을 통해 철학을 지켜온 선택은 브랜드를 가격 경쟁 밖으로 밀어 올렸다.

결국 『호모 인두투스, 입는 인간』은 옷을 통해 인간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또 스스로를 드러내는지를 보게 만든다. 한 벌의 옷은 단순한 취향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시대가 정해 놓은 기준과 기술의 변화, 권력의 작동 방식, 그리고 우리가 품은 욕망이 겹쳐진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옷은 ‘무엇을 입었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입게 되었는가’를 묻게 된다.

결국 옷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건, 내가 어떤 규범 속에서 살아왔고 어떤 방식으로 나를 만들어 왔는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 책은 ‘입는 행위’가 곧 자기표현이면서 사회와의 협상이라는 핵심 메시지를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단단한맘 @gbb_mom / 하하맘 @wlsdud2976' 서평단을 통해,

'해뜰서가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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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인스타 @hagonol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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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그릇 - 마인드셋에서 실행까지, 결국 부의 길에 이르는 법
제이투 지음 / 다른상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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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런 말이 너무 자연스럽다.

“월급만으로는 답이 없다.”

“이대로는 평생 집 못 산다.”

“투자 안 하면 뒤처진다.”

이 말들이 반복될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부의 기준은 어느새 ‘남들이 정해 놓은 모습’으로 이동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더 빨리 지치고, 더 쉽게 포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부의 그릇』이 정곡을 찌르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부가 멀어진 이유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부의 기준이 잘못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 책은 “어떻게 벌까”를 묻기 전에 “무엇을 부라고 부를 것인가”부터 다시 묻는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부의 그릇』의 출발점은 명확하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틀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결과를 만든다. 돈을 부르는 힘은 외부의 비밀스러운 정보나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내 안에 굳어 버린 사고방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투자 기법이나 수익률보다 먼저, 돈을 바라보는 기준과 태도를 담았다.

생각을 바꾸는 순간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말은, 막연한 동기부여가 아니라 이 책에서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의 출발선이다.

책이 가장 먼저 꺼내 드는 키워드는 ‘시간’이다. 저자는 돈을 즉석식에 비유한다.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금세 완성되는 간편식처럼, 단기간에 완성되는 부는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요리에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듯, 부 역시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한국 사회의 부의 기준은 지나치게 높다.

처음부터 닿을 수 없는 목표를 세워 두었기에 사람들은 조급해지고, 무리하다가 결국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 『부의 그릇』은 사회가 정해 준 잣대에서 벗어나, 내 삶에 맞는 기준을 다시 세우라고 말한다. 기준을 낮추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의 형태로 부를 재정의하라는 제안이다.

이 메시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워런 버핏 이야기다.

그의 자산은 초반이 아니라, 시간이 충분히 쌓인 뒤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복리는 시간이 길수록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책의 결론은 분명해진다. 돈을 걷어 내면 삶에 남는 것은 결국 ‘시간’이며, 우리가 부자가 되고 싶은 진짜 이유 역시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의 목표는 얼마를 모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유롭게 시간을 쓰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이 책은 이 주장을 현실적인 사례로 알려준다. 배당금과 글쓰기로 월 500만 원의 수입을 만들고 제주에서 사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월 500만 원으로도 충분히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저자 자신은 월 2,000만 원의 현금흐름을 만들고도 여전히 회사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 지점에서 ‘부의 척도는 돈의 크기가 아니라 시간의 자유’라는 점이 핵심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남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진짜 자유를 주는 부의 그릇이 얼마인지 알아내는 일이다.

이후 ‘잉여시간의 법칙’으로 나아간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습관이 만든 결과이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시간을 고정시간과 잉여시간으로 나누고 계산해 보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루 5시간의 잉여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1년 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저자는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라고 말한다. 30분부터 시작해 루틴을 만들고, 자동화된 습관으로 삶에 스며들게 하라고. 잉여시간을 사랑해야 미래의 내가 바뀐다는 말은,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으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잉여시간의 사용은 곧 소비자와 생산자의 갈림길로 이어진다. 보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만드는 사람으로 이동할 것인가. 소액이라도 투자해 보고, 글을 쓰고, 기록하고, 구조를 만드는 행위들이 쌓여 파이프라인이 된다. 배당금 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큰돈을 한 번에 넣기보다, 소액으로 실제 배당을 받아보는 경험을 먼저 쌓으라는 조언은 작지만 확실한 성취의 힘을 강조한다.

“진짜 되네”라는 경험이 다음 단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다만 이 책은 욕망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건다. 이카로스의 신화처럼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이면, 욕망이 통제 불능이 되어 부의 그릇은 깨진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먼 민스키 심리 곡선을 가져와, 탐욕과 환상의 구간에서 과속하면 인생에도 버블이 생긴다고 경고한다.

부의 그릇을 단단히 만든다는 것은 하루하루 작은 성취에 만족하며 속도를 조절하는 일이다.

결국 『부의 그릇』이 반복해서 말하는 결론은 하나다. 행동하지 않으면 부는 없다. 인지에서 행동으로, 행동에서 루틴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니체의 낙타·사자·아이의 정신을 통해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100%가 아닌 70%의 힘으로라도 오래 가는 설계를 하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이 말하는 부는 많음이 아니라 자유다. 시간을 이해하고, 기준을 다시 세우고, 잉여시간을 생산으로 바꾸며, 욕망을 조절하고, 실패를 털어내며 계속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부의 그릇』은 돈을 버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부에 대한 잘못된 기준을 바로잡아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우게 하는 책이다.

책을 읽고나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나는 얼마면 충분한가? 그리고 그 충분함을 위해 오늘 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부의 그릇은 이미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상상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돈을 걷어 내면 삶에는 오직 ‘시간‘만이 남는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시간을 온전히 쓰기 위해서다. 부자들이 말하듯, 돈이 많아서 좋은 이유는 단지 돈 때문만이 아니다. 원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진정으로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온전히 나를 위해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해답은 시간이다. 돈을 좇지 말고, 삶의 시간을 귀하게 여겨라. 진정한 부자의 목표는 단순히 많은 돈이 아니라 시간을 자유롭게 쓰며 원하는 삶을 누리는 데 있다. 돈만 쫓는다면 처음부터 무리한 방법으로 부에 도달하려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함정에 빠지거나 금세 지쳐 포기할 수 있다. 결국 부와 멀어진다. 부자가 되는 길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더해야 나만의 부의 기준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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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 - 김주하 앵커가 단단한 목소리로 전하는 위로
김주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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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붉은 불이 꺼지고 스튜디오의 조명이 모두 내려앉은 뒤, 김주하는 어디로 향했을까?

우리는 늘 그의 이름 앞에 ‘앵커’라는 수식을 붙여 왔고, 그 단단한 직함 뒤에 숨은 한 인간의 얼굴은 좀처럼 묻지 않았다. 완벽해 보이는 아이콘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상처 따위는 없을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착각의 반대편이다.

이 책은 강철 같은 평정심이 벼려진 시간들을 되짚으며, 한 인간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혹독한 시절을 통과해 결국 타인을 위한 등불을 선택하기까지의 기록이다. 유명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한 줌의 빛을 길어 올려 삶의 이유로 바꾸는지에 대한 투쟁기다.

그 시작은 의외로 아주 아날로그적인 감각에서 비롯된다.

어린 시절 “신문 왔냐~?”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던 조간신문,

종이와 잉크가 뒤섞인 냄새, 펼칠 때마다 들리던 바스락거림.

저자는 그 냄새를 ‘세상으로 통하는 첫 번째 창’이라 부른다. 활자의 뜻을 다 알지 못해도, 그 글자들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몸에 먼저 각인된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꿈은 직업이기 전에 존재의 방향이었다. 189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을 오가며 선망했던 여성 앵커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전문성으로 당당히 목소리를 낸 선구자들이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건네던 말도 오래 남는다.

“여자 선생님은 커피 안 타잖아. 김 양, 박 양 이렇게 불리지도 않고…”그 시대의 차별을 몸으로 겪었던 어머니의 현실 감각은, 저자로 하여금 단지 앵커가 아니라 바른 말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앵커를 꿈꾸게 했다. 그 꿈은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소명 의식의 씨앗이 된다. 저자는 꿈을 내면에 엔진을 장착하는 것에 비유한다. 추진력이 되기도 하고,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되기도 하는 엔진 말이다.

여고 시절 신문반의 경험은 그 엔진에 연료를 붓는다. 신문반 기자의 눈에 세상은 질문투성이였다.

왜 불공평한 일이 이렇게 많은지, 진실은 왜 여러 겹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얇은 교지 한 권이, 저자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창문이자 탐험 지도였다.

직접 기사 쓰고 제목 뽑고 사진 배치하며 지면을 완성하던 과정은, 놀이가 아니라 첫 번째 외침이었다.

그러나 ‘쓰레기는 쓰레기통에!’라고 교지에 크게 썼어도 다음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공감과 실행은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배운 순간이다.

따뜻하던 선생님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한 사람과 한 사건이 시선의 각도에 따라 얼마나 달리 보이는지도 알게 된다. 이때 생겨난 ‘줏대’는 훗날 그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남들이 모두 ‘예’라 말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말하는 용기는 거창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들의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익혔다.

그 용기가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앵커가 되려면 어떤 과가 유리한지 알고 싶어 방송사 인사부에 전화를 걸던 일이다.

6층 교실에서 쉬는 시간 10분, 몇 번의 ‘뺑뺑이’ 끝에 겨우 연결된 전화.

“저… 저는 고등학생인데요… 정말 죄송한데, 앵커가 되려면 대학교에서 무슨 과를 가야 제일 유리한가요?” 그 대답은 어쩌면 대단한 정보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에게는 짙은 안개 속에 한 줄기 빛이었다. 질문을 적은 종이 위에 전화번호가 촘촘히 채워지고, 막연했던 꿈의 지형도에 몇 개의 지명이 찍힌 느낌. 그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되는 법을 그때 배운다.

대학에 들어서고, 꿈은 더 치열한 현실이 된다. 안락함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던지는 선택, 그리고 혹시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를 대비해 ‘다음 길’을 함께 준비하는 전략. 무조건 도전을 미화하지 않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노력은 중요하지만, 먼저 그 일이 나에게 맞는지 알아보는 과정부터가 노력이라는 말은, 꿈을 낭만으로만 소비하지 않게 붙잡아 준다.

취업 준비는 생활의 압력과 함께 온다. 장학금, 생활비, 과외와 학원 강사, 때로는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까지. 돈을 벌기 위해 필요했던 차, 기름값과 보험료까지 스스로 감당하며 수동 변속기를 택했던 현실은 꿈을 향한 고생담이 아니라, 꿈을 현실로 지탱하는 일상의 기반에 가깝다.

카메라 앞에서의 공포도 나온다. 마이크로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는 고백과 저음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던 시간, 앵커 멘트가 아니라 기자 멘트처럼 들린다는 지적. 그는 모방을 택한다. 좋아하는 앵커의 목소리를 카세트에 녹음해 따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제 목소리도 아나운서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강연장에서 철제 필통을 천장으로 던질 만큼 절박해진다.

“좋은 목소리, 나쁜 목소리는 없습니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겁니다.”

그 한마디가 다시 전진할 이유가 되어 준다.

합격 뒤에도 그는 기적을 말하면서, 동시에 재능과 노력에 대한 솔직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노력하면 다 된다”는 말은 거짓일 수 있고, 간절함은 맞는 길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끝까지 밀어붙이게 하는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는 균형감은 책 전반을 단단하게 받친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꿈을 이룬 뒤에 찾아온 더 큰 시련이다.

앵커 데스크가 삶의 전부였던 시간, 붉은 불이 켜지는 순간이 존재 이유였던 시절을 지나,

개인의 가장 내밀한 아픔이 세상의 가십이 되어버린 순간들.

남편의 외도와 폭력, 그리고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앵커의 얼굴을 유지해야 했던 현실은 숨을 턱 막히게 한다. 특히 ‘좋은 엄마 콤플렉스’는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을 택하고,

아이 앞에서 행복한 부모인 척 연기하던 나날.

감정의 파급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은 오히려 내면을 병들게 했고,

불행한 결혼이라는 현실과 행복한 엄마여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인지 부조화가 깊어졌다.

“이 정도 불행은 참고 사는 거야” 같은 자기 설득은 독처럼 쌓여 영혼을 잠식한다.

그 장면들은 가엾고 슬프다. 한 사람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오래 속여야 했는지,

그 버팀이 얼마나 외로운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야기 중 마음이 가장 복잡해졌던 대목이 있었다. 남편과 이혼을 고민하던 와중에도, 첫째 아이가 “동생을 갖고 싶다”고 말했을 때 둘째를 선택한 부분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그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애쓰다 보니, 그 선택은 현실을 외면한 결정이라기보다 아이에게만큼은 결핍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 깨진 관계의 진실을 아이 앞에서만큼은 지우고 싶었던 절박함, 그리고 어쩌면 ‘이번만큼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해본 희미한 희망이 겹쳐진 결과에 가까웠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결정은 사랑이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였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선택을 두고 쉽게 탓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뒤로 미뤄왔는지, 그리고 그 미룸이 결국 어떤 대가로 되돌아왔는지를 더 또렷하게 보게 되었다.

시련이 한 개인의 사생활을 넘어 ‘스펙터클’로 소비될 때, 저자는 진실과 공감의 윤리를 묻는다.

클릭 수와 속도 경쟁 속에서 무죄 추정은 쉽게 무너지고, 여론 재판은 먼저 돌을 던진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2차 피해를 겪는다.

그가 말하는 공감은 단지 감정을 느끼는 수준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려는 연민의 태도다.

그리고 그 연민은 마침내 ‘레거시’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앉았던 자리가 아니라 누구의 손을 잡아주었는가. 상처를 자기 안에 가두지 말라는 부탁은 경험에서 나온 현실적인 제안이다. 상처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고, 이해가 다시 세상의 그늘에 손을 내미는 약속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

그가 자립준비청년들과 연결되며 발견한 생산성의 의미는 삶의 목적을 다시 쓰게 만든다.

더 이상 트로피나 헤드라인이 아니라, 제도의 구멍이 메워지고 누군가가 덜 울게 되는 변화가 그의 유산이 된다.

결국 이 책이 도달하는 곳은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라!는 메시지다.

침묵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결혼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목소리를 다시 찾아내는 과정은, 한 앵커의 성공담이 아니라 한 인간의 생존기다. 그리고 그 생존은 타인을 비추는 등불로 확장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간다’는 문장이 단순한 유명 멘트가 아니라, 얼어붙은 삶 위를 끝내 건너가겠다는 결심처럼 들린다.

붉은 불이 꺼진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다시 누군가의 길을 밝히는 불빛이 되는 과정을 담았다.

김주하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번져 온다. 얼음 위를 걷는 존재는 흔들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결국 세상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매일경제신문사(매경출판)'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어머니는 아마 모르셨을 것이다. 그 신문 ‘쪼가리’가 딸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문이자, 딸이 답을 찾아 나서는 탐험의 지도였다는 것을. 한 달에 한 번씩 나온 36페이지짜리 얇은 교지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치열한 첫 번째 외침이기도 했기에 직접 기사를 쓰고, 제목을 뽑고, 사진을 찍고, 사진을 배치하며 하나의 지면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은 그 어떤 놀이보다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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