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유리하다 - AI 시대,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
김용섭 지음 / 퍼블리온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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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AI가 만든 글과 이미지, 영상을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난다.

몇 시간 걸리던 일을 순식간에 끝내는 모습을 보면 편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능력이 앞으로도 가치가 있을지, 새 기술을 열심히 배우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이 유리하다』는 이런 막연한 불안에 희망적인 말만 건네지 않는다.

AI가 인간을 모두 대체할 것이라는 공포도, 도구 몇 개만 잘 다루면 미래를 앞서갈 수 있다는 낙관도 경계한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AI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다.

“AI 시대의 가장 비싼 실수는 늦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뒤처질까 봐 서둘러 자격증을 따고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빨리 시작하는 것과 제대로 준비하는 것은 다르다.

현재 특별한 능력처럼 보이는 프롬프트 작성법이나 AI 활용 기술도 머지않아 누구나 사용하는 기본 기능이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AI를 사용할 줄 아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질문하고, 어떤 결과를 선택하며 그것을 어디에 사용할지 판단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

인간은 AI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하는 다른 인간과 경쟁한다.

AI는 적이라기보다 강력한 도구다. 다만 그 도구가 사람을 자동으로 유능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능력을 크게 확장해주지만, 방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럴듯한 결과물을 빠르게 만들어주는 데 그칠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핵심 공식은 ‘인공지능×인간지능’이다.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라는 점이 중요하다.

AI를 능숙하게 다뤄도 비판적 사고와 판단력, 창의성이 부족하면 결과의 수준도 낮아진다.

반대로 인간적인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AI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다면 변화한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치기 어렵다.

앞으로는 AI 활용 능력과 휴먼 스킬을 함께 키워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휴먼 스킬은 의사소통, 비판적 사고, 창의성, 리더십, 적응력, 감성지능과 같은 능력이다.

AI도 논리적인 문장을 만들고 사람의 감정을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마음을 읽고, 관계와 상황에 맞게 소통하며, 타인의 고통 곁에 함께 머무는 일까지 완전히 대신하지는 못한다.

AI가 빠르게 답을 내놓더라도 그 답의 전제가 옳은지, 단기적인 효율이 장기적인 문제를 만들지는 않는지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샘 올트먼이 중요하게 보았다는 채용 기준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첫째는 문제를 해결해 실제 성과를 내는 사람,

둘째는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

셋째는 계속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이다.

각각 실행력, 관계지능, 학습지능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시대의 ‘똑똑함’은 명문대를 나왔거나 시험을 잘 본다는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빠르게 흡수하고, 기존의 답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내며, 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많이 아는 것보다 계속 배울 수 있는 사람, 정답을 외우는 사람보다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더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

성과를 끝까지 완성하는 힘도 빼놓을 수 없다. 일은 시작한 순간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아이디어를 내고 일을 벌이는 사람은 많지만,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처음에는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마무리에서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조직은 자신의 능력을 말로 포장하는 사람보다 결과로 증명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일을 완수하는 데에는 책임감과 끈기, 판단력과 결단력이 모두 필요하다.

이런 역량은 학력이나 자격증만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함께 일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지를 봐야 알 수 있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창의력과 판단력, 공감력이 실패와 경험에서 자란다는 이야기다.

판단력은 교과서만 읽는다고 생기지 않는다. 직접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며, 실패를 다음 판단의 재료로 바꾸는 과정에서 단단해진다.

AI는 방대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배울 수 있지만, 실패한 뒤 후회하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

타인의 눈물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자신의 결정에 책임지는 두려움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AI 시대에 가장 강한 인간은 정답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경험하고, 용감하게 도전하며,

실패를 통해 깊어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경쟁력은 지식의 양뿐 아니라 경험과 관계의 밀도에서 만들어진다.


AI는 조직과 일자리의 구조도 바꾸고 있다.

자료 조사와 문서 정리, 초안 작성처럼 과거 신입이 맡았던 업무를 AI가 대신하면서 ‘신입을 뽑아 키우는 방식’도 흔들리고 있다.

기업이 당장의 효율만 생각해 신입을 줄인다면, 미래의 숙련자와 관리자를 키울 기회까지 사라질 수 있다.

조직은 단순히 사람을 줄이는 데서 멈추지 말고, AI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지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반대로 개인에게는 더 큰 기회가 열릴 수 있다. AI를 활용하면 기획, 디자인, 마케팅, 고객 응대처럼 여러 사람이 나누어 하던 업무를 한 사람이 수행할 수 있다. 책에서 말하는 ‘솔로프러너’는 자신의 시간만 판매하는 프리랜서를 넘어, 혼자서도 하나의 사업 구조와 시스템을 운영하는 1인 기업가다. AI는 전문성과 방향을 가진 개인의 힘을 크게 확장해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동으로 유리한 것은 아니다. 책이 제시하는 미래의 순서는 냉정하다.

휴먼 스킬을 충분히 가진 유능한 인간 〉 AI 〉 휴먼 스킬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인간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AI보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질문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익숙한 방식만 반복한다면 AI보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인간의 유리함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계속 배우고 훈련하며 결과로 증명해야 하는 능력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는 “AI가 내 일을 빼앗을까?”라는 질문보다 “나는 AI와 함께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AI가 잘하는 반복 작업과 정보 정리는 적극적으로 맡기되, 인간이 더 잘할 수 있는 질문과 판단, 공감과 책임의 능력은 더욱 깊게 키워야 한다.

인간이 AI보다 유리한 이유는 더 빠르고 정확해서가 아니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며 타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속 배우는 힘, 사람들과 협력하는 힘, 시작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힘이 더해질 때 인간의 경쟁력은 분명해진다.

AI 시대에도 인간은 유리하다. 다만 그 유리함을 실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각자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


'퍼블리온 출판사 @publion_book'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당신의 관심사가 AI 도구 활용 스킬을 쌓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AI 도구 활용이 필요하고 중요하긴 해도, 그건 결국 기본일 뿐이다. AI 도구 활용 능력은 상향 평준화될 수밖에 없다. 그걸 못 가진 건 치명적 단점이겠지만, 그걸 가졌다고 더 유리한 건 아니다. 우린 적당히 밥 먹고사는 걸 목표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평소 자기계발하면서 실력을 키우고 커리어 관리를 하는 것도 최상위의 위치 혹은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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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 사유하는 인간
린지 스톤브리지 지음, 손성화 옮김 / 사람in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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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처럼 한국 사회가 정치적 갈등과 불신, 거짓과 진실의 충돌 속에서 혼란을 겪는 시기에

『한나 아렌트: 사유하는 인간』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인 것 같다.

나라의 상황을 바라보며 불안과 분노를 느끼고, 개인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라 무력해질 때가 많았다.

아무리 말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듯했고,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고를 따라가면서 혼란스러운 시대를 견디는 데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이나 누군가가 대신 내려주는 정답이 아니라, 끝까지 현실을 바라보고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결심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린지 스톤브리지의 『한나 아렌트: 사유하는 인간』은 아렌트의 철학 개념을 단순히 정리한 입문서가 아니다.

나치 전체주의와 전쟁, 망명과 무국적, 사랑과 배신, 논쟁과 고독을 통과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사유하는 사람으로 남았는지를 보여주는 지적 전기다. 아렌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시작해 파리의 난민 공동체와 프랑스 귀르스수용소, 몽토방을 거쳐 뉴욕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철학이 현실과 떨어진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삶의 절박한 경험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책에서 가장 먼저 마음에 남은 문장은 “놀이터에 혼자 있는 이에게는 아무리 잔인하고 억압적이더라도 포퓰리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놀이에 가담하는 것이 완전한 고립보다 낫다”는 말이었다. 이 문장은 사람들이 왜 때로는 자신을 억압하는 집단이나 권위주의적 정치에까지 끌려가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인간은 단순히 옳고 그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원하고,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사회에서 고립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집단조차 자신을 받아주는 공동체처럼 보일 수 있다.

전체주의는 바로 이 고립과 외로움을 이용한다. 사람들의 불안과 좌절, 정치에 대한 환멸과 막연한 분노를 특정한 적에게 집중시키고, 복잡한 현실을 짧고 강한 구호로 바꾼다. 서로 다른 의견은 배신이나 적대행위로 취급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말하고 판단하는 정치 대신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진실만이 요구된다. 그렇게 시민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에서 집단의 언어를 되풀이하는 군중으로 변한다.

아렌트의 경고를 읽으며 전체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독재자가 나타나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서로 고립되고, 현실을 함께 판단할 공적 공간을 잃고, 자신의 생각보다 집단이 제공하는 확신에 기대기 시작할 때 이미 그 토대가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선거와 제도만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질문하며, 두려움 없이 자신의 판단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가 언젠가 몰락하더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맥락과 사고방식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증오와 공포, 정치적 거짓말, 음모론, 자기 검열, 조직된 분노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언어와 모습을 입고 되돌아올 수 있다.

과거의 제복과 깃발은 사라져도 사람들의 현실 감각을 무너뜨리고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방식은 새로운 매체와 기술을 통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폭풍 역시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짧고 자극적인 문장이 복잡한 현실을 대신하고, 상대의 주장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조롱과 낙인이 더 빠르게 퍼진다.

분노가 계속될수록 사람은 사회적 고통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건에 지쳐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결국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냉소에 빠지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제공하는 설명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치적 거짓말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사람들이 하나의 거짓을 사실로 믿게 되는 데만 있지 않다.

무엇이 사실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더 위험하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냉소가 퍼지면 사람들은 증거를 확인하고 판단하는 일 자체를 포기한다. 그 자리를 자신을 안심시키는 이야기, 분노의 대상을 선명하게 정해주는 이야기, 이미 가진 확신을 강화해주는 이야기가 대신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분노와 위기의식에도 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의심과 주장이 저절로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낄수록 확인된 사실과 해석, 우려와 추측을 더 세심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비판하고자 했던 선동과 확증편향의 방식에 나 역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독자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정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전체주의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공식이나 민주주의를 즉시 회복시키는 묘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익숙한 기준과 제도가 흔들리는 시대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조건』에서 그가 남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한다는 것은 명령을 내린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직의 결정, 법과 규정, 다수의 선택, 시대의 분위기 뒤에 숨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내가 따르는 원칙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도 괜찮은지를 스스로 묻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평범한 사람이 모두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자신이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하나의 행정 업무처럼 설명했고, 자신은 거대한 조직 속 작은 톱니바퀴였을 뿐이라며 책임을 피하려 했다.

아렌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아이히만이 상상할 수 없는 악마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했고, 상투적인 관료의 언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일조차 규정과 절차의 문제로만 받아들였다.

악의 평범성이 주는 가장 무서운 경고는 거대한 악이 특별히 잔인한 사람에게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그렇게 했으니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타인의 고통을 숫자나 업무로만 취급하는 평범한 사람도 거대한 악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사유를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이 된다.

아렌트에게 사유는 철학자나 지식인만이 하는 특별한 활동이 아니었다. 누구나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였다.

그는 이 생각을 소크라테스에게서 가져왔다. 소크라테스는 온 세상과 불화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불화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비난은 피할 수 있어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있는 내면의 목소리까지 완전히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사유가 타인을 설득하거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사유는 내가 한 행동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 일을 저지른 나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과정이다.

세상의 흐름과 다수의 의견에 맞서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내면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남게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통쾌하고 큰 힘을 얻은 부분은 아렌트가 칸트의 철학으로 아이히만의 복종 논리를 뒤집는 대목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국가의 법과 상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칸트의 윤리를 왜곡해 행동을 변호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권리는 없다”고 단호하게 받아친다.

이 말은 모든 권위에 무조건 반항하라는 구호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적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선언하는 문장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행동의 원칙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인간은 명령을 수행하는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라 자기 행동의 원칙을 세우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도덕적 주체다.

“누구에게도 복종할 권리는 없다”는 문장이 통쾌했던 이유는 인간을 권력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명령했고 법과 제도가 허용했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책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법과 명령이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을 때 인간에게는 그것을 다시 판단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부품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묻고, 부당함을 거부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이 문장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바라보며 무력감을 느끼던 내게 인간에게는 여전히 판단하고 행동할 힘이 남아 있다는 위로가 되어주었다.

물론 이를 모든 법과 제도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강조한 것은 충동적인 반항이 아니라 책임 있는 판단이다.

법치와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되, 법과 제도 자체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쓰일 때 시민이 질문하고 비판하며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아렌트는 칸트가 말한 ‘확장된 심성’을 좋은 판단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만의 사유를 펼치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하세요”라는 가르침은 내 생각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과 처지, 두려움과 이해관계를 고려한 뒤 판단하라는 의미다.

이 말은 정치적 갈등이 극심한 오늘날 더욱 중요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편만 옳고 상대편은 모두 악하다고 믿는 순간 판단은 멈춘다. 그러나 모든 주장에 같은 가치를 부여하며 사실과 거짓의 차이를 지우는 것도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아렌트가 말한 판단은 사실을 직시하면서 여러 사람의 관점을 검토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결론을 내리고 책임지는 일이다.

아렌트의 사유는 추상적인 철학 이론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33년 나치 독일을 탈출했고, 프랑스에서는 귀르스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했다. 오랫동안 국적 없는 난민으로 살아야 했으며 고향과 언어, 직업과 친구를 잃었다. 그는 『우리 난민들』에서 고향을 잃는 것은 익숙한 일상을 잃는 것이고, 직업을 잃는 것은 자신이 세계에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잃는 것이며, 언어를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과 감정 표현의 능력을 잃는 것이라고 썼다.

이 경험은 아렌트에게 ‘권리를 가질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지만, 어떤 정치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은 그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받을 장소조차 잃는다.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은 중심에 있는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하는 제도의 한계를 본다. 아렌트는 난민이자 외부자로 살아온 경험을 통해 국가와 제도, 시민권과 인간의 권리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았다.

그의 철학에는 여러 사상가와 친구들의 흔적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칸트에게서는 스스로 판단하는 인간의 존엄과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확장된 심성을 배웠고,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사유를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로 이해하는 법을 얻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과 모든 탄생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온다는 ‘탄생성’의 사유로 발전했다.

스승이자 젊은 시절의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배웠지만,

하이데거가 나치 체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통해 깊은 철학적 지성이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반면 평생의 멘토이자 친구였던 카를 야스퍼스와의 대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을 검증하고 책임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발터 베냐민에게서는 역사를 승자의 진보 이야기로만 보지 않고 파괴된 삶과 잊힌 사람들의 흔적 속에서 읽는 법을 발견했고,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는 자유란 소수 지도자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말하고 행동할 때 생겨난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아렌트가 사랑한 것은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는 복수적 세계였다.

그러나 이 책은 아렌트를 오류 없는 사상가로 만들지 않는다. 그 역시 미국의 인종 문제를 바라보면서 당사자들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판단을 내렸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강조한 아렌트 자신도 언제든 판단에 실패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실패는 오히려 사유하는 인간이란 항상 옳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현실의 반박 앞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 책을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태도 중 하나는 확신과 사유를 혼동하지 않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미 모든 답을 알고 있으며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는 확신도 인간의 생각을 멈추게 한다.

사실이 자신의 신념과 충돌할 때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사유는 이데올로기로 굳어진다.

자유로운 정신이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까지 현실의 검증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정신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다는 것은 편안한 정치적 확실성과 이론적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현실의 위험과 취약성, 모순과 당혹스러움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견뎌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답을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질문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아렌트는 사유를 변화에 직면할 때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다시 태어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심각한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뒤에는 살아 있기 때문에 세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꼈다. 인간은 과거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이 책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세계가 이미 많이 어긋났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렌트는 세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는 상황이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에게는 서로 말하고 판단하고 함께 행동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시작할 능력이 남아 있다고 믿었다.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을 바라보며 느끼는 불안도 이 책을 통해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역할, 권력기관의 견제와 균형, 법치와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질수록 두려움과 분노가 앞설 수 있다. 그러나 무력감이 크다고 해서 사유를 포기하거나, 반대로 공포에 휩쓸려 확인되지 않은 주장까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말한 용기는 단지 목소리를 크게 내는 데 있지 않다.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구분하고, 법과 제도를 공부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편의 잘못도 잘못이라고 말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자유까지 지키는 데 있다. 부당함에는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되 증오와 허위가 나의 판단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유하는 시민이 지녀야 할 용기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은 특정한 인물이나 집단을 무조건 믿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시민 각자가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권력에 질문하며, 자신의 판단에 책임지는 데서 나온다. 자유 역시 내 편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법의 보호 아래 말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는 모두가 함께 누리는 현실이 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하나의 정당이나 정권만이 아니라, 누구나 말하고 질문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세계 그 자체다.

그렇다고 부당함 앞에서 중립을 지키라는 뜻은 아니다. 아렌트는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불복종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불복종은 증오와 파괴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자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세계를 지키기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이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라의 상황을 걱정하고 분노하는 내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다만 그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분노를 판단으로 바꾸고, 두려움을 공부와 행동으로 바꾸며, 무력감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로 바꾸어야 한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작을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공적인 힘이 만들어진다. 아렌트가 보기에 진정한 권력은 한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는 순간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사유하는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간다움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힘이 사유와 판단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명령에 복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자유는 혼자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말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공적 가능성이다.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현실에 대한 공통 감각을 파괴하지만, 사유하는 인간은 그 고립을 넘어 타인의 관점을 살피고 자신의 양심과 대화하며 다시 공동의 세계로 나아간다.

생각을 멈추지 말 것. 자신의 판단을 권력이나 집단에 넘기지 말 것. 현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하지 말고, 자신이 믿는 생각까지 끊임없이 검토할 것. 그리고 세계에 대한 사랑을 냉소와 무력감에 빼앗기지 말 것.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세계가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는 사실은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그 틈을 다시 잇기 위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할 이유가 된다.

“누구에게도 복종할 권리는 없다.”

이 문장은 누구도 우리의 판단과 책임을 대신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인간은 복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사유하고 판단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시작할 수 있는 존재다.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암울하게 느껴지는 시대에 이 책을 만난 것은 그래서 더욱 큰 행운이었다.

아렌트의 사유는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위로가 아니라, 현실을 더 정확히 바라보고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위로였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일,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일이야말로 어두운 시대에도 우리가 자유와 인간다움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일 것이다.


'단단한맘포포리 서평단'을 통해 '모티브 출판사'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단단한맘 @gbb_mom

#포포리 @ppoppory_

#사람in출판사 @saramin_books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전체주의는 사막에서 번성한다고 아렌트는 학생들에게 경고했다. 정치적,실존적 공허만큼 이 극악무도한 관념이 환영받도록 만드는 것은 없다. 말이 되지 않는다면 뭐든 가능해진다. 포퓰리스트와 선전가들이 잘 알다시피 황무지에서 가짜 폭풍을 일으키면 행위, 의미, 목적, 구원의 외양이 만들어진다. 이는 오늘날의 소셜미디어 폭풍이 다시금 여절히 보여주듯 거짓 행위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폭풍이 지나갈수록 사람들은 고통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덜 민감해지고 판단 능력이 떨어진다. 삶, 정치, 고통 자체가 지겨워지는 것이다. 그때 ’불가능한’ 큰 관념을 품은 거물들이 오고, 별안간 세계는 다시금 스스로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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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2
다크모드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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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지금 피곤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기억이 진짜인지 정도는 스스로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믿는다.

평생 하나의 몸과 마음으로 살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02 : 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는 그 믿음이 생각보다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책에는 11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도 자신은 멀쩡하다고 믿었던 소년,

잠든 채 차를 몰고 가 사람을 해치고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남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자신의 경험처럼 기억한 사람, 즐겁지도 않은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을 해치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낫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이들은 특별히 어리석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몸과 정신을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책은 잠과 기억, 쾌락과 치료를 둘러싼 실제 사건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자주 잘못 이해하는지 보여준다.

심리학과 뇌과학, 의학과 역사, 범죄와 철학을 넘나들지만 어렵고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지 않는다.

먼저 흥미로운 사건을 들려준 뒤, 그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의 오류를 짚어낸다.

한 편의 미스터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빠르게 읽히면서도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열일곱 살 랜디 가드너의 수면 박탈 실험이다.

그는 1963년 과학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약 264시간, 무려 11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 실험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눈꺼풀이 무겁고 조금 예민해지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야의 초점이 풀리고 감각이 둔해졌으며, 발음이 뭉개지고 감정의 변화도 심해졌다. 나중에는 길가의 표지판을 사람으로 착각하는 환각까지 나타났다.


그런데도 가드너는 끝까지 완전히 무너져 보이지 않았다.

농구를 하고 핀볼 게임에서 연구자를 이겼으며, 기자회견에서는 질문에도 또렷하게 답했다. 한 관찰자는 기억과 판단력이 무너지는 소년을 보았지만, 다른 관찰자는 여전히 게임을 하고 대화하는 멀쩡한 소년을 보았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잠을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는지가 아니다.

잠이 부족해지면 몸만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괜찮은가’를 판단하는 능력도 함께 흐려진다는 사실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장 지친 순간의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아직 괜찮다고 쉽게 판단한다.


사람은 망가질 때 모든 기능이 한꺼번에 꺼지지 않는다.

말하고 걷고 웃을 수 있다는 이유로 멀쩡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흐려진 것이 판단력이라면 자신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결국 가드너의 실험이 보여준 것은 잠을 이긴 인간이 아니라,

무너지는 몸이 한동안 멀쩡한 척할 수 있으며 그 모습에 가장 먼저 속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책은 현대인이 잠을 지나치게 수치와 기준으로 판단하는 모습도 돌아보게 한다. 몇 시에 잠들었는지, 몇 시간을 잤는지, 깊은 잠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를 수면 앱으로 확인하고, 앱이 좋지 않은 점수를 보여주면 몸의 느낌보다 숫자를 더 믿는다.

새벽에 잠깐 눈을 뜬 것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나쁜 잠’이라고 해석하는 순간 불안이 시작된다.

불면증이 아닐까, 내일 하루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면 몸은 긴장하고 다시 잠들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잠의 형태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 기준일 수 있다.

빛이 밤을 밀어내고 도시의 활동 시간이 길어지면서 잠은 휴식이 아니라 관리하고 평가해야 할 성과처럼 변했다.

몸이 보내는 느낌보다 수면 앱의 점수를 믿고, 정해진 기준에서 조금 벗어나면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의심한다.

책은 우리가 잠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몸을 조금 더 느슨하게 받아들이는 감각까지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치명적 가족성 불면증을 앓았던 실바노의 이야기는 잠이 얼마나 놀라운 기능인지 보여준다.

그는 누구보다 자고 싶어 했지만 잠으로 넘어가는 길 자체가 닫혀 있었다.

그의 가문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비슷한 죽음이 반복됐고, 오랫동안 스트레스나 과로 때문이라고 여겼던 증상은 훗날 유전되는 질병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몸의 기능도 어느 날 조용히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변화가 반드시 통증이나 분명한 경고와 함께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잠든 채 처가로 운전해 장모를 공격한 케네스 파크스 사건은 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그의 몸은 움직였지만 판단과 기억은 충분히 깨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피해와 행동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순간 그에게 행동을 선택하거나 멈출 의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몸은 움직였는데 의식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 행동의 주인은 누구라고 해야 할까. 이 사건은 인간이 언제나 자기 몸의 주인이라는 믿음을 흔든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우리는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는 말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의 장면을 그대로 보관하는 창고라기보다, 떠올릴 때마다 다시 조립되는 이야기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한 장면도 정말 내가 직접 본 것인지, 나중에 본 사진과 가족들이 반복해서 들려준 이야기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자동차 사고 실험은 질문에 사용된 단어 하나가 기억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사고 영상을 보았지만, 자동차가 서로 ‘부딪쳤다’는 표현보다 ‘박살 났다’는 강한 표현을 들은 사람들이 차량의 속도를 더 빠르게 기억했다. 질문은 단순히 기억을 꺼내는 도구가 아니라 기억 안에 새로운 정보를 넣는 장치가 될 수 있었다.


‘쇼핑몰에서 길을 잃다’ 실험에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사건을 가족에게 들은 사실처럼 제시했다. 일부 참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을 기억한다고 말했고, 당시의 감정과 주변 모습까지 덧붙였다. 물론 모든 기억이 쉽게 완전히 조작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야기와 유도 질문, 신뢰하는 사람의 암시가 기억의 내용과 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목격자가 확신에 찬 태도로 누군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고 해도 그 기억이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사건 이후 본 뉴스와 사진, 수사관의 질문,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가 원래 기억에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섬뜩한 것은 잘못된 기억도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에도 감정과 세부 정보가 붙을 수 있고,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실제 경험이라고 굳게 믿을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즐겁지도 않은 행동을 왜 멈추지 못하는지도 살펴본다.

슬롯머신과 숏폼 영상이 사람을 붙잡는 것은 확실한 만족보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다.

재미가 없으면서도 계속 화면을 넘기고, 이미 충분히 소비했으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이것까지만 보고 자야지”라고 생각한 뒤 한 시간이 지나 있는 이유도 매 순간 즐거워서라기보다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것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책은 선의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됐던 의학의 오류를 보여준다.

사람을 낫게 한다며 오랫동안 시행된 사혈, 환자를 조용하게 만들면 치료됐다고 여긴 로보토미,

한때 의약품으로 사용됐던 헤로인과 코카인은 전문가의 확신도 잘못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손 씻기의 중요성을 주장했지만 동료들에게 외면받은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의 이야기는

기존의 믿음과 자존심이 새로운 지식을 거부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라는 제목은 처음에는 인간을 냉소적으로 비난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착각하고,

기억을 다시 쓰며, 욕망에 흔들리고, 자신의 판단을 지나치게 믿는다.

나만 부족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 불완전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망가져 있다는 사실보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내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조금 더 신중하게 듣는다.

내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확신만으로 누군가를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이 책은 독자를 겁주거나 고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가장 모르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가까워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잠과 기억, 욕망과 치료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어두운 본성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굳은 확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우리는 잠을 빌린 돈처럼 생각한다. 오늘 좀 덜 자도 내일이나 주말에 몰아 자면 갚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부족한 잠은 빌린 돈처럼 깔끔하게 갚아지지 않는다. 사라진 몇 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판단력과 기분과 집중력 속으로 슬그머니 스며든다. 문제는 그게 잘 안 느껴진다는 거다. 평소보다 좀 예민하고, 좀 멍하고, 실수가 좀 늘 뿐이라, 우리는 그걸 "원래 이런 날도 있지" 하고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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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9 - 박경리 대하소설, 5부 4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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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의 패색은 짙어지고 있지만 조선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학병과 징용, 식량난과 사상 탄압이 일상이 된 시대다.

자유는 물론이고 내일을 기대할 마음마저 빼앗긴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조차 잃어간다.

이 책에서 가장 무섭게 다가온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젊은이들이 거리와 일터, 집 마당에서 끌려가고, 가족은 기약 없는 이별을 맞는다.

그럼에도 울음과 한숨은 점차 들리지 않는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반복된 나머지 고통에 반응할 힘마저 없어진 것이다.

“체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의식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체념은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감정이다.

그러나 폭력이 일상이 되고 굶주림과 이별이 풍경처럼 반복되면 사람은 생각하는 일부터 멈추게 된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원인과 결과를 따질 힘도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린다.

억압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사람들이 침묵하는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평온한 사회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이 말할 힘을 잃고, 서로의 고통을 돌아볼 여유마저 빼앗긴 사회일 수 있다. 거리의 고요함이 평화를 뜻하지 않듯, 국민의 침묵 역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침묵은 두려움이고 체념이며,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닫아버린 결과다.


식량난을 그린 장면에서도 전쟁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밥 한 술과 술 한 잔을 나눌 여유가 사라지고,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 혼례를 치르는 일이 예사가 된다.

장례식에서도 조문객을 대접할 수 없고, 징용으로 끌려가는 아들과 남편에게 주먹밥을 싸주고 나면 남은 가족은 푸성귀가 든 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내일 닥칠 불행보다 오늘 먹을 한 끼를 먼저 걱정한다.

배급받은 식량의 절반을 팔아 다음 배급을 받을 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은 가난이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은 사람에게 미래를 생각할 여유를 빼앗는다. 생존에 모든 힘을 써야 하는 사람에게 정의와 희망,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다.

결국 전쟁은 사람의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인심과 마음의 여백까지 말려버린다.

먹을 것이 없으니 밥을 나누기 어렵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타인의 슬픔을 오래 들여다볼 수도 없다.

극심한 가난이 무서운 까닭은 사람을 굶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돌볼 힘까지 빼앗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한 술의 밥을 건네고,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행위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저항이다.


서희의 삶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길상은 형무소에 갇혀 있고, 출옥할 날짜조차 알 수 없다.

예전에는 정해진 형기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일본의 패배가 가까워지는 것은 희망이지만, 궁지에 몰린 권력이 어떤 잔혹한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공포가 된다.

전쟁에서 패배해가는 권력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키운다.

희망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그 희망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은 사람을 더욱 지치게 한다.

기다림은 끝을 알 때보다 끝을 전혀 알 수 없을 때 훨씬 잔인하다.

둘째 아들 윤국마저 학병으로 떠나면서 서희 곁의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환국 역시 아버지와 동생, 양현이 모두 곁을 떠난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지 못한다.

가족이 있어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인간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토지 19』는 가족을 단순히 혈연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서로의 불안을 알아보고 마음을 받아주는 관계가 있을 때 비로소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집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사이라도 고통을 말하지 못하면 사람은 고립된다.

반대로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상대의 두려움을 알아보고 곁을 지켜준다면 그 관계는 가족보다 더 깊어질 수 있다.


성환이 학병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성환할매가 눈이 멀어버리는 장면도 가슴을 무겁게 한다.

“자식이란 무엇일꼬?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 자식이다.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부모 자식은 맺어진 걸까?”

자식은 부모에게 기쁨인 동시에 평생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존재다.

아무렇게나 굴러도 좋으니 목숨만 길게 이어가라는 어머니의 마음 앞에서는 성공도 명예도 중요하지 않다.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것이 전쟁을 견뎌야 했던 수많은 부모의 유일한 기도였을 것이다.

전쟁은 군복을 입고 떠나는 한 사람만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는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의 시간까지 함께 빼앗는다.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은 몸으로 전쟁을 겪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끝없는 상상과 기다림으로 또 다른 전쟁을 치른다.

“원수는 세월이 갚고 남이 갚아준다”는 말도 오래 남는다.

이 말은 무조건 참고 살라는 뜻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지혜였을 것이다.

당장 맞서 싸울 힘이 없을 때 분노에 자신을 모두 태워버리는 대신 살아남아 시간을 견디는 것, 그것 역시 하나의 저항일 수 있다.

다만 세월이 모든 잘못을 저절로 바로잡아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기억하고 말하며 기록해야 비로소 시간은 심판의 힘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토지』라는 작품 자체가 한 시대의 폭력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거대한 기억이라 할 수 있겠다.

역사는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고통은 쉽게 지워지고, 말하지 않은 진실은 힘 있는 자의 이야기로 대체되기 쉽다.

박경리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사투리, 굶주림과 이별을 문장으로 남긴 것은 사라질 뻔한 사람들의 시간을 되찾아주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말이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어느새 사실처럼 굳어지는 모습도 나온다.

처음에는 추측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진실의 얼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람의 평판과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특히 불안이 가득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사실을 차분히 확인하기보다 자신의 두려움에 맞는 이야기를 더 쉽게 믿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낙인은 때로 총칼보다 오래 남는다.

박경리는 국가의 폭력뿐 아니라 일상 속 언어가 만들어내는 폭력도 놓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무심코 옮긴 말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양현과 영광의 사랑은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잃을 것에 대한 불안도 커진다.

“진정 크나큰 환희는 슬픔인지 모른다.”

행복이 클수록 그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자란다.

사랑은 삶을 완성해주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가장 연약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전쟁 한가운데서도 함께 있다면 헤어져 서로를 찾는 것보다는 행복할 것이라는 두 사람의 대화는 사랑의 본질을 단순하면서도 절실하게 보여준다.

고난 자체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현과 영광의 관계에는 출생과 신분, 가족의 역사도 얽혀 있다.

양현은 영광의 따뜻함을 알아가지만, 동시에 그 행복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영광 역시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애틋한 이유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과거와 신분, 가족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대가 짊어진 상처와 삶의 무게까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묻는다.


영광이 어린 시절 모아두었던 책과 습작 노트를 다시 발견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책을 한 권씩 사 모으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 품었던 오기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반드시 거창한 신념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꿈, 누군가 건넨 작은 돈, 어렵게 사 모은 책 한 권처럼 사소해 보이는 기억이 한 사람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기도 한다.

삶이 흔들릴 때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이유를 미래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잊고 있던 노트와 책은 영광에게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오가타와 쇼지, 조찬하의 여행은 혈연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쇼지는 오가타와 유인실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조찬하 부부의 사랑 속에서 자란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오가타는 쇼지가 찬하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그를 부러워한다.

아이에게 진짜 부모는 단지 피를 물려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안심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오가타에게 쇼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지만, 쇼지의 삶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어온 사람은 찬하다.

이 장면은 피가 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관계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함께 보낸 시간과 책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출생의 진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벽은 사람을 가두어 두는 억압적 존재이기도 하고 사람을 보호하고 의지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도 벽과 비슷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족을 이루는 일은 때로 책임과 의무라는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두는 일이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울타리 덕분에 우리는 차가운 세상에서 몸을 녹이고 안심할 수 있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을 조금 구속하더라도 기꺼이 돌아가고 싶은 벽, 즉 관계와 공동체가 필요하다.

벽이 전혀 없는 집은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 머물 수 없는 공간이다.

사람에게도 자신을 지켜주는 일정한 경계와 책임, 돌아갈 관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벽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벽이 사람을 가두는 벽인지 지켜주는 벽인지에 있다.


일본인 오가타와 유키코를 통해서는 한 국가의 잘못과 개인의 양심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오가타는 남경학살과 조선 여성들에게 가해진 참상을 떠올리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유키코 역시 전쟁을 일으키고 진실을 감춘 일본 군부를 비판한다.

일본 정부는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축소해 발표하고, 비판적인 언론인과 지식인을 탄압하며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국민의 부엌과 쓰레기통까지 살피면서 절약을 요구하지만, 정작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잘못된 판단은 감춘다.

사소한 생활을 통제하는 모습은 국가가 국민을 얼마나 세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은 자신이 만든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국민의 절약과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책임을 돌린다.

국가가 진실을 감추고 비판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전쟁은 바깥의 적과 싸우는 일을 넘어 내부의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박경리는 모든 일본인을 하나의 얼굴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국가가 광기에 빠졌을 때에도 자신의 나라가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이는 개인에게 조국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책임을 묻는다.

진정한 애국은 국가의 잘못을 감추고 두둔하는 태도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국가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의 집단이 저지른 폭력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은 그 시대에도, 지금도 귀하다.

자신이 속한 나라와 집단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배신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막는 가장 책임 있는 태도일 수 있다.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속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모습도 많은 생각을 남긴다.

권오송은 한때 주변 사람들에게 변절자라는 의심을 받았지만, 정작 전쟁을 찬양하고 징병을 독려하는 극본을 쓰라는 요구를 거부해 감옥에 갇힌다.

반대로 그를 손가락질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세가 험악해지자 일본 권력에 협력한다.

어제의 애국자가 오늘의 변절자가 되고, 변절자로 몰렸던 사람이 끝내 신념을 지키는 모순된 현실이다.

인간의 진실은 평온할 때의 말보다 위기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통해 드러난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한때의 소문과 겉모습만으로 쉽게 결론 내려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사람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더 쉽게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음악가 나일성의 태도를 통해서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도 드러난다.

그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살며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과 자신이 하는 음악까지 경멸한다.

그러나 악기와 목소리 자체에는 죄가 없다. 문제는 예술이 어떤 권력과 목적을 위해 사용되느냐에 있다.

전쟁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선전에 이용될 때 예술은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슬픔을 기록하고 인간의 마음을 지켜낼 때 예술은 저항과 위로가 된다.

『토지』 역시 역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대에 짓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문학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자유가 저당 잡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집도 가족도 없는 거지는 자유인이라는 주장에 다른 인물은 실제로 그런 처지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이 대화는 자유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경계하게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는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일 수 있지만,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빈곤일 수도 있다.

자유는 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굶주린 사람에게 내일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자유가 아니라 막막함일 수 있다.

가진 것이 많아 생기는 구속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어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구속도 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관계와 책임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이 감당할 관계와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데 있다.


배설자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도 단순한 복수의 통쾌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배설자는 일본 경찰에 협력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공포를 남긴 인물이다.

그런 그가 소나무에 묶인 채 죽음을 맞지만, 누가 왜 그를 죽였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강선혜는 배설자로 인해 오랫동안 불안과 고통을 겪었고, 그의 죽음 이후에도 마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여옥은 자신 역시 누군가를 미워하며 벌을 바랐지만, 어느 순간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벌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해자의 죽음이 피해자의 상처를 곧바로 낫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복수는 사건을 끝낼 수 있어도 기억과 공포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토지 19』는 악인이 벌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면서도 그것만으로 정의가 완성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죄를 기억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하지만, 증오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질문을 남긴다.


홍과 보연의 딸 상의가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에 맞서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평소 조용히 지내던 상의는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는 교사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밝힌다.

전쟁과 식민지 교육은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말고 명령에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신사참배와 군사훈련, 근로 동원은 학교를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그 안에서 상의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는 작아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일상의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상의의 용기는 어른들이 체념한 시대에도 다음 세대의 정신까지 완전히 길들일 수는 없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어두운 시대에도 학생들은 웃고 장난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들의 해맑음은 현실을 모르는 철없음이 아니라 폭력적인 시대가 끝내 빼앗지 못한 생명력처럼 느껴진다.


『토지 19』에서 광복은 가까워지고 있지만 인물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독자는 곧 역사의 전환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이들의 절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새벽 가까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확신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희망을 믿을 힘조차 없을 때에도 오늘을 견디고, 아이를 돌보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책 한 권을 다시 펼치는 행동 속에 희망은 이미 존재한다.

누군가는 미래가 없으니 오직 오늘만 생각하며 살면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그 말에는 체념과 생존의 지혜가 함께 담겨 있다.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시대에는 하루를 버티는 일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된다.

그러나 오늘만을 살아야 하는 삶이 진정으로 홀가분한 것은 아니다.

내일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는 인간에게서 꿈과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늘의 밥으로 목숨을 이어가지만,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삶을 계속할 수 있다.

“사람이 어찌 무병으로 살 수 있겠소? 아플 때도 있고, 고개를 넘어 또 넘어도 사람 사는 것이 안 그렇소.”

삶은 하나의 고개를 넘으면 끝나는 길이 아니다. 고개를 넘은 뒤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픈 이를 돌보고, 떠난 이를 기다리며 서로에게 밥 한 술과 마음 한 조각을 내어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아픔이 찾아올 때마다 서로를 돌보며 다시 고개를 넘는 일인지도 모른다.


『토지 19』는 거대한 역사를 기록하면서도 역사의 진짜 얼굴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헤어지게 하며 평범한 가족의 끼니마저 빼앗는 일이다.

또한 학교의 수업을 바꾸고, 예술가의 문장을 검열하며 사람들 사이에 의심과 소문을 퍼뜨린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과 언어, 관계와 기억을 차지하려는 순간 일상 전체가 전쟁터가 된다.

그런 세상에서도 인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살아간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나를 사람답게 바라봐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끝까지 살아 있게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그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돌보는 사람 자신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한다.

폭력적인 시대가 사람들을 서로 의심하고 외면하게 만들 때 타인의 곁을 지키는 행동은 시대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토지 19』가 전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라 생각한다.

역사가 인간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어도 서로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마음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절망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아니다.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며 사랑과 양심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일이다.

광복을 한 권 앞둔 이 책은 희망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밥을 짓고, 자식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소문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사람,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죄를 부끄러워하는 사람, 교사의 부당함 앞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는 학생도 보여준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반드시 거대한 영웅만이 아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방향을 조금씩 바꾼다.

어쩌면 희망은 밝은 미래를 확신하는 마음이 아니라 미래를 믿지 못하면서도 오늘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새벽이 온다고 장담해주지 않는 밤에도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사랑하며,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토지 19』가 보여주는 가장 끈질긴 생명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chae_seongmo

@dasanbooks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살아간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나를 사람답게 바라봐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끝까지 살아 있게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그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돌보는 사람 자신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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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은 스스로를 베는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 현자병법 1
항우 지음 / 블랙라벨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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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대개 승자의 이름을 오래 기억한다. 초한쟁패의 최종 승자는 유방이었고, 항우는 해하 전투에서 패한 뒤 오강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흔드는 인물은 항우다. 천하를 얻은 황제보다 천하를 잃은 패자의 마지막 노래가 더 오래 남았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산을 뽑고 세상을 덮을 만한 힘과 기개를 뜻하는 이 말에는 단순한 무용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현자병법 : 망설임은 스스로를 베는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는 항우의 승리와 패배를 따라가며, 결국 우리 삶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 되묻는 책이다. 항우의 생애를 소개하는 역사서라기보다 그의 결단과 자존심,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오늘의 삶에 비춰보게 하는 인문 자기계발서에 가깝다.


이 책은 진나라가 정해 놓은 질서 안에서 부속품처럼 살아가던 백성들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톱니바퀴라는 사실조차 잊기 쉽다. 오늘날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놓치기도 한다. 타인의 기대와 시선을 하나씩 걷어냈을 때 내 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남는지 돌아보게 된다.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것과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조직에 속한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생각과 선택을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이 문제다. 타인과 협력하면서도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삶의 주도권을 지키는 최소한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우는 진시황의 행차를 보며 언젠가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말한 인물이다. 멸망한 초나라의 후예였지만 진나라가 정해 놓은 운명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끝내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마천은 『사기』에서 황제의 일대기에 사용하는 ‘본기’에 항우를 기록했다. 왕조를 세우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의지로 살아낸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항우를 무조건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과감하고 강인했지만 잔혹하고 오만했으며,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해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다. 그의 강한 기개는 수많은 승리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고립과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항우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극단적인 고집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려 했던 자세는 배우되, 자기 확신이 타인의 목소리를 지우는 순간은 경계해야 한다. 주도적인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결과를 책임지지만, 독단적인 사람은 자신의 결정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그 대가까지 떠넘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거록대전의 파부침주(破釜沈舟)였다. 항우는 강을 건넌 뒤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렸으며, 병사들에게 사흘 치 식량만 남겼다. 그러나 이것은 무모한 만용이 아니었다. 그는 적의 상황과 보급선을 살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뒤, 그 결정을 끝까지 실행하기 위해 퇴로를 끊었다.

이 장면을 현실에 대입해보자면, 무조건 직장을 그만두거나 모든 것을 걸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퇴로와 안전장치는 때로 우리를 보호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준다.

다만 그것이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인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인지는 구분해야 한다. 나를 보호하는 안전망은 필요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할 이유부터 찾는 마음속 비상구는 결단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


이 책은 ‘완벽한 계획’의 함정도 지적한다. 우리는 “자료가 더 모이면”, “상황이 안정되면”, “조금 더 준비되면” 움직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 퍼센트의 정보가 주어지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모든 변수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선택할 기회와 결정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결단이란 두려움이 사라진 뒤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고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범위를 판단한 뒤, 불완전함을 안고 움직이는 일이다. 완벽한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핵심을 파악하고 첫 행동을 시작하는 힘이다.


타협에 대한 이야기도 깊이 남았다. 인간의 삶에는 타협이 필요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가능성을 깎아내리는 타협은 다르다. “이 정도면 됐다”, “나는 원래 이 정도다”라는 생각은 결과보다 먼저 기세를 꺾는다. 모든 일에 사력을 다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지는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신중함과 망설임도 구분한다. 신중함은 칼을 휘두르기 전에 자세를 가다듬는 일이고, 망설임은 이미 휘두른 칼에서 힘을 빼는 일이다. 결단은 극적인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결심한 다음 날에도 행동하고, 실패한 뒤에는 방법을 고쳐 다시 시도하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큰 결단보다 작은 결판을 자주 내보는 일이 중요하다. 미뤄둔 전화 한 통을 하고, 보내지 못한 메일을 보내고, 핑계만 늘어놓던 일을 오늘 한 페이지라도 시작하는 것이다. 큰 결단은 타고난 용기가 아니라 작은 선택을 스스로 내려온 습관에서 나온다.


책을 읽는 동안 한 가지 질문이 오래 남았다.


“나의 오늘은 누가 결정하고 있는가?”


망설임은 단순히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미루는 동안 선택지는 줄어들고, 결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첫걸음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두려움을 신중함이라고 부르며 삶을 미루지 않는 것이다.


항우는 천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지는 않았다. 역발산기개세는 산을 뽑겠다는 허황된 외침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무게를 스스로 들겠다는 한 인간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망설임이 스스로를 베는 칼이라면 오늘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남의 허락을 기다리며 미뤄둔 작은 일 하나를 내 손으로 결정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남이 짠 판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길을 여는 첫 번째 파부침주일지도 모른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돌이켜 보면, 우리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은 대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하지 못해서 생긴다. 사표를 내려다 망설였던 그날, 고백하려다 입을 다물었던 그 저녁, 시작한 일을 어중간한 지점에서 접어 버린 그 봄.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늘 그럴듯한 퇴로가 있었다. 더 좋은 타이밍, 더 안정된 상황, 더 확실한 보장. 그러나 그 퇴로가 우리를 살린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 퇴로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의 한계선을 본 적이 없는 채로 나이를 먹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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