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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경주 - 느긋하고 깊고 다정한 경주의 사계절 ㅣ 언제라도 여행 시리즈 3
김혜경 지음 / 푸른향기 / 2026년 1월
평점 :
도

『언제라도 경주』는, 천년의 고도라는 낯익은 수식어 대신 지금의 경주를 사랑스럽게 소개하는 책이다.
서라벌, 금성, 계림 같은 옛 이름이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지만,
김혜경 작가가 바라보는 경주는 교과서 속 역사 도시가 아니라,
나무와 풀과 꽃, 골목과 냄새, 사람들의 숨결이 스며 있는 살아 있는 일상의 공간이다.
화려한 유적과 유물이 아닌, 그것들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경주를 더 따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작가는 계절의 변화를 따라 아주 천천히 다정하게 보여준다.
책의 첫 장을 넘기면 가장 먼저 마음을 붙드는 건 경주의 사계절이다.
반월성의 벚꽃 숲에 반해 봄의 경주를 사랑하게 되고, 온통 신록으로 뒤덮인 오월의 경주에 푹 빠져 버린다. 한여름의 경주는 견디기 힘들 만큼 덥지만,
작가는 그 뜨거운 계절을 진하고 달콤한 복숭아와 오로라처럼 펼쳐지는 노을,
황남동 메타세쿼이아 아래에서 마시는 맥주 한 캔으로 기억한다.
불국사의 단풍과 샛노란 은행잎에 덮인 노서리 고분은 경주의 가을에만 허락되는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지고, 아무도 없는 겨울밤 대릉원의 정적은 쓸쓸한 찬란함이라는 모순된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남긴다.
흥미로운 건 작가가 이 계절들을 매번 다른 얼굴로 피어나는 살아 있는 시간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매년, 매 계절 경주를 찾아가도 며칠 사이로 꽃의 순서가 달라지고,
초여름·한여름·늦여름마다 하늘과 나뭇잎의 색이 조금씩 달라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성했던 잎이 어느 날 흔적도 없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어제는 봄이었는데 오늘은 겨울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매순간 다른 청춘을 키워 내는 자연을 통해, “같은 장소, 같은 계절이라도 늘 다른 감정을 전해 주는 도시”로서의 경주를 보여준다. 그 변화하는 풍경들 가운데, 문득 발길 닿는 골목 하나에도 이곳의 삶이 궁금해지는 마음이 생긴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 깊다.
황리단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자동차가 들어오기 힘든 잔잔한 골목이 이어진다.
작가는 이곳을 보이지 않는 막에 싸인 듯 조용한 동네라고 표현한다.
겨울 볕에도 부풀어 오른 산수유 꽃봉오리, 목욕탕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라지면
바로 옆 목재소에서 진동하는 나무 냄새, 집 앞 화분에서 자라는 갖가지 채소, 어스름 저녁 골목을 채우는 밥 짓는 냄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르신과 대문 앞에서 나와 반겨주는 강아지, 읍성 정자에 모여 앉아 있는 어르신들의 열린 마음, 집 앞에 색색으로 피어 여행자의 발을 붙잡는 국화들, 잠깐 열리고 사라지는 시장과 겨울에도 열심히 체조하는 할머니들.
작가가 포착한 경주의 골목은 관광 포스터에 담기지 않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혼자 밥을 먹고 나가는 손에 따뜻한 물병을 쥐여 주고, 자리가 없어 서 있으면 옆으로 와 앉으라 손짓해 주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빠르게 흐르는 세상 속에서 경주는 조금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도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리고 느긋하지만, 깊고 다정한 속도 말이다.
작가와 경주의 인연은 고작 4년 남짓이다. 남산도, 양동마을도, 포석정이나 감은사지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며 스스로를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덜컥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경주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긴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마음이 작은 건 아니라는, 다소 쑥스러운 고백이 오히려 진심을 느끼게 한다.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아서 경주는 여전히 ‘설레는 도시’로 남아 있고, 그래서일까. 작가는 경주를 빠르게 지나치지 않고 천천히 머물고 싶은 도시, 사진보다 마음으로 담고 싶은 도시로 그리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마음의 기록에 가깝다.
이 책이 매력적인 건, 단지 풍경을 잘 묘사해서가 아니라 경주라는 공간과 작가의 관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벚꽃을 기대하고 왔다가 아직 봉오리만 잔뜩 맺힌 나무들 앞에서 실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목련을 발견하며 오래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 순간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끝없이 바뀌는 자극적인 화면들에서 잠시 벗어나, 바람 소리와 새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선덕대왕신종의 종소리, 사람들 대화 소리를 들으며 봄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경험을 한다.
벚꽃이 만개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우연히 만난 목련 덕분에 오히려 더 진한 여행의 기억이 된다.
이 책에는 이런 기대와 다름이 오히려 여행을 깊어지게 만드는 순간들을 자주 등장시킨다.
식당과 카페를 묘사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양지식당의 콩나물밥과 파전을 먹는 장면은, 단순한 맛집 소개를 넘어 관계와 위로의 장면으로 그려진다.
메뉴는 단출하게 콩나물밥과 파전뿐인데, 특이한 양념장의 맛을 함께 궁금해하고 품평하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리로 이어진다.
남편 이야기, 자유와 책임,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과정 같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감정들이 콩나물밥 한 숟가락, 파전 한 조각과 함께 오간다.
“사랑받든, 자유롭든 뭐가 중요한가. 이런 사소한 감정을 사사로이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문장은, 이 여행이 단지 도시를 보는 여행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확인하고 다독이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런 ‘작은 공간들’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남는 장소가 무열왕릉 근처의 독립서점, ‘누군가의 책방’이다. 한옥과 작은 마당, 그리고 왕왕 짖는 강아지 ‘호두’가 있는 이 조용한 책방을 두고,
저자는 여긴 사실 드러누워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책방지기가 직접 골라 정성스럽게 포장해 둔 블라인드 북이 있다.
책 속 문장 한 줄과 짧은 소개만 붙어 있을 뿐, 포장을 뜯기 전까지는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
저자가 고른 문장은 “기록하지 않은 삶은 기억되기 어렵고 기억되지 못한 시간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지요.”였다. 사진을 찍고, 짧게라도 글을 남기려 애쓰는 자신과 닮은 문장을 발견하고,
그는 이 책을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아니라 ‘온전히 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집어 든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 역시 블라인드 북이라는 형식이 주는 설렘보다,
그 한 줄의 문장이 요즘 내가 자주 곱씹는 생각들과 묘하게 겹쳐져 이 책방이 더 궁금해졌다.
저자의 말처럼 이 공간이 언젠가는 정말 드러누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을 바라보는 시선도 새롭다. 나 역시 여러 번 다녀온 곳이지만, 이 책을 읽고서야 2층 테라스 난간의 구멍이 도자기 모양으로 뚫려 있다는 것, 5월 오후가 되면 그 모양 그대로 바닥에 빛이 떨어져 작은 그림자를 만든다는 사실과 아카시아꽃과 버드나무 솜털, 바람이 실어 나르는 꽃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이디야 커피숍 테라스에서 흑임자 수막새 마들렌을 들고 신라천년보고를 바라보며,
박물관은 지루하고 고리타분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풍경을 포착한다.
나뭇잎의 색, 테라스 바닥에 드리워지는 빛, 역사관 복도 끝 모서리 기둥에 새겨진 사자 조각과
그 뒤로 보이는 하늘까지, 박물관을 풍경을 감상하는 장소로 소개해 주는 저자의 시선이 참 고마웠다.
비 오는 날 친구들과 들른 퓨전 아시아 식당 ‘덕클’에서의 장면은, 중년의 우정과 건강, 두려움을 토닥이는 에피소드로 기억에 남는다. 축축한 날씨, 축축한 마음, 그와 함께 앉은 친구들은 신장 투석을 하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으로 힘든 시간을 겪어 왔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건네는 말투는 무겁기보다 유쾌하고, 가지를 싫어하던 중학생들이 이제 가지튀김을 서로 앞에 놓아주며 더 먹으라고 권해주는 장면에서는, 고단한 인생의 시기를 버티는 사람들 특유의 다정함이 느껴진다. 바깥 날씨처럼 우리 삶도 때로는 우중충하고 축축하지만, 이러다 또 맑아질 거라는 믿음이 음식 사이사이에 묻어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큰 축을 이루는 장소는 단연 ‘반월성’이다.
작가는 이곳을 단지 벚꽃 명소나 야경 스폿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돌보기 위해 찾는 마음 요양소처럼 그린다. 시름시름 말라 가던 마오리소포라 화분이 깍지벌레 때문에 죽어 갔던 경험을 떠올리며, 자기 마음 안에도 돌보지 않으면 번져 버리는 깍지벌레 같은 감정이 있다고 고백한다.
아무도 대신 잡아 줄 수 없는 그 마음의 벌레를 하나하나 닦아내기 위해 그는 혼자 경주로 떠난다.
반월성 숲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듣고, 새소리를 듣고, 축축했던 마음을 햇볕에 말리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작은 치유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노서리 고분 앞에 앉아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고,
밤에는 혼자 나가 비빔밥을 먹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선다.
그렇게 ‘나를 위한 마음 한 칸’을 마련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나가는 과정 끝에,
그는 반월성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고백을 외친다. “사랑해.”
이 말의 대상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언제라도 경주』는 여행 에세이이자 동시에 자기 돌봄의 기록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책이 단순히 경주의 명소들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이 아니라는 걸 여러 번 확인했다. 사람들이 잘 찾기 힘든, 자기 색이 또렷한 카페와 책방, 헌책방, 제과점, 고분군과 왕릉, 정원,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토함지, 향토사료관, 쪽샘지구, 골목 속 작은 식당까지 정말 많은 장소가 등장하지만,
그 모든 장소는 결국 어떤 눈으로 도시를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대구에서 가까운 경주라 자주 찾아간 도시였기에, 나는 경주를 꽤 잘 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자주 가 본 도시’와 ‘깊이 바라본 도시’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국립경주박물관의 테라스 난간이 5월의 햇빛을 받아 도자기 모양으로 비추는 아름다운 장면,
솔거미술관 옆 연못가 뽕나무에 매달린 그네, 8월 계림 바닥을 덮는 맥문동꽃의 보랏빛 카펫,
황성공원 울창한 숲과 오래된 나무들처럼, 나는 늘 스쳐 지나가며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장소를 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다.
조금 더 세심하게,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작은 사물 하나, 나무 한 그루, 난간의 구멍 하나를 보더라도, 새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경주가 더 이상 수학여행지나 지루한 문화재 관광 도시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자주 가 보았지만, 까도 까도 새롭고, 늘 같은 듯하지만 계절마다 표정을 달리하는 숨은 매력의 도시로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주는 이제 언제라도 가고 싶은 곳이 된다.
시간이 비어 있을 때, 마음이 지칠 때, 나를 다시 잘 돌보고 싶을 때, 그냥 가만히 걷고 앉아 있고 싶을 때 떠오르는 도시가 될 것 같다.
『언제라도 경주』는 그런 도시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여행의 감각을 일깨운다.
경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아직 경주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주를 바라보는 이 세심하고 다정한 시선이, 언젠가 우리 각자의 일상과 도시를 바라보는 눈에도 스며들기를 조용히 바라보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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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푸른향기 서포터즈 13기 활동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로 직접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목련을 바라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봄의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바람 소리도 들리고, 새소리도 들리고, 때론 선덕대왕신종의 종소리도 들린다.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마저 기분 좋게 들린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휙휙 바뀌는 자극적인 것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중독된 심신을 쉬게 해준다. 벚꽃 만개를 기대하고 왔다가 너무 일러 봉우리 진 벚꽃만 실컷 봤지만, 그 아쉬움을 우연히 만난 목련이 달래준 봄의 경주, 여행은 그런 뜻밖의 순간으로 진해진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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