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의 다시 만난 한국사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시즌3
정재환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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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는 오래 배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막상 돌아보면 머릿속에 조각조각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누구는 어느 시대 왕 이름이 먼저 떠오르고, 누구는 시험기간에 외웠던 연도만 희미하게 기억난다.

나 역시도 한국사를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재환의 다시 만난 한국사』는 익숙한 역사책이랑 결이 좀 달랐다.

예전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을 늘어놓으며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중요한 장면들을 골라 그 안에 남아 있는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읽다 보면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보다, 지금 우리가 왜 이런 사회를 살고 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기분이 든다.

이 책에서 계속 붙들고 가는 말이 바로 ‘역사 속 유전자’다.

처음에는 표현이 조금 낯설었는데 읽을수록 무슨 뜻인지 점점 선명해진다.

과거의 어떤 장면은 그냥 지나간 일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지금 우리 안에 성격처럼, 습관처럼, 가치처럼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저자는 한국사 특강과 집필을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한국사 속을 헤매듯 탐색한 끝에 결국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역사 속 유전자’를 찾기로 한다.

이 문제의식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단순히 옛일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책의 앞부분에서 만나는 전곡리 주먹도끼 이야기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구석기 시대 유물 이야기라고 하면 솔직히 조금 멀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전곡리 주먹도끼는 단순한 석기가 아니라, 한때 동아시아를 뒤처진 지역처럼 보았던 서구 중심의 시선을 뒤집은 상징으로 나온다.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없다고 단정하며 문화적으로 정체된 지역이라고 보던 시선이, 1978년 전곡리 발견 이후 더는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괜히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 더 좋았던 건 저자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먹도끼를 만든 사람들의 능력을 머릿속으로 먼저 그리고 실제로 만들어 내는 힘으로 본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주먹도끼는 그냥 돌이 아니라 상상과 기술이 만난 결과물인 셈이다.

구석기인에게 석기가 스마트폰 같은 필수 도구였다면, 주먹도끼는 그 시대의 가장 발전된 도구였다는 설명도 쉽고 재밌게 읽혔다. 아주 오래전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이미 필요한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기술 강국 대한민국과 연결해 보는 시선도 꽤 설득력 있다.

단군신화를 다룬 부분도 좋았다. 보통 단군 이야기는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가볍게 넘기기 쉬운데, 이 책은 그 안에 담긴 역사적 흔적을 꽤 차분하게 짚어 준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곰이 사람이 되어 웅녀가 되고,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만 보는 대신, 그 속에 담긴 집단의 이동과 결합, 정치 세력의 형성, 그리고 한반도 첫 국가의 기원을 읽어 내는 식이다.

곰과 호랑이를 토템 집단으로 해석하는 부분이나,

환웅 집단과 선주민 집단의 결합 속에서 고조선이 세워졌다는 설명은 단군신화를 훨씬 입체적으로 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홍익인간을 그냥 외워야 하는 건국이념이 아니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단군신화가 단지 신비로운 전설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시작을 설명하는 뿌리 같은 이야기로 다가왔다.

중간 이후에 나오는 여러 장면들도 하나하나 따로 노는 느낌이 아니라 한 줄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삼국통일은 승패의 역사로만 읽히지 않고, 오랜 분열 끝에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해방 이후 다시 남북으로 갈라진 현실까지 저절로 떠오르게 만든다.

팔만대장경은 단순히 대단한 문화재가 아니라, 국난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정신과 지식의 힘을 보여준다.

고려청자는 아름다운 유물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숱한 실패 끝에 결국 자기들만의 빛을 만들어 낸 도전의 결과처럼 느껴졌다.

훈민정음을 다룬 부분은 특히 오래 남았는데, 문자를 가진 사람만 권력과 지식에 접근할 수 있던 시대에 백성을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라웠다. 한글을 문화유산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소통과 평등의 사건으로 인식하게 해준다는 점이 좋았다.

수원 화성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그냥 예쁜 성곽 정도로만 알았는데, 이 책에서는 더 나은 도시와 더 나은 삶을 실제 공간으로 만들려 했던 상상력과 기술의 결과로 풀어낸다.

갑신정변은 실패한 사건으로만 외워 왔는데, 여기서는 그 안에 담긴 개혁의 절실함과 근대 국가를 향한 조급하고도 뜨거운 마음이 보인다.

만민공동회에서는 신분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함께 나랏일을 걱정하고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살아난다. 지금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걸 이런 대목에서 다시 느끼게 된다.

마지막의 조선어학회는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이 결국 사람과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묵직하게 전한다. 총을 들고 싸우는 일만이 독립운동이 아니라, 우리말을 연구하고 사전을 만들며 끝까지 버틴 일도 똑같이 치열한 저항이었다는 점이 마음에 남는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사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한 번 배웠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전혀 다르게 보였고,

지금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도 은근히 연결되는 지점이 많았다.

지혜, 기술, 통합, 호국, 예술, 소통, 민주, 독립 같은 말들이 역사책 속 표어처럼 뜬금없이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각각의 장면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사를 어렵게만 느꼈던 사람도 조금은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반대로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새로운 시선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느꼈다.

과거를 다시 읽는 일이 결국 지금을 더 잘 이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책이 꽤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알에이치코리아 RHK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결국 후지무라 사건은 일본 고고학계가 역사 날조를 묵인했거나 동조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일본에서 일어난 웃지 못할 촌극이었습니다만, 오래된 역사가 우월하다는 비이성적이며 근거 없는 인식이 빚은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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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극우가 온다
정민철 지음 / 페이지2(page2)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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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0대와 20대의 정치 감각을 바라볼 때면 예전처럼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때는 젊은 세대를 대체로 진보적일 것이라 짐작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단순한 구도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생각의 결은 크게 갈리고,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혐오와 조롱, 극단적인 언어가 너무 빠르게 번진다.

예전에는 정치가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 신문 기사 같은 비교적 정돈된 통로를 통해 다가왔다면,

이제는 짧은 영상과 밈,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자극적인 콘텐츠가 훨씬 먼저 감각을 건드린다.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의 정치적 태도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왜 저럴까”라고 묻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1020 극우가 온다』는 꽤 시의적절한 책이었다.

제목만 보면 다소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특정 세대를 몰아세우기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결을 추적하는 현장 기록이다.

저자는 한때 여의도에서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일했지만,

어느 순간 진짜 전장은 국회가 아니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같은 플랫폼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는 정책 보고서를 만들고 있는 동안, 10대와 20대는 이미 릴스와 쇼츠 속에서 정치인을 밈으로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의도가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멈춰 선 공간처럼 보였다는 저자의 고백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정치가 더 이상 ‘의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지금의 1020에게 정치는 토론이나 정책보다 더 짧고 강하고 재밌는 방식으로 먼저 스며든다.

몇 초짜리 숏폼 영상, 누군가를 희화화한 밈, 자극적인 자막 하나가 긴 설명보다 더 빠르게 인식을 만든다.

그렇게 반복해서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보다 먼저 감각이 물들고, 입장보다 먼저 분위기에 익숙해진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짚는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논리보다 비웃는 말투가 더 강력하게 소비되고,

진지한 문제 제기보다 조롱이 더 힙한 태도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라는 것이다.

책 속 교실 장면은 특히 서늘하다. 학생들이 고인을 조롱하는 노래를 아무렇지 않게 틀고,

교사가 문제를 지적하자 “왜 이렇게 진지하냐”고 받아치는 모습은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혐오가 어떻게 놀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맥락은 지워지고, 누군가의 죽음과 모욕은 웃긴 캐릭터처럼 소비된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게 되는 순간 잔인함은 유희가 된다.

이 책은 혐오가 어떻게 문화가 되고, 문화가 다시 세대의 공기처럼 퍼지는지를 아주 불편하게 보여준다.

디스코드를 다룬 부분도 인상 깊다. 부모는 카카오톡을 확인하며 아이들의 세계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폐쇄적인 서버와 음성 채팅 중심의 공간으로 이동해 있다.

그곳에서는 폭력과 조롱이 기록 없이 휘발되고, 어른들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에서 더 쉽게 놀이가 된다.

학교에서는 조용한 아이가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권력의 얼굴을 가질 수도 있다는 지적은 꽤 충격적이었다.

결국 이 책은 어른들이 모르는 사이 아이들의 감각과 윤리, 관계 맺는 방식 자체가 다른 코드로 재편되고 있다고 말한다.

후반부의 K라는 인물도 현실감을 더한다.

그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문제적 인물이 아니라 성수동 카페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평범한 청년이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설거지론’, ‘레드필’ 같은 혐오의 언어가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 장면이 무서운 이유는 혐오가 더 이상 숨겨야 할 부끄러운 말이 아니라,

‘팩트’와 ‘현실 감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어느 한쪽 정치 성향에 기대어 내용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특정 정당이나 진영의 논리로 이 책을 읽기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무엇이 실제로 위험 신호인지, 무엇을 경계하고 고쳐 나가야 하는지를 더 차분하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정치적 성향을 앞세워 이 책을 본 것이 아니라,

혐오와 조롱이 어떻게 일상적인 언어가 되는지, 알고리즘이 어떻게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른들이 놓치고 있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현실적으로 짚어보려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래서 이 책은 누가 옳고 그르다는 진영의 문제로 읽기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조심해야 할 감정의 흐름과 문화적 징후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으로 다가왔다.

『1020 극우가 온다』는 단순히 1020을 비난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왜 일부 젊은 세대가 그런 말에 끌리고, 그런 콘텐츠에 익숙해졌는지 그 배경을 묻는다.

그래서 이 책은 정치 비평서이면서 동시에 알고리즘 시대의 감정 구조를 들여다보는 사회 관찰기처럼 느껴진다

읽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책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어떤 변화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지 더 또렷하게 느끼게 만든다. 불편하더라도 현실을 정확히 보려는 사람, 혐오와 냉소가 어떻게 세대 감각이 되는지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키다 서평단‘을 통해,

'포레스트북스 출판사' 도서와 제작비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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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일베는 하수구에 있었기에 피할 수 있었다. 펨코는 접속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릴스는 내 손안의 스마트폰에서 매일 밤 나의 뇌를 해킹한다. 이것이 K가 일베보다 더 강력하고, 펨코보다 더 교화하기 힘든 괴물이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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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은 늘 시험에 들 테지만
한시원 지음 / 좋은땅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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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집을 읽을 때는 그저 사랑에 대한 시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몇 편을 지나고 나니 이 책은 사랑을 노래하는 책이라기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의 마음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시처럼 느껴졌다.

설렘이나 약속보다도 그 이후의 계절과 침묵, 그리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계절은 또 흘러가는데,

정작 사람의 마음만은 그 자리에 조금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가을 단상」을 읽을 때는 특히 그런 마음이 컸다.

“당신이 가고픈 그 어디라도 / 바람은 먼저 불어 가 닿고”라는 구절에서는

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이 남긴 기척은 세상 어딘가에 계속 닿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꽃이 자란다는 말도 좋았다.

사랑은 끝났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주 오래 작은 흔적이 남고, 그 흔적은 때로 아픔으로,

때로는 삶을 버티게 하는 기억으로 남는다.

막다른 길 끝에서 다시 더 높은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는 구절에서는,

이 시집이 슬픔을 말하면서도 끝내 절망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다.

상실도 결국 삶의 일부이고 그 끝에서 또 다른 길이 열린다고 믿는 마음이 있었다.

「그립다는 말 대신」은 더 직접적으로 아팠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사람 앞에 서 있었다는 고백은,

사랑이 끝나는 순간의 무력감을 아주 담담하게 보여준다.

꽃이 지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계절 어디에도 눈물에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표현을 읽을 때는,

세상의 풍경 전체가 한 사람의 상실로 물든 것 같았다.

사랑이 끝나면 그 사람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걷던 계절의 결도 달라진다는 걸 이 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가 더 좋았던 이유는

“외롭고 쓸쓸한 모든 것에는 / 각자만의 별이 있습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이 시집은 상실을 견디는 사람을 끝내 혼자 두지 않는다.

떠난 사랑은 비에 젖어 천천히 지워져도,

그 뒤에 남은 사람 안에는 아직 조용히 운행하는 별빛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연」에서는 다 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마음이 더 절제된 방식으로 전해졌다.

이 삶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짧지만 오래 남는다.

사랑은 늘 충분히 했다고 말하기 어렵고,

지나고 나면 늘 덜 건넨 마음이 남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영 못 오실 그대를 맞기 위해 등불 하나 밝혀 둔다는 마음도 참 서러웠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끝내 완전히 접지 않는다는 것.

이 시집은 그런 인간적인 미련과 그리움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봄비를 맞으며 그대를 그릴 때」를 읽으면서는

이 책이 왜 단순한 연애시집으로만 읽히지 않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 사랑을 우리는 왜 하나요”라는 물음은

누구나 한 번쯤 마음속으로 해봤을 질문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이 시는 거기서 사랑을 후회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 아프기만 한 사랑은 누구도 다치지 않고 더 깊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구절에서는,

한 사람을 향해 시작된 마음이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넓혀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 본 사람만이 더 큰 배려와 더 넓은 하늘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말처럼.

그래서 이 시집을 읽고 나면 사랑이 꼭 행복했느냐, 이루어졌느냐보다도

그 사랑이 한 사람을 어떤 존재로 만들었느냐가 더 중요하게 남는다.

흔들리고, 엇갈리고, 지워져 가는 과정 속에서도 마음은 조금씩 더 깊어진다.

이 책에 실린 사랑은 늘 시험에 들지만,

그 시험은 사랑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를 보여 주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떠난 줄 알면서도 오래 그리워하고,

끝내는 그 그리움마저 품은 채 살아가는 마음.

아마 이 시집이 담고 있는 감성은 바로 그런 것일 것이 아닐까?

사랑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의 이야기이면서도, 결국 사랑 덕분에 조금 더 넓어지는 사람의 이야기다.

읽고 나니 이 책은 유난히 조용히 오래 남는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위로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사랑을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는데도 사랑을 함부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어떤 날은 “당신이 그립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같은 문장이 오래 남고,

어떤 날은 “각자만의 별” 같은 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아마 이 시집은 읽는 사람의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이 책은 사랑을 아름답게 꾸미기보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마음의 결을 끝까지 바라봐 주는 책이라는 것!

그래서 더 진실하게 읽히는 시다.

'좋은땅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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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

하물며 눈 내리거나
문득 가슴 저리거든
내 서러운 마음을 추슬러
하늘 한번 올려다보리
이 삶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

떠나서 오지 않는 것은
온통 다 내 것인
이 삶의 낱낱 슬픔
마디마다 눈물 맺힌
그 세월들을
내 먼저 마중해 품었으니

하물며 세찬 바람 일어
갈꽃잎 흩날리거나
이 사무침이 더 깊어지면
노을을 심지 삼은
등불 하나 밝혀
영영 못 오실 그대를 맞으리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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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들이 당신 편이에요
하승완 지음 / 부크럼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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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완의 『살아온 날들이 당신 편이에요』를 읽으면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큰 소리로 위로하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조용한 밤에 혼자 있을 때 문득 누군가의 안부 한마디가 생각나듯,

이 책도 그렇게 차분하게 마음에 남았다.

읽는 동안 여러 번 멈춰서 내 이야기를 같이 떠올리게 됐다.

왜 나는 늘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왜 조금만 어긋나도 하루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는지…

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괜히 오래 마음이 쓰였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을 억지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는다.

무조건 괜찮다고도 하지 않고, 힘든 시간을 금방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크고 작은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마음속에는 쉽게 말하지 못하는 아픔 하나쯤은 있다는 걸 이야기한다.

섣불리 다 아는 척 위로하기보다, 마음의 무게를 조용히 헤아리며 곁에서 건네는 말처럼 느껴진다.

들어가는 글부터 기억에 남는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나의 안부를 다정하게 물어봐 주는 그 말이. 아주 짧은 말인데도 그 안부가 생각보다 깊게 다가왔다.

그냥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오늘도 버티고 있냐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냐고,

그래도 잘 살아 내고 싶다는 마음을 놓지 않고 있냐고 묻는 말처럼 느껴졌다.

살다 보면 정말 그런 날이 있다. 겉으로는 별일 없는 하루처럼 지나가는데 마음 한쪽은 자꾸 무겁고,

이유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데 이상하게 버거운 날들이 있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그 또한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조용히 다독여 준다.

초반에 나오는 “아주 작은 빛이 되어서라도”를 읽으면서는 특히 많이 공감했다.

예전의 나는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했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괜찮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애를 썼다는 부분이 참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계속 맞추고,

빛나 보이기 위해 억지로 웃으며 참고 버텼다는 문장도 그렇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 역시도 비슷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 괜히 부족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내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먼저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사람은 더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애쓰며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좋았던 건 그런 과거를 무조건 미숙했다고 잘라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였던 날들을 안타까워한다.

이 시선이 참 좋았는데, 예전의 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그때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다만 조금 외로웠을 뿐이라고 바라봐 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사람이 성숙해지는 시간은 늘 반짝이는 모습으로만 남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잘해 낸 순간들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참고 버텨 온 시간들까지 함께 지나오며 비로소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보다 오래 남는 울림”도 참 인상적이었다.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 부분이 더 마음에 들어왔다.

말수가 적은 사람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무심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차가운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꼭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은 전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침묵을 함께 견뎌 주는 사람, 다 듣고 난 뒤에 짧게 건네는 위로, 끝까지 들어 주는 태도 같은 것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고.

그 말이 참 맞게 느껴졌다. 살아 보니 오래 기억나는 사람은 말을 화려하게 하던 사람이 아니라, 내가 힘들 때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고 가만히 곁에 있어 준 사람이었다.

관계는 얼마나 많은 말을 주고받았는지보다,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헤아렸는지에 따라 더 오래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좋았던 건 이 책이 행복을 멀리서 찾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친구들이 익숙한 농담을 건넬 때, 기다리던 택배 상자를 열어 볼 때, 우연히 반가운 얼굴을 마주할 때, 누군가 내 취향을 기억해 줄 때 같은 장면들을 읽으면서 괜히 마음이 말랑해졌다.

행복은 특별한 날에만 오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런 소소한 순간들 사이에 이미 많이 들어와 있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바쁘게 살다 보면 그런 것들은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게 된다. 늘 더 큰 결과, 더 분명한 성취만 바라보느라 지금 내 하루 안에 들어와 있는 좋은 순간들을 잘 못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읽은 건 <추억으로 채우는 삶>이었다.

삶을 오래도록 숙제처럼 살아왔다는 고백이 참 남 일 같지 않았다.

몇 살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이 나이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야 하고,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더 빠르고 더 확실하고 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사실 누가 정해 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나 스스로 그런 기준을 만들고 그 안에서 나를 계속 다그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 준다. 그리고 이제는 삶을 숙제가 아니라 여행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 문장이 참 좋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만 붙잡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을 지나고 있지”를 더 자주 돌아보고 싶어졌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해야 할 일이 많아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기준으로 자신을 쉬지 않고 검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놓쳤기에 만날 수 있었던”도 참 좋았다.

버스를 놓친 날, 하루가 처음부터 틀어진 것 같았는데 그 덕분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였다. 읽으면서 나도 그런 날들이 떠올랐다. 계획대로 안 돼서 속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어긋남 때문에 오히려 다른 좋은 일이 생겼던 날들 말이다.

우리는 자꾸 놓친 것만 크게 보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만나게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이 글이 잘 보여 준다.

조금 늦어도, 조금 돌아가도,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 괜히 오래 남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크게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나는 너무 오래 내 삶을 평가하면서 살아왔구나 하는 것!

잘했는지, 부족한지, 늦은 건 아닌지, 남들보다 뒤처진 건 아닌지 그런 생각들로 내 하루를 자꾸 재단해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준다.

버텨 낸 날들이 이미 의미가 있고, 놓쳐 버린 순간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며,

내 삶은 생각보다 쉽게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살아온 날들이 당신 편이에요』는 읽고 나면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지는 책이라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조금 덜 아프게 바라보게 하고 오늘의 나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게 만든다.

지나온 시간을 실패처럼만 보지 않게 하고, 오늘의 나를 조금 덜 미워하게 하고,

사소한 하루 속에서도 작게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을 다시 보게 만든다.

조용한데 힘이 있고, 잔잔한데 오래 남는 책이다.

무리해서 잘 살려고 애쓰느라 지친 사람에게,

자꾸만 자신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 앞에서 마음이 자주 조급해지는 사람에게 참 잘 가닿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나니 제목이 왜 이렇게 붙었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나온 날들이 마냥 나를 힘들게만 한 것이 아니라,

결국 여기까지 오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크럼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당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렇게 자라고 있고,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는 시간이 있더라도 괜찮아요. 당신의 하루 안에 작은 행복이 자주 스며들기를.
숨결처럼, 꽃잎처럼 살며시 닿기를. 당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윤슬이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것처럼, 삶이 흔들려도 당신은 분명 반짝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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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 - 존재에 대한 명상
루퍼트 스파이라 지음, 김주환 옮김 / 퍼블리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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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려주기보다,

내가 늘 당연하게 여기며 지나쳤던 것을 다시 보게 만들어 준다.

루퍼트 스파이라의 『I Am 아이엠』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우리는 하루 종일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며 살아간다.

기분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고, 관계도 바뀌고, 하루 안에서도 마음은 몇 번씩 흔들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나는 나다’라고 느낀다.

생각과 감정은 계속 바뀌는데, 그 모든 변화를 겪는 ‘나’는 왜 늘 같은 존재처럼 느껴질까?

이 질문이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특히 루퍼트 스파이라의 철학이 궁금했지만 조금 어렵게 느껴졌던 사람에게 더 그렇다.

나 역시 『사물의 투명성』을 읽을 때는 솔직히 꽤 어렵다고 느꼈다.

의식과 세계가 하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머리로는 따라가려 해도 쉽게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I Am 아이엠』을 읽으면서는 그 어려웠던 내용이 조금은 감이 잡히는 느낌이 있었다.

설명으로는 멀게 느껴졌던 말들이 시의 언어를 통해 더 가까이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이 책은 일반적인 명상책과는 조금 다르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

‘나는 누구인가’를 아주 조용하게 다시 묻게 만드는 책이다.

역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루퍼트 스파이라가 30년 가까이 다듬어온 하나의 긴 시를 담고 있고,

여기에 철학적인 해설과 후기가 함께 실려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시집 같기도 하고, 명상문 같기도 하고, 철학 에세이 같기도 하다.

처음엔 이런 형식이 조금 낯설 수 있지만, 읽다 보면 오히려 이 형식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려는 내용을 가장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느껴졌다.

피곤함은 왔다가 사라지고, 기쁨도 왔다가 사라지고, 슬픔도 왔다가 사라진다.

‘나는 다섯 살이야’라고 말하던 시절도 지나가고,

‘나는 학생이야’, ‘나는 어른이야’, ‘나는 외로워’, ‘나는 사랑에 빠졌어’ 같은 상태도 계속 달라진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이 바뀌는 동안에도 늘 남아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나는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느낌이다. 스파이라는 그 자리를 ‘아이엠 I am’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아주 쉽게 바꾸면 이렇다. 내 생각은 바뀌고, 내 감정도 바뀌고, 내 상황도 바뀐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를 겪고 있는 존재 자체는 늘 여기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변하는 것들에 더 눈길을 준다. 기분이 어떤지, 지금 어떤 관계 안에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더 집중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모든 변화보다 먼저, 그 변화를 겪고 있는 ‘나’에게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저자 서문에서 특히 이해가 쉬웠던 것은 스크린 비유였다. 영화에서는 장면이 계속 바뀐다.

한 장면이 지나가고 다른 장면이 나오고, 인물도 바뀌고 분위기도 바뀐다.

그런데 그 모든 장면이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는 이유는 스크린이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은 영화 속 장면들처럼 눈에 띄게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장면이 나타나는 자리를 내어준다.

저자는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생각, 감정, 감각, 관계, 행동은 계속 바뀌지만, 그 모든 경험이 지나가는 자리로서의 ‘나’는 늘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좋았던 이유는 우리가 왜 계속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지를 꽤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더 많이 다르다.

생각도 달라졌고, 감정도 달라졌고, 삶의 조건도 달라졌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나라고 느낀다.

이 책은 그 이유를, 변하는 경험들 뒤에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 추상적으로만 들리지 않았던 것은, 실제로 우리 모두가 이미 그런 느낌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평소 자신을 감정과 너무 쉽게 연결해서 생각한다.

“나는 우울해”, “나는 외로워”, “나는 기뻐”, “나는 실패한 것 같아” 같은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문장에서 ‘우울해’, ‘외로워’, ‘기뻐’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나는”에 더 주목한다.

우울한 감정은 바뀔 수 있고, 외로움도 계속 이어지지 않으며, 기쁨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들이 바뀌는 동안에도 계속 남아 있는 ‘나’는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읽다 보면 내가 지금까지 ‘나’라고 믿어온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사실은 잠시 스쳐가는 상태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내 기분, 내 역할, 내 상황이 나의 전부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루퍼트 스파이라의 다른 저서인 『사물의 투명성』과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다뤘던 내용을 시의 언어로 압축해 담아낸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설명을 길게 따라가는 느낌보다는 짧은 문장 하나가 마음속에 오래 남는 느낌이 더 크다.

“나는 앎이며, 이 앎과 함께 모든 것이 알려진다”, “나는 현존이며, 이 현존 안에서 모든 것이 나타난다”, “나는 실체이며, 이 실체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같은 문장들은 처음 보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쉽게 풀면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모든 경험이 나타날 수 있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이미 내 안에 있다.

설명으로만 들을 때는 멀게 느껴지던 말들이 이 책에서는 시의 형식 안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천천히 스며든다.

이 책이 말하는 명상도 그래서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보통 명상이라고 하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거나, 특별한 평온을 얻어야 한다거나,

더 높은 단계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스파이라는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명상은 무언가를 새로 얻는 일이 아니라, 이미 늘 여기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에 가깝다.

다시 말해 명상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있는 나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다. 명상이 꼭 대단한 체험이나 특별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에서 특히 아름답게 느껴졌던 부분은 ‘존재의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쉽게 말하면,

내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존재와 세상의 근본이 완전히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이 생각을 여러 종교와 철학의 표현으로 연결해 설명한다.

기독교에서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열반과 윤회는 하나다”라고 하며,

힌두교에서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모두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부분도 저자 서문을 읽으면서 조금은 감이 잡혔다.

스파이라는 우리 각자의 존재가 따로 떨어진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그것을 ‘나’라고 부르고,

우주와의 관계에서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겉으로는 내가 세상과 떨어진 작은 존재처럼 보여도,

더 깊은 차원에서는 세상과 완전히 끊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파도와 바다의 비유가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파도는 각각 따로 보이지만 사실 모두 바다다.

사람도 겉으로는 서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물의 투명성』에서는 이 부분이 조금 더 추상적으로 느껴졌는데,

『I Am 아이엠』에서는 설명이 더 짧고 응축되어 있어서 오히려 핵심이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 생각은 사랑에 대한 문장으로 이어질 때 조금 더 쉽게 다가왔다.

이 책은 내 안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관계 속에서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이 말도 쉽게 풀면, 사랑은 완전히 남이었던 두 사람이 갑자기 이어지는 일이 아니라,

원래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던 존재가 그 사실을 알아보는 경험에 가깝다.

그래서 사랑은 누군가를 가지는 일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거리가 잠시 가까워지는 순간에 더 가깝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좋은 음악을 들을 때면,

우리는 가끔 나 자신을 잊고 그 순간에 푹 들어가게 된다.

그때는 내가 대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 그 장면이나 음악 속에 함께 머물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은 그런 순간을 통해 나와 세상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느끼게 한다.

그래서 사랑과 아름다움은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가 잠시 가까워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스파이라의 문장이 특별한 이유는 이런 이야기를 딱딱하게 설명하지 않고

시처럼, 때로는 역설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지만 침묵한다”,

“나는 알지만 알려지지 못한다”,

“나는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같은 문장들은 처음엔 난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자꾸 읽다 보면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계속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나’는 눈앞에 놓고 볼 수 있는 물건처럼 붙잡아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이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본질도 하나의 대상으로 붙잡을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시적인 느낌과 철학적인 뜻을 함께 살리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이 함께 실린 구성은 꽤 반갑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빨리 읽기보다, 어떤 날은 한두 문장만 읽고 오래 생각해보는 방식이 더 잘 맞는다.

“나는 나 자신을 표현할 단어가 없지만 모든 단어가 오로지 나만을 표현한다”,

“행복을 바라는 당신의 욕망은 당신의 가슴 안에서 나의 은총이 당기는 것이다”

같은 문장들은 해석보다 먼저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히 행복을 바라는 마음조차 내 안의 더 깊은 존재가 나를 부르고 있는 움직임일 수 있다는 대목은 오래 곱씹게 된다.

『I Am 아이엠』은 단번에 이해하고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어렵기만 한 책도 아니다.

오히려 본문은 생각보다 짧고 단순하며, 같은 방향을 여러 방식으로 반복해서 가리킨다.

그래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이라도 감이 잡히는 순간이 온다.

나 역시 『사물의 투명성』을 읽을 때는 너무 멀게 느껴졌던 내용들이 이 책을 통해 조금은 가까워졌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가 왜 계속 ‘아이엠’을 말하는지는 예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느껴졌다.

생각과 감정은 계속 바뀌고, 삶의 조건도 관계도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 모든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는 존재는 늘 이미 여기에 있었다.

『I Am 아이엠』은 바로 그 사실을 시의 언어로 보여주는 책이다.

무언가를 더 얻어야만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 자체로 충분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명상이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원래 늘 여기에 있었던 나를 더 이상 놓치지 않는 일임을 알게 해주었다. 이 책은 그 단순하지만 자주 잊고 사는 사실을 다시 깊게 바라보게 만든다.

'퍼블리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그의 시는 독자가 자신의 본질적 현존으로 되돌아가 쉴 수 있는 형태 없는 그릇이다. 잘 빚어진 그릇이 내용물을 드러내주듯이, 잘 빚어진 이 시는 우리의 본질적 현존을 드러내준다. 훌륭한 도예가는 그릇을 만들지 않는다. 빈 공간을 만든다. 스파이라의 시 역시 그러하다. 각 시구는 어떤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음으로 충만한 그 공간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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