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를 위한 창업선생 이병철 정주영
박상하 지음 / 북오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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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삼성과 현대라는 거대한 제국을 일군 두 사람인, 이병철과 정주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이미 여러 석학들이 남긴 『삼성과 소니』, 『SAMSUNG WAY』, 『호암의 경영철학』 같은 연구서들이 시스템과 전략을 정교하게 분석해 왔음에도, 정작 왜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졌는지, 어떤 내적 동력에서 그런 선택이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해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이 택한 길은 조금 다르다. 위에서 시스템을 내려다보는 분석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삶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창업가 이병철’과 ‘창업가 정주영’이라는 실존의 껍질을 벗겨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MZ세대가 실제로 사업을 시작할 때, 혹은 기업의 최전선에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경영 창작의 살아 있는 텍스트로 두 사람을 다루려는 시도다.

저자는 이병철과 정주영의 성공을 단순한 ‘기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척박한 황무지에서 오늘의 삼성과 현대를 일구기까지의 여정 뒤에는, 말로 다 풀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고 본다. 저자는 이 힘을 두 사람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꾸준히 작동해 온 ‘숨은 근육’, 다시 말해 에토스(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 몸에 밴 생각의 방향)로 이해한다. 이 책의 ‘2인 비교 스토리’는 바로 그 숨은 근육이 무엇이었는지를, 두 사람의 삶과 선택을 따라가며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밝혀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 퍼즐을 맞추기 위해 저자는 먼저 리더십의 두 유형을 꺼내온다.

경영학자 짐 콜린스가 말한 ‘숲속의 여우’와 ‘숲속의 고슴도치’다.

여우는 여러 길을 알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전략을 바꾸는 존재다. 냄새와 흔적을 읽고, 발자국을 지우고, 여러 수법으로 사냥감을 몰고, 때로는 죽은 척하며 숲의 환경 전체를 활용한다.

반대로 고슴도치는 한 방향으로만 돌진하는 동물이다. 시야도 좁고, 자주 부딪치고, 성질도 급하지만, 한 번 사냥감에 꽂히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콜린스에 따르면 세상의 리더는 결국 이 두 축 어디쯤에 놓인다.

직선과 곡선, 저돌성과 신중함, 행동 우선과 사고 우선,

디오니소스적 인간형(감정적이고 본능적이며, 열정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중시하는 인간 유형)과

아폴론적 인간형(이성적이고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며, 차분하게 계산하고 계획하는 인간 유형)…

이 대비를 통해 저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말한 ‘평가형’ 이병철과 ‘리더형’ 정주영을 더 입체적으로 읽어내려 한다.

이병철의 초상은 ‘숲속의 여우형 리더’라는 키워드로 정리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정미소, 상회, 양조장을 거쳐 제일제당·제일모직으로 이어지는 사업 확장 과정에서, 한 번 정상에 오른 뒤 거의 반세기 동안 정점에서 밀려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떤 스승이나 멘토의 그늘을 언급하기보다, 자신의 운명과 감각을 더 믿었던 인물이다.

그의 운명론은 흥미롭다. 재물과 지위는 마음대로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리와 우주의 섭리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면서도, 그 ‘운’을 기다리는 태도는 수동적이지 않다.

운이 올 때까지 둔하게 버티는 인내와,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물고 늘어지는 용기, 이 두 가지가 그의 운명론을 이룬다. 운을 기다린다는 말이 얼핏 체념처럼 들리지만, 이병철에게 그것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평소에 자신을 갈고 닦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의 성장 배경 역시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다. 가난에서 시작한 많은 1세대 창업가들과 달리, 이병철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여유 있는 집안에서 출발했다. 첫 창업 자본도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여유가 그를 ‘안전한 선택’에 머무르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큰 판을 상상하고 그 판을 현실로 끌어오는 통 큰 기질로 이어진 점이 흥미롭다. 한국비료처럼, 당시 한국 경제 규모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프로젝트에 세계 최대 수준으로 뛰어든 것도 그런 기질의 연장선이다. 그는 단지 큰 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면 1등, 아니면 안 한다”에 가까운 제일주의를 사업의 문법으로 삼았다.

성격 역시 이 문법과 맞닿아 있다. 차갑고, 냉정하고, 까다롭고, 예리한 사람. 완벽을 추구하며 식사에 나오는 빵조차 최고만을 고집한 사람.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일상에서 ‘최고의 것’을 직접 경험하고 비교해 봄으로써, 자기가 만들 제품의 기준을 몸으로 익히려는 태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의 완벽주의는 결국 삼성의 사업성 검토 지침 같은 시스템으로 구체화된다.

사업의 목적, 환경, 추진 방법, 조직, 성과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검토하는 매뉴얼은,

여우처럼 이리저리 꾀를 쓰되, 동시에 치밀함을 끝까지 놓지 않는 리더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병철의 내면을 지배한 건 ‘견고한 고독’이다. 그는 누구와도 쉽게 섞이지 않았고, 자신의 성을 스스로 쌓아 올린 뒤 철저히 성문을 닫아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이 고독이 그를 난해하고 신비로운 인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냉철한 이성, 인간에 대한 통찰,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시야를 가능하게 한 기반이기도 했다.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여우답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 번의 쓰라린 경험 끝에 기업가는 정치와 직접 엮여선 안 된다는 강한 금기를 세운다. 그때부터 삼성은 권력 대신 기술과 경쟁력이라는 마이 시크릿에 사활을 걸게 되고, 남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첨단 영역, 작고 가볍지만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경소단박형 제품들로 승부를 보려 한다.

반면 정주영은 전형적인 ‘숲속의 고슴도치형 리더’로 등장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현대왕국을 일으킨 그의 인생은,

“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야행성 동물”이라는 고슴도치의 이미지와 잘 겹친다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에 먼저 몸을 던지고, 수없이 부딪히고 넘어지면서도, 끝내 뚫고 나가는 사람. 조선업 진출, 현대자동차의 포니 개발, 중동 건설시장 정복, 서산 간척 사업 같은 사례들은 그의 도전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조선소 설립 에피소드는 그 성격을 압축해 보여준다.

정몽구가 승용차 생산에 성공한 뒤, 다음 목표로 대규모 조선소를 점 찍는다.

그때 한국엔 조선 기술도, 경험도, 필요한 자본도, 안정적인 수주 시장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의 안 되는 이유 리스트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근거로 시도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거나,

조건이 이렇게 안 맞는데 어떻게 배를 만드느냐는 회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정주영은 조건을 보고 물러서는 대신, 조건을 만들어 가는 쪽을 선택한다.

프랑스와 스위스 은행에 이어 영국 은행의 문을 두드리며 대출을 요청하고,

“수주 계약서부터 가져오라”는 답을 듣자 바로 그리스로 날아가 세계적인 선박왕 리바노스를 찾아간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우리는 16세기에도 철갑선을 만들던 나라다. 엔진과 철판으로 만드는 배라면 반드시 잘 만들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배짱인 설득을 이어간다.

그리고 결국 초대형 유조선 2척의 수주 계약서를 받아낸다.

그 계약서를 들고 다시 은행으로 돌아가 자금을 마련하고, 그 자금으로 조선소를 짓고, 다시 그 조선소로 수주를 소화해 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건이 안 돼서 못 한다는 말이 얼마나 허약한 변명인지 깨닫게 한다.

나는 이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 할 때, 갖춰지지 않은 조건을 따져 보며 시작도 하기 전에 스스로 발을 빼는 경우가 많다. 자본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고, 시장도 불확실하니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그런데 정주영의 방식은 정반대였다.

먼저 몸을 던져 실행의 무대 위에 올라가고, 그 과정에서 자본과 기술, 신뢰라는 조건을 차례로 만들어 간다. 이것이 무모한 만용과 다른 점은, 그 실행이 철저히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얻은 감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 자동차, 조선, 간척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일선 현장을 발로 밟으며 ‘어디에 황금이 되는 산업이 있는지, 그 산업을 자기 기업에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라는 CEO의 본질적인 역할에 집중했다.

중후반부의 ‘재와 평의 사이’라는 논의는 이런 두 사람의 차원을 정리해주는 개념적 틀이 된다.

저자는 사람의 역량을 일곱 단계로 나누면서,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지점은 평(平)–지(智)–재(才)의 구간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어느 정도까지는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평’의 세계가 있고,

배움과 깨달음, 자기 단련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의 세계가 있으며,

그 위에 설명하기 어려운 입체의 차원인 ‘재’의 세계가 있다.

이병철과 정주영은 명백히 이 ‘재’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출발선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기업과 기업가는 지금 대부분 사라졌지만,

삼성과 현대만은 여전히 글로벌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차이를 만든 힘이 바로, 설명하기 쉬운 평면적 역량을 넘어서는,

비상한 재주와 이를 토대 삼은 선택과 실행의 누적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저자가 ‘재’를 타고난 운명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깨달음과 학습, 자기 단련을 통해 지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고,

거기에 보통의 몇 배에 달하는 노력과 태도가 더해진다면 재의 세계를 향해 문을 두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병철의 일등정신과 정주영의 도전정신은 바로 그 ‘몇 배의 노력’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결국 이 책이 MZ세대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좋은 시스템과 탁월한 전략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태도, 반복되는 선택, 실패 앞에서 멈추지 않는 실행에서 서서히 만들어진다.

이병철처럼 냉정하게 현실을 읽고, 일등을 목표로 판을 설계하며 기술과 기준을 끝없이 끌어올리는 길도 있고, 정주영처럼 조건이 없어도 먼저 몸을 던져 새로운 산업의 길을 뚫어가는 길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조건이 되면 언젠가 해보겠다는 말이 사실상 영원히 하지 않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창업을 꿈꾸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보다 주도적으로 이끌고 싶든, 결국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서 재의 세계를 향해 조금 더 깊이 파고들 용의가 있는가를 묻는 질문처럼 다가온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앞으로의 MZ세대가 만들어낼 새로운 ‘경영 창작의 스토리’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북스타그램_우주 @woojoos_story 모집,

북오션출판사의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2인 비교 스토리’는 이병철과 정주영이라는 실존하는 경영사(business history)가 지금의 삼성과 현대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보는 데서 출발한다. 오늘날 삼성과 현대라는 실체를 경영의 주체인 두 사람의 남다른 기업가 활동(entrepreneurial activity)을 통해 전체적 시각으로 낱낱이 들여다볼 참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이병철의 경영 창작은 왜 강력한 개성과 냉혹한 성격을 내세웠는지,
반면에 정주영의 경영 창작은 왜 두둑한 배짱과 불같은 열정인지 들여다보려 한다.
더불어 이병철의 ‘이유는 없다, 명령은 내가 한다’는 황제 경영(push strategy) 전략과
정주영의 ‘이유는 없다, 나를 따르라’는 정벌 경영(lead strategy) 전략의 밑그림에 대해서도 면밀히 들여다볼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2인 비교 스토리’는 두 사람이 창작해낸 삼성과 현대라는, 지금의 경영 창작에서 우리에게 어떤 문법을 제시하고 있는지까지 속살을 빠짐없이 톺아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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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독한 별처럼
이케자와 하루나 지음, 서하나 옮김 / 퍼블리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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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자와 하루나의 『나는 고독한 별처럼』은 겉으로 보면 먼 미래와 낯선 생명체를 배경으로 한 SF 단편집이지만, 실제로는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일곱 번 다른 방식으로 변주해 보여주는 책처럼 느껴진다. 버섯과 공생하는 인간, 성별이 불분명한 존재와의 동거, 다이어트 강박이 우주 규모 사건으로 번지는 세계, 비 한 번 제대로 오지 않는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AI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멸망이 예정된 콜로니의 마지막 주민들까지. 배경은 계속 바뀌지만, 각각의 이야기 안에는 “외톨이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그래도 누군가와 연결되려 애쓰는 모습”이 공통된 정서로 흐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건 첫 번째 단편인 「실은 붉다, 실은 하얗다」다. 이 이야기는 이 책 전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드러내 주는 작품이라,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들이 전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뇌에 ‘뇌큰균’이 감염되면서 서로의 감정과 상태를 깊이 공감하는 능력을 얻는다. 이 공생 능력은 마이코파시라는 이름을 얻고, 그 덕분에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평온한’ 곳이 된다. 사소한 엇갈림으로 벌어지는 싸움이나 이혼, 폭력 사건이 줄어들고, 차별적인 말과 행동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사람들끼리 서로의 마음을 너무 잘 느끼기 때문에 함부로 비난하거나 공격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더 나은 세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이 변화의 과정을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뇌큰균과의 공생을 “오염”이라 부르며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감염된 아이의 미래에 절망해 아이의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 한 가족, 감염자를 노린 폭탄 테러, 균을 신격화하며 감염자의 피를 뒤집어쓰는 광적인 종교 집단, 갑작스레 퍼졌다가 사라지는 음모론들….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는 길은 공포와 혼란,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오는 다큐멘터리 속 내레이터의 한 문장을 기억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 길은 일방통행이었다.” 마음에 들든, 무섭든, 반대하든, 인류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는 선언이다. 이 장면은 현실에서 성소수자, 새로운 가족 형태, 새로운 기술과 가치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격렬한 찬반과, 결국 ‘이제는 이게 일상이야’라고 말하게 되는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회에서 공감은 겉으로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인물들의 구체적인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단순히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네오가 친구 곳코와 손을 잡고 느끼는 감각은 그 대표적인 순간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다정한 말이 오가는 가운데, 네오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전신으로 겪는다. 간질간질하고, 상쾌하고, 따뜻하고, 황홀해서 그냥 이대로 평생 있고 싶다고 느낀다. 이건 더 이상 단순한 우정이라기보다는, 동성인 곳코에게 느끼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그 감정이 육체와 마음 깊숙이까지 스며드는 순간에 가깝다. 그런데 동시에, 이 감정이 어디까지가 ‘나의 진짜 마음’이고 어디부터가 균과의 공생으로 인해 증폭된 감각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사랑과 공감이 내 안에서 우러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세계 전체가 그렇게 느끼도록 설계되어 버린 것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이 모호함과 두려움, 동시에 달콤한 쾌감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얀 실”의 이미지다. 하얀 실이 길게 늘어져 다가와 몸 안으로 스며들려 하고, 화자는 “넣고 싶다”와 “넣고 싶지 않다”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지 마, 하지 마, 열지 마, 내 안으로 들어오지 마”라고 속으로 외치면서도, 그 실이 자신을 가득 채워 새롭게 만들 때 엄청난 만족감과 충만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 장면은 분명 성적인 뉘앙스를 가지면서도, 누군가와 하나가 되는 일,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 얼마나 달콤하면서도 무서울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등장하는 하얀 실은, 땅속에서 퍼져 나가며 서로를 이어 주는 버섯의 하얀 균사를 떠올리게 한다. 균사는 하나의 몸이라기보다, 여러 점을 연결하면서 넓게 퍼지고 스며드는 존재다. 그래서 이 하얀 실은 몸과 몸,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는 연결의 상징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어 나라는 감각을 점점 흐리게 만들 수도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단편에서 붉은색과 하얀색은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붉다”는 말은 피, 심장, 상처, 격렬한 욕망과 사랑, 폭력을 떠올리게 한다. 네오와 곳코 사이의 황홀함, 질투, 초조함, “너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들이 모두 붉은 기운을 띤다. 또한 공생 사회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폭력과 피의 역사도 붉은색이 상징하는 영역이다. 반대로 “하얗다”는 말은 균사, 실, 공생, 평온, 깨끗해 보이는 세계의 표면을 떠올리게 한다. 공감 능력이 확장되어 갈등과 차별이 줄고, 모두가 평온하고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은 전형적인 하얀 유토피아의 이미지다.

제목이 “실은 붉다, 실은 하얗다”인 것은 이 세계와 관계들이 어느 한쪽 색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겉으로 보기엔 하얗게 평화롭지만, 그 바닥에는 늘 붉은 욕망과 상처, 폭력이 잠겨 있고, 또 붉은 혼란 속에서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하얀 위로가 자라난다. 결국 이 이야기 속 사랑과 공감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침투이고, 구원인 동시에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조금씩 포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첫 번째 단편을 가장 흥미롭게 읽은 이유는,

이 책 전체가 붙들고 있는 질문들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단편을 통해 “서로를 잘 이해하는 사회가 정말로 온전히 좋은 것일까?”,

“공감이 지나치게 커지면 오히려 ‘서로 다름을 견디는 힘’은 약해지는 건 아닐까?”,

“누군가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 안에는 나를 지우고 싶어 하는 욕망도 함께 섞여 있는 건 아닐까?”

같은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모양을 달리하며 뒤이어 등장하는 다른 여섯 편 속에서도 반복된다.

나머지 이야기들 역시 모두 고독한 별처럼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 어떻게든 서로와 연결되려 애쓰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성별조차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에서는, 젠더와 돌봄, 탄생과 죽음의 경계가 다시 질문되고, 다이어트 강박이 우주적 소동으로 번지는 이야기는 ‘몸’이라는 껍데기를 둘러싼 사회의 시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잔인한지를 드러낸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살아가는 작은 동물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뀌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누군가를 지키며 기다리는 마음,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이 무엇인지 조용히 묻는다. AI가 인간 대신 판단하고 돌보는 세계를 그린 이야기는, 편리함의 이면에서 책임과 선택권을 누구에게 넘기고 있는지를 되짚어 보게 하고, 마지막에 실린 표제작 「나는 고독한 별처럼」에서는 멸망이 예정된 콜로니에서, 그래도 서로에게 마지막까지 건네줄 수 있는 위로가 무엇인지, 고독과 죽음을 앞에 두고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부를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일곱 편의 이야기는 모두 배경도 다르고 분위기도 조금씩 다르지만, 책을 읽고 나면 하나의 문장으로 엮이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모두 고독한 별처럼 각자 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멈출 수 없는 존재다. 버섯과 공생하는 사춘기 소녀들, 성별과 형태가 애매한 존재들, 건조한 사막의 생명들, 몸과 목소리, AI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멸망해 가는 공간의 마지막 주민들까지, 이 책 속 존재들은 모두 어딘가 이상한 조건을 가진 채로 외로움과 함께 살아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조금씩 손을 뻗어 다른 존재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나는 고독한 별처럼』은 SF 설정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풍부한 상상력과 세계관이 즐거운 책이다. 관계와 정체성, 외로움에 대해 오래 생각해 사람들에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배제해 왔던 존재들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기도 했다.


'퍼블리온 서포터즈 2기' 활동을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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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훗, 이거 그거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
"맞아. 아플 때도 건강할 때도."
무언가가 톡톡 터지듯이 간질간질하면서 상쾌하고 따뜻한 기분이 샘솟았다. 이런 느낌 뭐지…, 이게 뭐지?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머리를 쓰다듬는 곳코의 손을 꽉 잡았다. 곳코의 손이 내 손가락과 뒤엉켰다. 이상하게 너무 황홀하고 기분이 좋아 그냥 이대로 평생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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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앉아있는 사람을 위한 책 - 놀랍도록 간편하고 짜릿하게 효과적인 사무직의 통증 해소법
엔도 겐지 지음, 신희라 옮김 / 사이드웨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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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큰 병은 아닌데, 늘 피곤하다.”

“밤에 자도 개운하지 않고, 낮이면 머리가 멍하다.”

“어깨랑 목이 항상 뻐근한데, 그냥 직업병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출근만 하면 괜히 예민해지고, 사람 말 한마디에도 더 상처받는다.”


요즘 주변에서, 그리고 내 입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들이다. 우리는 이 모든 걸 스트레스, 나이, 멘탈 탓으로 돌리면서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 채 버틴다. 『아주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강하게 브레이크를 건다. 당신이 겪는 무기력, 불면, 짜증, 두통, 눈의 피로가 “그냥 내 성격, 내 멘탈”이 아니라, 의자 앞에 앉아 있는 그 자세, 그 시간에서 비롯된 아주 구체적인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의 언어로 설명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하루 대부분을 의자에 붙어 있는 사람을 위해 쓰였다. 저자는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직장인뿐 아니라, 하루 두 시간 이상 앉아서 일하는 사람까지 모두 사무직으로 부른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 ‘앉아 있는 방식’ 자체가 어깨와 목, 허리의 결림을 만들고, 그 결림이 몸과 마음 전반에 파급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어깨 결림은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다. 저자는 결림이 구역감, 현기증, 무기력, 집중력·기억력 저하, 불안, 불면, 눈의 피로와 시야 흐려짐 같은 증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통증이 계속되면 뇌의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들고,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깨지며, 몸과 마음이 계속 긴장 모드(교감신경 우위)에 갇힌다. 그 결과 업무 효율은 떨어지고, 출근이 싫어지고, 사람과 일에 대한 여유가 사라지면서, 결국 우울증이나 자율신경기능이상 같은 마음의 병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멘탈 문제”라고만 여기는 많은 증상이 사실은 목·허리 결림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집요하게 짚어낸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부동화’다. 근육은 원래 움직이면서 혈액을 펌프질하고, 영양과 효소를 받고, 피로물질을 내보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자세로 계속 앉아 있으면 근육이 움직이지 못하고, 펌프가 멈추듯 혈액순환도 떨어진다. 혈관이 압박을 받으면서 피로물질과 수분이 쌓이고, 그 피로감이 결림과 통증으로 바뀐다는 것이 기본 메커니즘이다. 통증이 생기면 몸은 반사적으로 더 긴장하고, 더 긴장한 근육은 다시 혈류를 나쁘게 만들며, 통증은 만성화된다. 저자는 “단 30분만 가만히 있어도 근육은 굳기 시작한다”는 연구를 근거로,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30분마다 한 번은 자세를 풀어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스트레스가 더해지면 상황은 훨씬 나빠진다. 마감, 실적, 인간관계 같은 업무 스트레스는 교감신경을 더욱 흥분시키고, 근육을 쉽게 뭉치게 만들며, 통증에 대한 민감도까지 높인다. 결림과 통증이 자율신경을 교란시키고, 교란된 자율신경이 다시 통증과 스트레스를 증폭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저자는 사무직의 하루는 인체 설계 기준으로 보면 “매우 부적절한 환경”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겪는 피로와 짜증, 무기력을 단순 의지 부족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도록 시선을 돌려 준다.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도 여기에 기름을 붓는다. 머리는 체중의 약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무거운 구조인데, 고개를 15도, 30도, 60도로 숙일 때마다 목이 버텨야 하는 하중은 두 배, 세 배, 다섯 배까지 늘어난다. 출퇴근길과 쉬는 시간 내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는 자세는 목뼈의 정상적인 커브를 무너뜨리고 ‘일자 목’·‘거북 목’을 만든다. 그 부담은 다시 목과 어깨 근육으로 전가되어 결림과 통증을 악화시키고, 두통과 눈의 피로, 만성 피곤함으로 이어진다. 허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엉치뼈 앉기’나 무리한 ‘좋은 자세’ 고집은 척추의 곡선을 잃게 만들고, ‘일자 허리’나 과도한 요추 전만을 부르며 요통을 심화시킨다.

이 책의 장점은, 여기서 “몸이 이렇게 망가진다”는 경고만 던지고 끝내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까지 꼼꼼히 제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도쿄의과대학에서 척추·척수 연구와 진료를 병행해 온 정형외과 의사이자, 스스로도 어깨 결림과 요통을 겪어 본 환자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나 일상에서 바로 따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본 운동(어깨뼈 떼어내기 스트레칭, 골반 진자 운동, 까치발 체조)을 소개하고, 각각이 어떤 원리로 통증을 줄이는지까지 설명한다. 각 동작에 QR코드를 달아 실제 영상을 보며 따라 할 수 있게 한 구성도, “운동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책”이라는 인상을 준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흘려 보내기 마사지’와 ‘근막’ 개념이다. 저자는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온 “세게 주무르면 풀린다”는 생각이 오히려 근육에 미세 상처와 내출혈을 일으키고, 회복 과정에서 섬유화가 생겨 더 단단한 덩어리로 굳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 책이 제안하는 마사지는, 통증 부위를 손가락으로 모아 근섬유의 방향을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쓰다듬어 피로 물질과 불필요한 수분을 ‘흘려 보내는’ 방식이다. 근육을 둘러싼 유연한 조직인 근막에 쌓인 부기를 빼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통증이 느껴지는 자세에서 5회 정도만 시행하라고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결국 이 책은 “더 운동해라, 더 노력해라!”라고 다그치는 대신,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방식 안에서 몸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현실적인 기술을 가르쳐 준다. 오래 앉아 있는 삶을 당장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앉아 있는 시간을 덜 고통스럽게, 덜 위험하게 만드는 방법을 더하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은 사무직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다루는 건강서이자 자기계발서에 가깝다. 이유 없이 피곤하고, 집중이 안 되고, 잠도 잘 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질 때, 이 책은 그 모든 과정을 몸의 흐름과 신호를 통해 차분히 풀어 설명해 준다. 그리고 “단순한 결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 온 통증들을, 지금 당장 돌봐야 할 중요한 신호라고 다시 일러 준다.


요조앤 @yozo_anne 이 모집한 서평단에 선정되어,

사이드웨이 @sideways_pub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제1장 정리
근육은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굳는다. ‘부동화’가 결림과 통증의 원인이다.
스트레스는 긴장을 일으켜 결림과 통증을 악화시킨다.
스마트폰을 보는 자세가 머리를 훨씬 무겁게 만든다.
일자 목, 일자 허리 때문에 목, 어깨, 허리 통증이 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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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다운 퀄리티 투자 - 세상의 변화를 미리 읽고 1%에 집중하는 힘
FundEasy 지음 / 지음미디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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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다운 퀄리티 투자』는 변동성에 휩쓸리는 단기 매매에서 벗어나,

평생 가져갈 수 있는 투자 철학과 시스템을 세우고 싶은 사람에게 단단한 기준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자신이 겪어 온 시행착오를 숨기지 않는다.

시장 분위기에 취해 FOMO에 이끌려 테마주에 올라탔다가 손절로 끝난 경험,

하루 종일 시세창을 붙들고 단타를 반복하다가 수익보다 피로감과 수수료만 남았던 날들,

잠깐 수익이 나도 “이게 계속될까?”라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솔직하게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이렇게는 평생 투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변동성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꾸준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전략을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수많은 공부와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답이 바로 퀄리티 투자다.

저자가 말하는 퀄리티 투자는 단순히 좋은 기업을 사서 묻어두는 것이 아니다.

그는 퀄리티 투자를 뛰어난 기업의 동업자가 되는 투자라고 정의한다.

주가 등락에 베팅하는 트레이더가 아니라, 좋은 재무, 좋은 비즈니스 모델, 좋은 경영진을 가진 기업의 일부를 소유하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성장의 과실을 장기적으로 함께 나누는 주주이자 파트너가 되자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누군가와 동업을 할 때 그 사람의 과거 행실과 재무 상태, 지금의 사업 수완, 앞으로의 비전과 정직성을 꼼꼼히 따져 보듯, 기업을 보는 관점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이 철학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저자가 퀄리티 투자가 마음은 편하지만 수익률은 낮은 전략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으로 가장 높은 수익률을 보여 준 전략 중 하나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데이터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인용하는 대표적인 예가 MSCI World Quality Index다. ROE가 높고 부채비율이 낮으며 이익 변동성이 작은 기업들로 구성된 이 지수는, 1998년 12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약 25년 동안 세계 주식 시장 평균을 나타내는 MSCI World Index가 약 6.4배 오르는 동안 무려 9.3배 이상 상승했다.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상승장보다 하락장에서의 차이다.

닷컴버블 붕괴기(2000~2002년),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처럼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던 위기 국면에서조차 퀄리티 지수의 하락 폭은 시장 평균 대비 훨씬 작았다.

좋은 비즈니스 모델과 튼튼한 재무 구조를 가진 기업은 시장이 좋을 때 꾸준히 성장하고,

나쁠 때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평범한 기업과의 격차를 벌려 나간다.

저자는 이 데이터를 통해 투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적게 잃느냐라는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성장성과 가격을 함께 고려한 퀄리티 GARP 전략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준다.

재무적으로 우량하면서 성장성이 높고, 현재 주가가 합리적인 수준에 있는 기업들로 구성된

MSCI USA Quality GARP Select Index는 2002년 12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세계 증시 평균이 약 8.7배 오르는 사이 13.9배 이상 상승했다. 저자는 이러한 장기 데이터를 지켜보면서, “마음 편한 투자가 곧 수익률 높은 투자일 수 있다”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퀄리티 기업을 어떻게 골라낼 것인가?

저자는 좋은 재무, 좋은 비즈니스 모델, 좋은 경영진이라는 세 가지 기둥을 제시하며,

그중에서도 비즈니스 모델을 지탱하는 경제적 해자를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

책에서 정리하는 경제적 해자는 7가지다.

첫째는 규모의 경제다. 클수록 비용이 낮아지는 구조로, 코스트코나 쿠팡처럼 매출과 물량이 커질수록 단가가 내려가고, 그 힘으로 다시 가격 경쟁력을 높여 시장 지위를 강화하는 기업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는 네트워크 효과다. 쓸수록, 이용자가 많아질수록 가치가 커지는 구조로, 비자나 메르카도리브레 같은 결제·마켓플레이스 기업은 사용자와 가맹점이 늘어날수록 경쟁자가 끼어들 틈이 줄어든다.

셋째는 전환비용이다. 바꾸기 어렵고 귀찮다는 사실 자체가 해자가 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피스 제품군이나 인튜이트의 회계·세무 소프트웨어처럼, 한 번 도입하면 다른 서비스로 갈아타는 데 드는 교육·전환·리스크 비용이 너무 커지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는 브랜드다. 비싸도 기꺼이 사게 만드는 힘이다. 에르메스나 질레트처럼 이름만으로 신뢰와 욕망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브랜드는 가격을 올려도 고객이 떠나지 않는 구조적 우위를 갖는다.

다섯째는 핵심 자원이다. “우리는 이 자원을 우리만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업들, 예를 들면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사실상 독점한 ASML이나 특정 치료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과 데이터를 가진 노보 노디스크 같은 기업은 자원 그 자체가 해자다.

여섯째는 프로세스 파워다. “우리만 이렇게 할 수 있다”라는 운영 능력으로, TSMC의 반도체 제조 공정이나 유니클로의 공급망·재고 관리 시스템처럼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와 조직 문화가 쉽게 복제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마지막 일곱째는 역 포지셔닝이다. 기존 강자가 따라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시장을 재정의하는 전략이다. 에어비앤비나 넷플릭스는 호텔 체인이나 케이블 TV 사업자가 가지고 있던 사업 구조와 이해관계를 정면으로 비껴가는 모델을 통해, 기존 강자들이 쉽게 쫓아올 수 없는 위치를 선점했다.

저자는 이 일곱 가지 해자 중 어떤 요소를 얼마나, 어떻게 갖추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퀄리티 기업을 찾는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해자의 크기보다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지속 기간이다. 몇 년 반짝 성장하다 경쟁업체에 따라잡히는 기업보다, 성장 속도는 조금 느리더라도 10년 이상 해자를 지키며 복리를 쌓을 수 있는 기업이 장기 투자자에게 훨씬 큰 부를 안겨 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 위에서 저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탑다운·바텀업 결합 전략을 설명한다.

먼저 탑다운 분석으로 “어떤 운동장에서 뛸 것인가”를 결정한다.

거시경제의 변화와 글로벌 트렌드를 보며 앞으로 순풍이 불어올 산업을 고르고,

그다음 그 운동장 안에서 바텀업·퀄리티 분석을 통해 누구와 함께 뛸 것인가,

즉 일곱 가지 해자를 가장 견고하게 갖춘 기업을 추려낸다.

다만 이 원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압도적인 퀄리티 기업을 발견했을 때는 탑다운과 상관없이 순수 바텀업으로 오랜 기간 동행하기도 한다. 원칙을 유지하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저자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정리한 자신만의 방식이다.

이 철학은 포트폴리오 구축과 운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저자는 투자 무대를 대한민국에 한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기술 기업, 유럽의 명품 소비재,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기업처럼 각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해자를 가진 기업들을 대상으로 전 세계에 눈을 돌린다. 그러면서도 분산과 집중 사이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긴다.

종목 수는 약 20개 내외로 가져가며 특정 기업에 과도하게 쏠리지 않도록 하지만,

산업 관점에서는 자신이 확신하는 7개 안팎의 섹터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라는 아이디어에 확신이 있다면 미국의 엔비디아, 한국의 하이닉스, 대만의 TSMC에 나누어 투자하되, 큰 틀에서는 반도체 산업에 집중 투자한 셈이 된다.

종목은 분산하되 아이디어는 집중하는 방식이다.

비중 조절과 리밸런싱에 대해서도 책은 꽤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저자는 모든 종목을 똑같은 비율로 담지 않고, 각 기업에 대한 확신 수준과 안전마진을 기준으로 비중을 달리한다. 단일 종목의 비중은 원칙적으로 20%를 넘지 않도록 관리하고, 아주 예외적인 기회라고 판단될 때에만 30%까지 허용한다. 리밸런싱 역시 기계적으로 하지 않는다. 비중이 자신이 정한 원칙을 넘어섰을 때, 투자 아이디어의 핵심이 훼손되었을 때, 혹은 그 돈을 옮길 만큼 더 좋은 기업을 발견했을 때라는 세 경우에만 포트폴리오를 조정한다. 특히 이미 큰 수익을 준 ‘위너’ 종목의 비중이 커졌을 때는, 단순히 비중이 많으니 판다가 아니라, 기업의 해자가 예전보다 더 깊어졌는지, 밸류에이션이 비이성적인 수준까지 치솟았는지, 그 자본을 옮길 만한 더 매력적인 기회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함께 묻는 과정을 거친다.

이 책이 특별한 지점을 하나 더 꼽자면,

마지막 부분에서 지금까지 다뤘던 모든 과정을 하나로 합쳐 ‘실전 투자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저자는 하나의 투자 아이디어가 어떤 관찰에서 시작되어(탑다운),

어떤 과정을 통해 기업을 분석하고(바텀업), 어떤 고민과 가치평가를 거쳐 실제 매수·매도 결정으로 이어졌는지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한다.

특정 회사를 지목해 왜 그 회사를 선택했는지, 어떤 해자를 어떻게 해석했고,

어떤 리스크를 어디까지 감내하기로 했는지 구체적인 사례 네 가지를 통해 보여 준다.

이 과정을 따라가며, 앞에서 배운 개념들이 실제 투자 현장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책의 뒷부분에는 여덟 가지 부록이 실려 있어,

이론과 사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로 실전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1. FundEasy의 일상 루틴과 공부 습관

2. 투자의 효율을 높이는 핵심 사이트 정리

3. AI를 나만의 투자 비서로 활용하는 방법

4. 바쁜 직장인을 위한 퀄리티 기업 스크리닝 실전 가이드

5. 나만의 투자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7단계 로드맵

6. 추천 도서 목록

7. 참고할 만한 웹사이트와 자료

8. 주요 용어 설명

총 8가지 구성으로 꽤 알찬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부록들은 책에서 배운 내용을 단순한 ‘좋은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실제 내 투자 일상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실천 도구 상자 역할을 한다.

결국 『탑다운 퀄리티 투자』는 시장의 단기 소음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 투자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책이다. 투자란 남들보다 빨리, 더 많이 맞히는 게임이 아니라,

큰 그림을 읽고, 해자가 깊은 좋은 기업과 오래 동행하며 적게 잃고 꾸준히 이기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경제적 해자의 7가지 틀, 탑다운과 바텀업을 엮는 방법, 실전 포트폴리오 운용 원칙,

구체적인 투자 사례와 부록까지!

이 책을 읽고 나면, 단기 수익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와 평생 가져갈 수 있는 투자 철학을 설계할 수 있는 재료들을 한 손에 쥐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주식을 당장의 수익 수단이 아니라 오래 함께할 파트너십으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은 투자서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론과 사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로 실전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1. FundEasy의 일상 루틴과 공부 습관
2. 투자의 효율을 높이는 핵심 사이트 정리
3. AI를 나만의 투자 비서로 활용하는 방법
4. 바쁜 직장인을 위한 퀄리티 기업 스크리닝 실전 가이드
5. 나만의 투자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7단계 로드맵
6. 추천 도서 목록
7. 참고할 만한 웹사이트와 자료
8. 주요 용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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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06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식투자자들에게 도움될 드솹니다.
 
노자의 마음 공부 - 소란과 번뇌를 다스려줄 2500년 도덕경의 문장들
장석주 지음 / 윌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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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띠지에 적힌 “물은 애쓰지 않아도 결국 바다에 이른다.” 이 한 문장이 눈을 사로잡는다.

모래도 강하게 쥐면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더 빨리 흘러내리기 마련인데,

오히려 힘을 뺀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간다면 해도 언젠가는 닿을 수 있다는 말 같아서 오래 머릿속에 남는 문장이었다.

예쁜 표지도 눈길을 끌었는데, 공중에서 정지 비행을 하는 듯한 작은 새가 보인다.

녹색, 파랑, 붉은빛이 섞인 새는 벌새처럼 보인다. 그 옆의 꽃은 난초를 닮았다.

난초와 벌새라니,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초는 과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향으로 자기 자리를 조용히 지키는 존재다.

벌새는 아주 작지만 한곳에 머물며 쉼 없이 날갯짓해 균형을 잃지 않는 새다.

노자가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말하며,

물처럼 낮은 자리에서 억지로 힘을 쓰지 않고도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가르친 것처럼,

난초와 벌새의 모습은 이 책이 말하는 태도와 잘 포개진다.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법,

힘을 앞세우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흐름과 하나가 되는 법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것 같다.

『노자의 마음 공부』를 읽기 직전까지, 나는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야 된다며, 열심히 공부해야 되고, 뒤처지지 않아야 된다며 강하게 스스로를 압박했다. 관계에서도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사실 그게 성실하게 사는 거라 생각했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노자의 말과 그것을 풀어내는 문장을 읽다 보니 그게 성장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는 방식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중에서도 “소사과욕(少私寡欲)”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노자는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되고, 어짊을 끊고 의로움을 버리면 효성과 자애가 돌아오고, 교묘함을 끊고 이로움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고 말한 뒤, “가공되지 않은 본디의 소박함을 지키며, 사사로움을 누르고,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욕심을 적게 하라”고 덧붙였다.

이 책은 이 대목을 무위의 맥락에서 풀어낸다. 인과 의는 사람이 만들어낸 도덕 원리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움에서 멀어진다고 말한다. 어짊과 의로움조차도 배워서 익힌 지혜일 뿐,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사사로움을 누르고,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욕심을 적게 하라고 권했다.

여기서 말하는 ‘소(少)’는 물들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박(樸)’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가리킨다.

겉으로 보기에 거칠고 투박해 보여도, 그 안에는 아직 깎이지 않은 가능성과 힘이 남아 있다.

무위는 바로 그 꾸미지 않은 있음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 안의 욕심은 언제나 자연의 그러함을 조금씩 초과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가진 것보다 더 있어 보이고 싶고, 실제보다 더 의미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

어짊과 의로움조차 자연의 소박함에 견주면 보잘것없다는 말이 이 대목에서 더 실감 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쌓아 올린 것들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덧댄 말들, 성실해 보이기 위해 만든 과한 일정, 인정받고 싶어서 붙여 온 각종 타이틀들.

그게 다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욕심이었고, 그 욕심이 커질수록 내 안의 소박함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소사과욕은 욕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자연스러운 나를 초과하는 순간을 조심하라는 경계처럼 보인다. 이 말은 좋아 보이는 나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에 조금 더 가까워질 용기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노자가 말하는 부드러움도 이 책에서 새로 배웠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약지승강(弱之勝强)”, “대직약굴(大直若屈)” 같은 말들이 책 속에서 여러 번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며, 큰 곧음은 오히려 굽은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그저 멋있는 문장 정도로 읽고 넘어갔는데, 이 말을 다시 접하니 내가 믿어 온 강하다는 이미지를 뒤집어 주었다.

그동안 강하다는 건 악착같이 끝까지 버티고, 절대 꺾이지 않는 태도가 강함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노자가 말하는 부드러움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물은 단단하게 굳어 있지 않아서 부딪히면 깨지는 법이 없고, 닿는 대로 모양을 바꾸면서도 결국 자기 갈 길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약하다는 말이 더 이상 무기력 하거나 패배의 의미가 아니라, 굳이 맞서 싸우지 않고도 버텨낼 수 있는 유연함을 뜻한다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물처럼 산다는 건 그저 되는 대로 살자는 말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모양을 바꾸면서도 속으로는 흐름을 이어가는 상태에 가깝다.

누가 봐도 반듯하고 흠 잡을 데 없는 ‘곧음’이 아니라, 겉으로는 조금 굽어 보이고 남들보다 느려 보여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 삶이다. 예전에는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면, 이제는 조금 굽어도 괜찮고, 속도가 느려도 괜찮다는 생각을 이 문장들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이 대목을 곱씹다 보니, 눈에 띄게 강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처럼, 필요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그러나 자기가 흘러갈 바다만은 잊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이 책으로 인해 내가 닮고 싶은 ‘강함’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 같다.

“행어대도(行於大道)”라는 말처럼, 굳이 특별한 길만 찾지 않고 큰길을 걷듯 단순하게 살아도 된다는 구절도 마음에 남았다. 내 인생만은 뭔가 거창하고 드라마틱해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으니, 아무 일도 없는 것 같던 평범한 하루가 예전만큼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남들과 비교해서 뒤처진 삶이 아니라, 그저 나다운 속도로 걸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책 속에는 “도법자연(道法自然)”, “도상무명(道常無名)”, “무명지박(無名之樸)”, “복귀어박(復歸於樸)” 같은 말들이 나온다. 도는 자연을 본받고, 도는 늘 이름이 없으며, 이름 붙지 않은 통나무 같은 질박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구절들을 따라 읽으면서 괜히 뭐든 설명하고 포장하려 들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잘 보이고 싶어서 덧붙였던 말들,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붙인 수식들, 나를 과하게 정의하려 했던 습관들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 정의와 수식들 속에서 나는 점점 또렷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흐릿해지고 있었다. 무엇이 나인지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잠시 그 모든 이름과 설명을 걷어 낸 자리에서 남는 것을 지켜보는 일인 것이다. 어쩌면 노자가 말하는 ‘소박함으로 돌아간다’는 건, 새로운 이름을 얻는 과정이 아니라, 필요 없던 이름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나를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天下皆知美之為美 斯惡已)”라는 문장도 오래 남았다.

노자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순간, 이미 추한 것도 함께 생긴다고 말한다.

선한 것을 가리키는 순간, 선하지 않은 것도 함께 생긴다고 말한다.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앞과 뒤, 어렵고 쉬움도 모두 서로를 기준 삼을 때 비로소 나뉜다.

우리가 이름 붙이고 비교하는 순간, 둘은 동시에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그래서 도를 따르는 사람은 굳이 앞장서서 모든 것을 재고 나누고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남을 도와도 내가 했다는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오래 간다고 노자는 말한다.

이 말을 곱씹다보니, 남의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나를 재던 시간이 떠올렸다.

남들이 좋다고 여기는 잣대를 그대로 가져와 나를 비교하느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모습과 내가 편안한 상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구절이 내게 남긴 것은, 세상이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이름 사이에 나를 세워 두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삶에서 조금씩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과 기준에 매달리기보다, 비교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애자승의(愛者勝之)”, “자지자명(自知者明)”, “자고능용(自固能用)”, “기자불립(其者不立)” 같은 구절들은 관계와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이긴다는 뜻,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밝다는 뜻,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뜻, 자기만 세우려 하면 오래 서 있지 못한다는 뜻. 이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니, 관계 안에서 내가 어떻게 나를 잃어버렸는지, 또 언제 나만 앞세웠는지 하나둘 떠올랐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은 이 책에서 특히 다르게 다가온 말이다. 그동안은 ‘늦게 성공해도 괜찮다’는 위로 문구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장석주의 글을 따라가다 보니 그 속에 다른 얼굴이 있었다. 큰 그릇은 빨리 만들 수 없다. 천천히 두드리고, 깎고, 비우고, 다시 채우는 과정을 반복해야 겨우 형태를 갖춘다. 돌이켜 보면, 내가 나를 조급하게 몰아세웠던 시간 대부분은, 그릇이 아직 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이제는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마음을, 아주 천천히 허락해 보려고 한다.

“천망회회 소이부실(天網恢恢 疏而不失)”도 잊기 어려운 문장이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 보여도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지금 내 인생이 조금 엉킨 것 같고 빗나간 것처럼 보여도, 모든 것이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나를 완전히 놓아버린 게 아니라면, 나는 아직 그물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절망하지 말고, 조금은 삶을 믿어봐도 좋겠다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거듭 느낀 건,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질 때가 많다는 점이다.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는 말처럼, 말이 적을수록 더 자연스럽다.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는 말도 마음에 남았다. 작은 생선을 굽듯이 삶을 다루라는 뜻.

너무 세게 뒤집거나, 너무 자주 건드리면 금세 부서진다는 말이다.

내 하루와 관계, 마음도 그런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흔들어대기보다, 살피며 천천히 익혀야 비로소 제 맛이 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떠오른 한 줄은 결국 이것이었다.

“힘을 빼고 살아도 괜찮다.”

노자의 말과 저자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나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을 주며 살고 있나?”

그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보려고 하다 보니, 내려놓아도 되는 것, 다시 붙잡아야 하는 것, 아직 잘 모르겠는 것들이 조금씩 구분되기 시작했다. 이 책이 내게 가르쳐 준 건 욕심과 힘을 통째로 버리라는 말이 아니었다. 나를 소모시키는 욕심과 나를 지켜 주는 욕심을 가려 보라는 것, 억지로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라 흐름을 따라가며 버티게 하는 힘을 키우라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무수히 많은 순간에 흔들릴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굳이 악착같이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부러지지 않기 위해 세게 버티기보다 휘면서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쪽이 더 오래 간다고. 애쓰지 않아도 바다에 이르는 물처럼, 조금 힘을 빼고 흘러가도 결국 도착할 곳에는 도착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믿고 싶다. 억지로 나를 몰아붙이는 대신, 도법자연(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최선의 움직임을 찾는 것)의 마음으로 내 흐름을 믿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자가 말한 도(道)에,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보일러서평단 @boramchan.everyday'을 통해,

'윌마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소사과욕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되고,
어짊을 끊고 의로움을 버리면 백성이 효성과 자애를 되찾고,
교묘함을 끊고 이로움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이 세 가지로는 무위를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따라야 할 말을 덧붙인다.
가공되지 않은 본디의 소박함을 지키며, 사사로움을 누르고,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욕심을 적게 하라
- <도덕경> 19장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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