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 속 기후환경 빼먹기
루카 지음 / 글씨앗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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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가 무너지고, 해류가 멈추고, 동물과 식물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장면은

더 이상 영화 속 상상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졌다.

기록적인 폭염과 한파,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이변,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의 출현은

이미 현실의 뉴스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묻기 시작한다.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아온 재난은 정말 허구일까, 아니면 가까운 미래의 예고편일까.

루카의 『재난영화 속 기후환경』은 바로 이 불안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재난 영화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기후과학과 생태계의 질서를 차근차근 짚어 주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재난 영화는 왜 늘 지구의 끝을 이야기할까?

거대한 해일이 도시를 삼키고, 빙하가 무너지고, 인간은 얼어붙은 세상에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장면들을 출발점 삼아 영화 속 재난이 어디까지 상상이고 어디부터 현실과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히 영화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장면 뒤에 숨어 있는 기후 변화와 생태계의 변화 과정과 과학적 배경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책의 첫 부분에서는 영화 〈투모로우〉를 통해 기후 재앙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영화에서는 북대서양 해류가 멈추면서 지구가 순식간에 빙하기로 들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영화처럼 단 며칠 사이에 지구 전체가 얼어붙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저자는 그 배경이 되는 과학적 현상, 즉 폴라 볼텍스와 북대서양 해류 순환 같은 실제 기후 시스템을 설명하며 우리가 이미 극단적인 기상이변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최근 수십 년 사이 극한 한파와 폭염이 증가하고 있으며, 해류 순환 역시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설명은 영화적 상상을 현실의 문제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이 책은 재난 영화를 과장된 허구로만 보지 않게 만든다.

오히려 영화가 현실의 경고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지구 역사 속 빙하기와 대멸종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구는 이미 여러 차례 빙하기와 생물 대멸종을 겪었고, 과학자들은 지금 이 시대를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작점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그 위기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인간은 지구 전체 생물량에서 아주 작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인간이 길러 온 가축까지 포함하면 지구 동물 생물량의 대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한 종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때 생태계의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책의 중반부에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보여준다.

늑대나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인간 사회 가까이 내려오는 이유도 결국 인간이 서식지를 파괴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자연은 인간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반응할 뿐이라는 메시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부분에서 내가 가장 깊이 읽은 대목은 범고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범고래를 오래전부터 매우 똑똑하고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 범고래는 돌고래과에 속하는 해양 포유류로, 매우 높은 지능과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가진 동물로 알려져 있다. 무리를 이루어 협력 사냥을 하며 지역과 집단에 따라 서로 다른 사냥 방식과 의사소통 체계를 갖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종으로도 연구되고 있다.

그래서 범고래를 떠올리면 강력한 포식자, 때로는 먹이를 몰아붙이고 괴롭히는 잔혹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소개되는 범고래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인상과는 조금 달랐다.

죽은 새끼를 며칠 동안 물 위로 떠받치고 다니며 쉽게 놓지 못하는 행동, 가족 단위의 유대 속에서 드러나는 애도의 장면은 범고래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단순히 무서운 포식자가 아니라, 높은 지능과 함께 깊은 유대와 감정까지 지닌 존재일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면서도 묘한 감동을 주었다. 강한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을 본 느낌이었다.

또 하나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사람의 신경계를 교란해 극단적인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 〈해프닝〉처럼 식물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설정은 처음에는 황당한 상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은 실제 자연 속에도 강력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 존재하며, 일부는 심장과 신경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투구꽃에 들어 있는 아코니틴, 자살 나무로 불리는 식물의 치명적인 독성 물질, 환각과 방향 감각 상실을 유발하는 성분들에 대한 대목은 읽는 내내 서늘한 기분을 남겼다.

평소 식물을 조용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여겼던 나에게, 식물 역시 살아남기 위해 정교하고 강력한 방어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자살을 유발할 정도로 위험한 식물 이야기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돌아보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남은 생각은 자연이 인간에게 복수한다는 말이 사실은 충분히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해 분노를 품는 것이 아니라, 훼손된 환경과 깨진 균형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숲이 사라지고 서식지가 잘게 끊기면 야생동물은 먹이를 찾아 인간의 공간 가까이로 밀려오고, 기후 변화가 심해질수록 생태계의 질서도 함께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결국 인간의 삶을 다시 위협하는 재난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영화 속 장면과 연결해 보여주면서, 오늘의 기후 위기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현실임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재난영화 속 기후환경』은 재난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물론이고,

환경과 과학을 어렵게 느끼는 독자에게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영화 속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후 변화와 생태계 붕괴, 인간의 책임과 선택이라는 더 큰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영화는 이미 끝났지만 현실의 지구는 아직 결말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재난을 구경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어떤 미래를 써 내려갈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으로 오래 남는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꼭 그렇지도 않아. 식물들도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식물을 몰아내는 전략을 쓰기도 하거든.
앞에서 말한 화학적 방어를 곤충이나 미생물이 아니라 다른 식물을 견제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걸 타감작용Allelopathy이라고 불러. 영어 단어를 풀어보면 접두어 ‘alle-‘는 ‘서로’를, 접미사 ‘-patchy’는 ‘영향,작용‘을 뜻하지. 따라서 타감작용이란 말은 한 생물이 분비한 물질이 다른 생물의 발아, 생장, 생존, 생식 등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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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동해 - 동해 예찬론자의 동해에 사는 기쁨 언제라도 여행 시리즈 2
채지형 지음 / 푸른향기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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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룬 책은 많지만, 어떤 도시를 이렇게 오래 바라보고 천천히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담아낸 책은 흔치 않다. 채지형의 『언제라도 동해』는 단순한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는 과정을 담은 여행 에세이다.

동해라는 도시를 빠르게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오래 머물며 천천히 스며드는 여행의 경험을 보여 준다.

묵호항, 논골담길, 북평민속시장, 해파랑길, 한섬해변 같은 장소들은 관광지 정보처럼 나열되기보다

저자가 실제로 걸어 다니며 느낀 생활의 풍경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 책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려 주기보다,

한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 볼 수 있는지를 전하는 책에 가까웠다.

이 책의 시작에서 저자는 동해를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동해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동해 어디요?”라고 묻고, “묵호”라고 덧붙이면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고 한다.


묵호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항구의 지명이고,

동해시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에게 동해는 행정구역의 이름보다 훨씬 따뜻한 의미로 다가온다.

일 때문에 잠시 방문했던 바닷가 도시에서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조금 더 머물게 되고,

어느 순간 이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동해 생활은 결국 여행 책방 ‘잔잔하게’를 여는 일로 이어진다.

우연처럼 시작된 선택들이 쌓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동해와의 첫 인연은 ‘동해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서 시작된다.


누군가 “동해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저자는

새벽에 찍은 일출 사진을 보여 주며 매일 아침 감동을 선물 받는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다라고 답한다.

처음에는 동해가 그저 낯선 지역이었지만, 한 달 살기를 권해 준 사서의 다정한 한마디와

신청 링크 하나가 새로운 삶의 문을 여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동해에 언제 오실 건가요?”라는 전화 한 통은

단순한 일정 확인이 아니 삶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처럼 다가왔다.

묵호에서의 첫날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태풍이 몰아치고, 강풍이 문을 흔들며, 파도와 바람의 소리가 밤을 가득 채운다.

낮에 아름답게 보였던 유리창은 밤이 되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잔잔해진 묵호항과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는 순간 저자는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그 장면은 여행이 결국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묵호의 풍경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곳은 바람의 언덕이다.

바람의 언덕에서는 쪽빛 동해와 짙은 산자락, 부지런히 오가는 고깃배, 알록달록한 지붕의 산동네가 한눈에 펼쳐진다. 한때 명태를 말리던 덕장이었던 공간이 지금은 누구나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할 수 있는 장소로 바뀌었다. 한낮의 푸른 바다, 새벽 어부들의 불빛, 저녁이면 별자리처럼 반짝이는 산동네 불빛까지 시간마다 달라지는 풍경이 한 도시의 깊이를 보여 준다.

바람의 언덕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달빛 아래 묵호를 예찬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인상 깊다.


비올리스트와 지휘자를 만나 음악과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언젠가 이곳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여행지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

동해에서의 생활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풍성해진다.

‘동해 한 달 살기’ 공간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과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같은 공간에서 머물며 자연스럽게 이웃이 된다.

태풍이 불어오는 밤 좁은 방에 모여 모히토를 나누며 각자의 삶과 여행 이야기를 풀어 놓는 장면은 여행지에서 만들어지는 특별한 공동체의 느낌을 전한다.

다음 날 바닷가에서 게를 잡으러 갔다가 거센 파도만 보고 돌아오는 경험조차 또 하나의 추억이 되는 곳이었다.


동해 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물회 덕후라고 말할 만큼 물회를 좋아한다.

싱싱한 회와 새콤한 국물, 바다의 향이 어우러진 물회는 동해에서의 삶을 대표하는 맛으로 등장한다.

묵호의 물횟집에서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물회를 먹는 순간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바닷가 생활의 감각을 그대로 전한다.


장칼국수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추장을 풀어 칼칼하게 끓인 장칼국수는 추운 겨울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들이 빠르게 몸을 녹이기 위해 먹던 음식에서 시작되었다.

소박한 한 그릇의 음식에 동해 사람들의 생활과 시간이 담겨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북평민속시장 이야기를 통해 동해의 또 다른 풍경도 드러난다.

3일과 8일에 열리는 북평장은 바다의 해산물과 산의 나물이 함께 모이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오일장이다. 시장 골목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머리국밥을 먹고, 친구와 바다를 바라보며 음식을 나누는 순간 저자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다 앞에서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동해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바다와 산이 가까이에 있고, 시장과 골목이 살아 있으며,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도시로 그려진다. 저자는 여행자로 머물던 시간을 지나 남편 브루스와 함께 동해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작은 책방을 열어 동네의 시간을 살아 간다. 책방에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새로운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며 골목은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렇게 동해에서의 삶은 풍경과 사람, 일상과 여행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언제라도 동해』는 동해라는 도시를 소개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삶을 발견해 가는 기록이다. 여행지를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도시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살아 보는 여행의 의미를 보여 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동해는 단순히 한 번 다녀오는 바닷가 도시가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남는 장소로 자리 잡는다. 제목처럼 정말 언제라도 떠나 보고 싶은 도시가 되고, 가능하다면 한 번쯤 살아 보고 싶은 도시로 기억된다.


'푸른향기 서포터즈 13기' 활동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1937년 묵호항 개항 이후, 묵호는 넘치는 물고기 덕분에 무럭무럭 성장했다. 묵호가 커지자, 명주군(현재 강릉시)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을 통합해 동해시를 만들었다. 즉, 동해는 강릉의 남쪽과 삼척의 북쪽을 합한 신생 도시인 것. 강원도를 대표하는 오일장인 북평장은 이름에 ‘북’이 들어 있지만, 동해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 넓은 뜰’이라는 뜻의 북평은 과거 삼척 소속이었다. 여전히 ‘동해시’보다 ‘묵호’와 ‘북평’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동해가 살기 좋은 동네로 소문나면서 ‘동해시’를 아는 이도 빠르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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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타임 - 단단한 삶을 위한 시간
이소원 지음 / 퍼블리온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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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그 흔한 풍경 속에서도 문득 고개가 돌아가는 날이 있다.

늘 보던 작은 정원인데도 햇살이 내려앉는 각도나 잎빛이 한 톤만 달라져도 하루의 기분이 바뀐다.

『가든 타임』은 바로 그 장면에서 출발한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현장에서 정원을 가꾸는 저자는, 교육자의 삶을 지나 다시 땅 위에 서고 싶다는 마음으로 ‘빛나는 숲’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도시 곳곳의 작은 틈에서 정원의 순간을 수집해왔다.

일상에 치여 감각을 잃고 헤매던 아침,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며 마주한 작은 정원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그에게 온 세포의 감각이 푸르게 살아나는 듯한 경험을 했다. 휘어지고 부러진 가지 사이로 각기 다른 빛을 내는 잎들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다시 하루를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는 고백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정원을 매개로 우리가 왜 일상 속에서 자꾸 지치고 감각이 무뎌지는지 짚어주고, 그 감각을 생활 가까이에서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 차분히 안내한다. 거창한 정원이 아니어도, 책상 위 작은 화분 하나라도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면 이미 나만의 정원이며, 정원의 순간을 자세히 살피고 수집하는 일이 곧 나를 돌보는 일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이론으로 설득하기보다, 빛과 그림자, 잎의 색과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는 장면들로 독자를 이끈다. 읽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내 감각은 얼마나 무뎌져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정원의 숨에 기대어 다시 일상을 시작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저자에게 가장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

“정원이 뭐죠? 어떻게 하면 잘 즐길 수 있을까요?”

트렌드처럼 번진 가드닝 열풍과 달리, 아직 정원의 본질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정원은 말로 담기에는 너무 섬세하고 다감각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원을 정의하기보다 정원에서 경험한 순간들을 통해 정원의 힘을 보여준다.

왜 우리에게 정원이 필요한지, 어떻게 삶 가까이에 들일 수 있는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독자가 자신의 언어로 정원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 중심에는 정원은 나와 만나는 곳이라는 문장이 있다. 소쇄원 이야기는 이 문장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조선 중종 시대, 스승의 죽음을 겪고 낙향한 양산보가 세상의 어지러움 속에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조성한 정원이다. 광풍각 마루에 앉아 통나무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빛을 바라보던 저자의 경험은 회복의 기록이다. 뜻은 품고 있었지만 정작 그 뜻 안에 머물지 못하던 시절, 사업의 불안과 팬데믹의 막막함 속에서 흔들리던 마음이 그곳에서 잠시 가라앉았다는 고백은, 정원이 사람을 다시 자기답게 돌아오게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 순간 저자는 비로소 공간 안에 오롯이 존재하는 자신을 만났다고 말한다. 정원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나를 보는 일이고, 정원과 연결된다는 것은 내 마음과도 연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정원에 들어서면 우리는 감각부터 달라진다.

눈을 감으면 바람결에 실려 오는 향기가 먼저 다가오고, 새소리와 나뭇가지가 비벼대는 소리가 이어진다. 겨울의 정원은 겉으로는 침묵 속에 잠긴 듯 보이지만, 저자에게는 언제고 따뜻한 외딴 섬이 된다.

정원은 계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설득력을 가진다.

하나의 정원은 쉼의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돌봄과 배움, 놀이와 치유의 공간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적극적인 치료의 장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가 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정리하는 존엄한 시간의 공간이 된다.

같은 정원을 바라보아도 각자가 읽어내는 의미는 다르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처럼, 어떤 이는 벽만 보고 고개를 떨구지만, 또 다른 이는 그 벽을 오르는 잎사귀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정원은 객관적인 공간이라기보다 각자의 감정과 사유가 스며드는 주관적인 세계다.

저자는 자연감각을 깨우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태생적으로 생명을 사랑하는 본능, 이른바 바이오필리아가 내재되어 있다는 설명과 함께 우리는 왜 자연에 끌리는지를 되짚는다.

예쁜 꽃을 보면 절로 눈길이 가고, 숲과 강이 가까운 공간을 선호하는 마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도시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너무 멀어졌고, 그 감각은 무뎌졌다.

그래서 시작은 거창 할 필요 없이, 책상 위 작은 화분 하나면 충분하다.

매일 물을 주고, 잎을 들여다보고, 해가 드는 방향으로 자리를 옮겨주는 작은 행동이 삶과 자연을 다시 이어준다. 식물의 매일의 성장을 지켜보는 동안, 그 곁에서 함께 자라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마음이 담긴 작은 화분 하나가 온 세상과 닿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원은 우리의 오감을 깨워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한다. 미국의 환경심리학자 캐플런 부부가 말한 주의력 회복 이론을 인용하며, 저자는 자연이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우리의 주의를 붙잡고 정신적 피로를 낮춘다고 설명한다. 아름다운 색과 형태, 바람과 빗소리, 흙의 냄새와 촉감은 잘게 쪼개진 일상의 감각을 다시 모아준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곧 마음챙김의 시간이다.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태도 속에서 우리는 내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 정원에서는 적절한 반응을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게 된다.

돌담 틈에 핀 민들레 이야기도 인상 깊다. 흙이 넉넉하지 않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은 자신이 자란 곳을 불평하지 않는다.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장미는 장미답게 살아간다.

우리는 MBTI나 혈액형 같은 분류로 서로를 재단하고, SNS 속에서 가짜 자아를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비교하지만, 식물은 우리의 외모나 직업, 경제력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돌보는 손길에만 반응할 뿐이다. 디지털 속에서 만들어진 자아를 잠시 내려놓고 실제의 나를 만나는 경험이 정원에서 가능하다는 말이 깊게 남는다. 자연과의 공명을 통해 감정이 잠잠해지고, 살아 있구나! 하는 감각이 또렷해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정원은 울타리 속 나만의 천국이기도 하다. 정원의 어원을 따라가면 ‘울타리로 둘러싸인 즐거움’에서 출발한다. 고대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가 사막 한가운데 조성된 오아시스였듯,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울타리를 쳤고, 동시에 자연과 분리된 자신을 위해 다시 울타리 안에 자연을 불러들였다. 동양의 정원은 차경과 축경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했고, 서양의 정원은 인간의 의지와 예술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서로 다른 양식 속에서도 공통된 지점은 분명하다. 정원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만들어온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도시 속 정원에 대한 이야기는 정원의 의미를 개인을 넘어 사회로 확장시킨다.

정원은 무채색 도시를 물들이는 한 방울의 물감이 되고, 사람들의 걸음을 느리게 하며 심장박동을 낮춘다. 녹지공간이 늘어나면 안전감이 높아지고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연구도 소개된다.

작은 정원은 도시의 열을 낮추고, 바람이 통하는 길이 되며, 사람과 생물 모두에게 숨 쉴 틈을 제공한다. 공공정원에서 열리는 음악회와 체험 프로그램, 지역 커뮤니티 활동은 정원이 문화와 사회를 잇는 통섭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자연의 사계절을 따라 삶의 성장과 리듬을 읽어내고, 감각을 통해 깊어지는 사유의 과정을 다루며, 정원이 어떻게 개인의 회복을 넘어 공동체의 회복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가드닝을 놀이처럼 즐기고, 가꾸고 먹고 나누는 과정 속에서 정원이 일상의 문화로 스며드는 모습도 그려진다. 각 장은 정원을 단일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여러 층위와 연결된 다면적인 공간으로 조명한다.

그리고 ‘가든타임’의 장면은 이 모든 이야기를 단단히 묶어준다.

경기도 하남 미사강변의 나무 고아원, 개발로 베일 뻔한 나무들을 모아 조성한 근린공원에서 저자는 상처 입은 나무들 앞에 선다. “내가 너를 입양해도 될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를 돌보는 일이 곧 나를 돌보는 일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150년 된 회화나무의 구부정한 몸통과 뒤틀린 가지, 잘려 나간 자리에서 다시 자라나는 어린 가지들은 팬데믹의 시간 속에서 주저앉고 싶었던 저자 자신의 모습과 겹쳐진다. 상처에서 시작되는 성장이라는 문장은 이 책의 가장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원은 크기나 식물의 종류로 완성되는 공간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깊이 마음을 두고 돌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다. 그래서 손바닥만 한 화분 하나도 때로는 태산 같은 힘이 되어, 흔들리는 마음을 조용히 지탱해준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결국 나를 가꾸는 일이고, 세상이 주는 상처 앞에서도 오롯한 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매일의 작은 행동으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든 타임』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내 삶의 계절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내 감각으로 오늘의 나를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상처 위에서도 다시 자라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말이다. 이 책은 거창한 결론을 내리게 하기보다, 빛과 바람, 잎의 결 같은 장면을 건네며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머무는 시간이 쌓일수록, 삶은 조금씩 더 단단해진다.

결국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정원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고, 크기가 아니라 관계다. 자연과 다시 이어지는 시간, 무뎌진 감각을 되찾는 시간, 나를 온전히 마주하는 시간이 곧 정원이다. 오늘 하루 안에 그런 순간을 한 번이라도 만들어보라는 제안이 오래 다정하게 남는다.


'퍼블리온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도시 속 작은 정원들이 늘어나면 비단 인간 생활환경의 쾌적함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도시가 팽창할수록 도시에 기대어 사는 많은 생물 또한 참 고달프다. 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도시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는 천천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건만, 생존 앞에서 맘이 급해진 생물들은 도시의 속도에 맞추어 십수 년간에 급속히 진화를 이루어냈다. 작은 생물들은 깃털을 짧게 줄이고(흰털발제비는 날개의 깃털을 짧게 줄여 수직으로 빠르게 날 수 있도록 진화했고 그 결과 자동차를 재빨리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빛에 적응하며(도시 속 나방은 빛을 무시하고 곳곳에 몰려든다) 악착같이 도시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이것은 안락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일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바라듯이, 도시의 작은 생물들에게도 마음껏 숨 쉬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이 허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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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4 - 박경리 대하소설, 4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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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4』는 거대한 사건이 폭발하는 권은 아니다.

대신 사람들 마음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깊게 흔들리는 변화가 중심이 된다.

배경은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은 나라를 빼앗긴 채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그런데 이 권을 읽다 보면 ‘독립’이나 ‘혁명’ 같은 단어보다 먼저 와닿는 건, 그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러운 공기다.


이야기는 길노인의 생일잔치로 시작한다.

겉으로는 잔치지만, 사실은 앞으로의 방향을 의논하는 자리다.

땅을 어떻게 할지, 조직을 어떻게 유지할지, 누가 책임을 질지 같은 문제들이 오간다.

총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시대에 ‘결정’은 곧 위험이라는 걸. 말 한마디가 집안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침묵은 또 다른 죄가 될 수도 있다.

이 장면은 14권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겉은 평온하지만 속은 팽팽하다.


이 권에서 가장 마음이 쓰인 인물은 명희다.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 삶이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바느질과 수예를 가르치며 조용히 살아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 혼자 감당해야 하는 책임,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계속 따라다닌다.

명희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관계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질까, 아니면 또 다른 외로움 속으로 들어갈 뿐일까?

명희의 삶은 해방이 아니라, 고요한 고독에 가깝다.


인실과 오가타의 관계도 그렇다. 조선 여자와 일본 남자. 서로의 감정은 진심이지만, 시대가 그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라를 빼앗은 쪽과 빼앗긴 쪽이라는 현실이 둘 사이에 놓여 있다.

인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체념이야말로 패배라는 사실도 안다. 그 단단함이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진다.

사랑이 개인의 감정으로만 존재할 수 없는 시대라면, 그 사랑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관수와 한복은 또 다른 방식으로 시대와 맞선다.

관수는 가난과 차별 속에서 자라며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뼛속 깊이 느낀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혁명 안 하고 애국 안 하고 살 수 없나?” 이 질문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애국하지 않으면 배신자 취급을 받고, 싸우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를 묻는 절규다. 한복은 “살인자의 아들로 끝나느니 애국자로 끝나겠다”고 말한다.

그 말은 영웅적이라기보다,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존엄처럼 느껴진다.

정의는 정말 존재하는가, 아니면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름일 뿐인가?


이 권에는 인간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문장도 등장한다.

맹수는 배부르면 사냥하지 않지만, 인간은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읽으면서 마음이 서늘해졌다. 인간은 이념과 애국이라는 이름으로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래서 14권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정의는 누구의 것인가. 성공한 자가 들고 있는 칼 위에 꽂힌 말은 과연 진짜 정의인가?


읽는 내내 ‘밤’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관수가 술에 취해 “왜 이리 날이 안 새느냐”고 울부짖는 장면은 개인의 한탄을 넘어 시대의 탄식처럼 느껴진다.

새벽이 오지 않는 기분.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땅을 지키고, 사랑을 붙들고, 조직을 이어가고, 다시 모인다.

끝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은 왜 계속 버티는가?

희망 때문일까, 아니면 포기할 수 없다는 자존 때문일까?


『토지 14』는 큰 사건보다 사람들의 선택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싸우고, 어떤 이는 버티고,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이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이 모여 시대를 만든다. 이 권을 덮고 나면 거창한 감동보다 묵직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정의를 믿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밤을 지나고 있는가.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chae_seongmo

@dasan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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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란 신들린 무당 말이나 눈앞에 보이는 엽전 한 닢을 더 믿으니,
바늘구멍만 들여다보지 화산구멍은 눈앞에 없고,"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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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밤의 뮤지컬 - 나만의 공간에서 즐기는 N차 관람 뮤지컬의 감동 Collect 37
윤하정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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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밤의 뮤지컬』은 제목 그대로, 30편의 대표 뮤지컬을 따라 밤의 무대를 여행하는 책이다.

저자 윤하정은 머리말에서 무대를 “밤의 산물”이라 부른다.

하루의 일과가 느슨해지는 그 시간, 무대 안팎에는 그날의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는 사람들(제작진·배우·연주자·관객)이 모이고, 한순간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공연장을 채운다는 고백으로 책의 결을 잡는다. 그리고 그 무대를 좇느라 오랫동안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밤에는 공연장으로, 낮에는 공연장 안팎에서 배우와 관계자를 만나고 원작과 배경을 탐험하며 기사와 방송을 이어온 시간이었다. 이 책은 그 세월이 흩어지지 않도록 관람·취재·기록을 아카이브로 엮어낸 결과물이다.

구성은 ‘하루 한 편’의 리듬을 닮았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사랑받아온 뮤지컬 서른 편을 중심에 두고, 15개의 카테고리로 정리한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인기작부터 프랑스·오스트리아 뮤지컬, 우리 색이 짙은 창작뮤지컬, 1~2인극 소극장 작품부터 블록버스터급 대극장 공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단순한 관람기라기보다, 자칫 단편적인 기사로 흩어질 수 있는 기록을 섬세하게 이어 붙인 입체적 안내서에 가깝다. 뮤지컬이 완성도 높은 종합예술이면서 가장 대중적인 공연예술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화려한 무대 뒤에는 시대와 문화, 삶의 방식, 인간의 깊은 내면이 겹겹이 숨어 있음을 한 편씩 꺼내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이 다정한 이유는 ‘용어’부터 잡아주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공연시장의 양대 산맥인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설명하면서,

웨스트엔드는 런던의 상업 공연지구, 브로드웨이는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중심 공연가라는 배경을 짚는다. 또한 국내 무대에서 자주 헷갈리는 오리지널·라이선스·창작뮤지컬의 구분도 명확하다.

해외 팀이 내한해 공연하면 오리지널(정확히는 내한공연에 가깝고), 저작료와 판권을 구입해 한국 제작진이 한국어로 올리면 라이선스, 우리 제작진이 만든 작품은 창작뮤지컬. 여기에 토니 어워즈(1947~)와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1976~)처럼 공연계의 대표 시상식, 뮤지컬의 노래를 뜻하는 ‘넘버’,

같은 선율을 반복하는 ‘리프라이즈’, 더블/트리플 캐스팅과 원 캐스팅의 차이까지 친절하게 정리해 둔다. 덕분에 입문자도 길을 잃지 않고, 마니아는 자신이 아는 공연을 정리된 언어로 다시 만난다.

이 책은 한때 세계 4대 뮤지컬로 불리던 〈오페라의 유령〉·〈레미제라블〉·〈캣츠〉·〈미스 사이공〉에서 출발한다. 기준은 단순하다.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들이라는 것. 모두 영국산으로, 〈캣츠〉(1981)·〈레미제라블〉(1985)·〈오페라의 유령〉(1986)·〈미스 사이공〉(1989)이 그 순서로 무대에 올랐다.

세월이 흐르며 순위가 바뀌었을지라도, 이 작품들이 지금도 멋진 선배처럼 무대를 지키며 젊은 관객과 진솔하게 소통하는 이유를 저자는 계속 질문한다. 이 질문이야말로 책을 단순 정보 모음이 아닌, 공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묶어준다.

예컨대 Day 1 〈오페라의 유령〉에서 저자는 작품의 주요 기록부터 또렷하게 정리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35년 이상 쉬지 않고 공연된 유일한 뮤지컬이며(브로드웨이는 2023년 폐막), 2010년 런던 만 회, 2012년 뉴욕 만 회를 돌파해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왜 이 작품이 오래 버티는가를 “변치 않는 클래식함”으로 풀어낸다. 19세기 파리 오페라하우스를 재현한 웅장한 무대, 200여 벌의 의상, 대형 샹들리에 같은 볼거리뿐 아니라, 드라이아이스와 촛불을 활용한 장면 구성, 도르래와 케이블로 설계된 샹들리에 추락의 기술적 구현까지 ‘무대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핵심은 결국 음악이다.

‘The Phantom of the Opera’의 파이프 오르간, ‘The Music of the Night’의 다감한 내면, ‘All I Ask of You’와 이어지는 팬텀의 리프라이즈가 같은 선율을 전혀 다른 감정으로 무겁게 만드는 방식까지.

한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히트곡이 나온 뮤지컬로도 명성은 깨기 힘들 것이라는 문장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읽는 쪽이 납득하게 된다. 게다가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의 실제 공간(지하 수공간)과 원작 소설을 연결하며 ‘런던에서 시작된 영국산 뮤지컬이 왜 프랑을 쓰는가’ 같은 궁금증까지 자연스럽게 해소해 준다. 공연을 본 사람은 장면이 다시 선명해지고, 못 본 사람에겐 꼭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도록 만든다.

Day 2 〈레미제라블〉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이 작품을 저자는 가슴을 파고드는 포근한 인류애라고 부른다. 제목부터가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빵 하나로 19년을 복역한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관용을 통해 새사람이 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은촛대까지 내어주는 작은 자비가 장발장의 삶뿐 아니라 주변의 삶까지 바꿔 놓고, 그 사랑은 마리우스와 코제트, 에포닌, 그리고 자베르의 원칙이 무너지는 비극까지 큰 파문으로 번진다.

혁명의 바리케이드와 ‘One Day More’ 같은 대서사 장면이 유명하지만, 결국 이 작품이 오래 남는 이유는 절망 속에 피어난 작은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끝까지 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또한 〈레미제라블〉의 포스터가 장발장이 아닌 어린 코제트인 이유를 상징으로 풀어주는 대목은, 작품을 한 번 더 깊게 보게 만드는 지점이다. 코제트는 비참한 인간의 상징이면서도 사랑과 포용, 새로운 삶을 향한 의지, 곧 작품이 말하는 방대한 인류애를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설명은 공연을 보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곱씹게 만든다.

결국 『30일 밤의 뮤지컬』이 주는 선물은 정보만이 아니다.

저자는 30일의 밤 동안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30편의 뮤지컬을 감상하며 색다른 감동을 느껴보라고 초대한다. 입문자에게는 가장 친절한 가이드로, 애호가에게는 공연장의 공기와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기록집으로 기능한다. 화려한 장면 뒤의 역사와 맥락을 알고 나면, 공연은 더 깊고 오래 남는다.

이 책은 그 깊이를 어렵지 않게 건네는, 뮤지컬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정한 초대장이다.


'동양북스 서포터즈 2기' 활동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한때 세계 4대 뮤지컬로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캣츠〉 〈미스 사이공〉을 꼽았습니다. 기준이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들입니다. 모두 ‘영국산’으로 〈캣츠〉가 1981년, 〈레미제라블〉이 1985년,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미스 사이공〉은 1989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세기가 달라지고 새로운 인기 뮤지컬도 많아진 만큼 순위가 조금은 바뀌었을 듯한데요. 그럼에도 대다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마흔 살 안팎, ‘라떼’나 ‘꼰대’ 수식어가 달릴 이들 뮤지컬이 꾸준히 ‘멋진 선배’ ‘진정한 리더’로 무대를 지키며 자신보다 어린 관객들과도 진솔하게 소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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