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2
다크모드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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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지금 피곤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기억이 진짜인지 정도는 스스로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믿는다.

평생 하나의 몸과 마음으로 살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02 : 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는 그 믿음이 생각보다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책에는 11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도 자신은 멀쩡하다고 믿었던 소년,

잠든 채 차를 몰고 가 사람을 해치고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남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자신의 경험처럼 기억한 사람, 즐겁지도 않은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을 해치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낫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이들은 특별히 어리석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몸과 정신을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책은 잠과 기억, 쾌락과 치료를 둘러싼 실제 사건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자주 잘못 이해하는지 보여준다.

심리학과 뇌과학, 의학과 역사, 범죄와 철학을 넘나들지만 어렵고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지 않는다.

먼저 흥미로운 사건을 들려준 뒤, 그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의 오류를 짚어낸다.

한 편의 미스터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빠르게 읽히면서도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열일곱 살 랜디 가드너의 수면 박탈 실험이다.

그는 1963년 과학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약 264시간, 무려 11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 실험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눈꺼풀이 무겁고 조금 예민해지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야의 초점이 풀리고 감각이 둔해졌으며, 발음이 뭉개지고 감정의 변화도 심해졌다. 나중에는 길가의 표지판을 사람으로 착각하는 환각까지 나타났다.


그런데도 가드너는 끝까지 완전히 무너져 보이지 않았다.

농구를 하고 핀볼 게임에서 연구자를 이겼으며, 기자회견에서는 질문에도 또렷하게 답했다. 한 관찰자는 기억과 판단력이 무너지는 소년을 보았지만, 다른 관찰자는 여전히 게임을 하고 대화하는 멀쩡한 소년을 보았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잠을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는지가 아니다.

잠이 부족해지면 몸만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괜찮은가’를 판단하는 능력도 함께 흐려진다는 사실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장 지친 순간의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아직 괜찮다고 쉽게 판단한다.


사람은 망가질 때 모든 기능이 한꺼번에 꺼지지 않는다.

말하고 걷고 웃을 수 있다는 이유로 멀쩡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흐려진 것이 판단력이라면 자신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결국 가드너의 실험이 보여준 것은 잠을 이긴 인간이 아니라,

무너지는 몸이 한동안 멀쩡한 척할 수 있으며 그 모습에 가장 먼저 속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책은 현대인이 잠을 지나치게 수치와 기준으로 판단하는 모습도 돌아보게 한다. 몇 시에 잠들었는지, 몇 시간을 잤는지, 깊은 잠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를 수면 앱으로 확인하고, 앱이 좋지 않은 점수를 보여주면 몸의 느낌보다 숫자를 더 믿는다.

새벽에 잠깐 눈을 뜬 것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나쁜 잠’이라고 해석하는 순간 불안이 시작된다.

불면증이 아닐까, 내일 하루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면 몸은 긴장하고 다시 잠들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잠의 형태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 기준일 수 있다.

빛이 밤을 밀어내고 도시의 활동 시간이 길어지면서 잠은 휴식이 아니라 관리하고 평가해야 할 성과처럼 변했다.

몸이 보내는 느낌보다 수면 앱의 점수를 믿고, 정해진 기준에서 조금 벗어나면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의심한다.

책은 우리가 잠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몸을 조금 더 느슨하게 받아들이는 감각까지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치명적 가족성 불면증을 앓았던 실바노의 이야기는 잠이 얼마나 놀라운 기능인지 보여준다.

그는 누구보다 자고 싶어 했지만 잠으로 넘어가는 길 자체가 닫혀 있었다.

그의 가문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비슷한 죽음이 반복됐고, 오랫동안 스트레스나 과로 때문이라고 여겼던 증상은 훗날 유전되는 질병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몸의 기능도 어느 날 조용히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변화가 반드시 통증이나 분명한 경고와 함께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잠든 채 처가로 운전해 장모를 공격한 케네스 파크스 사건은 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그의 몸은 움직였지만 판단과 기억은 충분히 깨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피해와 행동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순간 그에게 행동을 선택하거나 멈출 의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몸은 움직였는데 의식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 행동의 주인은 누구라고 해야 할까. 이 사건은 인간이 언제나 자기 몸의 주인이라는 믿음을 흔든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우리는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는 말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의 장면을 그대로 보관하는 창고라기보다, 떠올릴 때마다 다시 조립되는 이야기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한 장면도 정말 내가 직접 본 것인지, 나중에 본 사진과 가족들이 반복해서 들려준 이야기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자동차 사고 실험은 질문에 사용된 단어 하나가 기억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모두 같은 사고 영상을 보았지만, 자동차가 서로 ‘부딪쳤다’는 표현보다 ‘박살 났다’는 강한 표현을 들은 사람들이 차량의 속도를 더 빠르게 기억했다. 질문은 단순히 기억을 꺼내는 도구가 아니라 기억 안에 새로운 정보를 넣는 장치가 될 수 있었다.


‘쇼핑몰에서 길을 잃다’ 실험에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사건을 가족에게 들은 사실처럼 제시했다. 일부 참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을 기억한다고 말했고, 당시의 감정과 주변 모습까지 덧붙였다. 물론 모든 기억이 쉽게 완전히 조작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야기와 유도 질문, 신뢰하는 사람의 암시가 기억의 내용과 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목격자가 확신에 찬 태도로 누군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고 해도 그 기억이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사건 이후 본 뉴스와 사진, 수사관의 질문,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가 원래 기억에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섬뜩한 것은 잘못된 기억도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에도 감정과 세부 정보가 붙을 수 있고,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실제 경험이라고 굳게 믿을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즐겁지도 않은 행동을 왜 멈추지 못하는지도 살펴본다.

슬롯머신과 숏폼 영상이 사람을 붙잡는 것은 확실한 만족보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다.

재미가 없으면서도 계속 화면을 넘기고, 이미 충분히 소비했으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이것까지만 보고 자야지”라고 생각한 뒤 한 시간이 지나 있는 이유도 매 순간 즐거워서라기보다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것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책은 선의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됐던 의학의 오류를 보여준다.

사람을 낫게 한다며 오랫동안 시행된 사혈, 환자를 조용하게 만들면 치료됐다고 여긴 로보토미,

한때 의약품으로 사용됐던 헤로인과 코카인은 전문가의 확신도 잘못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손 씻기의 중요성을 주장했지만 동료들에게 외면받은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의 이야기는

기존의 믿음과 자존심이 새로운 지식을 거부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라는 제목은 처음에는 인간을 냉소적으로 비난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착각하고,

기억을 다시 쓰며, 욕망에 흔들리고, 자신의 판단을 지나치게 믿는다.

나만 부족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 불완전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망가져 있다는 사실보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내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조금 더 신중하게 듣는다.

내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확신만으로 누군가를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이 책은 독자를 겁주거나 고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가장 모르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가까워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잠과 기억, 욕망과 치료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어두운 본성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굳은 확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우리는 잠을 빌린 돈처럼 생각한다. 오늘 좀 덜 자도 내일이나 주말에 몰아 자면 갚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부족한 잠은 빌린 돈처럼 깔끔하게 갚아지지 않는다. 사라진 몇 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판단력과 기분과 집중력 속으로 슬그머니 스며든다. 문제는 그게 잘 안 느껴진다는 거다. 평소보다 좀 예민하고, 좀 멍하고, 실수가 좀 늘 뿐이라, 우리는 그걸 "원래 이런 날도 있지" 하고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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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9 - 박경리 대하소설, 5부 4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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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의 패색은 짙어지고 있지만 조선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학병과 징용, 식량난과 사상 탄압이 일상이 된 시대다.

자유는 물론이고 내일을 기대할 마음마저 빼앗긴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조차 잃어간다.

이 책에서 가장 무섭게 다가온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젊은이들이 거리와 일터, 집 마당에서 끌려가고, 가족은 기약 없는 이별을 맞는다.

그럼에도 울음과 한숨은 점차 들리지 않는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반복된 나머지 고통에 반응할 힘마저 없어진 것이다.

“체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의식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체념은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감정이다.

그러나 폭력이 일상이 되고 굶주림과 이별이 풍경처럼 반복되면 사람은 생각하는 일부터 멈추게 된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원인과 결과를 따질 힘도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린다.

억압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사람들이 침묵하는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평온한 사회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이 말할 힘을 잃고, 서로의 고통을 돌아볼 여유마저 빼앗긴 사회일 수 있다. 거리의 고요함이 평화를 뜻하지 않듯, 국민의 침묵 역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침묵은 두려움이고 체념이며,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닫아버린 결과다.


식량난을 그린 장면에서도 전쟁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밥 한 술과 술 한 잔을 나눌 여유가 사라지고,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 혼례를 치르는 일이 예사가 된다.

장례식에서도 조문객을 대접할 수 없고, 징용으로 끌려가는 아들과 남편에게 주먹밥을 싸주고 나면 남은 가족은 푸성귀가 든 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내일 닥칠 불행보다 오늘 먹을 한 끼를 먼저 걱정한다.

배급받은 식량의 절반을 팔아 다음 배급을 받을 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은 가난이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은 사람에게 미래를 생각할 여유를 빼앗는다. 생존에 모든 힘을 써야 하는 사람에게 정의와 희망,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다.

결국 전쟁은 사람의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인심과 마음의 여백까지 말려버린다.

먹을 것이 없으니 밥을 나누기 어렵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타인의 슬픔을 오래 들여다볼 수도 없다.

극심한 가난이 무서운 까닭은 사람을 굶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돌볼 힘까지 빼앗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한 술의 밥을 건네고,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행위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저항이다.


서희의 삶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길상은 형무소에 갇혀 있고, 출옥할 날짜조차 알 수 없다.

예전에는 정해진 형기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일본의 패배가 가까워지는 것은 희망이지만, 궁지에 몰린 권력이 어떤 잔혹한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공포가 된다.

전쟁에서 패배해가는 권력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키운다.

희망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그 희망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은 사람을 더욱 지치게 한다.

기다림은 끝을 알 때보다 끝을 전혀 알 수 없을 때 훨씬 잔인하다.

둘째 아들 윤국마저 학병으로 떠나면서 서희 곁의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환국 역시 아버지와 동생, 양현이 모두 곁을 떠난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지 못한다.

가족이 있어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인간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토지 19』는 가족을 단순히 혈연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서로의 불안을 알아보고 마음을 받아주는 관계가 있을 때 비로소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집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사이라도 고통을 말하지 못하면 사람은 고립된다.

반대로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상대의 두려움을 알아보고 곁을 지켜준다면 그 관계는 가족보다 더 깊어질 수 있다.


성환이 학병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성환할매가 눈이 멀어버리는 장면도 가슴을 무겁게 한다.

“자식이란 무엇일꼬?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 자식이다.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부모 자식은 맺어진 걸까?”

자식은 부모에게 기쁨인 동시에 평생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존재다.

아무렇게나 굴러도 좋으니 목숨만 길게 이어가라는 어머니의 마음 앞에서는 성공도 명예도 중요하지 않다.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것이 전쟁을 견뎌야 했던 수많은 부모의 유일한 기도였을 것이다.

전쟁은 군복을 입고 떠나는 한 사람만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는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의 시간까지 함께 빼앗는다.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은 몸으로 전쟁을 겪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끝없는 상상과 기다림으로 또 다른 전쟁을 치른다.

“원수는 세월이 갚고 남이 갚아준다”는 말도 오래 남는다.

이 말은 무조건 참고 살라는 뜻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지혜였을 것이다.

당장 맞서 싸울 힘이 없을 때 분노에 자신을 모두 태워버리는 대신 살아남아 시간을 견디는 것, 그것 역시 하나의 저항일 수 있다.

다만 세월이 모든 잘못을 저절로 바로잡아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기억하고 말하며 기록해야 비로소 시간은 심판의 힘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토지』라는 작품 자체가 한 시대의 폭력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거대한 기억이라 할 수 있겠다.

역사는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고통은 쉽게 지워지고, 말하지 않은 진실은 힘 있는 자의 이야기로 대체되기 쉽다.

박경리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사투리, 굶주림과 이별을 문장으로 남긴 것은 사라질 뻔한 사람들의 시간을 되찾아주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말이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어느새 사실처럼 굳어지는 모습도 나온다.

처음에는 추측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진실의 얼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람의 평판과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특히 불안이 가득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사실을 차분히 확인하기보다 자신의 두려움에 맞는 이야기를 더 쉽게 믿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낙인은 때로 총칼보다 오래 남는다.

박경리는 국가의 폭력뿐 아니라 일상 속 언어가 만들어내는 폭력도 놓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무심코 옮긴 말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양현과 영광의 사랑은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잃을 것에 대한 불안도 커진다.

“진정 크나큰 환희는 슬픔인지 모른다.”

행복이 클수록 그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자란다.

사랑은 삶을 완성해주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가장 연약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전쟁 한가운데서도 함께 있다면 헤어져 서로를 찾는 것보다는 행복할 것이라는 두 사람의 대화는 사랑의 본질을 단순하면서도 절실하게 보여준다.

고난 자체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현과 영광의 관계에는 출생과 신분, 가족의 역사도 얽혀 있다.

양현은 영광의 따뜻함을 알아가지만, 동시에 그 행복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영광 역시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애틋한 이유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과거와 신분, 가족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대가 짊어진 상처와 삶의 무게까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묻는다.


영광이 어린 시절 모아두었던 책과 습작 노트를 다시 발견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책을 한 권씩 사 모으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 품었던 오기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반드시 거창한 신념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꿈, 누군가 건넨 작은 돈, 어렵게 사 모은 책 한 권처럼 사소해 보이는 기억이 한 사람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기도 한다.

삶이 흔들릴 때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이유를 미래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잊고 있던 노트와 책은 영광에게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오가타와 쇼지, 조찬하의 여행은 혈연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쇼지는 오가타와 유인실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조찬하 부부의 사랑 속에서 자란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오가타는 쇼지가 찬하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그를 부러워한다.

아이에게 진짜 부모는 단지 피를 물려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안심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오가타에게 쇼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지만, 쇼지의 삶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어온 사람은 찬하다.

이 장면은 피가 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관계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함께 보낸 시간과 책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출생의 진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벽은 사람을 가두어 두는 억압적 존재이기도 하고 사람을 보호하고 의지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도 벽과 비슷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족을 이루는 일은 때로 책임과 의무라는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두는 일이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울타리 덕분에 우리는 차가운 세상에서 몸을 녹이고 안심할 수 있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을 조금 구속하더라도 기꺼이 돌아가고 싶은 벽, 즉 관계와 공동체가 필요하다.

벽이 전혀 없는 집은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 머물 수 없는 공간이다.

사람에게도 자신을 지켜주는 일정한 경계와 책임, 돌아갈 관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벽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벽이 사람을 가두는 벽인지 지켜주는 벽인지에 있다.


일본인 오가타와 유키코를 통해서는 한 국가의 잘못과 개인의 양심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오가타는 남경학살과 조선 여성들에게 가해진 참상을 떠올리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유키코 역시 전쟁을 일으키고 진실을 감춘 일본 군부를 비판한다.

일본 정부는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축소해 발표하고, 비판적인 언론인과 지식인을 탄압하며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국민의 부엌과 쓰레기통까지 살피면서 절약을 요구하지만, 정작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잘못된 판단은 감춘다.

사소한 생활을 통제하는 모습은 국가가 국민을 얼마나 세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은 자신이 만든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국민의 절약과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책임을 돌린다.

국가가 진실을 감추고 비판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전쟁은 바깥의 적과 싸우는 일을 넘어 내부의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박경리는 모든 일본인을 하나의 얼굴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국가가 광기에 빠졌을 때에도 자신의 나라가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이는 개인에게 조국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책임을 묻는다.

진정한 애국은 국가의 잘못을 감추고 두둔하는 태도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국가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의 집단이 저지른 폭력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은 그 시대에도, 지금도 귀하다.

자신이 속한 나라와 집단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배신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막는 가장 책임 있는 태도일 수 있다.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속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모습도 많은 생각을 남긴다.

권오송은 한때 주변 사람들에게 변절자라는 의심을 받았지만, 정작 전쟁을 찬양하고 징병을 독려하는 극본을 쓰라는 요구를 거부해 감옥에 갇힌다.

반대로 그를 손가락질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세가 험악해지자 일본 권력에 협력한다.

어제의 애국자가 오늘의 변절자가 되고, 변절자로 몰렸던 사람이 끝내 신념을 지키는 모순된 현실이다.

인간의 진실은 평온할 때의 말보다 위기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통해 드러난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한때의 소문과 겉모습만으로 쉽게 결론 내려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사람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더 쉽게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음악가 나일성의 태도를 통해서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도 드러난다.

그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살며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과 자신이 하는 음악까지 경멸한다.

그러나 악기와 목소리 자체에는 죄가 없다. 문제는 예술이 어떤 권력과 목적을 위해 사용되느냐에 있다.

전쟁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선전에 이용될 때 예술은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슬픔을 기록하고 인간의 마음을 지켜낼 때 예술은 저항과 위로가 된다.

『토지』 역시 역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대에 짓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문학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자유가 저당 잡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집도 가족도 없는 거지는 자유인이라는 주장에 다른 인물은 실제로 그런 처지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이 대화는 자유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경계하게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는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일 수 있지만,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빈곤일 수도 있다.

자유는 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굶주린 사람에게 내일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자유가 아니라 막막함일 수 있다.

가진 것이 많아 생기는 구속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어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구속도 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관계와 책임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이 감당할 관계와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데 있다.


배설자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도 단순한 복수의 통쾌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배설자는 일본 경찰에 협력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공포를 남긴 인물이다.

그런 그가 소나무에 묶인 채 죽음을 맞지만, 누가 왜 그를 죽였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강선혜는 배설자로 인해 오랫동안 불안과 고통을 겪었고, 그의 죽음 이후에도 마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여옥은 자신 역시 누군가를 미워하며 벌을 바랐지만, 어느 순간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벌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해자의 죽음이 피해자의 상처를 곧바로 낫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복수는 사건을 끝낼 수 있어도 기억과 공포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토지 19』는 악인이 벌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면서도 그것만으로 정의가 완성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죄를 기억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하지만, 증오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질문을 남긴다.


홍과 보연의 딸 상의가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에 맞서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평소 조용히 지내던 상의는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는 교사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밝힌다.

전쟁과 식민지 교육은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말고 명령에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신사참배와 군사훈련, 근로 동원은 학교를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그 안에서 상의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는 작아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일상의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상의의 용기는 어른들이 체념한 시대에도 다음 세대의 정신까지 완전히 길들일 수는 없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어두운 시대에도 학생들은 웃고 장난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들의 해맑음은 현실을 모르는 철없음이 아니라 폭력적인 시대가 끝내 빼앗지 못한 생명력처럼 느껴진다.


『토지 19』에서 광복은 가까워지고 있지만 인물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독자는 곧 역사의 전환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이들의 절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새벽 가까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확신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희망을 믿을 힘조차 없을 때에도 오늘을 견디고, 아이를 돌보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책 한 권을 다시 펼치는 행동 속에 희망은 이미 존재한다.

누군가는 미래가 없으니 오직 오늘만 생각하며 살면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그 말에는 체념과 생존의 지혜가 함께 담겨 있다.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시대에는 하루를 버티는 일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된다.

그러나 오늘만을 살아야 하는 삶이 진정으로 홀가분한 것은 아니다.

내일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는 인간에게서 꿈과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늘의 밥으로 목숨을 이어가지만,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삶을 계속할 수 있다.

“사람이 어찌 무병으로 살 수 있겠소? 아플 때도 있고, 고개를 넘어 또 넘어도 사람 사는 것이 안 그렇소.”

삶은 하나의 고개를 넘으면 끝나는 길이 아니다. 고개를 넘은 뒤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픈 이를 돌보고, 떠난 이를 기다리며 서로에게 밥 한 술과 마음 한 조각을 내어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아픔이 찾아올 때마다 서로를 돌보며 다시 고개를 넘는 일인지도 모른다.


『토지 19』는 거대한 역사를 기록하면서도 역사의 진짜 얼굴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헤어지게 하며 평범한 가족의 끼니마저 빼앗는 일이다.

또한 학교의 수업을 바꾸고, 예술가의 문장을 검열하며 사람들 사이에 의심과 소문을 퍼뜨린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과 언어, 관계와 기억을 차지하려는 순간 일상 전체가 전쟁터가 된다.

그런 세상에서도 인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살아간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나를 사람답게 바라봐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끝까지 살아 있게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그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돌보는 사람 자신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한다.

폭력적인 시대가 사람들을 서로 의심하고 외면하게 만들 때 타인의 곁을 지키는 행동은 시대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토지 19』가 전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라 생각한다.

역사가 인간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어도 서로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마음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절망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아니다.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며 사랑과 양심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일이다.

광복을 한 권 앞둔 이 책은 희망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밥을 짓고, 자식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소문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사람,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죄를 부끄러워하는 사람, 교사의 부당함 앞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는 학생도 보여준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반드시 거대한 영웅만이 아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방향을 조금씩 바꾼다.

어쩌면 희망은 밝은 미래를 확신하는 마음이 아니라 미래를 믿지 못하면서도 오늘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새벽이 온다고 장담해주지 않는 밤에도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사랑하며,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토지 19』가 보여주는 가장 끈질긴 생명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chae_seongmo

@dasanbooks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살아간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나를 사람답게 바라봐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끝까지 살아 있게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그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돌보는 사람 자신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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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은 스스로를 베는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 현자병법 1
항우 지음 / 블랙라벨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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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대개 승자의 이름을 오래 기억한다. 초한쟁패의 최종 승자는 유방이었고, 항우는 해하 전투에서 패한 뒤 오강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흔드는 인물은 항우다. 천하를 얻은 황제보다 천하를 잃은 패자의 마지막 노래가 더 오래 남았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산을 뽑고 세상을 덮을 만한 힘과 기개를 뜻하는 이 말에는 단순한 무용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현자병법 : 망설임은 스스로를 베는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는 항우의 승리와 패배를 따라가며, 결국 우리 삶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 되묻는 책이다. 항우의 생애를 소개하는 역사서라기보다 그의 결단과 자존심,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오늘의 삶에 비춰보게 하는 인문 자기계발서에 가깝다.


이 책은 진나라가 정해 놓은 질서 안에서 부속품처럼 살아가던 백성들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톱니바퀴라는 사실조차 잊기 쉽다. 오늘날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놓치기도 한다. 타인의 기대와 시선을 하나씩 걷어냈을 때 내 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남는지 돌아보게 된다.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것과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조직에 속한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생각과 선택을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이 문제다. 타인과 협력하면서도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삶의 주도권을 지키는 최소한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우는 진시황의 행차를 보며 언젠가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말한 인물이다. 멸망한 초나라의 후예였지만 진나라가 정해 놓은 운명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끝내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마천은 『사기』에서 황제의 일대기에 사용하는 ‘본기’에 항우를 기록했다. 왕조를 세우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의지로 살아낸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항우를 무조건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과감하고 강인했지만 잔혹하고 오만했으며,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해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다. 그의 강한 기개는 수많은 승리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고립과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항우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극단적인 고집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려 했던 자세는 배우되, 자기 확신이 타인의 목소리를 지우는 순간은 경계해야 한다. 주도적인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결과를 책임지지만, 독단적인 사람은 자신의 결정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그 대가까지 떠넘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거록대전의 파부침주(破釜沈舟)였다. 항우는 강을 건넌 뒤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렸으며, 병사들에게 사흘 치 식량만 남겼다. 그러나 이것은 무모한 만용이 아니었다. 그는 적의 상황과 보급선을 살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뒤, 그 결정을 끝까지 실행하기 위해 퇴로를 끊었다.

이 장면을 현실에 대입해보자면, 무조건 직장을 그만두거나 모든 것을 걸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퇴로와 안전장치는 때로 우리를 보호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준다.

다만 그것이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인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인지는 구분해야 한다. 나를 보호하는 안전망은 필요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할 이유부터 찾는 마음속 비상구는 결단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


이 책은 ‘완벽한 계획’의 함정도 지적한다. 우리는 “자료가 더 모이면”, “상황이 안정되면”, “조금 더 준비되면” 움직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 퍼센트의 정보가 주어지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모든 변수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선택할 기회와 결정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결단이란 두려움이 사라진 뒤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고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범위를 판단한 뒤, 불완전함을 안고 움직이는 일이다. 완벽한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핵심을 파악하고 첫 행동을 시작하는 힘이다.


타협에 대한 이야기도 깊이 남았다. 인간의 삶에는 타협이 필요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가능성을 깎아내리는 타협은 다르다. “이 정도면 됐다”, “나는 원래 이 정도다”라는 생각은 결과보다 먼저 기세를 꺾는다. 모든 일에 사력을 다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지는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신중함과 망설임도 구분한다. 신중함은 칼을 휘두르기 전에 자세를 가다듬는 일이고, 망설임은 이미 휘두른 칼에서 힘을 빼는 일이다. 결단은 극적인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결심한 다음 날에도 행동하고, 실패한 뒤에는 방법을 고쳐 다시 시도하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큰 결단보다 작은 결판을 자주 내보는 일이 중요하다. 미뤄둔 전화 한 통을 하고, 보내지 못한 메일을 보내고, 핑계만 늘어놓던 일을 오늘 한 페이지라도 시작하는 것이다. 큰 결단은 타고난 용기가 아니라 작은 선택을 스스로 내려온 습관에서 나온다.


책을 읽는 동안 한 가지 질문이 오래 남았다.


“나의 오늘은 누가 결정하고 있는가?”


망설임은 단순히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미루는 동안 선택지는 줄어들고, 결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첫걸음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두려움을 신중함이라고 부르며 삶을 미루지 않는 것이다.


항우는 천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지는 않았다. 역발산기개세는 산을 뽑겠다는 허황된 외침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무게를 스스로 들겠다는 한 인간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망설임이 스스로를 베는 칼이라면 오늘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남의 허락을 기다리며 미뤄둔 작은 일 하나를 내 손으로 결정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남이 짠 판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길을 여는 첫 번째 파부침주일지도 모른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돌이켜 보면, 우리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은 대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하지 못해서 생긴다. 사표를 내려다 망설였던 그날, 고백하려다 입을 다물었던 그 저녁, 시작한 일을 어중간한 지점에서 접어 버린 그 봄.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늘 그럴듯한 퇴로가 있었다. 더 좋은 타이밍, 더 안정된 상황, 더 확실한 보장. 그러나 그 퇴로가 우리를 살린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 퇴로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의 한계선을 본 적이 없는 채로 나이를 먹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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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시인이 그리고 쓴 느지감치 그림일기 - 2026 충남문화관광재단 선정작
김병호 지음 / 세종마루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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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일에 머무르는 것이 편하고, 서툰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하지만 『동네 시인이 그리고 쓴 느지감치 그림일기』를 읽다 보면 늦었다는 말이 꼭 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50대 중반을 지나던 글쟁이가 코로나 시기에 동네 문화강좌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그림 에세이다. 저자는 그림일기를 매일 성실하게 쓰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핑계 삼아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일기라는 이름을 붙여두면 그림을 조금 덜 미루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다.


그림을 배우게 된 계기도 거창하지 않다. 팬데믹으로 수강생이 줄어든 화가 친구의 문화강좌에 “나라도 나가지, 뭐” 하는 마음으로 등록한다. 두 달 동안 4B연필을 쥐고 씨름한 뒤에야 수채화로 넘어가고, 어렵게 완성한 첫 그림을 바라보며 혼자 뿌듯해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도화지 한 장을 꽉 채워보는 일도 좋은 경험”이라는 짧은 말을 남긴다.

정성을 쏟아 완성한 그림인데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인지, 저자는 속으로 아쉬워한다.


이 책은 자신의 어설픈 순간을 숨기지 않는다.

혼자 애써 그리던 그림을 선생님이 고쳐주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모습과 실제 그림이 달라 속상해하기도 한다. 저자는 자신의 부족함까지 농담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림 실력이 빠르게 늘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툴러도 계속 그리면서 조금씩 자기 그림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림을 시작한 뒤 저자는 동네를 더 자주 걷는다.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골목과 논길을 돌아다니며 그림의 소재를 찾는다.

사진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불필요한 것은 지우고, 없던 것은 더하고, 색도 마음대로 바꾼다.

동네 고등학생들이 다니는 논길을 그리면서는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고, 그 길에서 학창 시절의 흡연과 폭력적인 학교문화까지 떠올린다.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꾸 옆길로 새지만, 그 옆길이야말로 이 책의 진짜 재미다.

굴다리를 그리다가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동네 풍경을 그리다가 설날 아침에 마주친 육상선수를 생각하며, 힘겹게 운동하는 자신을 손오공과 팔계, 대왕달팽이에 빗댄다.

저자의 시선은 조금 삐딱하고 능청스럽지만 그 안에는 지나온 시간과 주변 사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따뜻함이 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선생님이 그림의 어두운 부분을 손보자 밝은 색이 더 선명해지는 장면이었다. 저자는 어둠을 잘 다뤄야 밝은 부분이 더 밝아지듯, 현실에서도 어두운 부분을 잘 만져야 삶의 명도가 높아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삶의 어둠은 무조건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바라보고 다룰 때 오히려 밝은 순간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 도시〉에 담긴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인간의 아주 오래된 본능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생기기 전부터 사람들은 동굴 벽화에 소와 말, 고래와 사람, 별을 그렸다.

그 안에는 먹고사는 일과 사랑, 두려움과 꿈이 담겨 있었다.

그림은 자신의 삶을 남기고 다른 사람과 이어지기 위한 오래된 소통 방식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특히 그림 속 ‘상징’에 주목한다. 동그라미 하나도 숫자 0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연인의 얼굴이고, 밥그릇이며, 보름달일 수 있다. 같은 모양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떠올리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상징은 정답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보는 사람의 기억과 감정이 더해질수록 의미가 계속 달라진다.


비 오는 날의 도시도 마찬가지다. 빗방울을 통과한 풍경은 휘어지고, 색은 번지고, 도시의 불빛은 평소보다 더 강하고 낯설게 보인다. 저자는 이를 칸딘스키적인 미학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하면서도, 사실은 아마추어로서 부족한 부분을 감추기 위한 꼼수일 수도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도 비 오는 창밖 풍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같은 장면을 보고도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느 순간 흐려지고 휘어진다.

결국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통과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예술은 현실을 정확히 복사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인 세계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보여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은 경건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술은 노는 일이며, 말려도 하고 싶은 일이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그 안에서 마음껏 움직이는 일이다.

그림도 시도 음악도 잠시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놀이이며, 슬픔조차 그 안에서는 표현의 한 부분이 된다. 그래서 거실 벽을 보수하라는 아내의 잔소리에 잔머리를 굴리다가 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처럼 바꾸어버리는 엉뚱한 장면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은 〈바람의 고향을 주제로 한 변주곡〉이었다.

시인 주우1이 등단 30년을 기념해 기획한 전시에서 시는 시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의 시를 표현하는 자리였다.

저자는 그 가운데 시 「바람의 고향」을 주제로 그림 한 점을 맡는다.

시 내용을 그대로 옮긴 삽화가 아니라 시를 자신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한 작품이었다.


그림 왼쪽에는 한 사람이 힘겹게 똥을 싸고 있다.

이를 본 아내는 남의 중요한 행사에 걸 그림에 왜 똥을 그리느냐며 타박하지만,

저자는 “예술은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며 그림을 지킨다.

작품 속 인물은 오랫동안 묵힌 것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꺼낸다.

그렇게 나온 똥은 책이 되고, 책은 바람을 만든다.

오른쪽의 위아래가 뒤집힌 세상에서는 그 바람에 놀란 존재들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뒤돌아본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똥은 단순한 배설물이 아니라 작가 안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생각과 경험, 고민과 감정, 그리고 창작의 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을 힘겹게 밖으로 꺼내면 책이 되고 그림이 되고 한 편의 작품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작품은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익숙하게 보던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바람이 된다.

뒤집힌 세계와 뒤돌아보는 존재들은 예술이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보여주는 힘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 바람은 비로소 마음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림 속에 숨겨진 마릴린 먼로 역시 오래 바라볼수록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예술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왼쪽 아래의 ‘670달러, 가격 흥정 없음’이라는 문구에는 창작에 들인 시간과 마음은 쉽게 흥정할 수 없다는 유쾌한 자존심도 담겨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런 해석이 작가가 정해둔 하나의 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묘한 매력이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고 조금 삐딱하게 보이는 그림이지만,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지 생각하다 보면 의외로 깊은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저자의 엉뚱한 시선을 따라 웃으며 걷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삶과 창작, 나이 듦과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동네 시인이 그리고 쓴 느지감치 그림일기』는 그림을 통해 평범한 하루를 다시 보고, 오래된 기억과 감정을 꺼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서툴더라도 계속 바라보고, 그리고, 기록하는 동안 평범했던 하루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예술의 시작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자기 눈으로 다시 바라보고 마음속에 오래 묵혀둔 것을 용기 내어 꺼내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지금이라도 느지감치 시작해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기존의 책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묘한 책이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어둠을 다스려야 밝은 부분이 더 밟아지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어두운 부분을 잘 만져야 사는 일의 명도가 더 올라갈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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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 번은 어린 왕자 필사 인생에 한 번은 어린 왕자 필사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송근아 옮김 / CRETA(크레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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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는 비행기 사고로 사하라사막에 불시착한 한 조종사가 작은 별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린 왕자는 자신이 살던 소행성 B612를 떠나 여러 별을 여행하고, 왕과 허영심 많은 사람, 사업가와 점등인 같은 어른들을 만난다.

이후 지구에 도착해 장미와 여우, 뱀을 통해 사랑과 관계, 책임과 이별의 의미를 배워간다.

어린 시절에는 신비로운 별에서 온 아이의 모험담처럼 읽히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온다.

숫자와 성과를 좇느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어른들의 모습,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 꿈과 상상력을 잃어버린 삶이 곳곳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어린이만을 위한 동화라기보다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어른을 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생에 한 번은 어린 왕자 필사』의 첫머리에서 정여울 작가는 우리가 『어린 왕자』를 혹시 잘못된 서랍 속에 넣어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서랍에서 꺼내 ‘꿈을 깜빡 잊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책들의 서랍’에 넣어두자고 말한다.

이 표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어린 시절 한 번 읽었다는 이유로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책이 사실은 어른이 된 뒤 다시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눈으로 읽고 어떤 책은 마음으로 읽지만 이 필사책은 손끝으로 읽는 책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전체 내용을 직접 따라 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원작 삽화와 함께 작품의 주요 장면마다 ‘사유의 시간’이 배치되어 있다.

눈으로 읽으면 한두 초 만에 지나갈 문장도 손으로 옮겨 적으려면 한 글자씩 바라보아야 한다.

문장의 속도에 맞춰 생각도 느려지고, 평소라면 지나쳤을 표현과 감정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필사는 문장을 단순히 베껴 쓰는 일이 아니라 한 문장이 내 안을 충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다.

빨리 읽을 때는 작가의 이야기였던 문장이 손끝을 거치고 나면 나의 기억과 꿈, 관계와 상처를 돌아보게 하는 문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은 “어른은 누구나 한때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어른은 거의 없다”라는 유명한 헌사로 시작한다.

생텍쥐페리는 처음에는 이 책을 자신의 친구 레옹 베르트에게 바쳤지만, 곧 ‘어린 시절의 레옹 베르트’에게 바친다고 고쳐 쓴다.

이 한 문장 안에는 『어린 왕자』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잊는다.

상상하는 법, 이유 없이 좋아하는 법, 사소한 것에 감탄하는 법, 누군가의 마음을 숫자 없이 바라보는 법을 잃어버린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마음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그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세상을 계산하는 능력은 커졌지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잊었다면 우리는 성장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부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화자인 조종사는 여섯 살 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린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그림을 모자라고 생각한다.

보아뱀의 내부까지 다시 그려 보여주었지만 어른들은 그림을 그만두고 지리와 역사, 연산과 문법을 공부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그는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화가의 꿈을 포기한다.

이후 어른이 된 조종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아뱀 그림을 보여주며 상대가 자신의 상상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다.

그러나 누구나 모자라고 답한다. 그러면 그는 그 사람 앞에서 보아뱀과 원시림, 별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대신 골프와 정치, 넥타이 같은 이야기만 나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어른들의 상상력 부족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사람은 꿈이 없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말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느낄 때 먼저 입을 다물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꿈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꿈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마음속에 숨겨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사유의 시간’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독자의 삶을 향해 질문을 건넨다.

어린 시절 진지한 호기심을 보였지만 어른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적이 있는지 주변의 만류와 사회적 시선 때문에 포기한 꿈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사유의 시간’은 단순히 작품의 내용을 되짚는 코너가 아니다.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내 삶과 연결해 보고 나라면 어땠을지 천천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이해받지 못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꿈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통해 독자는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좋은 질문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평소 외면했던 마음 앞에 잠시 멈춰 서게 한다.

이 책의 ‘사유의 시간’은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읽는 시간을 넘어 자신의 삶을 천천히 읽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종사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 없이 살아가다가 사하라사막에 불시착한다.

마실 물은 일주일 분량밖에 남지 않았고 혼자서 고장 난 비행기를 고쳐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이렇게 조종사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

조종사가 여러 번 양을 그려주지만 어린 왕자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아파 보인다거나 숫양이라거나 너무 늙었다고 말한다.

결국 조종사는 상자 하나를 그려주며 원하는 양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환하게 기뻐한다.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어른에게는 빈 상자일 뿐이지만 어린 왕자에게는 양이 잠들어 있는 집이다.

어린 왕자는 눈에 보이는 그림보다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바라본다.

상자 속 양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믿음, 위로와 희망도 눈앞에 형태로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힘든 날마다 떠올릴 수 있는 ‘상자 속 양’ 같은 존재가 하나쯤 필요하다.


이 책은 여기서 다시 질문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상자 속 양’ 같은 존재가 있는지?

황량한 사막 같은 고난의 시간에 어린 왕자와 같은 존재를 만난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사막은 아무것도 없는 장소처럼 보이지만, 조종사는 바로 그곳에서 어린 왕자를 만난다.

삶이 가장 메마르고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나 책, 문장 하나가 찾아와 삶의 의미를 바꾸기도 한다.

힘든 일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순간에도 새로운 사람이나 뜻밖의 기회가 찾아올 수 있다.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난다는 것은 절망 속에서도 관계와 의미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은 어린 왕자와 양에 관한 대화다.

조종사는 양이 제멋대로 가다가 길을 잃을 수 있으니 끈과 말뚝을 그려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자신이 사는 곳이 아주 작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다. 그리고 슬픈 기색으로 덧붙인다.

“앞만 보고 가봤자 아무도 멀리 갈 수 없는걸….”

처음에는 작은 행성에서는 아무리 걸어도 멀리 갈 수 없다는 단순한 의미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문장은 어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앞만 보고 나아가는 사람을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리며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성과를 얻는 것을 성장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앞만 본다고 해서 반드시 멀리 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방향을 돌아보지 않고 속도만 높이면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같은 자리만 맴돌 수 있다.

멀리 간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거리를 이동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왜 이 길을 걷는지 알고, 곁에 있는 존재를 살피며, 필요할 때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다.


또한 이 문장은 ‘앞’만 바라보는 삶이 무엇을 놓치는지도 생각하게 한다.

앞에는 목표와 미래가 있지만 옆에는 함께 걷는 사람이 있고, 뒤에는 내가 지나온 삶과 포기했던 마음이 있다.

앞만 보는 사람은 빠르게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미가 외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인생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가 아니다. 때로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옆 사람의 속도를 기다리고, 내가 출발한 이유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삶의 깊이는 얼마나 빨리 갔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누구와 함께 걸었는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문장은 자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조종사는 양이 길을 잃을까 봐 묶어두려고 하지만 어린 왕자는 양을 묶는다는 발상 자체를 이상하게 여긴다.

어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행동을 제한하거나 자신의 뜻대로 하려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상대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붙잡아두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잃을까 봐 불안한 마음일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억지로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떠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만큼 서로 믿는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어린 왕자의 말에는 앞으로만 달리는 삶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작은 세계 안에 갇혀 있는 외로움도 담겨 있다.

아무리 걸어도 멀리 갈 수 없는 작은 행성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과 습관 안에서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사람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문장은 현재의 방향이 맞는지, 내가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자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때로는 멈춤이 후퇴보다 더 큰 전진이 되며 방향을 바꾸는 용기가 속도를 높이는 노력보다 더 멀리 데려다준다.


『어린 왕자』는 숫자로 세상을 판단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의 목소리와 좋아하는 놀이보다 나이와 몸무게, 형제의 수와 아버지의 수입을 묻는다.

분홍빛 벽돌과 창가의 제라늄, 지붕 위의 비둘기가 있는 집을 설명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비싼 가격의 집이라고 말하면 그제야 멋진 집이라고 감탄한다.

오늘날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사람을 연봉과 직함, 학력과 팔로워 수로 설명하고, 집은 가격으로, 책은 판매량과 순위로 평가한다.

우리는 하루를 잘 보냈는지도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로 판단할 때가 있다.

숫자는 결과를 쉽게 보여주지만, 한 사람의 마음과 삶까지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하는지, 무엇을 기다리고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숫자로 나타낼 수 없다.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은 대부분 셀 수 없기에 더 귀하다.


필사로 『어린 왕자』를 읽는 장점은 이런 문장 앞에서 쉽게 지나가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눈으로 읽을 때는 익숙한 명문장으로만 받아들였던 표현도 손으로 쓰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더 오래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각 장면 뒤에 놓인 ‘사유의 시간’은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도록 돕는다.

질문에 반드시 훌륭한 답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두 문장으로 답해도 좋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그저 아름다운 동화로 남겨두지 않고 현재의 나와 연결하는 일이다.

나는 아직 보아뱀 속 코끼리를 알아볼 수 있는가.

사회적 시선 때문에 포기했던 꿈은 무엇인가.

내 삶에서 단 한 송이 장미처럼 특별한 존재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앞만 보고 걷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묶어두려 한 적은 없는가.

이 질문들은 독서를 삶의 문제로 확장한다.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권의 책이 나에게 어떤 질문을 남겼는가이다.


『인생에 한 번은 어린 왕자 필사』는 빠르게 완독하고 덮어두는 책이 아니라 하루에 몇 쪽씩 천천히 쓰고,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추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글씨가 예쁘지 않아도 괜찮고 매일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문장을 따라 쓰면서 내가 무엇을 잊고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데 있다.

필사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연습이라기보다, 바쁜 일상 속에서 놓쳐버린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에 가깝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것과 마음속에 숨겨둔 꿈, 소중하지만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한 문장씩 다시 꺼내보는 일이다.


삶의 방향이 흐릿해졌을 때, 숫자와 성과에 지쳤을 때, 관계 속에서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 이 책을 펼쳐보면 좋겠다.

어린 왕자의 문장을 손으로 따라가다 보면 아주 새로운 답을 발견하기보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지냈던 진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 안의 소행성 B612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잊혀 있었을 뿐이다.

보아뱀 속 코끼리를 알아보는 눈과 상자 속에서 잠든 양을 믿는 마음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인생에 한 번은 어린 왕자 필사』는 잊어버린 별로 돌아가기 위한 나침반이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놓쳤던 마음을 돌아보고 내가 정말 멀리 가고 있는지 다시 묻게 하는 책이다.

손끝에 별 하나를 올려놓고 싶은 밤, 꿈을 깜빡 잊어버린 어른에게 건네고 싶은 책이다.


'크레타 CRETA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대답했다.

"아저씨가 준 상자가 좋은 이유는 밤이 되면 그걸 양의 집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야."

"그래, 맞아. 네가 착하게 굴면 낮에 양을 묶어놓을 끈도 하나 그려줄게. 끈을 매달 말뚝도 그려주고."

하지만 어린 왕자는 내 제안에 놀란 듯했다. "양을 묶어놓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묶어두지 않으면 제멋대로 가다가 길을 잃을 거야."

내 친구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가기는 어디로 가겠어?"

"어디든지. 앞만 보고 가겠지."

그러자 어린 왕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내가 사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아주 작으니까!"

그리고 어쩐지 슬픈 기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앞만 보고 가봤자 아무도 멀리 갈 수 없는걸..."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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