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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대신 샌드백을 때리기로 했습니다
윤리 지음 / 모티브 / 2026년 5월
평점 :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특별히 나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되는 날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는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남들과 비교하며 조급하게 달리고만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특히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을 때면 더욱 그렇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좋아하는데,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드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내가 애매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 대신 샌드백을 때리기로 했습니다』를 읽기 전에는 제목만 보고 스트레스를 복싱으로 풀어내는 가벼운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 책은 복싱 이야기를 하는 책이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오래 흔들렸던 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화해해 가는 기록에 더 가까웠다.
미대를 졸업한 예술가이자 크리에이터, 마케터, 작가로 살아가는 저자는 스스로를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다양한 색을 가진 팔레트 같다고 느끼는 날도 있었지만, 때로는 왜 송곳처럼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들지 못하는지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사람은 하나의 색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흩어져 보였던 경험과 고민, 실패와 방황의 시간들이 사실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겹겹이 쌓여가는 붓질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책의 초반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의 학창 시절 이야기였다.
중학교 시절의 저자는 스스로를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라고 표현한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예술고등학교나 명문 미대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세계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느 날 짝꿍이 무심코 건넨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이번 시험에서 평균 80점 넘으면 내가 햄버거 사줄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사소한 말이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처음으로 ‘나도 하면 되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예고 원서 마감 3시간 전에 무모한 도전을 하고, 결국 합격까지 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인생을 바꾸는 계기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대단한 기회가 와야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짧은 격려 한마디가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예고에 진학한 뒤에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실기 꼴등, 성적 꼴등에서 시작했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분야에서 끊임없이 부딪혔다. 하지만 저자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조소를 만나게 된다.
처음 흙을 만졌을 때의 감각을 설명하는 부분이 유독 생생하게 다가왔다.
맞지 않는 길을 억지로 걷는 것보다 늦더라도 심장이 뛰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것이 결국 더 빠른 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앙대학교 미대에 입학한 뒤 저자는 또 다른 벽과 마주한다.
전국에서 모인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한때 즐거웠던 작업은 부담이 된다.
작품 하나에도 완벽을 요구했고, 조금만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스스로를 심하게 몰아붙였다.
특히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엔진이 아니라, 나를 짓누르는 쇠사슬이었다”는 고백이 오래 남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고,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저자 역시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았다.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야만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내는 상실을 경험한다.
살아 있지만 살아가는 것 같지 않은 시간들. 작업도, 인간관계도, 미래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린 시기였다. 그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의외로 단순한 말이었다.
“엄마 아빠는 네가 무엇이 되든, 어떤 길을 가든 다 좋아. 네가 건강하기만 하면 돼.”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다. 더 좋은 결과를 내야 하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며,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하지만 정작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보다, 그 과정에서 다치지 않았는지, 너무 지쳐 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걱정한다. 저자의 부모님이 건넨 이 말은 성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해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성공보다 건강과 행복을 먼저 바라봐 주는 마음이기에 더욱 깊은 위로가 되었다.
저자는 결국 휴학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실패가 아닌 회복의 시간으로 만들어간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흙을 만지기 시작한다.
특히 폐공장에서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그곳에는 평가도, 점수도, 비교도 없었다. 오직 흙과 사람, 그리고 창작의 즐거움만 있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미술의 ‘펜티멘토’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그림 위에 새로운 색을 덧칠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아래의 붓질이 다시 비쳐 보이는 현상이다. 처음에는 실수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림의 깊이가 된다.
살면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돌아온 길, 멈춰 있던 시간들, 의미 없어 보였던 경험들 역시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가 된다. 저자는 그것을 실패가 아니라 두께라고 표현했다.
복싱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부분도 좋았다.
저자는 운동 경력이 없는 평범한 여성으로 복싱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해도 될까?”라는 의심이 컸지만 SNS에 자신의 운동 과정을 꾸준히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뜻밖의 댓글들이 달린다.
“윤리님 보고 용기 내서 복싱 시작했어요.”
“복싱이 이렇게 멋진 운동인 줄 몰랐어요.”
“선수 생활을 접었는데 다시 해보고 싶어졌어요.”
이 장면을 통해 사람들은 꼭 대단한 사람을 보며 용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서툴더라도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얻기도 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라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시작했기 때문에 조금씩 자신만의 모습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복싱을 통해 배우게 된 삶의 태도들이 등장한다.
특히 ‘고속도로 아니고 저속도로’라는 챕터가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복싱장 매니저로 일하며 사람마다 성장 속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은 글러브 끈을 묶는 데 일주일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기술을 금세 익힌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 역시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늘 남보다 빨리 가야 한다고 배운다. 빨리 성공해야 하고, 빨리 자리 잡아야 하고, 빨리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일지도 모른다.
느리게 걷는 사람은 자신의 호흡이 어디서 가빠지는지 알 수 있고, 그래서 더 오래 걸어갈 수도 있다.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습관은 66일이면 만들어진다고들 말한다. 나 역시 그런 이야기를 믿어왔다.
하지만 저자는 1년 동안 매일 5km를 뛰고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습관이 되면 쉬워진다는 말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1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은 귀찮고 힘들었다고 한다.
다만 달라진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었다.
그리고 가장 지루한 구간에서 오히려 가장 좋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뇌는 쉬지 못하고 계속 과열된다.
그런데 달리기처럼 단순한 반복은 과열된 머리를 식혀주고, 생각이 정리될 공간을 만들어준다.
저자는 달리기를 ‘뇌의 냉각 시스템’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에 정말 공감이 갔다.
감사일기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매일 감사한 일을 기록하다 보니 부정적인 일이 생겨도 예전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마음속에 두툼한 쿠션이 생긴 것처럼 충격을 흡수해주는 공간이 생겼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결국 감사일기의 핵심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의 문제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는 정보를 더 많이 찾아낸다.
불안에 집중하면 불안이 늘어나고, 감사에 집중하면 감사할 이유가 더 많이 보인다.
책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신을 헤비급이 아니라 경량급이라고 표현한다.
한 방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재능은 없지만, 대신 부지런히 움직이며 수많은 잽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가 참 좋았다. 우리는 자꾸 남의 체급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남의 무기를 부러워하기보다 내 체급에 맞는 강점을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비교는 발전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순간부터는 자기파괴가 된다.
결국 『세상 대신 샌드백을 때리기로 했습니다』는 복싱 에세이가 아니다.
이 책은 불안과 비교, 완벽주의에 지친 사람이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펜을 쥐고, 글러브를 끼고, 운동화 끈을 묶고, 감사한 일을 적는 사소한 반복들이 어떻게 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 보여준다.
삶이 자꾸 늦어지는 것 같을 때, 남들과 비교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때, 지금의 내가 너무 애매하고 부족하게 느껴질 때 읽어보면 좋겠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그려지고 있는 그림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방황과 실패, 망설임 역시 언젠가는 삶의 깊이가 되어줄 붓질일 수 있다. 그러니 오늘 조금 느려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내가 나의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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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하지만 그 서로 다른 속도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 오히려 나를 깊이 안심시켰다. 출발선도, 보폭도 모두 달랐지만 결국 각자가 가야 할 방향을 향해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느리게 걷는다고 해서 목적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천히 걷는 사람이 길가에 핀 작은 꽃들을 발견하듯, 자신의 호흡이 어디서 가빠지는지를 정확히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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