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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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아티초크가 펴낸 해즐릿 3부작 중 마지막 권이다.

앞선 두 권이 인간의 욕망, 혐오, 일상의 자잘한 감정과 사고를 파헤쳤다면,

이 책은 해즐릿이라는 인물을 이루는 가장 깊은 층(정치적 신념, 인간에 대한 불편한 진실, 청춘과 시간에 대한 통찰)을 한 권에 응축해 보여준다.

해즐릿의 글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그의 사유 방식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이미 앞선 두 권을 읽어 그의 문장에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해즐릿이 어떤 신념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해즐릿은 19세기 초 영국 사회가 보수주의로 돌아서던 시대에 급진적 공화주의자로 살았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체를 흔들었고, 영국은 혁명 사상이 퍼질까 두려워 억압적으로 변하던 때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군주제와 귀족제를 부패한 봉건의 잔재라 비판했고,

나폴레옹을 세습 권력의 사슬을 끊은 인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상주의자들이 자주 빠지는 ‘현실을 무시하는 태도’는 경계하면서도, 지켜야 할 원칙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해즐릿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말하는 급진성이라는 것이 빠르게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끝까지 깊이 생각하고 따져 보려는 태도에 가깝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저자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은 바로 ‘진부한 비평가’에 관한 부분이다.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이 한 말이나 유행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마치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말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위대한 작가지만 기복이 있다”고 쉽게 단정하고,

『맥베스』의 성공 역시 “음악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단편적으로 해석한다.

고전 희극에 대해서도 아무 고민 없이 “저속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남의 생각을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는 통찰력 있는 평가를 한다고 믿는 모습이,

해즐릿이 이 글에서 가장 경계하고자 한 지점이다.

그들의 문제는 틀린 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읽다 보면 200년 전의 풍자가 지금 우리의 인터넷, SNS, 댓글 현실까지 그대로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생각 없이 따라가는 사람’의 특징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정보 과잉 시대의 문제와 정확히 겹쳐 보였다. 진짜로 아는 사람보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더 눈에 띄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까지 흔드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강렬했던 부분은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이다.

저자는 겉으로 늘 부드럽고,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언제나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자기 문제와 관계없는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나고 누가 학살당하고 어떤 민족이 고통받아도 자신의 삶에 직접 닿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식사를 망친 작은 그을음 하나에는 하루 종일 예민해지는 존재다.

이런 묘사는 처음엔 과한 일반화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온화한 사람은 이기적, 까칠한 사람은 정의롭다”라는 구도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타인의 고통에는 차갑지만 자기 불편에는 과도하게 민감한 인간의 모습)을 읽다 보면, 이 글이 단순한 흑백 논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기 중심성을 들춰내는 분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겉으로 까칠하고 불편해 보이는 사람 중에는 타인을 위해 끊임없이 신경 쓰고,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대목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앞부분만 보면 너무 단정적인 주장처럼 느껴졌지만, 뒤에 이어지는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정작 나는 내 일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라는 부끄러운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저자는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넘겨온 마음의 구조를 차분히 해부한다. 이런 통찰이야말로 읽는 사람을 한 번 멈춰 서게 만드는 힘이다.

‘인격을 안다는 것은’에서는 사람의 외모나 첫인상이 의외로 정확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말은 꾸밀 수 있지만, 표정과 태도는 쉽게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인간은 너무 복잡해서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떠올려 보면, 누군가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판단을 쉽게 할 수 없다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저자는 이 모순을 “판단의 유보”라는 태도로 정리한다. 어느 하나의 행동만으로 사람을 단정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인격은 수많은 조각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시 깨닫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의 작은 단면만 보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만, 해즐릿은 그 단면 너머를 생각하게 만든다.

표제작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청춘을 다룬다. 해즐릿에게서 청춘은 단순히 젊은 나이가 아니라, 삶의 모든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기를 의미한다. 그때의 열정, 기대, 실망, 좌절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 기억은 오래 남아 우리를 만든다. 이 대목은 한국 청년 세대의 현실과도 대비된다. 요즘 청춘은 세계가 나를 위해 열려 있다는 느낌보다는 세계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압박을 더 크게 느끼고 살아간다. 하지만 저자는 청춘의 순간이 지나도 그때의 흔적은 우리 안에 남아 계속해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책은 해즐릿 3부작의 마지막 권으로서,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생각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치 비평, 인간 심리, 도덕 판단, 청춘의 기억까지 주제가 넓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들이민다는 점이다. 진부한 비평가를 읽으면 ‘나도 생각 없이 말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돌아보게 되고,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에서는 ‘나는 얼마나 작은 불편에 집착하며 살았나’ 돌아보게 만든다. 해즐릿의 문장은 200년 전의 것이지만 놀라울 만큼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티초크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첫인상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첫인상을 그럴듯한 말이나 행동에 속아 잊어버렸다가, 결국 대가를 치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한다. 한 사람의 얼굴은 오랜 세월이 만든 결과물이며, 그의 삶 전체가 표정에 새겨져 있다. 아니, 그것은 자연이 직접 찍어낸 흔적이며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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