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문법
박민혁 지음 / 에피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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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리뷰 먼저]
책을 읽고 나니 저자 부부의 실제 삶이 더욱 궁금해졌다.
부부가 출연했던 KBS 인간극장 ‘나는 선생님과 결혼했다’ 편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영상 속에서 민혁 씨와 혜민 씨의 일상은 책에 담긴 문장처럼 꾸밈없이 진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살피며 살아가는 모습은 책의 온기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더라.

[본문 리뷰]
『기억의 문법』은 한 사람이 성장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따라가며,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실제로 겪은 장면들을 따뜻하고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다.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배운 마음, 어머니와 함께한 밤의 온기,
저자의 미술 치료를 통해 마주한 불안과 감정을 기록해 두었던 엄마의 깊은 마음,
반려동물과의 이별이 남긴 애도, 자연 속에서 길러진 태도, 그리고 혜민을 만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시간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 책 이야기의 시작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와 함께한 여행 중, 하산길에서 갑자기 힘을 잃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저자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늘 강해 보이던 사람도 시간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포카라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 연초를 태우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말없이 뒤집힌 재킷 후드를 바로 잡아 주던 장면도 오래 남는다. 그 행동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는 따뜻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집 안을 가득 채운 책장과 매일 밤 책을 읽어주던 엄마의 목소리, 불을 끈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던 긴 대화들이 그 온도를 만든다. 질문이 많던 아이를 귀찮아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던 태도는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저자는 그 시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다’는 감각을 배웠고,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해도 괜찮다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얻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추억 속 인물이 아니라 저자가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잦은 전학과 학교 생활의 불안정 속에서 민혁에게 틱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각성을 느낀 엄마는 미술치료 상담을 받게 하고, 치료사는 민혁이 “영민하지만 예민해 스트레스를 쉽고 깊게 받는 아이”라며 이런 유형의 아이에게는 우울감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중 ‘우울’이라는 단어가 엄마 마음에 깊이 박히고, 혹시 아이가 자신을 닮아 더 힘든 건 아닌지, 자신의 불안이 아이에게 전해진 건 아닌지 자책이 이어진다. 저자는 그 기록을 통해 자신의 불안과 슬럼프까지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고, 슬픔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지나고 나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일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 믿음은 민혁이 눈 덮인 놀이터 한가운데 누워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라고 외치며 스스로를 회복해 가는 장면에서 확신으로 굳어진다.

반려묘 하루와 하비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마음이 안타까웠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존재는 삶의 한 부분이 되고, 그만큼 책임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하루를 떠나보낸 뒤 저자는 <겨울방학>의 <언젠가 너로 인해>라는 노래 한 곡 앞에서 끝내 무너진다.
참아보려 해도 눈물이 먼저 쏟아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했던 기억의 색이 서서히 옅어지는 현실이 더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래도 기일이 다가오면, 잊고 지냈던 하루가 다시 선명해진다고 말한다.
하루가 죽고 찾아온 하비는 이별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비는 낯선 환경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그 스트레스가 몸의 상처로 나타난다.
상처를 낫게 하려고 계속 핥지만, 그 행동이 지나쳐 오히려 덧나고 만다.
모습을 지켜보며 저자는 깨닫는다. 하비는 상처를 치유하려고 핥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또다시 덧나게 된다. 공자가 말한 ‘과유불급’처럼, 치유의 마음이 오히려 상처를 반복시키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하비를 통해 배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낫지 않던 상처가, 저자가 집에 머물며 곁을 지켜주는 동안 조금씩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또 하나를 알게 된다. 특별히 무얼 하지 않아도, 누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주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하비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함께 있음’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길 바란다고 말한다.

태안 기름 유출 당시, 가족과 함께 방호복을 입고 해안가로 달려가 바위와 자갈에 들러붙은 기름을 닦고 덩어리진 모래를 걷어냈던 경험은 저자에게 오래 남았다. 그때 깨달은 건 단순했다. 환경을 지킨다는 건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을.
캠핑장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했던 생각도 함께 남아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빛나지 않는 건 아니다.”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의 하늘에도 별은 존재하듯, 사람도 지금 보이지 않을 뿐 누구나 빛나는 존재라고 저자는 믿게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친 뒤 마드리드 공항에 갇혀 돈 없이 3일을 버텨야 했던 기억은 더 직접적이다. 굶주림 속에서 그는 가장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 평범함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부분은,
지금의 와이프인 혜민을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으로 이어지게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공황 증상이 심해졌던 가족여행 중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갑작스럽게 불안이 몰려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저자가 본능적으로 찾은 사람은 혜민이었다.
통화로 안정을 찾은 뒤에도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전화를 끊자마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잘 때 연락하고 자. 내 이름의 뜻은 은혜 혜, 하늘 민이야.
하늘의 은혜.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따뜻함은 다 주고 싶어.”
저자는 웃으며 답한다.
“선생님은 저의 혜민이에요. 그 따뜻함 다 받을게요.
제 이름은 하늘 민에 빛날 혁, 하늘에 빛나는 별이에요.”
그녀는 “넌 정말로 빛나는 별”이라고 말하고 잠든다.
이미 알고 있던 이름을 다시 소개받은 그날 밤, 저자는 마음속으로 확신한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와 결혼을 하겠느냐고.”
그날 밤, 그는 깊고 평온한 잠에 들 수 있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개인의 사랑에서 사회로 확장된다.
2023년 여름, 연이어 발생한 묻지마 범죄 소식들은 저자에게 큰 충격으로 남는다.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나던 영상은 특히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지 말이다.
그 질문에서, 조금은 따뜻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시작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차갑기만 한 곳은 아니라는 것과 우리가 서로를 믿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저자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혜민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들을 나누기 시작한다. 예상보다 빠르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해주었다.
환경을 지키는 일,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미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경청클럽’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저자는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었다면, 어쩌면 많은 비극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전한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대화’가 있다. 저자에게 대화는 곧 사랑이다.
혜민과의 관계 역시 대화를 통해 자라났다. 고마운 일과 속상한 일, 사소한 하루의 조각들까지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다. 담임선생님과 학생이었던 시절에도, 9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다 보면 서운함의 이면에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서투른 말이라도 괜찮다고.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말하고 상대의 말을 마음으로 들어보자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기억의 문법』은 한 사람이 사랑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관계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사람을 다시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따뜻한 책이다.


'에피케(Epikhe)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놀 인스타 @hagonolza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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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타지 않는 삶 - 서른, 제네바에서 배운 흔들리지 않는 삶의 태도
안상아 지음 / 자크드앙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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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결혼을 계기로 스위스 제네바에 살게 되면서, 낯선 도시 안으로 직접 들어가 부딪히며 살아낸 시간을 일기처럼 풀어낸 기록이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스쳐 가는 풍경이 아니라,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 관계를 다시 만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삶의 기록에 가깝다. 언어를 익히기까지의 막막함, 친구를 만들기 위해 실제로 움직이고 시도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경험 속에서 저자가 새롭게 정리해 나간 생각들이 차분하게 이어진다.

유행을 타지 않는 삶(유타삶)은 ‘잘 산다’는 말을 다시 정의해 보려는 한 사람의 생활 실험이자 솔직한 고백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서른 초입까지의 삶에 큰 불만이 없었다고 말한다. 재능과 노력을 어디에 쓸지에 대한 계획, 결혼을 약속한 연인, 사회적으로 무난히 굴러갈 수 있는 기술과 태도를 갖췄다고 믿었다. 하루는 안정적으로 반복되었고, 삶은 매끈한 동그라미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안정이 안주가 되어 권태로 변해 있음을 깨닫는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동그라미는 익숙함이 만들어 낸 착각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는 다른 모양의 삶을 직접 살아보고 싶어진다. 사각형이나 세모가 아닌,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낯선 모양으로.

그 실험의 무대가 된 제네바에서 저자는 말 그대로 배수진을 친다. 불어를 알아듣지 못해 대화를 눈빛과 손짓으로 짐작해야 했고,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붙던 역할과 설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는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감각이 들어섰지만, 동시에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든다. 특히 남편의 출장으로 혼자 남아 2박 3일 동안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날,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고백은 저자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한 계기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자유롭지만,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언제든 쉽게 지워질 수 있는 존재라는 감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솔직하게 글로 풀어낸다.

이때 저자가 선택한 방식은 ‘증명하지 않는 삶’이었다. 과거와 미래를 내세워 자신을 설명하는 대신, 순간을 먼저 살아보고 그 안에서 답을 찾는 귀납적 방법. Here and now. 그래서 SNS 사용을 줄이고, 한국어를 쓰는 순간 시공간이 다시 한국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어 한국 친구들과의 연락도 의도적으로 줄여 나간다. 백지 인생을 살아볼 기회라 여겼지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달콤한 동시에 차가웠다. 곧 그는 지금 여기에서의 존재감을 스스로 붙잡아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출발점은 아주 가까운 일상이었다. 집안일과 생활의 루틴, 매일 반복되는 식탁과 공간 정리. 저자는 제네바에 도착해 가장 먼저 공을 들인 일이 집안일이었다고 말한다. 헌신이나 봉사로 여겨지기 쉬운 이 일이, 오히려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자립적인 일이 되었다는 고백은 인상적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루를 스스로 붙잡아 세우는 감각, 그 안에서 그는 ‘쓸모 있음’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한다.

이후 삶의 과제는 관계로 확장된다. 언어를 배우고, 돈을 벌고, 친구를 만드는 일. 특히 친구를 만들기 위해 언어 교환 앱을 설치하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금 당장 내세울 수 있는 가치로 삼아 실제 만남을 이어가는 과정은 현실적이고 솔직하다. 낯선 도시에서 관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막연한 용기가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이는 태도라는 점을 저자는 스스로의 경험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그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통로였기 때문이다.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태도는 ‘손해 보기 싫은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상처받기 싫어 다가가지 못하거나, 먼저 손을 내밀면 약해질 것 같아 멈추는 태도들이 결국은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시간과 에너지, 감당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돈까지도 투자한다. 그 결과는 즉각적인 숫자로 환산되지 않지만, 낯선 공간에서 쌓인 신뢰와 분위기를 통해 ‘나도 이 도시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으로 남는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줄이는 연습이다. 애초부터 내 존재를 가볍게 여긴 사람에게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기, 통제할 수 없는 일은 흘려보내기. “이 고민이 정말 내 시간을 들일 만큼 가치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습관은 인간관계를 넘어 삶 전체를 한결 가볍게 만든다. 집착과 조급함, FOMO에 대한 이야기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간절할수록 어긋나는 마음, 남들이 정해 둔 타이밍에 휘둘리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의식적으로 힘을 빼는 태도를 배워 나간다.

『유행을 타지 않는 삶』이 말하는 ‘유행을 타지 않음’은 세상과 등을 지는 일이 아니다.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구분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와 리듬을 지켜내는 일이다. 하늘을 바라보되 두 발은 땅에 단단히 붙이고, 균형을 잃지 않는 삶. 이 책은 더 멋진 사람이 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내 삶의 모양을 하나로 고정해 두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설계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이 책은 유행처럼 소비되기보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조용히 다시 펼쳐 보게 되는 기록으로 남는다.

'자크드앙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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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is-moi, je te suis.
Suis-moi, je te fuis.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곱씹을수록 너무 정확해서 소름이 돋았다.

당신이 나를 피하면 내가 당신을 쫓고,
당신이 나를 쫓으면 내가 당신을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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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밤 - 그림과 문장과 삶을 엮은 내 영혼의 미술관
이소영 지음 / 청림Life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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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한꺼번에 몰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난 날이었다.
빼곡한 글을 더 읽기엔 마음이 먼저 지치는 것 같아, 조금 가볍게 숨을 고를 수 있는 책을 찾다가 『그림 읽는 밤』을 골랐다.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손이 갔다. 예쁜데, 그 예쁨이 과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끌어당기는 책이었다.

책을 펼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그림은 칼 라르손의 〈부엌, 집으로부터〉였다.
부엌 한가운데 서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이 시선을 붙잡는다. 언니가 동생을 챙기는 듯한 아주 짧은 순간을 담은 그림인데, 그 찰나 안에 집이라는 공간의 공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냄비가 놓인 가스레인지,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 슬쩍 밖으로 나가려는 고양이까지. 그림 속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마도 우리가 기억하는 삶의 대부분이 이런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시네이 메르세 팔의 열기구 그림은 분위기를 바꾼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열기구 위의 인물. 목적지에 닿지 않은 채 떠 있는 모습은 불안함을 품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다. 열기구 밖으로 몸을 내밀어 주변을 바라보는 모습 때문일까.
이 그림은 목적지를 보여 주기보다, 흘러가는 시간에 머무르게 한다. 앞날이 분명하지 않아도 잠시 쉬어 가도 괜찮다는 걸, 말없이 전해 주는 그림처럼 느껴졌다.

에바 곤잘레스의 〈침실에서〉는 아주 고요하다.
매일 같은 침실, 같은 커튼. 하지만 오늘의 빛은 어제와 다르다. 우리는 늘 비슷한 하루를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를 지나고 있다는 걸 이 그림은 부드럽게 알려 준다.
그리고 ‘시작’은 거창한 결심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순간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도 충분히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언덕을 달려 내려오는 베렌스키올드의 그림을 보며 문득 웃음이 났다.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왜 달리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아이들은 누군가의 미래로 준비된 존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언젠가 우리도 저런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이 괜히 마음을 건드린다.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멈춰 서게 된 이유는 그림뿐만 아니라, 그 옆에 적힌 짧은 문장들 때문이기도 하다.
아포리즘처럼 놓인 문장들은 그림의 여운을 길게 끌고 간다. 어떤 문장은 밑줄을 긋게 만들고, 어떤 문장은 그대로 옮겨 적고 싶어진다.
페이지 아래 남겨진 빈 줄을 보며, 이 책이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사람의 생각도 이 책 안에 남겨도 괜찮다고, 조용히 허락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 책이 익숙한 이름에만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 니콜라에 토니차, 요제프 리플 로나이, 레옹 스필리에르트, 스탠리 스펜서, 장 조프루아, 앙리 루소, 피에르 보나르, 페데리코 잔도메네기,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오딜롱 르동, 니콜라 드 스탈, 파울 클레, 맥스필드 패리시 등.
각기 다른 나라와 삶을 살아온 화가들의 그림이 이 한 권 안에 담겨 있다.
자주 접하지 못했던 그림과 여운을 남기는 글들은 자연스럽게 생각이 머무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화가들의 삶과 그림을 함께 읽다 보면, 막연하게 느껴지던 그림이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다가온다. 어렵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림 읽는 밤』을 읽고 나니 이미 지나온 하루를 조금 더 잘 바라보고 싶어졌다.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일보다, 있었던 것들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도, 내용도 가까운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오래 두고, 밤마다 조금씩 꺼내 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청림라이프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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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2 - 박경리 대하소설, 3부 4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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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2권을 읽는 동안,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보다

이미 일어난 일들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계속 보는 느낌이었다.

큰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그 사건들은 늘 조용히 처리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남는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애도할 시간도 없이 다시 살아가야 한다.


가장 먼저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건 환이의 죽음이다.

강쇠는 환이를 떠올리며 “성님답게 죽은 기라”고 말한다.

울먹이면서도 그 말이 나오는 걸 보면,

환이는 끝까지 자기 길을 바꾸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듯하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이어지는 강쇠의 독백은 더 씁쓸하다.

이제 남은 건 늙은 혜관과 관수뿐이고,

“우리 당대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일 기다”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이 장면을 읽으며, ‘옳게 살았다’는 말과 ‘이룬 것이 있다’는 말이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이는 자신의 기준을 끝까지 지켰지만,

그 기준이 세상을 바꾸거나 삶을 편안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히 남는다.


환이 이후로 대비되듯 등장하는 인물이 지삼만이다.

지삼만은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청일교의 교주가 되고, 주색에 빠지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그 모습은 처음부터 악하다기보다,

갈 곳을 잃은 사람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환이와 지삼만을 함께 떠올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둘 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막막함 앞에 서 있었다.

다만 환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선이 있었고,

지삼만은 살아남기 위해 그 선을 하나씩 내려놓았다는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은 죽은 뒤에도 ‘그 사람다움’이 남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점점 자기 모습을 잃어간다.


12권에서 가장 아프게 남는 사건은 역시 봉순(기화)의 죽음이다.

기화는 상현을 사랑했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 사랑은 함께 살아가는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만 품은 채 기화는 조용히 스스로 생을 끊는다. 이 소식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전해 들은 말로, 이미 지나간 일처럼 처리된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기화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드는 생각은 이랬다.

이 소설에서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사랑을 못 느껴서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도 그걸 지켜 낼 방법이 없어서라는 점이다.

기화는 사랑을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었다.

가난, 신분, 소문, 책임 같은 것들이 앞을 막았고 그 사이에서 기화는 점점 혼자 감당하게 됐다.

그래서 기화의 죽음은 한 사람의 슬픈 결말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걸 보여 주는 장면으로 남는다.


기화의 죽음 뒤에 남은 사람은 상현이다.

그는 늘 한 박자 늦다.

기화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고 죽은 뒤에야 사랑을 자각한다.

아이에게 원고료를 남기는 선택은 옳아 보이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뒤다.

상현을 보며 악한 선택보다 더 무서운 건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태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그 사이 누군가의 인생은 이미 크게 달라져 버린다.


그 와중에 서희는 묵묵히 남아 있다.

남편의 부재 속에서도 집안을 지키고 기화의 아이 양현이를 거둔다.

크게 슬퍼하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서희는 감정보다 책임을 앞세운 사람으로 보인다.

서희를 보며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일이 아니라, 느끼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희의 강함은 버티는 힘에 가깝다.


그리고 용이의 죽음.

그의 삶에 비해 마지막은 조용하다.

파란만장했지만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진다.

이 장면을 지나며 1세대 인물들이 조금씩 이야기의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느낌이 든다.


용이의 죽음을 보며 ‘잘 살았다’는 말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인지 자꾸 생각하게 됐다.

큰 업적도, 뚜렷한 결론도 없지만 그는 분명히 자기 몫의 시간을 살아냈다.

어쩌면 어떤 인생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따지기보다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살아냈는지를 남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12권의 끝에서 윤국은 광주학생사건을 이야기하며, 더 이상 어미 품에 머무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시대를 바라보기 시작한 세대로 등장한다. 그 장면은 “새로운 사건”이라기보다, 환이의 죽음과 지삼만의 파멸, 기화의 죽음, 서희가 버텨 온 삶처럼 부모 세대가 끝내 풀지 못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세대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 12권은 결말을 내리는 권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질문과 시대의 무게를 윤국 세대에게 조용히 건네며 다음 권으로 이어지게 하는 전환점처럼 남는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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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시 2026 - 소음 속에서 정보를 걸러 내는 해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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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만 되면 늘 비슷한 말들이 반복된다.

GTX, 지하화, 신공항, 공공기관 이전 같은 단어들이 쏟아지고,

사람들은 속으로 “이번에도 결국 말로 끝나겠지” 하고 넘기게 된다.

『한국 도시 2026』은 그런 익숙한 피로감부터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쏟아지는 공약들 가운데 예산과 공정, 안전과 민원, 지자체 갈등 같은 현실의 벽을 넘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계획은 무엇인지, 반대로 말만 요란한 채 일정만 미뤄질 가능성이 큰 약속은 무엇인지를 가려 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초반부에서는 ‘어디가 뜬다’는 결론을 서두르지 않고,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일정(대선·지방선거), 인구와 산업의 흐름, 교통 인프라의 시간표를 차례로 짚으며 도시를 판단할 기준점을 잡게 해준다.

저자는 2024년 초 『한국 도시의 미래』를 낸 이후에도 세상이 너무 크게 바뀌었다고 말한다.

국제 정세가 흔들리고, 한국 정치 일정이 급격히 재편되면서 도시의 전망은 부동산 표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섣부르게 부동산 예측을 앞세우지 않는다.

국제 질서의 변화와 국내 정치 이벤트가 산업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고, 그 산업이 어디에 모이고 빠지며, 그 결과 인구와 교통이 어떤 방향으로 쏠리는지부터 차근차근 정리한다.

도시를 볼 때 먼저 봐야 할 건 어느 동네가 뜨냐가 아니라, 트럼프 2기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나 계엄·탄핵·조기 대선 같은 국내 정치 이벤트처럼, 도시의 산업·인구·교통을 한꺼번에 흔들어 놓는 큰 흐름이다.

이 흐름을 설명하면서 책은 방위산업과 동남권 메가시티를 예로 든다.

트럼프와 푸틴의 회담 소식이 돌자 언론이 전쟁이 곧 끝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고, 그 분위기에 주식시장에서 방산주가 흔들렸던 장면을 끌어온다. 하지만 저자는 국제 정세를 조금이라도 읽는 사람이라면, 그런 회담 한 번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리 없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순간은 주식을 팔 타이밍이 아니라 살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 전쟁과 시장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정리한다.

이렇게 보면 동남권의 체력도 다르게 보인다. 방위산업이 모여 있는 동남권은 누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하루아침에 흔들리는 곳이 아니라, 국제 정세가 요동칠수록 오히려 산업 벨트로서 견실하게 버틸 가능성이 큰 권역이라는 것이다. 뉴스의 소음이 커질수록, 도시의 체력은 말이 아니라 산업의 자리에서 나온다는 점을 이 대목이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준다.

국내 정치로 시선을 돌리면,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개발 공약의 패턴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2024년 총선과 2025년 대선을 거치며 김포·고양의 서울 편입, GTX·CTX 전국 확장, 철도·도로 지하화 같은 말이 쏟아졌지만, 선거가 끝나자 현실의 속도는 달랐다는 점을 짚는다.

착공이 늦어지고, 개통은 밀리고, 예산과 공사비, 민원과 안전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단순하다. 인프라는 누군가 하면 된다!는 의지를 외친다고 갑자기 앞당겨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외적 조건이 바뀌고, 공공 공사비는 경직되고, 정치·행정권은 득실을 따져 내용을 바꾸려 한다. 그러니 초기 시간표를 절대적인 약속으로 믿고 인생 계획을 세우면 위험하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가덕도 신공항 이야기는 그 ‘시간표의 함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공사 기간을 둘러싼 갈등, 안전 문제를 들어 사업에서 이탈한 시공사, 그리고 선거를 앞둔 지역 정치의 계산이 한 줄로 연결된다. 책은 과거의 속도전이 어떤 희생을 낳았는지까지 끌어오며 대형 인프라 사업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한다. 신공항 하나의 논쟁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개발을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고 밀어붙이는지까지 드러낸다.

교통망 지하화와 광역철도 논의 역시 같은 톤으로 이어진다. 교통이 부족한 지역의 확충은 평등권과 생활권의 문제일 수 있지만, 이미 교통이 충분한 대도시에서 거액의 예산을 들여 지하화를 요구하는 건 논리와 재정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지하화 이야기가 다시 살아나는 이유도 결국 그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거창한 약속을 듣기 전에, 몇 년 전 던져진 공약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를 먼저 보라고 권한다. 그 되돌아봄이 2026년 지방선거 공약을 해석하는 가장 좋은 예습이라는 말한다.

책을 읽다 보면 ‘각자도생’이라는 표현을 쓴 부분이 보인다.

이 말의 구체적인 뜻은 “이제는 누가 대신 지켜주지 못하니,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에 가깝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은 우주 개발 100조, AI 100조·200조, 철도에 몇 조 같은 말을 쉽게 꺼내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건설업계의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 집 짓는 물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면, 도로·철도 같은 인프라 공사도 당연히 여유 있게 굴러가기 어렵다.

저자는 그래서 싱크홀이나 지반침하, 부실공사 같은 사건이 잇따르는 현실을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비용은 오르는데 공공 공사비는 경직돼 있고, 공사를 밀어붙이면 안전 문제가 커지고, 다시 멈춰 서며 일정이 늘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공약과 광고가 더 장밋빛으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정치인은 조 단위를 말하고, 부동산 시장에서는 그 말을 호재처럼 홍보한다. 하지만 실제 진척이 없는 공약도 많고, 결국 믿고 움직인 사람만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책은 한국은 각자도생의 사회라는 말을 꺼내며, 달콤한 말에 기대기보다 시민 스스로 공약과 광고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눈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자체 간 갈등은 국가 사업이 표류하는 또 다른 이유로 등장한다. 수도권 메가시티 논란이 흐지부지된 배경, 김포와 인천의 교통망 갈등, 경기북도 분도 논란처럼 지역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 “국가가 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힘을 잃는지 보여 준다. 제2차 공공기관 이전, 군공항 이전, 우주 산업 거점 선정 같은 사안들이 선거 일정과 결합해 흔들리는 모습은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 장면이라고 말한다.

세종을 둘러싼 논의는 이 초반부의 모든 요소가 한데 모이는 지점이다. KTX 세종역, 대통령실 이전, 행정수도 완성 논의는 교통·정치·인구가 동시에 얽힌 문제이며,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정치적으로도 가능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시킨다. 한 지역의 편의가 다른 지역의 손해로 인식되는 순간 사업은 멈춰 서기 쉽고, 그래서 세종은 늘 기대와 회의 사이에서 “정치 테마”가 되기 쉽다는 현실까지 짚는다.

이렇게 1부에서 전국 공통의 변수를 정리한 뒤 2부로 넘어가면, 한국을 3대 메가시티와 6대 소권으로 나눠 살핀다. 대서울권·동남권·중부권, 그리고 대구·구미·김천, 동부 내륙, 동해안, 전북 서부, 전남 서부, 제주의 아홉 권역에서 2026년에 주목해야 할 지점을 점검하는 구성이다. 이때 기준은 단순한 ‘호재’가 아니라 산업의 체력, 교통의 현실성, 인구가 움직이는 방향이다.

결국 『한국 도시 2026』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도시는 공약처럼 움직이지 않고, 뉴스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조건’ 위에서 바뀐다는 점이다. 국제 정세, 선거 일정, 산업의 자리, 인구 이동, 공사비와 안전, 지자체 갈등 같은 요소가 맞물리지 않으면 그럴듯한 약속도 쉽게 현실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어디가 뜬다’는 결론을 먼저 던지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실제로 굴러갈 수 있는 계획인지, 무엇이 말만 크고 계속 미뤄질 가능성이 큰지 가려내는 기준을 정리한다.

요란한 말과 자극적인 전망을 좇다 보면 남는 건 피로감이지만, 조건과 구조를 먼저 살피기 시작하면 도시의 방향은 훨씬 또렷해진다. 『한국 도시 2026』은 바로 그 지점을 짚는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가치는 특정 지역의 미래를 맞히는 데 있지 않다. 뉴스를 그대로 믿지 않고, 공약과 개발 담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며, 도시를 구조적으로 읽는 눈을 갖게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눈을 갖게 되었을 때, 다음 선거와 다음 개발 이슈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열린책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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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애초에 왜 지금의 세종시 자리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려 했던 걸까요?
1970년대 말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려는 가장 큰 목적은 안보적 차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인구 중심점으로 수도를 옮기되, 휴전선으로부터 평양보다 더 먼 거리인 70킬로미터 이상, 북한군의 해상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서해안 4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로 한국 전역을 위협함과 동시에 국지 도발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격 등이 그런 사례들이죠. 북한이 국지 도발을 일으켜 서울을 공격하면 서울 인구의 3분의 1이 사상하리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1970년대에 행정수도를 설계했던 대전제에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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