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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문법
박민혁 지음 / 에피케 / 2025년 12월
평점 :
[짧은 리뷰 먼저]
책을 읽고 나니 저자 부부의 실제 삶이 더욱 궁금해졌다.
부부가 출연했던 KBS 인간극장 ‘나는 선생님과 결혼했다’ 편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영상 속에서 민혁 씨와 혜민 씨의 일상은 책에 담긴 문장처럼 꾸밈없이 진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살피며 살아가는 모습은 책의 온기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더라.
[본문 리뷰]
『기억의 문법』은 한 사람이 성장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따라가며,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실제로 겪은 장면들을 따뜻하고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다.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배운 마음, 어머니와 함께한 밤의 온기,
저자의 미술 치료를 통해 마주한 불안과 감정을 기록해 두었던 엄마의 깊은 마음,
반려동물과의 이별이 남긴 애도, 자연 속에서 길러진 태도, 그리고 혜민을 만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시간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 책 이야기의 시작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와 함께한 여행 중, 하산길에서 갑자기 힘을 잃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저자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늘 강해 보이던 사람도 시간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포카라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 연초를 태우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말없이 뒤집힌 재킷 후드를 바로 잡아 주던 장면도 오래 남는다. 그 행동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는 따뜻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집 안을 가득 채운 책장과 매일 밤 책을 읽어주던 엄마의 목소리, 불을 끈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던 긴 대화들이 그 온도를 만든다. 질문이 많던 아이를 귀찮아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던 태도는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저자는 그 시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다’는 감각을 배웠고,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해도 괜찮다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얻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추억 속 인물이 아니라 저자가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잦은 전학과 학교 생활의 불안정 속에서 민혁에게 틱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각성을 느낀 엄마는 미술치료 상담을 받게 하고, 치료사는 민혁이 “영민하지만 예민해 스트레스를 쉽고 깊게 받는 아이”라며 이런 유형의 아이에게는 우울감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중 ‘우울’이라는 단어가 엄마 마음에 깊이 박히고, 혹시 아이가 자신을 닮아 더 힘든 건 아닌지, 자신의 불안이 아이에게 전해진 건 아닌지 자책이 이어진다. 저자는 그 기록을 통해 자신의 불안과 슬럼프까지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고, 슬픔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지나고 나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일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 믿음은 민혁이 눈 덮인 놀이터 한가운데 누워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라고 외치며 스스로를 회복해 가는 장면에서 확신으로 굳어진다.
반려묘 하루와 하비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마음이 안타까웠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존재는 삶의 한 부분이 되고, 그만큼 책임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하루를 떠나보낸 뒤 저자는 <겨울방학>의 <언젠가 너로 인해>라는 노래 한 곡 앞에서 끝내 무너진다.
참아보려 해도 눈물이 먼저 쏟아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했던 기억의 색이 서서히 옅어지는 현실이 더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래도 기일이 다가오면, 잊고 지냈던 하루가 다시 선명해진다고 말한다.
하루가 죽고 찾아온 하비는 이별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비는 낯선 환경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그 스트레스가 몸의 상처로 나타난다.
상처를 낫게 하려고 계속 핥지만, 그 행동이 지나쳐 오히려 덧나고 만다.
모습을 지켜보며 저자는 깨닫는다. 하비는 상처를 치유하려고 핥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또다시 덧나게 된다. 공자가 말한 ‘과유불급’처럼, 치유의 마음이 오히려 상처를 반복시키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하비를 통해 배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낫지 않던 상처가, 저자가 집에 머물며 곁을 지켜주는 동안 조금씩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또 하나를 알게 된다. 특별히 무얼 하지 않아도, 누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주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하비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함께 있음’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길 바란다고 말한다.
태안 기름 유출 당시, 가족과 함께 방호복을 입고 해안가로 달려가 바위와 자갈에 들러붙은 기름을 닦고 덩어리진 모래를 걷어냈던 경험은 저자에게 오래 남았다. 그때 깨달은 건 단순했다. 환경을 지킨다는 건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을.
캠핑장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했던 생각도 함께 남아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빛나지 않는 건 아니다.”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의 하늘에도 별은 존재하듯, 사람도 지금 보이지 않을 뿐 누구나 빛나는 존재라고 저자는 믿게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친 뒤 마드리드 공항에 갇혀 돈 없이 3일을 버텨야 했던 기억은 더 직접적이다. 굶주림 속에서 그는 가장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 평범함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부분은,
지금의 와이프인 혜민을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으로 이어지게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공황 증상이 심해졌던 가족여행 중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갑작스럽게 불안이 몰려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저자가 본능적으로 찾은 사람은 혜민이었다.
통화로 안정을 찾은 뒤에도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전화를 끊자마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잘 때 연락하고 자. 내 이름의 뜻은 은혜 혜, 하늘 민이야.
하늘의 은혜.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따뜻함은 다 주고 싶어.”
저자는 웃으며 답한다.
“선생님은 저의 혜민이에요. 그 따뜻함 다 받을게요.
제 이름은 하늘 민에 빛날 혁, 하늘에 빛나는 별이에요.”
그녀는 “넌 정말로 빛나는 별”이라고 말하고 잠든다.
이미 알고 있던 이름을 다시 소개받은 그날 밤, 저자는 마음속으로 확신한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와 결혼을 하겠느냐고.”
그날 밤, 그는 깊고 평온한 잠에 들 수 있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개인의 사랑에서 사회로 확장된다.
2023년 여름, 연이어 발생한 묻지마 범죄 소식들은 저자에게 큰 충격으로 남는다.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나던 영상은 특히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지 말이다.
그 질문에서, 조금은 따뜻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시작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차갑기만 한 곳은 아니라는 것과 우리가 서로를 믿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저자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혜민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들을 나누기 시작한다. 예상보다 빠르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해주었다.
환경을 지키는 일,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미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경청클럽’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저자는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었다면, 어쩌면 많은 비극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전한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대화’가 있다. 저자에게 대화는 곧 사랑이다.
혜민과의 관계 역시 대화를 통해 자라났다. 고마운 일과 속상한 일, 사소한 하루의 조각들까지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다. 담임선생님과 학생이었던 시절에도, 9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다 보면 서운함의 이면에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서투른 말이라도 괜찮다고.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말하고 상대의 말을 마음으로 들어보자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기억의 문법』은 한 사람이 사랑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관계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사람을 다시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따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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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케(Epikhe)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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