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고통 속에 건네는 위로 - 삶은 견디는 것이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시민K 지음 / 헤르몬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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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프롤로그를 읽고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철학이 삶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그 고통이 당신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민K의 『쇼펜하우어, 고통 속에 건네는 위로』는 위로를 예쁜 말로 감싸 안는 대신, 삶에는 원래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게 만든다. 이 단호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한다.

나만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 애써 밝은 척해야 했던 힘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든다.

책의 구성은 ‘고통 → 사유 → 고독 → 자아 →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고통을 똑바로 보는 데서 시작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혼자의 시간에서 그 생각을 단단히 만들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나’로 서 보며, 마지막에는 예술과 아름다움 속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이 흐름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간의 삶과 닿아 있다. 그렇다고 추상적으로만 흘러가진 않는다. 각 장마다 직장인, 자영업자, 간병인, 교사, 프리랜서 같은 현실의 장면에서 출발한다. ①현실의 고통을 꺼내고, ②쇼펜하우어의 생각으로 구조를 비춰 보고, ③사회적 배경을 함께 살피고, ④오늘을 버티게 해 줄 한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그래서 고통이 개인 탓으로 축소되지 않고, 이해와 수용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책은 먼저 ‘의지’라는 말을 쉽게 풀어준다. 여기서 의지는 “살고자 하는 힘”이다. 이 힘 덕분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동시에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 하고 싶은 것은 계속 생기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고통을 낳고, 충족되고 나면 곧 권태로 바뀐다. 쇼펜하우어는 이 상태를 고통과 권태 사이의 “진자 운동”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이 구조를 외면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사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까?”라는 질문 앞에서 “원래 그렇다”라고 말해 준다. 이게 냉소가 아니라 출발점이 된다. 비정상은 내가 아니라, ‘고통 없는 삶이 정상’이라고 믿었던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

이 인식은 일상의 장면에서 더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워킹맘의 하루를 떠올려 보자. 끝없는 결정과 돌봄, 감정 노동 속에서 ‘나’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이런 삶을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부르며, 성과가 없으면 실패처럼 느낀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오늘을 무사히 통과하는 일 자체가 가장 어려운 성취라고. 견디는 중은 미완성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다른 이름이라고. 무기력도 마찬가지다. 게으름이 아니라 오래 버틴 끝에 생기는 경고 신호다. 그러니 멈춤이 필요할 때가 있다. 멈춘다고 무너지는 게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숨 고르기다.

돌봄의 장면들은 특히 오래 남는다. 쇼펜하우어에게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다. 나를 향하던 관심이 어느 순간 타인의 안녕으로 향할 때 사랑이 생긴다. 그런데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간병의 시간은 길고, 말수는 줄고, 보상은 없을 때가 많다. 그래도 등을 씻기고, 약을 챙기고, 밤을 지새운다. 책은 이 시간을 사라짐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라고 말한다. 오늘 내가 노모의 등을 닦았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연민은 약함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끝까지 떠안으려는 결심의 다른 이름이다.

‘사유’와 ‘고독’의 장에서는 현대의 문제를 정확히 짚는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지만, 우리는 종종 ‘생각’ 대신 ‘반응’으로 움직인다. 많이 공유한다고 해서 스스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생각하는 힘을 인간다움의 최소 조건으로 보았다. 타인의 판단 속에 갇히지 않으려면 질문이 필요하다. “내 생각은 정말 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려면 혼자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고독은 결핍이 아니라 자존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타인의 칭찬이 멈춘 자리에서, 나만의 질서와 목소리를 유지하는 힘. 그게 고독의 품격이다. 외로움을 피하려고 소음을 늘릴수록, 정작 나는 흐려진다. 반대로 혼자의 시간을 받아들이면, 타인과의 연결도 더 진실해진다. “나는 나와 함께 있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불편한 질문이지만, 지금 필요한 훈련처럼 느껴졌다.

‘자아’의 장은 타인의 기대에서 적절히 거리를 두고, 내 선택에 책임지는 태도를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윤리는 방임이 아니라 절제다.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 균형. 칭찬은 힘이 되지만, 어느 순간 칭찬이 통제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 그때 필요한 건 반항이 아니라 중심이다. 조용한 의지,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 설명 대신 일상으로 보여 주는 꾸준함. “나는 지금 내 의지로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마지막 ‘아름다움’의 장은 이 책 전체의 어두운 선율 위에 얹힌, 단 하나의 예외를 다룬다. 예술을 바라보는 순간, 음악 한 소절에 멈추는 순간, 하늘빛을 올려다보는 짧은 동작 같은 것들이 고통의 진자 운동을 잠시 멈춘다. 그때 우리는 삶을 사느라 허덕이는 사람에서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희망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 나를 멈추게 하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그 감각을 과장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언어로 건넨다. “삶은 고통이지만,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단순한 역설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잔잔히 울린다.

결국 이 책은 고통을 없애 주는 비법서가 아니다.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는 생활형 철학 노트에 가깝다. 현실의 사례에서 시작해 철학으로 구조를 비추고, 사회적 맥락으로 책임의 위치를 조정한 뒤, 오늘을 버티게 하는 한 문장으로 등받이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독자는 거창한 변화 대신, ‘살아남음’의 품위를 되찾는다. 견딘다는 건 실패가 아니다. 멈춤은 나약함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다. 연민은 약함이 아니라 의지의 확장이다. 혼자의 시간은 결핍이 아니라 나를 회복하는 공간이다.

프롤로그의 고백처럼, 세상이 흔들려도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오늘의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 작아져도 괜찮다.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건너왔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이 책은 그 말을 가볍게 하지 않는다. 내 삶의 장면을 하나씩 비추어, 내가 이미 하고 있던 일을 조용히 가리킨다. 그래서 믿을 수 있고 오래 남는다. 고통은 사실이고, 위로는 선택이다. 나는 오늘도 선택한다—사유와 고독, 나 자신, 그리고 하루 한 번의 아름다움을. 그 작은 선택이 내일의 숨을 다시 연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헤르몬하우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의지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의 철학에서 ‘의지‘란 단순한 바람이나 소망이 아니다. 살아 있으려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마모되어도 멈추지 않는 존재의 본능적 에너지다.
그 충동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지만, 바로 그 충동 때문에 우리는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을 때 고통을 낳고, 충족되고 나면 곧 권태로 바뀐다. 이 두 감정 사이를 오가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진자 운동‘이라 불렀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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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서서 보는 그림의 비밀
이정우 지음 / 투래빗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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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가보면 어떤 그림 앞에는 사람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서서라도 보려고 한다.

예전의 나는 그 이유를 단순히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니까”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정작 내가 질문했어야 했던 것은 ‘왜 그 그림이 처음부터 유명해졌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

이 책 『줄 서서 보는 그림의 비밀』을 읽고 나니, 그 줄의 길이는 명성의 부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기획과 설득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작가의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대를 읽는 눈, 자신을 어떻게 보이게 할지에 대한 전략, 그리고 관객을 납득시키는 명분이 모여 이름값을 만든다.

이정우의 『줄 서서 보는 그림의 비밀』은 바로 그 지점을, 미술사의 장면들을 통해 한 편의 브랜드 연대기처럼 보여준다.

그 첫 페이지를 연 인물은 바로 렘브란트였다. 그는 남들보다 훨씬 짧은 도제 과정을 거치고 스무 살 무렵 과감히 공방을 열었다. 당시 초상화의 유행은 보석과 비단, 서재 소품으로 신분을 과시하는 방식이었지만, 렘브란트는 장식을 덜어내고 인물의 눈빛과 표정을 섬세하게 담았다. 외교관 하위헌스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그 당시 고민하던 마음이 눈에 잘 드러난다”고 적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는 스물일곱에 서명을 관습적 성(姓) 표기 대신 이름 하나로 밀어붙이며 ‘Rembrandt’에 묵음 d를 얹었다. 철자 하나가 로고가 되었고, 로고는 곧 브랜드가 되었다. 무엇보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상징하는 그의 연출력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그 그림은 단체 기념사진처럼 모두를 한 줄로 세워 균등하게 보이게 하던 관례를 깨고, 실제 해부 수업 장면을 무대처럼 구성한다. 시신이 중앙에 놓이고, 어떤 이는 책을 펼쳐 비교하고, 또 다른 이는 몸을 기울여 손가락 근육을 들여다본다. 당시 관례대로라면 복부부터 해부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렘브란트는 ‘도둑의 손’이라는 사연에 맞춰 손에서 시작하는 장면을 택한다. 죄와 지식의 긴장이 한 지점에 모이도록 시선을 설계한 셈이다. 관객은 초상을 ‘얼굴의 기록’이 아니라 ‘사건의 한 장면’으로 읽기 시작한다. 바로 이 대목이 렘브란트가 초상화에 스토리텔링을 본격적으로 주입했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물론 그의 선택이 언제나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야경, 1642》에서 그는 민병대를 이상화하지 않고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현실의 장면으로 보여줬다. 후원자들은 위엄 있는 집단 초상을 기대했지만 화면에 담긴 것은 권위의 허술함이었다. 결국 주문이 줄었고, 가족과 재산을 잃는 시련이 겹친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꾸준히 그렸다. 말년의 자화상들에서는 비싼 직물의 광택도 화려한 소품도 사라지고, 거친 붓질과 꺼지지 않는 눈빛만이 남는다. 팔릴 가능성이 낮다는 걸 알면서도 자화상을 계속 그렸다는 사실은 그의 열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는 자화상을 홍보가 아니라 탐구의 장으로 삼았고, “나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이 남았는가”를 끈질기게 묻는 그 진정성이 훗날 낭만주의의 재발견과 오늘의 경매가까지 이어진 동력이라는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미지를 언어처럼 쓰는 법을 아는 화가였다. 어린 시절 얼굴 신경 마비로 말하기가 어려웠던 그는 “그림이 나의 목소리였다”고 회상한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그는 칼을 들어 올리는 형제들의 결연함과 함께, 화면 한쪽에 주저앉은 여성들을 배치해 전쟁의 슬픔을 동시에 보여준다. 충성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면서도, 그 이면의 상처를 지우지 않는 구성이 이미지의 설득력을 높인다. 또한, 《마라의 죽음》에서는 현장의 피, 흩어진 서류, 지도를 과감히 비워내고 욕조의 마라만 남겨 신성한 침묵이 감돌게 했다. 덜어냄으로 격을 높이고, 정적 속에서 메시지를 크게 만든다.

나폴레옹과 함께한 작업에서는 ‘황제 마케팅’의 교과서가 펼쳐진다. 알프스를 넘는 장면에서 원래 타고 넘었던 노새는 역동적인 명마로 바뀌고, 거센 바람결은 망토를 끌어올려 장군의 손짓을 부각한다.

바위에는 ‘BONAPARTE’를 크게 새기고, 아래에 한니발과 카롤루스 대제의 이름을 더 낮고 투박하게 새겨 비교의 프레임을 만든다. 심지어 실제로 불참했던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대관식》의 관중석에 앉혀 ‘기억되길 바라는 역사’를 구성한다. 사실 여부를 넘어 이미지가 현실을 재단하는 힘—다비드는 권력이 원하는 ‘명분을 시각화’했다.

마르셀 뒤샹은 질문의 방향을 바꿔 버렸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가?”라고. 소변기에 ‘R. Mutt’라는 가명을 적어 출품한 《샘》은 선택과 맥락이 오브제를 예술로 전환시킬 수 있음을 천연덕스럽게 증명한다. 유치해 보이는 언어유희 《L.H.O.O.Q》, 여장한 분신 ‘로즈 셀라비’, 가짜 향수 《아름다운 숨결》에 이르기까지 그는 공산품, 정체성, 말장난을 섞어 ‘브랜드가 욕망을 어떻게 설계하는가’를 연출했다. 그가 깨뜨린 것은 재료 선택의 규범만이 아니다. 감상법 자체가 바뀐다. “이게 예술이냐”라는 불쾌감, 당혹, 웃음을 포함한 모든 반응이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뱅크시가 경매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파쇄했을 때, 우리는 그 장난 속에서 치밀한 기획과 미디어를 다루는 솜씨를 읽을 수 있다. 뒤샹은 여기에 더해, 방식으로 놀라게 하는 것을 넘어서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근본 질문 자체를 흔들며 판을 바꿨다.

이 책은 과거와 동시대를 한 줄로 엮어 보여준다. 렘브란트가 서명 하나로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반 고흐는 동생 테오와의 편지를 통해 작업의 서사를 축적했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꽃 캐릭터를 가장 ‘핫한’ 셀럽들과 결합시켜 작품에 동시대성을 주입했고,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는 이벤트로 악동 캐릭터를 고도화했다. 표면적으로는 디테일, 감동, 트렌드, 스캔들처럼 전략이 제각각이지만, 그 안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철저한 분석, 분명한 포지셔닝, 관객을 납득시키는 명분, 그리고 그 명분을 반복 가능한 형식으로 축적하는 꾸준함이다. 책이 다룬 열한 명의 예술가는 각기 다른 시대와 조건 속에서 학자, 컬렉터, 대중을 동시에 설득해 왔다. 그 설득의 언어가 바로 브랜딩과 스토리텔링이다.

이 책을 읽고 전시장을 찾는다면, 먼저 이렇게 물어보자.

이 작가는 지금 내게 무엇을 보게 하려는가?

왜 꼭 이 방식이어야 했는가? 그 선택을 지탱하는 명분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렘브란트의 화면에서는 이야기에 빨려들게 만드는 시선의 배치가 보이고, 다비드의 빈 배경은 <마라의 죽음>에서 처럼, 피와 소품을 과감히 지워 마라의 얼굴·손·편지에 시선을 고정시켜 화면을 성화처럼 엄숙하게 만든다. 이것은 정치적 사건을 숭고한 희생으로 ‘기억되게’ 편집하는 연출인 셈이다. 뒤샹의 ‘장난’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근본 질문을 우리에게 되돌리는 정확한 기획으로 읽힌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우리들의 일상에도 옮겨오게 된다. 인스타그램 사진 한 장, 캡션 한 줄, 이력서의 문장 하나에도 묻는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인가. 어떤 기호와 톤을 반복해 나의 이름값을 설계할 것인가를 묻는다.

결국 이 책이 건네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명작은 우연히 탄생하지 않는다. 재능 위에 기획이 있고, 기획을 떠받치는 명분이 있으며 그 명분을 관객의 언어로 번역하는 스토리텔링이 있다. 예술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게 만드는 방식’이고, 줄을 서게 만드는 힘은 그 방식을 얼마나 일관되고 설득력 있게 축적했는가에서 나온다. 피카소의 말처럼 “평범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면, 우리가 훔쳐야 할 것은 형식이 아니라 원리다. 시대를 읽는 눈, 포지셔닝의 결단, 덜어냄과 더함의 정확도, 그리고 무엇보다 명분. 이 책은 그 원리를 이야기로 보여주며 다음 전시장 앞에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멈춰 설 이유를 만들어 준다.


'투래빗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렘브란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야경,1642>은 그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브랜딩에 균열을 가져온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바닝 코크와 필럼 판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로, 민병대의 모습을 그린 단체 초상화입니다.
당시 민병대를 그리는 건 전통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녔습니다. 도시를 지키는 민병대원은 대부분 지역 내 부유한 유력 인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전쟁 같은 국가적 위기가 없었지만, 민병대의 권위는 여전히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는 당시 가장 강력한 입지의 예술가, 렘브란트에게 단체 초상화를 의뢰하게 됩니다. 렘브란트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단체 초상화를 성공시킨 전례가 있었기에, 이번에도 사람들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렘브란트 역시 이 그림에만 무려 1년 반이라는 시간을 공을 들였지만, 사람들이 예상한 결과물은 아니었습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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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곧게 세운 자, 운명조차 그대를 따르리라 - 율곡 이이·신사임당 편 세계철학전집 5
이이.신사임당 지음, 이근오 엮음 / 모티브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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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느낀 건, 율곡 이이가 배운 지식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배움을 이론으로 쌓기보다 그것을 삶을 바르게 하는 도구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고민과 결심이 함께 담겨 있다. 추상적인 철학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강조한 핵심은 마음을 곧게 세우는 일이다. 그는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늘 경쟁과 비교 속에서 불안에 시달리고, 편리함과 욕망에 쉽게 끌려 다닌다. 그런 시대에 율곡의 말은 “자신을 바로 세우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로 다가온다.

책의 초반부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삶과 교육에서 출발한다. 신사임당은 흔히 ‘현모양처’로 불리지만, 책을 읽다 보면 단순한 이상적인 여성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냈지만, 동시에 자신의 예술과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완벽을 추구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내려 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주변의 도움을 구하고,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알았던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오늘날 완벽하려다 지쳐버리는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큰 위로가 된다. 결국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자기 삶을 꾸준히 유지하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또한 신사임당은 ‘순종’을 복종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순종은 더 큰 가치를 위해 작은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남편이 집을 비워도 원망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억지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상황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스스로 판단했다. 신사임당에게 순종과 자기주도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한 줄기의 일관된 태도였다. 언제 물러서야 하고 언제 나서야 하는지를 아는 분별력, 그것이 그녀의 진짜 힘이었다.

그녀의 교육 방식은 특히 인상 깊었는데, 신사임당은 자녀를 훈육으로 몰아세우기보다 아이의 성향과 흥미를 세심히 관찰하며 지도했다. 아이가 ‘소학’을 재미있게 읽으면 더 깊게 가르치고, 흥미가 떨어지면 잠시 멈추었다. 억지로 시키지 않고 스스로 배우게 만든 것이다. 동시에 아이가 잘못하면 타일러 바로잡되, 감정적으로 꾸짖지 않았다.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성급히 말하지 않고, 반드시 이치로 깨우쳐 주었다”는 구절이 바로 그런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교육은 율곡이 자기주도적으로 배우는 사람으로 자라게 했다. 그는 감시가 없어도 스스로 공부했고, 생각을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을 길렀다.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질문하는 교육법이었다. 신사임당은 율곡이 글을 읽다 막히면 답을 바로 알려주지 않고 “이 글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물었다. 외우는 걸 확인하기보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려 한 것이다. 그래서 율곡은 생각하는 힘,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에게 정답을 주기보다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어라. 질문하는 힘이 곧 살아가는 힘이 된다.” 이 말은 학생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적용된다.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 선택이 정말 나를 위한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줄 알 때, 비로소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신사임당은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기보다 직접 공경했고, 겸손하라 말하기보다 겸손하게 살았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아마 이런 일치일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 정보보다 삶으로 증명하는 본보기. 신사임당의 태도는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이후 책은 율곡 이이의 대표 저서 세 권—『성학집요』, 『격몽요결』, 『동호문답』—을 통해 그의 사상과 실천 철학을 보여준다. 『성학집요』는 임금에게 바친 학문의 요약서이지만, 그 본질은 누구에게나 통한다. 율곡은 “먼저 자신을 닦은 뒤에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즉,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조화를 강조했다. 자신을 바르게 세우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과 같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삶으로 옮기면, 작은 약속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공동체의 신뢰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격몽요결』은 공부의 바탕이 되는 생활 습관을 다루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읽는 것,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언행을 조심하는 것, 예의가 아닌 것은 보지도 말고 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는 공부뿐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단정한 몸가짐과 꾸준한 독서,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태도가 결국 한 사람의 품격을 만든다.

『동호문답』은 정치와 인간관계를 이야기하지만, 본질은 “공정함”이다. 그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은 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한 문제는 단호히 구분하되, 단순히 의견이 다른 문제는 다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인간관계의 대부분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관점 차이일 때가 많다는 점을 일깨운다.

책을 덮고 나면, 세 가지 메시지가 선명히 남는다.

첫째, 마음을 세우는 일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둘째,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셋째, 배움은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삶을 바르게 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이근오가 엮은 『마음을 곧게 세운 자, 운명조차 그대를 따르리라』는 단순한 고전 요약서가 아니다.

신사임당의 따뜻한 교육과 율곡의 실천적 철학이 함께 흐르며, 오늘의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다. 완벽하려 애쓰기보다 꾸준히 바로 서려는 마음,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

그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운명은 결국 그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오게 될 것이다.




질문은 바쁜 사회에서 우리를 잠깐 멈추게 하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를 만들어 더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예컨대, 삶의 가치는 얼마나 더 많은 답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느냐가 아닐까 싶다. 답은 항상 옳기만 한 게 아니다. 옳은 답일지라도 때에 따라 극단적인 결론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잘못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답은 원칙적으로 옳다. 하지만 상황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적용한다면 작은 실수에도 극단적인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 오히려 "이 잘못을 어떻게 하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 더 나은 해결책이 나온다. 이처럼 정해진 답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올바른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언제나 답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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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티브의 눈으로 다시 배우는 티처조의 영어식 사고 수업 - 생각이 영어가 되는 2단계 사고 학습법
조찬웅(티처조).Coleen Dwyer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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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다시 배운다는 것은, 단어를 외우는 일이 아니라 사고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영어를 오랫동안 공부해왔지만 정작 입을 열면 말이 느리고 어색하다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단어를 알고 문장을 외워도 막상 실전에서는 입이 굳는 이유는 단순하다.
영어가 몸에 익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여전히 한국어 중심으로 굳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티처조의 영어식 사고 수업》은 바로 이 지점을 정면에서 다룬다. 영어가 안 되는 이유를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재능 탓으로 돌리지 않고, 사고 시스템의 문제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기존 영어책과 완전히 다르다.

저자는 영어 실력은 지식이 아니라 뇌의 동작 방식에 달려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영어를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한국어로 해석하고, 말을 할 때도 먼저 한국어를 떠올린 뒤 영어로 번역한다. 이 두 단계를 거치는 사고 구조를 유지하는 한, 아무리 공부해도 속도는 절대 빨라질 수 없다. 따라서 해결책은 더 열심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번역기를 통째로 끄는 것”이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고 전환이 반드시 영어권 국가에 살아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아침에 팟캐스트를 들으며 시작하고, 업무 시간에는 영어 이메일과 뉴스를 다루며, 일상 속 대부분을 영어에 노출시키는 루틴을 보여준다. 그는 묻는다.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을까, 아니면 영어권에 살고 있을까?” 물리적으로는 한국이지만, 언어적으로는 이미 영어권에 가깝다.
영어식 사고는 장소가 아니라 환경 설계의 문제라는 메시지는 특히 인상 깊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영어를 추상적인 감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고 단위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존 교재에서 popular를 ‘인기 있는’으로 외웠다면, 이 책에서는 be liked by many people이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라고 안내한다. as soon as 역시 ‘~하자마자’가 아니라 almost at the same time이라는 감각으로 저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방식으로 단어를 이해하면 암기가 아니라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에 실전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영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식 사고가 자리 잡히면 속도는 자연스럽게 붙고, 표현은 더 이상 한국어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온다. 단어를 더 많이 외워서 실력이 는다기보다는, 언어를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면서 반응 속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티처조의 영어식 사고 수업》은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는 뻔한 동기부여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그렇게 외워도 입이 안 열렸던 수많은 학습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영어를 못했던 게 아니라, 방식이 잘못됐던 것뿐입니다.
지금부터는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영어로 생각하세요. 나머지는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영어를 못해서 답답했던 사람보다, 이제는 영어로 말하는 사람답게 사고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다. 영어 공부법이 아니라 뇌의 언어를 교체하는 과정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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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허기
정능소 지음 / 메이킹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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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평 먼저]
간만에 마음에 들어오는 시를 만났다.
이전에 ‘이제야‘ 시인님 시를 접하고 나서 이제 시도 가까워져야겠다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만난 시집 또한, 시 한 편으로도 깊은 사유를 하게 하는 매력 있는 시집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추천이다.

[본문 리뷰]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을 다치고도, 이상하게도 다시 손을 내민다. 어떤 날은 사소한 한마디에 금세 가라앉고, 또 어떤 날은 더 확실히 사랑받고 싶어 애쓴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오래 가는 약속을 꿈꾼다. 정능소의 『관계의 허기』는 이런 마음을 딱딱한 설명 대신, 밤·달·바람·물 같은 풍경으로 조용히 어루만진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에 장면이 먼저 펼쳐지고, 이성으로 따지지 않아도 자연스레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첫 시부터 인상적이다. ‘구름 의자’를 통해 고흐를 만나는 밤이었다.
느릅나무 아래, 칠이 벗겨진 의자에 고흐를 앉히고 담배 한 개비를 내어주며 건네는 질문.

“허망한 꿈을 몇 번이나 꾸셨냐고, 꿈 깨어 목 칼칼한 갈증은 어떻게 꾸셨냐고,
화폭에 별을 뿌렸던 고흐, 영혼과 맞바꾼 별 중에 하나라도 가질 수 있었던가”

이 대목에서 ‘별’은 화려한 상징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마음의 비유로 느껴진다.
우리는 사랑에서든 일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확실함을 원한다. 변하지 않는 애정, 모두가 인정할 만한 성취, 한 번 손에 넣으면 두 번 다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보증 같은 것들 말이다.
시가 말하는 ‘별’은 바로 그런 확실함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별의 속성에 있다.
별은 멀리 있을 때 가장 밝고, 거리를 둔 채 바라볼 때 비로소 빛난다.
그 빛을 손에 쥐려는 순간(상대를 통째로 내 마음대로 하려는 순간) 별은 사라진다.
붙잡음은 빛나는 평온이 아니라, 서로를 질식시키는 그림자를 낳는다.
‘너와 나, 바람에 쉬이 흩어지는 구름일지니’라는 말은 관계라는 것은 원래 바람에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처럼 변하고 흔들리기 쉬운 것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흐름을 허용하고 바라보기를 권한다.
서로를 조종하려 들면 금세 답답해지고, 변화를 전제로 곁을 지키면 관계는 오히려 오래 가게 된다.
이게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소유 대신 인정으로 허기를 줄이는 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하필 화자는 고흐를 불러 냈을까. 그는 생전에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는 인상이 강한 인물이다.
살아 생전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붉은 포도밭’ 한 점을 사간 것이 생전 판매 된 유일한 유화 그림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삶은 아를에서의 귀 자해와 병원·요양원 생활로 대표되는 고독과 불안의 이미지가 짙은 인물이다. 그래서 시는 ‘영혼과 맞바꾼 별’의 뜻을 묻기 위해 그를 대표적으로 불러낸 것이 아닐까싶다.
그는 끝내 붙잡으려 했던 빛과 그 대가로 치른 상처를 함께 지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고흐에게 묻고 싶었던 별의 진짜 뜻은 무엇일까?
이 시에서의 별은 ‘결국 변치 않는 사랑, 모두가 인정하는 성공, 한 번 쥐면 불안이 사라질 보증 같은 것‘을 가리킨다. 고흐에게 던진 질문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하는 질문과 같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갈아 넣어 붙잡으려 한 그것은, 정말 붙잡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답은 시의 마지막에 스며 있다. 별은 가까이 움켜쥐는 순간 사라진다.
별이 빛나는 이유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고, 관계가 오래 가는 이유도 간격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혼과 맞바꾼 별”의 진짜 뜻은, 소유하려는 순간 사라지는 확실함의 환상이며,
우리가 할 일은 붙잡기가 아니라 간격을 둔 바라봄—별은 하늘에 두고 빛만 가슴에 품는 태도임을 말한다.
여기서 화자의 목소리는 고흐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가르친다.
당신(고흐)은 별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 별을 보는 눈을 우리에게 남겼다. ㅡ 생전에 칭송받지 못한 시간이 길었다 해도, 그 밤을 건너며 그가 붙잡은 빛은 오늘날 우리에게 크게 와닿았다.
(실제로 고흐는 병원과 요양원에 머무르며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작품을 남겼고, 그 밤의 시선이 지금 우리의 밤도 비추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시에서의 고흐는 실패한 화가의 상징이 아니라 ‘소유 대신 바라봄’을 가르쳐 준 스승에 가깝다. 별을 쥐지 못했기에, 대신 별을 보는 법을 남긴 사람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고흐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평생 찾아 헤맨 그 별은 사실 거리와 함께 있을 때만 빛난다.
그러니 붙잡지 못한 것이 곧 실패는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그 밤을 건너며 버틴 당신의 눈이 지금의 우리를 살린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그 외로웠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시는 〈집들이 초대장〉이다.
“우리, 영원히 서먹해야 할 사이는 아니잖소 부딪힌 칼날에 튄 불똥에 데인 날은 있었지만
그대와 나, 칼날이 무디어졌을 지금쯤은 얼굴 한 번 봅시다”라는 말은, 날 서 있던 시간이 지나 이제는 서로를 다치게 하던 말과 감정의 칼끝이 둔해졌으니 먼저 문을 열어 보자는 화해다. 이어지는 “강물은 기다리지 않고 구름은 머물러 있지 않을 테니”는 시간과 감정이 가만히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관계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흐른다. 망설이다가 때를 놓치면, 다시 만날 기회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시의 핵심은 누가 먼저 사과하느냐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있다.
“결이 달랐다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떻겠소”라는 제안은, 옳고 그름을 끝까지 가려 같은 결로 맞추려 애쓰기보다, 서로 다른 결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차이 위에 다시 만남을 이어 보자는 뜻으로 이해된다. 논쟁과 해명으로 상대를 설득하기 전에, 우선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결국 관계 회복의 골든타임은 스스로 여는 것이다. 기다림 속에서 상처의 서사가 길어지기 전에, “이제는 날이 무뎌졌으니 한번 얼굴을 봅시다”라고 초대하는 쪽이 먼저 관계의 회복을 열 수 있다는 메시지다.

다음 시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별아 내 가슴에>라는 시다.
“겨울바람에 굴려진 조약돌처럼 별빛이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다
별빛, 수천 년 혹은 몇백 년 전에 출발한 빛을 지금 내가 보고 있다고 하니
등골 서늘하게 와닿는 경이로움이여,
별을 하늘 너머에 박아둔 이유는 가슴에다 넉넉하게 담으라는 조물주의 뜻이 아닐까
사람들은 가슴에다 별들을 쓸어 담으며 무정한 세상살이에 위로받지 않았던가
무수히 반짝이는 별 무리,
사람들 마지막 날에 가슴에서 키운 별들을 토해 놓는 바람에 저렇게 무한정으로 늘어났나 보다
나는 왜, 별 무리를 담글 가슴에다 구린내 풍기는 온갖 잡것을 담아두고 애를 끓이는가?
좁쌀아, 좁쌀아, 인간사에 너무 가슴 태우지 마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저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이니”

이 시 구절을 보면, “별을 하늘 너머에 박아둔 이유는 가슴에다 넉넉하게 담으라는 조물주의 뜻이 아닐까”라는 부분이 있다. 별은 소유가 아니라 가슴에 품는 것이라 했다. 그동안 우리는 별을, 그러니까 완벽한 사랑과 확실한 인정 같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더 가까이, 더 오래, 더 확실하게. 그런데 붙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멀어졌다. 별은 손에 쥐는 순간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별은 하늘에 두고, 가슴에 그 빛을 품는 법을 배우면 되는 거다. 멀리 있기 때문에 더 잘 보이고, 멀리 있기 때문에 넓게 오래 비춘다. 관계도 그럴지 모른다. 소유하려 들지 않고, 바라보고 돌보며, 각자의 간격을 인정하는 것이 오래 갈 수 있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마지막 날에 가슴에서 키운 별들을 토해 놓아서 하늘의 별이 늘었다”는 시인의 상상은 아름답다. 마음속에서 키운 선한 마음, 다정한 말, 한 번 참은 성급함, 한 번 더 내민 손… 그런 것들이 죽고 나서도 빛이 되어 남는다면, 오늘의 작은 선택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
시에서 말한 ‘가슴에 키운 별들‘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나는 요즘 무엇을 키우고 있나? 가슴 속에서는 어떤 것이 자라나고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그러다 이어지는 한 줄에서는 뜨끔하기도 했다.
“나는 왜, 별을 담글 가슴에 구린내 나는 잡것을 담아두고 애를 끓이는가?”에서다.
나는 종종 질투, 억울함, 쓸데없는 비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걱정 같은 것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아무리 예쁜 풍경을 봐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결국 허기는 더 심해지고, 속은 더 답답해졌다.
마음을 그릇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담을지는 스스로 고른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게 된다.
시인의 “좁쌀아, 좁쌀아”라는 자기호명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듯 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말투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사에 너무 가슴 태우지 마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저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마지막 권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문장이 아닐까.
큰 기쁨에 너무 들뜨지 말고, 큰 슬픔에도 끝장났다고 생각하지 말자.
지나갈 일을 지나가게 두는 연습. 붙잡을 건 책임이고 내려놓을 건 집착이다.

이 시를 읽고 나서 작은 실천을 한번 적어 본다.
첫째, 마음이 복잡할 때 하늘을 한 번 본다. 별이 보이든 안 보이든 고개를 드는 동작 자체가 숨을 바꾼다. 둘째, 확인이 필요할 때는 사람을 붙잡기보다 내 마음을 먼저 묻는다.
“지금 내가 불안해서 확인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필요한 질문일까?”
셋째, 잠들기 전에 오늘 하루 가슴에 담긴 “잡것” 하나를 이름 붙여서 내보낸다.
며칠 전에 읽은 ‘브레인 덤핑’에서 실행 했던 것처럼,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 이르면 질투, 억울함, 비교, 조급함 같은 것에 총체적으로 “잡것”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것을 가슴 속에서 내보낸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나를 옥죄고 힘들게 하던 것들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 “잡것”을 내보낸 자리에 오늘 본 작은 빛 하나를 채워보자. 고마웠던 말 한 줄, 누군가의 웃음, 스스로 한 작은 수고와 같은 것들로.

별은 결국 소유할 수 없고, 그래서 더 오래 빛난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나는 너를 가질 수 없지만, 너의 빛을 배울 수는 있다. 그리고 내 안에서 키운 그 빛이 언젠가 누구에게 작은 별 하나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관계의 허기』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아질 거야라는 오래된 기대를 내려놓게 한다.
사람을 바꾸는 대신 나의 허기를 알아차리고, 차이를 인정하고, 슬픔을 제대로 보내고, 내 선(경계)을 제대로 세우고, 충분함을 배우는 일이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타인에게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다.
별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을수록 밤하늘은 더 깊어진다.
이 책은 위로를 약속하기보다 매일 해볼 작은 연습을 권한다.
그 작은 변화가 내일의 관계를 조금 더 안전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시집을 권하고 싶은 사람은 분명하다.
관계에서 자주 지치고, 비슷한 자리에서 반복해 넘어지는 사람.
화해와 단념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다.

『관계의 허기』는 정답집이 아니라 다음 선택을 현명하게 만들 수 있는 책이다.
그 풍경을 지나며 우리는 자기 속도를 회복하고, 그 속도로 타인에게 다가서는 법을 다시 배운다.
허기는 남겠지만, 더 이상 우리를 마음대로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사랑은 소유의 별빛이 아니라 함께 걷는 달빛으로 곁을 비춘다.


'메이킹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인스타 @hagonolza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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