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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은 늘 시험에 들 테지만
한시원 지음 / 좋은땅 / 2026년 1월
평점 :

처음 이 시집을 읽을 때는 그저 사랑에 대한 시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몇 편을 지나고 나니 이 책은 사랑을 노래하는 책이라기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의 마음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시처럼 느껴졌다.
설렘이나 약속보다도 그 이후의 계절과 침묵, 그리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계절은 또 흘러가는데,
정작 사람의 마음만은 그 자리에 조금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가을 단상」을 읽을 때는 특히 그런 마음이 컸다.
“당신이 가고픈 그 어디라도 / 바람은 먼저 불어 가 닿고”라는 구절에서는
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이 남긴 기척은 세상 어딘가에 계속 닿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꽃이 자란다는 말도 좋았다.
사랑은 끝났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주 오래 작은 흔적이 남고, 그 흔적은 때로 아픔으로,
때로는 삶을 버티게 하는 기억으로 남는다.
막다른 길 끝에서 다시 더 높은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는 구절에서는,
이 시집이 슬픔을 말하면서도 끝내 절망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다.
상실도 결국 삶의 일부이고 그 끝에서 또 다른 길이 열린다고 믿는 마음이 있었다.
「그립다는 말 대신」은 더 직접적으로 아팠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사람 앞에 서 있었다는 고백은,
사랑이 끝나는 순간의 무력감을 아주 담담하게 보여준다.
꽃이 지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계절 어디에도 눈물에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표현을 읽을 때는,
세상의 풍경 전체가 한 사람의 상실로 물든 것 같았다.
사랑이 끝나면 그 사람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걷던 계절의 결도 달라진다는 걸 이 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가 더 좋았던 이유는
“외롭고 쓸쓸한 모든 것에는 / 각자만의 별이 있습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이 시집은 상실을 견디는 사람을 끝내 혼자 두지 않는다.
떠난 사랑은 비에 젖어 천천히 지워져도,
그 뒤에 남은 사람 안에는 아직 조용히 운행하는 별빛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연」에서는 다 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마음이 더 절제된 방식으로 전해졌다.
이 삶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짧지만 오래 남는다.
사랑은 늘 충분히 했다고 말하기 어렵고,
지나고 나면 늘 덜 건넨 마음이 남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영 못 오실 그대를 맞기 위해 등불 하나 밝혀 둔다는 마음도 참 서러웠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끝내 완전히 접지 않는다는 것.
이 시집은 그런 인간적인 미련과 그리움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봄비를 맞으며 그대를 그릴 때」를 읽으면서는
이 책이 왜 단순한 연애시집으로만 읽히지 않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 사랑을 우리는 왜 하나요”라는 물음은
누구나 한 번쯤 마음속으로 해봤을 질문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이 시는 거기서 사랑을 후회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 아프기만 한 사랑은 누구도 다치지 않고 더 깊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구절에서는,
한 사람을 향해 시작된 마음이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넓혀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 본 사람만이 더 큰 배려와 더 넓은 하늘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말처럼.
그래서 이 시집을 읽고 나면 사랑이 꼭 행복했느냐, 이루어졌느냐보다도
그 사랑이 한 사람을 어떤 존재로 만들었느냐가 더 중요하게 남는다.
흔들리고, 엇갈리고, 지워져 가는 과정 속에서도 마음은 조금씩 더 깊어진다.
이 책에 실린 사랑은 늘 시험에 들지만,
그 시험은 사랑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를 보여 주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떠난 줄 알면서도 오래 그리워하고,
끝내는 그 그리움마저 품은 채 살아가는 마음.
아마 이 시집이 담고 있는 감성은 바로 그런 것일 것이 아닐까?
사랑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의 이야기이면서도, 결국 사랑 덕분에 조금 더 넓어지는 사람의 이야기다.
읽고 나니 이 책은 유난히 조용히 오래 남는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위로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사랑을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는데도 사랑을 함부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어떤 날은 “당신이 그립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같은 문장이 오래 남고,
어떤 날은 “각자만의 별” 같은 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아마 이 시집은 읽는 사람의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이 책은 사랑을 아름답게 꾸미기보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마음의 결을 끝까지 바라봐 주는 책이라는 것!
그래서 더 진실하게 읽히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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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땅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연
하물며 눈 내리거나 문득 가슴 저리거든 내 서러운 마음을 추슬러 하늘 한번 올려다보리 이 삶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
떠나서 오지 않는 것은 온통 다 내 것인 이 삶의 낱낱 슬픔 마디마다 눈물 맺힌 그 세월들을 내 먼저 마중해 품었으니
하물며 세찬 바람 일어 갈꽃잎 흩날리거나 이 사무침이 더 깊어지면 노을을 심지 삼은 등불 하나 밝혀 영영 못 오실 그대를 맞으리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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