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의기양양하게 자기 영혼의 이 절정을 향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엄중하게 존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은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로부터 우리의 환상과 문화적인 행복을 겨냥한 거대한 방해가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시는 방해,
곧 바벨탑 건축 이야기가 보여주는 방해입니다.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 P25

다른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은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길, 계시의 길, 은혜의 길, 그리스도의 길,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 인정받는 길입니다. "너희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종교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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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인류가 하나로 통일되어재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응답하면, 우리는 "우리도 그런 통일을 원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 진리는 교리도 세계관도 종교적 체험도 아니다. 그런 진리는 정의와 사랑 같은4. 추상명사를 되풀이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하나님이 그 안에서 세상을 화해케 하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다. 진리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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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은 곧 환대라는 것이다. 경청할 때 우리는 문을 열고 손님을 안으로 들인다. 나의 공간 속으로 타인을 맞이한다. 자신을 여는 것이다. 경청은 초대이며, 그 초대된 곳에서 사람들은 약점까지 내보이며 친해질 수 있다. 제대로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도 모른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들어올지 모른다. 우리는 뜻밖의 상황에 마음을 열고, 낯선 이를 받아들이며, 예기치 못한 일을 듣는다. 변화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예수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이들 안에 오셔서 함께 먹겠다고 하셨는데, 그 문화에서 식사는 친밀한 행위였다. 사회적으로 격이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하는 일이었다. 함께 먹으면 관계가 평등해진다. 경청할 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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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에 헌신하고 또 헌신한 것은 이를 통해 나부터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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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기록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을 한 공동체에게 전달하여 그 공동체가 그 비밀을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환경이 바뀔 때마다계속해서 그에 비추어 그것을 다시 적용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초창기부터 새로운 상황에 접하여그 비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논쟁과 몸부림과 의견 차이가 있어 왔다. 신약성경 자체가 이 점을 확실히 보여 준다. - P184

앞서 인용한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의 말이 시사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과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는 바깥에 서서 그것을 검토하는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내주하면서 거기서부터 저 밖에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려고 애쓰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의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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