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교회 -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의 교회에 대한 확신
존 R. 스토트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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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교회 #존스토트 #IVP

 

교회의 실재가 현존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로완 윌리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되면서도 살아 있는 교회의 성격을 항구적으로 규정해 줄 분명하고도 본질적인 표지들은 계속 있어왔다. 이 책의 목적은 살아있는 교회라고 부를 교회의 여러 특성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나의 희망은 명백하게 성격적인 이러한 특성들이 어떻게든 보존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

 

1) 살아 있는 교회의 본질적인 표지들을 고찰하기에 앞서 필요한 세 가지 가정

우리는 모두 교회에 헌신한다. 신약 성경은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을 알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선교에 헌신한다. 그분의 선교는 언제나 성육신을 의미한다. 안전하게 면역된 천국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헌신한다. 교회는 부패 상태에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해서 개혁되고 갱신되는 것을 보게 되기를 갈망한다.

 

2) 자신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는 교회다. 성령 충만은 반지성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특히 사도들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돌보는 교회다. 관대함은 언제나 하나님 백성의 특성이었다. 우리 모두가 전적인 가난으로 부름을 받진 않았지만, 모두가 검소한 생활방식을 실천하며 우리의 것을 공유하고 나누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배하는 교회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공식적이면서도 비공식적이었고, 기쁨이 넘치면서도 진중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이러한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예수님 자신이 일상으로 혹은 날마다 전도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전도를 이따금씩 하는 행위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2. 예배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함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이며, 우리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시편 1053절을 따라 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는 것이 예배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 진정한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 성경의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진정한 예배는 회중 예배. 교회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교제권을 넓히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영적 예배.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읽고 선포해야 하고, 성찬을 두려움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행해야 하고, 간절한 찬양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진정한 초월을 경험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예배는 도덕적 예배.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3. 전도 지역교회를 통한 선교

지역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지역교회는 교회 자신을 이해하고(교회의 신학), 교회를 조직화하고(교회의 구조), 교회를 표현하고(교회의 메시지), 교회 자신이 되어야(교회의 삶) 한다.

 

1) 교회는 그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의 신학

최소한 교회에 대한 그릇된 상 두 개가 있다.

- 첫 번째는 종교 클럽 혹은 내향적인 기독교이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회원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협동 사회다.”라고 말했다.

- 두 번째는 세속적인 선교 혹은 종교 없는 기독교다. 이기적인 종교에 대한 그들의 혐오는 정당하지만 종교 없는 기독교란 개념은 균형을 상실한 반작용이다.

- 교회를 이해하는 세 번째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 그릇된 속에 있는 진리를 결합함으로써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을 섬기는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이중 정체성 혹은 성육신적 기독교이다.

 

2) 교회는 그 자신을 조직화해야 한다: 교회의 구조

우리의 정적이고 경직되고 자기중심적인 구조는 이단적이다. 분주하고 교회 중심적인 프로그램은 가정생활에 해악을 끼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교회는 5-10년 마다 자신을 평가하고, 교회의 구조가 그 정체성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는지 알기 위한 조사를 행해야 한다.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하므로 지역 사회 조사가 필요하다.

지역 교회에 대한 면밀한 질문들이 필요하다.(교회 건물, 예배 의식, 교회 구성원, 교회 프로그램 등)

 

3) 교회는 그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

점점 더 다원주의적으로 되어 가는데, 우리는 이러한 복음을 세계 속에서 어떻게 공식화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절대 부동성.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표현(이신칭의, 하나님의 나라, 해방, 중생 등등)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이들은 신약성경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음의 형식에 풍부한 다양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절대 유동성. 신약 성경에는 모든 다양성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뿌리 깊은 통일성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경향도 피해야 한다.

우리는 고대의 말씀과 현대 세계 사이, 이미 주어진 것과 열린 상태로 남겨진 것 사이, 내용과 상황 사이, 성경과 문화 사이, 계시와 상황화 사이의 변증법을 두고 씨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대한 충성과 사람에 대한 민감성이 둘 다 필요하다.

 

4) 교회는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삶

하나님의 비가시성은 신앙에서 하나의 큰 문제다. 구약 성경의 유대인들이 직면했던 것처럼 오늘날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토대 위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비가시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오셨는가?

그분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자신을 가시적으로 계시해 오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자신을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보여주신다.

 

4. 사역: 열둘과 일곱

일곱 집사를 세운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원리 하나가 새겨져 있다. 모든 사람 각자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이 원리를 세 가지 긍정적인 진술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을 사역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역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말씀 사역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리 업무로 산만해지지 않고 그들의 소명에 집중하기를 기대하신다.

 

이 원리에 동의하면서 목사직에 정관사를 붙인 사역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어제나 교회에 커다란 해를 끼치게 한다. 지역 교회의 리더십은 목양적이면서 동시에 복수적이어야 한다. 다음은 바울이 제시한 목양의 은유들이다.

 

1) 사도들의 모범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된 메시지 어느 한 부분도 생략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 공동체의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도시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다.

 

2) 거짓 교사들의 침입 양무리를 맡은 목자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부여되었다. 첫째는 양무리를 먹이는 일이고, 둘째는 이리들을 내쫓는 일이다.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오류와 싸워야 한다.

 

3) 백성들의 가치(양무리) - 양무리들이 있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다. 교회는 독생자의 피로 사신 교회다. 감독을 임명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도록 동기 부여해 준다.

 

5. 교제: 코이노니아의 의미

신약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의 핵심에는 공동의라는 뜻의 형용사 코이노스가 있다.

공동의 유산. 우리는 나라와 문화와 교회가 다르고 기질과 은사와 관심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위로자 되시는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신다.

공동의 봉사. 코이노니아는 물질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지식, 은사도 함께 나누라 도전한다.

상호책임. 어느 누구도 전적인 수혜자 혹은 전적인 기부자가 아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일에서 협력 관계에 있다.

 

6. 설교: 다섯 가지 역설

1) 진정한 기독교 설교는 성경적이고 동시대적이다. 성경과 동시대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깊은 협곡의 양면을 연구해야 한다. 익숙해질 때까지 성경을 연구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구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이중적 경청이라 부른다.

 

2) 기독교 설교는 권위적이면서 동시에 잠정적이다. 설교자들은 교리와 불가지론의 요소를 겸비해야 한다. 분명하게 계시된 것들에 대해서는 교리적이어야 하고, 비밀한 것들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성경으로 인도해서 그들이 성경에서 스스로 풀을 찾아 먹도록 권해야 한다.

 

3) 기독교 설교는 예언적인 동시에 목양적이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계시하신 교리적 진리와 윤리적 기준을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예언적이고, 성경적 진리를 더디 믿는 사람들과 성경적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다룬다는 의미에서 목양적이다.

 

4) 설교는 은사인 동시에 공부하는 설교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칼빈은 먼저 학자가 되지 않고서는 영영 훌륭한 말씀 사역자가 될 수 없다고 했고, 스펄전 역시 공부에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설교단에서 더 이상 거두지 못할 것이라 했고, 빌리 그레이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은 사역을 다시 시작한다면 자신이 했던 것보다 세 배는 더 공부하고, 더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5) 다섯 번째 역설은 설교는 깊은 사고와 열정으로서, 지성과 감정이 연동하고, 명쾌한 사고와 깊은 정서가 겸비된다.

 

7. 연보: 열 가지 원리

1) 기독교의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2) 카리스마, 즉 성령의 은사일 수 있다.

3) 연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무된다.

4) 기독교의 연보는 비례적인 연보이다.

5) 균등에 기여한다. 이때의 균등은 획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 기회의 균등, 극단적인 사회적 불균형을 차단에 기여할 수 있다.

6) 면밀한 감독이 필요하다.

7) 우호적인 경쟁이 가능하다.

8) 기독교의 연보는 추수와 닮았다.

9) 기독교적 연보는 연보의 목적에 따라 각각의 상징적(신학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

10) 진정한 연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증진한다.

 

8. 영향력: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이라는 모델을 통하여 공동체적으로는 자신의 교회에 대한, 개인적으로는 제자들에 대한 네 가지 진리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한다.

 

1) 소금과 빛의 진리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배적인 문화와 다르게 될 것!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있는 무기로는 기도 / 복음 전도 / 모범 / 논쟁 / 행동 / (믿음으로 생기는) 고난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기독교적 독특성을 유지해야 한다. 기독교적 독특성이란 더 큰 의, 더 넓은 사랑, 더 고상한 야망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특별히 우리는 비관주의에 회개할 필요가 있다. 신앙과 비관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9. 21세기의 디모데를 찾아서

디모데는 그 주변의 지배적인 문화로부터 구별되라고 부름 받았다.

 

1) 윤리적 호소. 우리는 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거룩에 이르는 과정엔 수동성이란 없다.

2) 교리적 호소.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가 지켜 낸 교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3) 경험적 호소. 영생은 새 시대의 삶이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러한 삼중적인 호소는 우리 시대에 극도로 적실하고, 균형이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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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 10 - 자유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십계명 탐구
숀 글래딩 지음, 임고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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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에 대한 책들을 살피다가 ‘TEN 10’ 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을 들고 훑어보니 열 명의 등장인물이 나와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이었다. 대개 십계명을 다룬 책들은 계명이 쓰인 배경, 각 계명의 의미, 적용 이러한 식으로 나누어 조금은 딱딱한 편인데, 이 책은 제목도, 형식도 부담스럽지 않아 집어 읽었는데, 400페이지가 조금 못되는 적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내용도 흥미로워서 오래 걸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이 사회가 공동체로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모두가 깊이 공감한다면서 십계명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각 계명에 대해서 다루는데 1계명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열 번째 계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역순으로 첫 번째 계명까지를 다룬다. 아마도 작가가 의도한 것 같은데, ‘에 대하여 언급하며 가르치려는 태도보다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 안타까운 상황들을 공감하려 했던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개인의 연약함이나 사악함을 차근차근 다루며 결국에는 하나님으로 이끌고 간다.

 

저자는 열 가지 계명을 모두 다루면서 다른 십계명 책들이 담고 있는 기본적인 해석들도 알차게 담아낸다. 물론 그 해석이 특별히 다양하거나, 아주 독특하진 않다. 오히려 톡톡 튀는 형식 안에 생각보다 익숙하면서 보수적인 내용들, 십계명이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 계명을 인간들이 지킬 수 없다는 현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주로 오셔서 그 모든 계명들을 지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 이 복음을 믿고 기도하며 계명을 지키자는 권면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사실 형식이 조금 특별할 뿐이지만. 저자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전통적인 교리 해설서들의 내용뿐 아니라 십계명을 풀어내는 순서까지도 충실하게 따른다.

 

어찌 보면 형식은 참신하지만 해석이 크게 새로울 것이 없어서 사람에 따라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등장인물 열 명을 통해 제시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 특히 천박한 자본주의로 인한 비인간화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각 개인이 직면하는 일상의 어려움과 내면의 고민들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적용이 참 뛰어나다. 아마도 20년 넘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저자의 목회 이력이 여기에 도움이 된 것 같다.

 

십계명을 연구하기 위해서 이 책 한 권만을 읽어서는 안 되겠지만, 십계명 설교나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들 혹은 십계명을 한 번도 공부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특히 그동안 너무 딱딱한 십계명 해설서만 접한 분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십계명도 이렇게 재미있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도움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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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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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창비.

 

1112,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로 광화문 광장에 100만이 모인 날이었다.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아내와 온 힘을 다해서 나갔다. 종각역에 내려 올라와보니 종로 대로를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조금 걷다 보니 스스로 걷기 보단 떠밀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나와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 뿐 아니라 상당수의 아빠, 엄마들이 어린 자녀들과 손잡고, 혹은 안고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그곳에 나오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을 미리 해놓거나, 아이를 데리고 나오기 위하여 온갖 준비를 했을 것이고, 지하철을 한, 두 번식 갈아타는 수고를 해야 했고, 길바닥에 아이와 함께 앉아 몇 시간씩 있어야 했고, 집에 돌아갈 땐 한 두 시간은 걸어야만 하는 수고까지 각오하며 나온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리고 그들을 이렇게까지 광장으로 몰아갔을까? 부끄러움, 분노, 슬픔, 절망....이 중에 하나이거나, 이 모두 이거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의 저자 엄기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파산한 세계라 부른다. 처음엔 너무 나아간 말이 아닌가 싶었지만, 금방 수긍이 갔다. 개인이 혼자서 노력하며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바깥이 있어야 하는데, 바깥이 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바깥때문에 개인의 존엄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당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저자는 지금, 대한민국을 파산했다고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은 그 바깥의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가 분노했다. 젠틀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저자는 총 3장에 걸쳐 바깥이라는 구조, 시스템이 무너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리셋을 원하는 사람들을 분석하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리셋을 원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리셋을 부르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빼앗긴 존엄과 안전을 되찾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리셋을 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를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세상 가운데 자신을 소진하면서 점점 무기력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악착같이 더 살기 위해 자신의 존엄성을 무시당한 채 조용히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더욱 슬픈 일은 더 이상 소진할 것이 없을 정도로 수고해서 지치고 무기력해진, 비겁해지면서까지 조용하게 된 개인을 두고 이렇게 된 것이 순전히 그들 개인의 문제라 치부한다는 것이다. 부당한 대접을 받고 사는 것도 억울한데, 그렇게 억울하게 된 것도 내 책임이라 하니 절망하거나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절망과 분노를 우울한 모습으로, 어떤 이는 과격한 모습으로 나타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세상의 리셋을 원한다는 거다.

 

저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세상을 한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이야기를 통해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는 근무 중에 업무와 상관없는 인격적 모독을 당한다. 이때 점주는 잠간 상황을 보는 척 하지만 금방 아르바이트생에게 그냥 조용히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길 지시하거나, 오히려 손님을 화나게 했으니, 아니 손님이 화가 났으니 사과를 요구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아니오’, ‘싫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모욕을 선물하는 조직, 사회. 이런 세상에서 억울하면 성공해야 하고, 성공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분을 삭이고 반강제로 자신과 사회를 긍정하며 이겨보려 한다. 그런데 그렇게 노오력하면 노오력할수록 자신은 소진되게 되고,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게 부정당하고,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곳에 존엄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을 담보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천인데, 여전히 세상은 그들을 향하여 비정규직과 정규직이란 구조에 대하여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저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 말만 바뀌었을 뿐, 점점 공고해지는 또 다른 신분제이고, 계급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심지어 우리 사회의 일부 특정 엘리트들의 기득권이 더욱 강화 되고 있는 분위기가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다. 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그들의 안전마저도 위협 한다.

 

무엇인가를 하면 할수록 소진되고, 가만히 있으면 부정당하는 일들을 반복하는 쳇바퀴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크게 두 가지 차원의 제안을 한다. 먼저는 인간의 존엄과 인도주의를 위해 온갖 법적/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면 절대로 자연스럽게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구 사회가 엄청난 전쟁과 학살을 경험하며 깨닫게 된 소중한 교훈 아니겠는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제안은 먹고사니즘에 잠식된 우리의 일상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서로를 기능이 아닌 동료로서, 함께 협력하며 고통을 나누고, 함께 행동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조금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서로를 주체로서 인정하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부터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다시 희망을 볼 수 있고, 잃어버린 자유를 조금씩 확장할 수 있다.

 

한 번은 지인이 촛불 시위를 냉소했던 적이 있었다. 이미 광우병 소고기 사태 때,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분도 절망하고, 또 절망해서 이 세상이 아예 망해버리는 것 말고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112, 저녁 630분이 되었을 때, 그곳에 모인 100만이라는 주체들은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이 이 세상 바깥, 시스템의 주인이라 착각하는 사람을 향하여 함성을 질렀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쉽게 꺼내지 못했던 아니오를 함께 힘을 모아 뿜어낸 것이었다. 그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했고, 너무나 슬펐고, 권력자들로 인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그곳에 나왔던 우리였는데 그 함성 후에 나는 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고, 도무지 희망이 보이질 않아 리셋하자고 모인 그곳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다. 잠간일수 있고, 그것마저 하고 마는 것일 수 있지만, 함께 아니오라고 외치니 스스로 바깥의 주인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말을 듣고, 움직였다.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노력하면 그만큼 보상 받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당하게 존중받는 세상으로 우리가 진입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아니오라는 말로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턱을 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케 보여주고, 진짜 희망을 가져보자고 말을 건넨다. 아직,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진 나에게 참 기분 좋은 책이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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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 동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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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케이시윅스. 동녘

 

근로기준법 제50[근로시간] 1주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1일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일주일 평균 근무시간 40시간.

 

이렇게만 맞춰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사람들이 넘쳐 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파트타임 근무자들이나,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들 할 것 없이 너무 많이 일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있는데, 이것 역시 아주 큰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적건, 많건 너무 많은 시간을 임금 노동에 사용하는 것은 인간됨의 근본까지도 흔들 수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토록 많이 일하는 것에는 큰 저항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헌신과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아래 장시간 근무를 장려하거나, 추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한풀 꺾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일만 시간의 법칙이 유행처럼 번지며 미친 듯이 일하라는 것을 멋있게 포장하여 수많은 매체들이 앞 다투어 이야기를 하기 까지 했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담대하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11p) 책의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저자의 질문에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정도 답을 할 수 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리고 사람은 원래 일을 해야 하니까.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거절한다. 그리고 함께 거절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필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관습이자 규범 장치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고(20p),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착취를 당하기까지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생산의 현장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참 전, 두 아주머니께서 식당 개업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식당은 인건비 따먹기야!” 지금 생각해보면 저자의 지적에 딱 들어맞는 얘기이다. 어디 식당만 그러할까?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업주는 당당하게 많은 일을 요구하고, 고용된 사람들은 조금 불평이야 할 수 있어도 묵묵히 일한다. 당당하게 착취하고, 기꺼이 봉사수준에 가깝게 헌신(?)하는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자는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를 바로 노동 윤리에서 찾는다. 일 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상황 중에 일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낯설었는데, 응당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동에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문제 제기하는 저자의 담대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가 전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저자는 막스 베버를 인용하며 지나치게 개인화된 노동 윤리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개인의 경제적 성취나 실패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집단의 책임 혹은 구조적인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을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나 의무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고용주의 사업 활동을 소명으로 해석해주는 한, 바로 이런 노동 의지를 착취하는 것은 합법화 되었다고 말한다....빈곤에는 도덕적 의심이 가해진다.”(91p) 일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온전히 노동윤리가 기업 친화적으로만 적용되는 사회를 정확하게 꼬집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커다란 저항 없이도 많이 일하는 상황이 지속 가능한 또 다른 이유를 신성시까지 여겨지는 가족 윤리, 가족 제도에 기반한 임금 노동 구조에서 찾는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하루 8시간, 5일 근무가 풀타임 근무의 표준이 되었을 때, 남자 근로자는 집안의 풀타임 가사 노동자였던 여성의 보조를 받는다고 상정되어 있었다. 물론 이 조차도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부양을 위해 훨씬 더 많이 일할 것을 요구 받았고, 그것을 인생 최고의 의무로 받아들여졌다.(255p) 현재의 임금 노동의 구조가 노동 윤리와 가족 윤리와 젠더 분업화에 기반을 두고 설계 되었기에,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자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크게 반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악한 시스템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틈을 내기 위하여 두 가지 제안을 내어 놓는다. 노동시간 단축, 주당 40시간 근로에서 30시간으로 줄이자는 것 그리고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것. 두 가지 모두 상당히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주장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논의가 되어 왔던 내용들이다. 그중에서도 마르크스를 노동 시간 단축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제안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자본론>에서 노동 시간의 단축을 전제로 하여 개인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 중에 협력자로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4p) 개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사업에 관여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그동안 소외문제, 의미 없는 노동 문제로 고통 받았던 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저자는 프롬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가 개인의 자유에 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마도 마르크스라는 인물 자체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편견이 상당히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싶은 느낌이 들었다. 여튼, 마르크스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노동 시간의 단축을 제안했다.) 또한 저자는 기본소득 자체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것을 꼬집고, 기본소득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기본소득은 개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가족이나 가구 구성, 다른 소득 여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고용 여부와 상관없이 지급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소득이 그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게끔 바닥 수준을 정립하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많은 이들이 임금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조건과 상태에 덜 의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228p) 이러한 기본소득에 대한 반감은 지금도 강력하다. 노동윤리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 먹을 수 없다는 바울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저자는 존재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더욱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기본소득이 사람들로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기본소득을 받으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까? 사실 아직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지에 대해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이것을 유토피아적 미래라 말하며 우리가 함께 상상하고, 이것을 더욱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도 구체적인 제안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막연한 상상, 무모한 요구라 할지라도 우리가 함께 하며 정치적 행동을 보이는 것에 대한 상당한 의미가 있음을 저자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지금의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할 수 있게 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현재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를 억압하는 힘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더 큰 위험은 우리가 너무 많이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348p)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그토록 노동 윤리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며 적게 일해야 하고,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만, 저자 역시 일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례 당연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문제제기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나 좋은 노동과 가족이라는 가치를 통째로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것이 근무시간 유연제인데,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회사들에 다니는 근로자들의 경우, 대부분 여가 시간마저도 근무시간에 통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근무를 위해서 혹은 더욱 많은 결과물을 내기 위하여 생겨난 제도들이라면 아무리 이름이 그럴싸해도 결국엔 노동자 개인과 그 노동자의 가족을 통째로 일과 기업에 종속되게끔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서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점이 많이 의아했었다. 이렇게 그럴싸한 문제제기를 해놓고서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아서 말이다. 하지만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노동에 대해서, 많이 일하고, 적게 받는 것에 대해서 별로 질문조차 하지 않고 지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이러한 문제제기가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노동 시간 단축, 기본소득의 지급,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이것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이 일하고 있고, 너무 적게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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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난 하나님 -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하나님을 말하다
강호숙 지음 / 넥서스CROSS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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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난 하나님-한국교회에서 여성의 하나님을 말하다> 강호숙.

 

합동측 신학교에서 여성()학을 다년간 가르쳐 온 강호숙 교수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토대로 책을 냈다. 그동안 자신이 여성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로부터 그동안 남성 중심적 혹은 가부장적으로 읽혀왔던 성경과 교회의 뒤쳐진 성윤리와 기독 여성의 일상과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냈다. 워낙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고, 남성 위주의 시각에 젖어있는 많은 교인들을 독자로 삼는 책이다 보니 쉽고,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동성애 반대, 혼전순결 말고는 성에 대해서 잘 가르치지 않는 상황이기에 이 책의 내용들은 어느 정도 유익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여성 목회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사역들이나, 성폭력이나, 추행과 같은 일을 당했을 때, 신고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나, 이와 관련하여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은 많이 공감할 수 있었고, 남성 목회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저자가 주장한 부분들에 대해서 동의가 되고, 나름 필요한 내용들이라 생각을 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여성학을 신학적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했지만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과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책에서 구분한 남성과 여성의 특징들을 받아들인다든지, 사사 드보라를 두고 돌봄과 사랑이라는 모성적 리더십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고 언급한 부분은 잘 납득이 되질 않았다. 여성학이 우리에게 준 큰 유익이 여성을 그동안 주어져 있던 특정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 것이고, 사람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일 텐데, 오히려 그러한 시각을 둔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쓰인 배경이 되는 교회들이나, 학교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알기에, 또한 그러한 분위기에서 여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하고, 그것을 위하여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믿기에, 이 책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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