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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 동녘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케이시윅스. 동녘
‘근로기준법 제50조 [근로시간] ① 1주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② 1일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일주일 평균 근무시간 40시간.
“이렇게만 맞춰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사람들이 넘쳐 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 파트타임 근무자들이나,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들 할 것 없이 너무 많이 일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있는데, 이것 역시 아주 큰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적건, 많건 너무 많은 시간을 임금 노동에 사용하는 것은 인간됨의 근본까지도 흔들 수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토록 많이 일하는 것에는 큰 저항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헌신과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아래 장시간 근무를 장려하거나, 추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한풀 꺾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일만 시간의 법칙이 유행처럼 번지며 미친 듯이 일하라는 것을 멋있게 포장하여 수많은 매체들이 앞 다투어 이야기를 하기 까지 했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담대하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11p) 책의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저자의 질문에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정도 답을 할 수 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리고 사람은 원래 일을 해야 하니까.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거절한다. 그리고 함께 거절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필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관습이자 규범 장치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고(20p),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착취를 당하기까지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생산의 현장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참 전, 두 아주머니께서 식당 개업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식당은 인건비 따먹기야!” 지금 생각해보면 저자의 지적에 딱 들어맞는 얘기이다. 어디 식당만 그러할까?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업주는 당당하게 많은 일을 요구하고, 고용된 사람들은 조금 불평이야 할 수 있어도 묵묵히 일한다. 당당하게 착취하고, 기꺼이 봉사수준에 가깝게 헌신(?)하는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자는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를 바로 노동 윤리에서 찾는다. 일 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상황 중에 일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낯설었는데, 응당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동에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문제 제기하는 저자의 담대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가 전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저자는 막스 베버를 인용하며 지나치게 개인화된 노동 윤리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개인의 경제적 성취나 실패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집단의 책임 혹은 구조적인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을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나 의무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고용주의 사업 활동을 소명으로 해석해주는 한, 바로 이런 노동 의지를 착취하는 것은 합법화 되었다고 말한다....빈곤에는 도덕적 의심이 가해진다.”(91p) 일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온전히 노동윤리가 기업 친화적으로만 적용되는 사회를 정확하게 꼬집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커다란 저항 없이도 많이 일하는 상황이 지속 가능한 또 다른 이유를 신성시까지 여겨지는 가족 윤리, 가족 제도에 기반한 임금 노동 구조에서 찾는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가 풀타임 근무의 표준이 되었을 때, 남자 근로자는 집안의 풀타임 가사 노동자였던 여성의 보조를 받는다고 상정되어 있었다. 물론 이 조차도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부양을 위해 훨씬 더 많이 일할 것을 요구 받았고, 그것을 인생 최고의 의무로 받아들여졌다.(255p) 현재의 임금 노동의 구조가 노동 윤리와 가족 윤리와 젠더 분업화에 기반을 두고 설계 되었기에,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자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크게 반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악한 시스템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틈을 내기 위하여 두 가지 제안을 내어 놓는다. 노동시간 단축, 주당 40시간 근로에서 30시간으로 줄이자는 것 그리고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것. 두 가지 모두 상당히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주장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논의가 되어 왔던 내용들이다. 그중에서도 마르크스를 노동 시간 단축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제안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자본론>에서 노동 시간의 단축을 전제로 하여 개인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 중에 협력자로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4p) 개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사업에 관여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그동안 소외문제, 의미 없는 노동 문제로 고통 받았던 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저자는 프롬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가 개인의 자유에 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마도 마르크스라는 인물 자체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편견이 상당히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싶은 느낌이 들었다. 여튼, 마르크스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노동 시간의 단축을 제안했다.) 또한 저자는 기본소득 자체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것을 꼬집고, 기본소득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기본소득은 개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가족이나 가구 구성, 다른 소득 여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고용 여부와 상관없이 지급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소득이 그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게끔 바닥 수준을 정립하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많은 이들이 임금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조건과 상태에 덜 의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228p) 이러한 기본소득에 대한 반감은 지금도 강력하다. 노동윤리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 먹을 수 없다는 바울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저자는 존재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더욱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기본소득이 사람들로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기본소득을 받으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까? 사실 아직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지에 대해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이것을 유토피아적 미래라 말하며 우리가 함께 상상하고, 이것을 더욱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도 구체적인 제안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막연한 상상, 무모한 요구라 할지라도 우리가 함께 하며 정치적 행동을 보이는 것에 대한 상당한 의미가 있음을 저자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지금의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할 수 있게 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현재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를 억압하는 힘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더 큰 위험은 우리가 너무 많이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348p)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그토록 노동 윤리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며 적게 일해야 하고,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만, 저자 역시 일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례 당연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문제제기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나 좋은 노동과 가족이라는 가치를 통째로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것이 근무시간 유연제인데,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회사들에 다니는 근로자들의 경우, 대부분 여가 시간마저도 근무시간에 통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근무를 위해서 혹은 더욱 많은 결과물을 내기 위하여 생겨난 제도들이라면 아무리 이름이 그럴싸해도 결국엔 노동자 개인과 그 노동자의 가족을 통째로 일과 기업에 종속되게끔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서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점이 많이 의아했었다. 이렇게 그럴싸한 문제제기를 해놓고서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아서 말이다. 하지만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노동에 대해서, 많이 일하고, 적게 받는 것에 대해서 별로 질문조차 하지 않고 지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이러한 문제제기가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노동 시간 단축, 기본소득의 지급,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이것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이 일하고 있고, 너무 적게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