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 IVP 모던 클래식스 14
엘리자베스 오코너 지음, 전의우 옮김 / IVP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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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 엘리자베스 오코너. IVP

 

교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회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아예 지역 교회를 떠나 어떤 교회에도 가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그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세이비어교회라면 그렇게 교회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적어도 참고는 할 수 있는 교회가 아닐까 싶다. IVP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서 이 책을 선택한 것만 보아도 이 책을 함께 읽으며 교회를 위해 고민하고, 대화하고, 기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세이비어 교회는 그 규모에 비해서 어마어마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을 읽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감동할 수 있는 예화들,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보다 세이비어 교회가 감당하는 엄청난 예산이 사용되는 선교와 봉사에 대한 이야기들이나, 그로 인한 수많은 회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진 않다. 대신 이 책에는 세이비어라는 지역 교회를 통해 검증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저자 역시 내적여정과 외적여정의 균형을 강조하고,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서로 헌신하며 하나 되는 공동체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세이비어의 여러 사역들이 성령의 음성을 따르기 위하여 쉬지 않고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면서도, 주변의 필요에 민감했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보통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인데, 이것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아니 단지 균형을 넘어 지속적으로 내적으로 외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분투에 가까운 노력을 하는 모습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책 말미에 이렇게 나온다.

 

우리는 배워 가고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변화시킬 필요는 없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사람들 곁에 있으면 된다. 우리 자신에 관해서도,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고 곁에 있어 줄 사람들이 필요할 뿐이다. 은사는 이렇게 끌어내진다....”(277)

 

나는 목사인데,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상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가르치려 드는 자세가 있다. 부인할 수 없다. 이 부분을 보면서 아....라는 탄식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리고 오랜만에 교회에 대한 소망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1950, 60년대의 미국에 있는 한 지역 교회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부족한 모습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이 단지 사역과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들이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보기 아까워 오랜만에 책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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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여성을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과 남성이 사적 영역에 머무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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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 개혁 신학의 젊은 기수 마이클 호튼 시리즈 3
마이클 호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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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렌즈를통해서보는삶의목적과의미 #마이클호튼 #부흥과개혁사

 

신학교 다니던 시절 저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여러 책의 출간과 함께 작가에 대한 평이 나쁘지 않아서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10년쯤 지났는데, 이후로도 저자는 책을 정말 많이 써냈고, 내가 속한 교단이나 교회들 사이에서는 개혁주의의 젊은 기수라는 평을 들으며 점점 유명해졌다. 한 번쯤은 읽어봐야지 했는데, 이제야 그의 책을 처음으로 봤다. 그런데 보니까 1993년도에 쓴 책이니까....저자가 벌써 25년 전에 쓴 책이었다. 아마도 학위를 마치고 책을 쓰기 시작한 때쯤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이 쓰인 시기를 말하는 이유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용에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오는 청년의 씩씩함? 담대함?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느낌은 지금의 일반적인 대한민국 청년의 분위기와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저자는 십계명을 풀어가면서 현대(미국) 세계가 얼마나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맞서 십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율법의 사회적, 신학적, 도덕적 용법에 대해 설명으로 시작하여 열 가지 계명을 차례대로 해설하고, 마지막 챕터에서 율법을 위반한 자에 대한 희소식-칭의와 성화를 다룬다. (당시) 최근의 기사, 문학, 사회 평론 등을 자유롭게 인용하며 현대 사회와 복음주의 교회들이 각 계명들을 어떻게 어기는지를 살피고, 그에 대응하여 나름 무난한 성경 해석과 교리 문답, 특히 루터의 대교리문답과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 문답을 자주 인용하며 십계명에 순종하자 강력하게 권면한다.

 

책 전반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점들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좀 많이. 책 편집이 오래 전이라 그런지 가독성이 조금 떨어지고, 저자가 교리 문답을 인용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저자의 해석이 그저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현대 문화와 교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하여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소개하며 그 둘을 연결 짓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냥 연결만 한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각 계명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편적인 경우가 많았고, 당위적인 차원에서 요구하고 끝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낙태에 대한 저자의 태도이다. 미국 사회가 지나치게 낙태문제에만 골몰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기도 그 문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노동에 대해서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태도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데,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러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계명을 적용하는 내내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욕구를 강박증처럼 느끼는 이 세대에 권리추구보다 우리의 의무를 신실하게 행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일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하지만 억압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밥벌이라도 하면 다행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같았다. 똑같은 권면을 해도 이러한 이해나 공감을 통과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주변에서 개혁주의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를 듣는데, 사실 많이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계속 그러한 분위기 속에 살았기 때문이겠지만....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그런 답답함을 느꼈다. 저자가 막 30이 되었을 때 쓴 책이니 이럴 수도 있겠다. 앞에서 읽은 김용규의 <데칼로그>나 숀 글래딩의 <TEN 10>이 워낙 좋은 책이어서 그런지 그 책들과 저절로 비교가 됐다. 보통 평을 쓰면 무슨 추천사처럼 긍정적인 것만 쓰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만에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을 만났다.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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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 김용규의 십계명 강의
김용규 지음 / 포이에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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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김용규 #포이에마

 

청년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쳐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작년부터 교리문답들과 십계명 관련 책들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김용규의 <데칼로그>는 단연 압권이었다. 이 책은 폴란드의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데칼로그>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때 저자는 키에슬로프스키가 십계명을 해석하는 원리를 존재론적 해석이라 명명한다. 존재론적 해석이란 서양철학사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정립이 되어 온 존재론과, 교부신학 혹은 정통신학을 따라 십계명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탐욕에 종이 된 사람이 존재의 명령에 순종할 때 참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원리로 각 계명을 해석한 것이다.

 

저자는 각 계명들마다 먼저 영화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그 내용을 해석한다. 그렇게 내용을 전개할 때, 플라톤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현대철학자들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인간 이해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십계명 해석을 소개하고, 그러한 논의들을 결합한다. 놀라운 점은 저자가 이러한 해석을 시도하면서 깊이를 더할 뿐 아니라 쉽게 설명하고 흥미까지 더했다는 것이다.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이 책의 원작(?)이 될 수 있는 영화(10....영화가 오래 돼서 그런지 싸다.)까지 사서 볼 정도였다.

 

모든 챕터마다 저자가 성실하게 연구했고,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참 많이 수고를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처음에 제시한 존재론적 해석을 기반으로 각 계명들을 일관되게 해석한다. 각 챕터마다 인간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특히 저자는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얼마나 탐욕스럽게 살아가는지, 돈의 유혹과 억압에 얼마나 많이 노출이 되어있는지에 대해서도 피부에 와 닿게 이야기한다. 거의 모든 계명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와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약하고 악한 모습들을 다루는데, 그중에서도 마지막 계명에서 저자는 부채인간이 되기까지 탐욕에 의해 휘둘리는 인간을 적나라케 보여주며 10계명이 우리를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각 챕터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주장을 요약해서 정리해 놓았고, 150페이지에 걸쳐 저자가 인용한 인물과 전문 용어들에 대한 해설까지 친절하게 더해주었다. 책을 좀 더 기억해보고, 다음에 활용해보려고 책 전체를 요약해보았는데, 사실 아래의 결론만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말걸....하는 생각도 든다.

 

십계명은 결국 단 하나의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때 다른 신이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각종 우상에 불과하고, 나머지 아홉 계명은 단지 1계명에 대한 순차적이고 구체적인 부연 설명에 불과하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구약 성경을 꿰뚫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구원, 곧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죄란 신에게서 돌아선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각종 탐욕에 의한 우상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서는 한결같이 신을 사랑하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쳤고, 십계명은 이러한 신의 의지가 구체화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자유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러한 신적 자유를 부여하기 위하여 계약을 허락한 것이다.”

 

십계명의 해석 뿐 아니라 그것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도 있게, 그리고 재미있게 소개한 이 책,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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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대표작 1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현숙 옮김 / 복있는사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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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공동생활. 본회퍼. 복있는사람

 

본회퍼의 책들이 새롭게 번역이 되어 나왔다고 해서 온라인 서점을 통해 한 번 훑어보았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책의 디자인! 이렇게 책이 예쁘게 나올 수도 있나 싶었다.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좀 찾아보다 1960년대 문익환 목사님께서 번역했던 신도의 공동생활서문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강력하고 매력적인 소개가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처음에는 이다식의 문장으로 옮겨 보았다. 그런데 차츰 그 내용이 너무나 간곡한 권면이라고 느끼게 되면서, 나는 이것을 편지체로 옮기고 싶어졌다.... 사실 이 책은 핑겐발데에 있는 지하 신학교의 학생들과의 공동생활의 결실이요,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 교회를 향하여 주는 극히 구체적이고도 간곡한 권면의 말씀이다믿을 만한 분이 이 정도까지 멋진 소개를 하는데, 하루 빨리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간절한 권면이기에 요약도 경어체로 해보았다.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제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반드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모인 공동체라면 서로의 약하고 악한 모습에 실망할지라도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든든하게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통해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는 가운데 공동체에 주어진 약속을 붙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붙들며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을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합니다. 모두가 전체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어떠한 차별의 논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가능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모든 공동생활의 존폐가 달려 있습니다.

 

함께 있는 날 우리는 하루의 아침을 공동(가족) 기도회로 모일 수 있습니다. 특히 시편을 통해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법,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지, 어떻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지에 대해서 익힐 수 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함께 성경을 읽습니다. 이때 해당 본문을 성경의 전체라는 맥락 아래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무한한 내적 관계들 속에서 예수님의 증거가 좀 더 명료해지기 때문이고, 그렇게 전체로서의 성경을 연속해서 읽어 나갈 때, 우리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속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읽기에 이어 공동 찬송과 공동의 기도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함께 찬송하고 공동의 간구를 반복하면서 개인주의적인 기도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공동의 기도회가 끝나면 우리는 식탁교제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축제와도 같은데, 안식일을 회상하도록 돕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식탁 교제가 나만의 양식이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라도 떡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 중 누구도 굶주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루는 기도와 노동이라는 이중적인 일로 특징지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 각각이 별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고유한 권리를 확보하는 곳에서 기도와 노동이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하루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하루의 모든 생활에 질서와 규율이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저녁 기도의 자리는 공동의 중보기도를 위한 자리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모든 불의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홀로 있는 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정신 요양소가 아닙니다. 자기 도피를 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은 공동체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왜곡시킵니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공동체를 주의해야 하고, 반대로 성도의 교제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있으며 침묵을 배울 수 있는데, 이때의 침묵은 전적으로 말씀을 기다리는 행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침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기도, 특히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원수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은혜받은 죄인의 얼굴로 변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주의할 것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특히 목사라면) 적지 않은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섬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곳마다 불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에 대항하여 진지를 구축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강자와 약자가 생긴다는 것인데, 이러한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악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혀를 훈련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비할 나위 없이 소중한 형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의 소중함을 발견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다양하다는 사실도 발견합니다. 어느 지체라도 소중하지 않은 지체가 없기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체가 생겨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체적인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고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고, 타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섬김이 어렵지만, 약자는 교만을, 강자는 무관심을 경계하며 구체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섬길 때에만 우리의 모든 말들이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 고백과 성찬 경건한 자로서 교제만 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으로서 교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완전히 고독한 외톨이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우리의 죄를 서로에게 고백할 때, 성도의 교제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지고, 십자가로 가는 돌파를 이룰 수 있고, 새 생명으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상대에게 나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죄고백은 아주 좋은 성찬의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형제들과 화해하고, 은혜를 영접하고, 용서와 새 생명을 누립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기쁨은 완전해집니다. 말씀 아래 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은 성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무게감이 느껴진다. 또한 천재 신학자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태도로 말하기 보다는 성도들과 함께 경험했을 구체적이면서도 따뜻한 조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참된 교회, 공동체를 추구하며 그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본회퍼였기에 특별하지 않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어느 하나 버릴 문장이 없었다.

 

요약에서도 나타나지만, 그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으로 모인 모임으로서 서로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것이 아닌, 오직 섬기는 공동체다. 특히 본회퍼는 서로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함께 생활할 때 알게 되는 소소한 일들을 돕는 것을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권면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공동체를 섬겼고, 그리스도를 섬겨왔기에 짧은 말들에도 힘이 느껴졌다. 특히 공동체성을 아름답게 가꾸고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죄 고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은 퍽 인상적이었다. 죄 고백 역시 철저하게 개인의 경건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용서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며,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모임이라 주장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시간들이다.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부끄러운 교회들 가운데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사유했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구기 위하여 분투했던 본회퍼의 책이다. 목숨을 바쳐가며 불의에 항거했던 본회퍼, 그의 진짜 관심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명저이다. 이런 차원에서 <성도의 공동생활>은 강영안 교수님의 소개처럼, 한국의 교회들이 부끄러운 모습들을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천천히 곱씹어 보면서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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