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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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창비.

 

1112,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로 광화문 광장에 100만이 모인 날이었다.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아내와 온 힘을 다해서 나갔다. 종각역에 내려 올라와보니 종로 대로를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조금 걷다 보니 스스로 걷기 보단 떠밀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나와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 뿐 아니라 상당수의 아빠, 엄마들이 어린 자녀들과 손잡고, 혹은 안고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그곳에 나오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을 미리 해놓거나, 아이를 데리고 나오기 위하여 온갖 준비를 했을 것이고, 지하철을 한, 두 번식 갈아타는 수고를 해야 했고, 길바닥에 아이와 함께 앉아 몇 시간씩 있어야 했고, 집에 돌아갈 땐 한 두 시간은 걸어야만 하는 수고까지 각오하며 나온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리고 그들을 이렇게까지 광장으로 몰아갔을까? 부끄러움, 분노, 슬픔, 절망....이 중에 하나이거나, 이 모두 이거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의 저자 엄기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파산한 세계라 부른다. 처음엔 너무 나아간 말이 아닌가 싶었지만, 금방 수긍이 갔다. 개인이 혼자서 노력하며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바깥이 있어야 하는데, 바깥이 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바깥때문에 개인의 존엄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당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저자는 지금, 대한민국을 파산했다고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은 그 바깥의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가 분노했다. 젠틀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저자는 총 3장에 걸쳐 바깥이라는 구조, 시스템이 무너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리셋을 원하는 사람들을 분석하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리셋을 원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리셋을 부르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빼앗긴 존엄과 안전을 되찾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리셋을 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를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세상 가운데 자신을 소진하면서 점점 무기력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악착같이 더 살기 위해 자신의 존엄성을 무시당한 채 조용히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더욱 슬픈 일은 더 이상 소진할 것이 없을 정도로 수고해서 지치고 무기력해진, 비겁해지면서까지 조용하게 된 개인을 두고 이렇게 된 것이 순전히 그들 개인의 문제라 치부한다는 것이다. 부당한 대접을 받고 사는 것도 억울한데, 그렇게 억울하게 된 것도 내 책임이라 하니 절망하거나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절망과 분노를 우울한 모습으로, 어떤 이는 과격한 모습으로 나타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세상의 리셋을 원한다는 거다.

 

저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세상을 한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이야기를 통해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는 근무 중에 업무와 상관없는 인격적 모독을 당한다. 이때 점주는 잠간 상황을 보는 척 하지만 금방 아르바이트생에게 그냥 조용히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길 지시하거나, 오히려 손님을 화나게 했으니, 아니 손님이 화가 났으니 사과를 요구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아니오’, ‘싫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모욕을 선물하는 조직, 사회. 이런 세상에서 억울하면 성공해야 하고, 성공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분을 삭이고 반강제로 자신과 사회를 긍정하며 이겨보려 한다. 그런데 그렇게 노오력하면 노오력할수록 자신은 소진되게 되고,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게 부정당하고,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곳에 존엄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을 담보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천인데, 여전히 세상은 그들을 향하여 비정규직과 정규직이란 구조에 대하여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저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 말만 바뀌었을 뿐, 점점 공고해지는 또 다른 신분제이고, 계급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심지어 우리 사회의 일부 특정 엘리트들의 기득권이 더욱 강화 되고 있는 분위기가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다. 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그들의 안전마저도 위협 한다.

 

무엇인가를 하면 할수록 소진되고, 가만히 있으면 부정당하는 일들을 반복하는 쳇바퀴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크게 두 가지 차원의 제안을 한다. 먼저는 인간의 존엄과 인도주의를 위해 온갖 법적/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면 절대로 자연스럽게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구 사회가 엄청난 전쟁과 학살을 경험하며 깨닫게 된 소중한 교훈 아니겠는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제안은 먹고사니즘에 잠식된 우리의 일상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서로를 기능이 아닌 동료로서, 함께 협력하며 고통을 나누고, 함께 행동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조금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서로를 주체로서 인정하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부터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다시 희망을 볼 수 있고, 잃어버린 자유를 조금씩 확장할 수 있다.

 

한 번은 지인이 촛불 시위를 냉소했던 적이 있었다. 이미 광우병 소고기 사태 때,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분도 절망하고, 또 절망해서 이 세상이 아예 망해버리는 것 말고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112, 저녁 630분이 되었을 때, 그곳에 모인 100만이라는 주체들은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이 이 세상 바깥, 시스템의 주인이라 착각하는 사람을 향하여 함성을 질렀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쉽게 꺼내지 못했던 아니오를 함께 힘을 모아 뿜어낸 것이었다. 그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했고, 너무나 슬펐고, 권력자들로 인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그곳에 나왔던 우리였는데 그 함성 후에 나는 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고, 도무지 희망이 보이질 않아 리셋하자고 모인 그곳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다. 잠간일수 있고, 그것마저 하고 마는 것일 수 있지만, 함께 아니오라고 외치니 스스로 바깥의 주인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말을 듣고, 움직였다.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노력하면 그만큼 보상 받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당하게 존중받는 세상으로 우리가 진입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아니오라는 말로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턱을 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케 보여주고, 진짜 희망을 가져보자고 말을 건넨다. 아직,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진 나에게 참 기분 좋은 책이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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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 동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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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케이시윅스. 동녘

 

근로기준법 제50[근로시간] 1주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1일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일주일 평균 근무시간 40시간.

 

이렇게만 맞춰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사람들이 넘쳐 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파트타임 근무자들이나,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들 할 것 없이 너무 많이 일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있는데, 이것 역시 아주 큰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적건, 많건 너무 많은 시간을 임금 노동에 사용하는 것은 인간됨의 근본까지도 흔들 수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토록 많이 일하는 것에는 큰 저항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헌신과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아래 장시간 근무를 장려하거나, 추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한풀 꺾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일만 시간의 법칙이 유행처럼 번지며 미친 듯이 일하라는 것을 멋있게 포장하여 수많은 매체들이 앞 다투어 이야기를 하기 까지 했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담대하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11p) 책의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저자의 질문에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정도 답을 할 수 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리고 사람은 원래 일을 해야 하니까.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거절한다. 그리고 함께 거절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필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관습이자 규범 장치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고(20p),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착취를 당하기까지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생산의 현장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참 전, 두 아주머니께서 식당 개업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식당은 인건비 따먹기야!” 지금 생각해보면 저자의 지적에 딱 들어맞는 얘기이다. 어디 식당만 그러할까?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업주는 당당하게 많은 일을 요구하고, 고용된 사람들은 조금 불평이야 할 수 있어도 묵묵히 일한다. 당당하게 착취하고, 기꺼이 봉사수준에 가깝게 헌신(?)하는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자는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를 바로 노동 윤리에서 찾는다. 일 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상황 중에 일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낯설었는데, 응당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동에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문제 제기하는 저자의 담대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가 전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저자는 막스 베버를 인용하며 지나치게 개인화된 노동 윤리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개인의 경제적 성취나 실패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집단의 책임 혹은 구조적인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을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나 의무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고용주의 사업 활동을 소명으로 해석해주는 한, 바로 이런 노동 의지를 착취하는 것은 합법화 되었다고 말한다....빈곤에는 도덕적 의심이 가해진다.”(91p) 일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온전히 노동윤리가 기업 친화적으로만 적용되는 사회를 정확하게 꼬집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커다란 저항 없이도 많이 일하는 상황이 지속 가능한 또 다른 이유를 신성시까지 여겨지는 가족 윤리, 가족 제도에 기반한 임금 노동 구조에서 찾는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하루 8시간, 5일 근무가 풀타임 근무의 표준이 되었을 때, 남자 근로자는 집안의 풀타임 가사 노동자였던 여성의 보조를 받는다고 상정되어 있었다. 물론 이 조차도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부양을 위해 훨씬 더 많이 일할 것을 요구 받았고, 그것을 인생 최고의 의무로 받아들여졌다.(255p) 현재의 임금 노동의 구조가 노동 윤리와 가족 윤리와 젠더 분업화에 기반을 두고 설계 되었기에,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자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크게 반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악한 시스템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틈을 내기 위하여 두 가지 제안을 내어 놓는다. 노동시간 단축, 주당 40시간 근로에서 30시간으로 줄이자는 것 그리고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것. 두 가지 모두 상당히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주장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논의가 되어 왔던 내용들이다. 그중에서도 마르크스를 노동 시간 단축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제안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자본론>에서 노동 시간의 단축을 전제로 하여 개인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 중에 협력자로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4p) 개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사업에 관여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그동안 소외문제, 의미 없는 노동 문제로 고통 받았던 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저자는 프롬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가 개인의 자유에 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마도 마르크스라는 인물 자체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편견이 상당히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싶은 느낌이 들었다. 여튼, 마르크스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노동 시간의 단축을 제안했다.) 또한 저자는 기본소득 자체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것을 꼬집고, 기본소득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기본소득은 개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가족이나 가구 구성, 다른 소득 여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고용 여부와 상관없이 지급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소득이 그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게끔 바닥 수준을 정립하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많은 이들이 임금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조건과 상태에 덜 의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228p) 이러한 기본소득에 대한 반감은 지금도 강력하다. 노동윤리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 먹을 수 없다는 바울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저자는 존재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더욱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기본소득이 사람들로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기본소득을 받으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까? 사실 아직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지에 대해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이것을 유토피아적 미래라 말하며 우리가 함께 상상하고, 이것을 더욱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도 구체적인 제안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막연한 상상, 무모한 요구라 할지라도 우리가 함께 하며 정치적 행동을 보이는 것에 대한 상당한 의미가 있음을 저자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지금의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할 수 있게 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현재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를 억압하는 힘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더 큰 위험은 우리가 너무 많이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348p)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그토록 노동 윤리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며 적게 일해야 하고,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만, 저자 역시 일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례 당연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문제제기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나 좋은 노동과 가족이라는 가치를 통째로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것이 근무시간 유연제인데,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회사들에 다니는 근로자들의 경우, 대부분 여가 시간마저도 근무시간에 통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근무를 위해서 혹은 더욱 많은 결과물을 내기 위하여 생겨난 제도들이라면 아무리 이름이 그럴싸해도 결국엔 노동자 개인과 그 노동자의 가족을 통째로 일과 기업에 종속되게끔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서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점이 많이 의아했었다. 이렇게 그럴싸한 문제제기를 해놓고서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아서 말이다. 하지만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노동에 대해서, 많이 일하고, 적게 받는 것에 대해서 별로 질문조차 하지 않고 지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이러한 문제제기가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노동 시간 단축, 기본소득의 지급,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이것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이 일하고 있고, 너무 적게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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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난 하나님 -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하나님을 말하다
강호숙 지음 / 넥서스CROSS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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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난 하나님-한국교회에서 여성의 하나님을 말하다> 강호숙.

 

합동측 신학교에서 여성()학을 다년간 가르쳐 온 강호숙 교수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토대로 책을 냈다. 그동안 자신이 여성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로부터 그동안 남성 중심적 혹은 가부장적으로 읽혀왔던 성경과 교회의 뒤쳐진 성윤리와 기독 여성의 일상과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냈다. 워낙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고, 남성 위주의 시각에 젖어있는 많은 교인들을 독자로 삼는 책이다 보니 쉽고,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동성애 반대, 혼전순결 말고는 성에 대해서 잘 가르치지 않는 상황이기에 이 책의 내용들은 어느 정도 유익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여성 목회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사역들이나, 성폭력이나, 추행과 같은 일을 당했을 때, 신고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나, 이와 관련하여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은 많이 공감할 수 있었고, 남성 목회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저자가 주장한 부분들에 대해서 동의가 되고, 나름 필요한 내용들이라 생각을 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여성학을 신학적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했지만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과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책에서 구분한 남성과 여성의 특징들을 받아들인다든지, 사사 드보라를 두고 돌봄과 사랑이라는 모성적 리더십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고 언급한 부분은 잘 납득이 되질 않았다. 여성학이 우리에게 준 큰 유익이 여성을 그동안 주어져 있던 특정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 것이고, 사람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일 텐데, 오히려 그러한 시각을 둔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쓰인 배경이 되는 교회들이나, 학교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알기에, 또한 그러한 분위기에서 여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하고, 그것을 위하여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믿기에, 이 책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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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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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책을 읽는 데 무려 두 달이나 걸렸다. 정말 헉헉 했다. 책이 어렵지는 않은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았다. 몇 번은 오가며 반복해서 본 것 같은데, 여전히 잘 넘어가질 않았다. 대강이라도 정리를 해보고 싶었는데, 그냥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몇 개 추려보는 정도로 해보았다.

 

1. “제주의 관점-페미니즘은 수많은 타자들의 다른 목소리중 하나이다.”

-> 이 책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제주도민이 육지에 있는 도시들에 가는 것이 쉽지 않고, 그중에서도 대전이 특히 더하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고, 저자의 질문에 생각해보려 해도 짐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페미니즘이 많은 사람에게 그렇다. 나한테도 그랬고. 여성주의를 조금씩 배우면 배울수록 나란 사람은 이웃사랑과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걸 확인이 된다.

 

2.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편안할 수는 없다. 다른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 페미니즘은 배우면서 확 달라진 게 있는데, 생활이 불편해 졌다는 것. 하다못해 함께 하는 여자 청년들에게 인사도 버벅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걸핏하면 외모 칭찬을 했는데, 그걸 빼고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하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나도 모르게 불쑥 너 많이 예뻐졌다.’ 혹은 너 많이 살 빠졌다.’ 와 같은 말이 툭툭 튀어나와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경우가 있다.

 

3.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 답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왜 그렇게 취업하려고 노력하니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 내가 이 부분을 읽고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여자 전도사님들을 만날 때면 가끔 이렇게 물었는데....“전도사님은 왜 신학대학원에 왔어요?” 그럴 때면 항상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전도사님이 여기에 온 이유하고 같아요.” .

 

4.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 불편해도 생각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려고 애쓰다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간다. 바로 옆에 있는 이웃조차 억압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아는 것은 믿는 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돌이켜서 영생을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5.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며칠 사이 미쓰 박논쟁이 치열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는데, 페미니즘 관련하여 논쟁이 일 때면, 나름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자신의 경험, 지식을 기준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어김없이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여과 없이 드러낼 때가 많은데, 문제는 누군가 그런 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그들은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쓸데없이 논쟁이 확대되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페미니즘은 지배 이념이 아니고, 대중매체도 그것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6. “스위트 홈과 자녀 양육이 소중하고 성스러운 일이라면 그것은 책임이라기보다 권리일 것이고, 남성들도 앞 다투어 참가해야 한다. 그러나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은 노동 시장에서 남성들이 듣는 가장 모욕적이고 비참한 욕이다.”

-> 많은 일들이 성별화 되어 있는데, 가사와 돌봄의 일이 더욱 그리하다. 나 역시 페미니즘을 배워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아내의 영역에 침범? 하고 있는데, 하지 않던 일을 하나 시작하는 것만 해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본다. 난 가정 일이 정말 신성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보니 내 생각과 나의 일상 사이에 괴리감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7. “...‘페미니즘이 옳긴 하지만, 시기상조다 라거나, 현실적이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 교회에서 페미니즘 모임을 시작한 이후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다. 참 신기하다. 저자가 들은 얘기들을 거의 비슷하게 들었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런 모임은 오히려 공동체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얘기....내가 교회에서 수많은 성경공부, 여타 모임을 인도해보았는데,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보았다. 성경을 인용하지 않아서 그런건가....

 

8. “...여성에게는 걸레라는 낙인과 추방이 기다린다. 남성이 더럽다고 간주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몸을 씻지 않아서거나 돈이나 권력 투쟁에서의 부정부패 때문이지, 섹스로 인한 규정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에게 더럽다는 의미는 대개 성적인 측면이 연상된다.”

-> 처음에 이 부분을 읽고서는 헛웃음이 나왔는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건 참 심각한 문제였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이 생각보다 깊게, 짙게 이 사회와 남자들에게 배어있다는 걸 적나라케 보여주는 고정관념이었다.

 

9. “‘남자는 참을 수 없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참는 남성은...폭발 직전일 것이다.”

-> 이런 얘기는 교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던가? 나도 이런 비슷한 얘기를 예전에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저자의 말처럼 여자들은 밤거리나 여행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등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해야 할 것이다.

 

10.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 사회와 나는 연속선상의 한 몸인데, 어느 지점에서 그 몸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 사적인 영역으로부터 공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내가 사는 거의 모든 삶의 현장에 페미니즘이 적용되지 않을 곳은 없었다. 물들어 올 때, 노를 저어보자고 했던가?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유행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 다시 이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올 한 해 나름 시간 쪼개서 배우고, 실천해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다. 그래도 이만큼 유익한 공부가 흔치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만큼 생각을 급진적으로 뒤흔드는 텍스트가 많지 않고, 생활 전반을 바꾸라고 도전하는 공부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찾자면 성경, 기독교가 내 인생에 그런 역할을 했는데, 페미니즘이 서른 중반을 넘어 마흔을 향해 가는 나를 향해 변화하라고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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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뒷조사 복음서 뒷조사
김영화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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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하진 않더라도 쉽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마태복음 개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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