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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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있는사람

 

창조냐? 진화냐?” 라는 식의 질문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 질문이 사용되는 경우는 어느 한쪽의 정해진 답을 요구 하는, 마치 사상 검증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참 많다. 먼저는 문자, 근본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모습들이다. 만약 이때 답을 하면서 진화에 대한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어떻게 인류의 조상을 원숭이로 볼 수 있냐는 식 반응과 함께 경멸의 눈초리를 받을 수 있고, 심지어 불신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진보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거나,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태도인데, 누군가로부터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경우 더 이상 대화하기 힘든 무식한 사람이라는 식의 냉소나, 조롱을 하는 경우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책의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통해 과학과 종교의 이러한 잘못된 전쟁 서사를 바로 잡고, 더욱 풍성한 시각으로 우리의 삶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과학과 종교부분의 석좌교수로서 오랜 시간 이 부분을 놓고 치열하게 연구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여러 권의 전문적인 저술들을 내놓았고, 이 책은 해당 주제에 대한 입문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이 비록 입문서라 할지라도 충분한 연구와 묵상 끝에 그 정수들을 모아 놓은 것인 만큼 과학과 신앙에 대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총 아홉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독단주의는 과학과 종교 어디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우주의 기원’, ‘다윈과 진화론’, ‘인간의 영혼이라는 묵직한 주제들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다루면서 물리학, 생물학, 뇌신경과학 등의 학문이 결코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 저자는 자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아인슈타인, 다윈 등의 과학자들도 신앙을 배척하는 독단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시에 도킨스, 히친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은 과학자라는 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여러 저술들을 통해 주장하는 내용들은 전혀 과학적이라 부를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어서 저자는 특정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안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이 삶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한 과학으로 인간의 기술적 패턴을 설명하는 것은 쉬울 수 있으나, 그것을 규범화 하거나 윤리의 근거로 삼으려 할 땐 필연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진화적 과거에 대한 모든 과학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을 보고 내용을 미리 짐작한 사람들이 있다면, 위의 내용을 보고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얼핏 이 책은 창조과학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소위 창조과학에 대한 언급은 아주 살짝 할 뿐이다. 지구가 6천년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18세기에 밝혀진 것이고, ‘과학적 창조론이라는 주장은 기독교 신학 역사 중 꽤나 근래에 들어서야 나타난 믿기 힘든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기독교 신학 정통에서도 창조과학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이 부분을 짧게나마 언급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진화라는 주장을 잘 들어보지 않고, 과학과 신앙(신학)이 절대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지레 신앙과 과학의 잘못된 전쟁 서사에 모든 논쟁을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들은 저자의 말처럼 그야말로 아름답고 풍성한 우주를 초라하게 보이게 만드는 렌즈가 될 뿐이다.

 

저자는 책 전체를 포괄할만한 예화를 하나 인용한다. “이 주전자가 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는 에너지가 가해져서 물의 온도를 끓는점까지 높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차를 마시려고 불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이 둘은 다른 대답이다. 그러나 둘 다 옳다.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한쪽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과학과 신앙이 서로를 보완하며 좀 더 완벽한 (세상을 보는) 렌즈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상대방 혹은 주변의 상황을 한 가지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관계와 생각들을 빈곤하게 하는 지를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가끔 이런 얘길 하셨다. “하나님은 진리를 흩어 뿌려 놓으셨어.” 이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 책은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경도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한쪽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한다. 나도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필요하고, 서로가 경청해야 할 것을 어렵지 않게 설명하며 권하는 이 책을 다른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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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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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다. 1장을 읽으면서, 아니 읽기 전부터 기대하면서 읽었는데....조금 박하게 감상평을 남기자면 이런식으로 쓰자면 72년생 김xx 62년생 김xx 52년생 김xx 계속 쓸 수도 있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이 책에 해당 되는 것 같다. 왜 소설을 무슨 탐사보도 같이 썼는지 모르겠다. 동시대의 여성들의 평범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쓰려고 한 것 같은데, 차라리 에세이와 같은 방식의 글이면 어땠을까 싶다. 페미니즘이 대유행하는 시기였기에 책이 엄청 팔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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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신학
강남순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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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신학 : 여성, 영성, 생명>은 감신대에서 여성주의 신학을 가르쳤고, 지금은 텍사스의 한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강남순의 페미니스트 신학 관련 논문 모음집이다. 2002년도에 나왔으니 감신대에서 교수직 문제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한참 싸우기 전에 나온 책이라 할 수 있다. 논문 모음집이어서 그런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갖는 저항적이고 실천적인 특성들이 생생하게 다가오기 보다는 딱딱하고 현실감이 조금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만약 비슷한 주제로 그 문제를 겪은 2006년 뒤에 다시 썼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글들이 나올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총 열 네 편의 글을 통하여 페미니스트 신학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여기에는 페미니스트 신학의 쟁점, 근대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 폭력, 가정, 여성 목회, 성경 해석 등의 다양한 주제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주제들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고 핵심들만 짧고, 간단하게 다룬다. 그렇다보니 각 주제에 대한 깊은 논의를 하기 보다는 각 주제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통해 페미니스트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나는 14개의 소논문들 중에서 열두 번째 주제 기독교적 덕목의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화파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특히 저자는 그람시, 푸코 등을 인용하며 한국 교회가 가부장제적 복종을 순종이라는 기독교 핵심 개념과 혼용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폭력적인 복종의 요구를 아름다운 자발적 순종으로 포장해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남성 중심적 교회에 스스로를 종속시켰다.

이 부분이 정말 공감이 갔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저자가 지적한 부분들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몇몇 여성분들의 적극적인 반발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에 조금은 놀랐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여성이라고 전부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성차별 문화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소극적으로는 이용당했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폭력과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인내, 순종, 사랑이라는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었고, 저자의 지적처럼 성차별에 반대한다는 당연한 구호조차도 반교회적, 반가정적 발언으로 취급당하는 경우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성급한 판단일 수 있으나 남성들도 아니고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성차별을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동안 폭력적인 생각과 행동들을 꾹 참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페미니즘이 교회 안에서도 그만큼 유행한다는 것이고, 페미니즘이 그만큼 교회에서 그동안 가르쳐온 내용들과 부딪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답을 제시한다. 물론 조금은 지루하고, 딱딱할 수 있지만, 페미니스트 신학이 궁금하다면 참고해 볼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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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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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는 깜짝 놀랄 정도로 책이 얇다.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이란 말이 주는 뉘앙스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습이 왜 이렇고,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본문에도 없고 심지어 어떤 참고자료도 붙여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불친절한 책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짧지만 소책자에 가까운 이 책에 담긴 짧은 이야기만으로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일상에서 분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예배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는 집에서, 먹고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상과 종교적인 행위가 구분이 되기 힘들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푸블리우스라는 한 사람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경험한 짧지만 인상적인 예배 이야기 한 편을 통해서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워낙 많은 사람들의 평을 읽었고,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었기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이야기가 워낙 짧은데다 어려울 것도 없고 지극히 평범해서 금방 읽고 조금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게 뭐지? 솔직히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1세기 교회의 예배 이야기>라는 제목이 너무 거창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내가 왜 그렇게 이 책을 평범하게 읽었고, 조금은 실망스럽게 읽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선은 푸블리우스가 경험한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어쩌면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있고, 기도를 하고, 찬송도 하고, 2부 순서처럼 교제의 시간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친한 사람들을 초대하거나, 내가 초대 받아 가서 함께 즐겁게 교제하는 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예배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일상도 크게 특별해 보이지 않았는데,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크게 색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고, 새로운 통찰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평범한 예배와 일상의 친교의 모습이 합쳐지는 것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집에서 가족들과 예배하거나, 가끔 교회의 소그룹 멤버들이 예배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러한 모임들은 엄연히 주일 11시 오전 예배’로 대표되는 소위 '공예배'에 그 중요성을 비교하기 어렵다. 삶이 예배이고, 가정교회를 추구하고 표방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분명 교회 건물에 모여서 목사를 스피커로 두고 다른 여러 격식을 차린 예배 모임이야 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그야말로 성수주일의 핵심이 아니었던가? 그만큼 예배의 자리는 일상과 특별하게 달랐고, 더욱 거룩해야 하는 자리였다. 예배를 목숨 걸고지켰던 만큼 그러한 예배의 모임은 점점 일상의 모습과 달라졌고, ‘평범할 수 없는 모임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점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명시적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삶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일상을 예배화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어떤 친교 모임에서 환대를 받고, 서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중에 하나님을 높이고, 그러한 중에 서로에 대한 끈끈한 책임감을 엿보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푸블리우스가 경험하는 예배와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있는 예배의 자리와 일상의 자리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예배의 자리도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푸블리우스가 경험한 예배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에 걸쳐 전도 집회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많은 교회들의 예배가 그들이 부르짖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과 얼마나 배치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몇 번식 곱씹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지만, 반복해서 이 책을 읽으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예배와 나와 교회의 예배를 비교하며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책이 얇아 다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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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3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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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IVP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IVP 모던 클래식 시리즈 중에서 세 번째 책이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기독교 사회참여>의 고전이라 알려져 있는 이 책은 시편의 매력적인 한 구절을 제목으로 쓰고 있을 뿐 아니라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웃으며 서로를 안고 있는 사진으로 표지를 디자인했다. 모던클래식에 들어갈 정도의 책이라는 점, 그리고 제목과 멋있는 디자인, 그리고 평판.... 많은 점들이 책을 집어 읽고 싶게끔 만들었다.

 

이 책은 저자가 1981년 네덜란드의 자유대학에서 열린 카이퍼 연속 강좌를 했던 내용들을 다듬어 출판한 것으로, 개혁주의 전통에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강변한다.

 

1장은 개혁주의 노선에는 초기부터 세계 형성적 기독교의 면을 강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세계 형성적이란 신자들이 내세 지향적인 신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세속 사회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2장은 근대 사회가 폭력을 행사하여 얻은 자유위에 세워져 있고, 지금도 일부 권력자들이 합법적인 폭력과 억압을 통해 대다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밝힌다.

 

3장은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변혁하고자 개혁신학과 해방신학의 통합적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더욱 큰 관점이란 다름 아닌 샬롬의 관점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모든 관계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현실을 볼 때 너무나 큰 문제들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4장에서 6장까지를 통해 불평등을 심각하게 보여주는 빈곤의 문제’, 세계를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게 하는 민족주의의 문제’, 절대 다수의 시민들을 아름다움에서 격리시켜버린 도시의 문제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7장과 8장에서 예배와 학문의 주제를 통해 지금까지 개신교 진영의 예배와 학문이 교회, 성도들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반성한다. 이어서 담대한 도전을 하는데, 선포 중심의 예배를 좀 더 카톨릭화 해야 한다는 것과 실천 지향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현재의 선포 중심의 예배가 성례전적인 면을 많이 잃어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소망마저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과 이웃을 향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은 학문들은 교회가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샬롬의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격리시킨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책에 대한 칭찬이 워낙 대단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제목과 표지가 매력적이라 잔뜩 기대를 하고 봤으나, 기대만큼 만족스럽진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저자의 주장이 최근 성서학자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자주 읽고 접한 주제이다 보니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기독교 철학자로서 빈곤과 민족주의, 도시의 문제가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 즉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있다는 분석을 잘 했지만 다른 사회학 책들이 보여주는 치밀한 분석이나 구체적인 예들을 다양하게 제시하진 않았다. 물론 저자는 처음부터 책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다루지 않겠다고 말을 했지만, 굵직한 문제들을 조금은 지루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이 책이 30년도 전에 출간이 되었으나 여전히 급진적(개신교 진영에서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으로 다가오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배와 학문에 대한 저자의 일갈이었다. 선포 중심의 예배, 실천에서 동떨어진 학문 추구가 초래하는 결과는 생각보다 끔찍한데, 역설적으로 공허한 메시지를 양산하게 했고, 결국 공적인 예배와 삶 전반에 기쁨과 소망을 약화시켜 영적인 힘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너무나 동의가 되고,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다. 말씀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자기주장만 가득한 설교가 얼마나 많고, 성찬을 비롯한 여러 성례전적 요소들을 대거 축소시키며 사라진 기쁨과 소망을 찬양과 기도(라고 적었지만 노래와 자기 암시에 가깝다)로 메꾸면서 이웃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종교 행위만 남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는 저자가 명문화하진 않았지만 모두 목회자 중심의 목회,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틀에 갇혀 성도들에게 그 틀을 강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까지 차단하는 경우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조금은 딱딱하고 지루했지만, 저자는 개혁신학의 범주 안에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비전을 전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주장은 마음을 움직인다. (나와 같이) 개혁신학의 범주에 있으면서 다른 신학과 신앙에 대해 접할 기회가 거의 없거나 적었던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고, 특히나 개혁 신학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 읽어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도 예쁘고, 내용도 묵직한 만큼 집에 한 권쯤은 있어도 좋은 책,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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