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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 성경신학적으로 바라본 우상숭배와 하나님 형상의 의미
그레고리 K. 비일 지음, 김재영 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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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구약사용’, ‘신약 신학’, ‘성전 신학’ 등으로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신약학자, 그레고리 빌의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 We become what we worship’. 작가는 이번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명제를 중심으로 우상숭배와 우상숭배자의 관계를, 하나님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와의 관계를 구약성경, 유대문헌,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간단 요약

 

그레고리 빌은 루터가 정의한 우상숭배를 약간 바꾸어 이렇게 정의한다. “궁극적인 안전을 위해 당신의 마음이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그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다. 오직 마음의 신뢰와 믿음이 하나님도 만들고 우상도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 혹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기로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인간에게 심판을 내리셨고, 그 심판은 다름 아닌 인간이 섬기는 우상을 닮아가는 것이었다.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창조주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실패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피조물의 말을 들으면서 심판을 자초했다. 놀라운 점은 피조물을 숭배하면서 그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의지했던 피조물을 닮아갔다는 점이다. 아담은 죄를 전가하고, 거짓을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하는 마귀를 닮아갔다.

모든 우상 숭배의 뿌리와도 같은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동시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사건으로 발전하고, 금송아지를 숭배한 사건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눠진 뒤에도 더욱 편만하게 되었다.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금송아지’를 닮아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고’, ‘(마음이)완강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이 있었지만 그 영광의 형상을 피조물의 것으로 바꾸어버렸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집단적 아담’의 사명을 뒤로한 채, 허무하고 헛된 형상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스스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선지자들이 우상 숭배 때문에 심판 당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눈’, ‘코’, ‘입’과 같은 감각기관을 사용하여 조롱하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이 지각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의 마음을 점점 둔하게 만들어 그들을 그들이 섬기는 우상과 같은 상태로 만드셨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유대문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신약 성경에 이르러서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아담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해당하는 범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복음서에서 나타나듯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을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처럼 마음이 굳었고, 목이 곧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맹인이 되어 눈은 뜨고 있었지만 볼 수 없는 맹인과도 같았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도 그들의 조상처럼 그들이 섬기는 우상처럼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 지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했고,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로마서 1장 20절 – 28절이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우상을 숭배한 사람들은 1차적으론 자신들이 만들고 섬기는 우상을 닮아간 것이고, 더욱 근본적으론 우상의 뒤편에 숨어 있는 마귀를 닮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무서운 방법으로 심판하신 하나님 때문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뿐 아니라 사도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우상 숭배자가 우상을 닮아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제를 전한다. 특히 들으라!’는 명령을 반복하는 것, 그들의 얼굴과 이마에 ‘짐승의 이름’이 있는 것, 그들을 666이란 숫자로 보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우상과 같아 질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우상을 닮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레고리 빌은 이 주장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 놓여 있는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상황을)뒤집는 은혜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자들에게 볼 수 있게 해주셨고,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핑계할 수 없게 보여주셨다. 신약의 저자들은 한 결 같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겨 우상과 같이 되어 우상과 함께 멸망당할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감상평

 

신대원에서 관심을 두고 공부했던 부분이 구약의 정경적 해석이었다. 특히 이사야서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해야 하는 지에 대하여 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있다. 정경적 해석, 혹은 정경적-문맥적 해석은 참 흥미롭고, 매력적인 방법이었다.

우선은 이 방법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기에 신앙을 북돋았다. 또한 특정 주제가 구약의 한 본문에서 신약으로 이어진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은 계시가 발전한다는 큰 해석적 틀과 부합하며 성경을 보는 재미를 더했다. 예를 들자면 ‘돈’이라는 주제, ‘심판’이라는 주제, 그레고리 빌이 다루었던 ‘성전’이나 ‘우상숭배’와 같은 주제들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주제라 할 수 있겠다.

저자가 직접 밝히는 이 책의 해석학적 접근법에 대한 부분을 직접 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이 연구의 기저에.....중요한 전제는 신구약성경 전체가 신적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관점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음을 의미한다....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는 인간 저자들을 통해 전달된 신적 저자의 의도가 현대의 독자에게도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최근에는 이러한 연구를 전형적으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용어로 언급하는데....”

 

그레고리 빌은 성전 신학에서 그 해석적 방법으로 ‘성전’이라는 주제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제시가 되고, 발전 되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성전’이 에덴동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스스로 그 임재의 장소에서 쫓겨난 인간들을 위하여 어떻게 ‘성전’을 회복하시고 확장하시어, 마지막 때에 완성하시는 지를 수많은 성경의 구절들을 치밀하게 주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하는 지를 추적하여 설득력 있으면서도 읽는 이들이 압도당할 정도로 장엄하게 서술했다.

 

이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를 읽으면서 성전 신학을 읽는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주제만 ‘성전’에서 ‘우상숭배’로 바뀐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동시에 ‘성전신학’을 이 책이 보충하며 성전을 확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예배자들로 채워가고 계신다는 내용을 보충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요약에서 본 것처럼 이 책의 주제는 ‘사람은 무엇을 예배하든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것이고, 저자는 이 주제를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하여 차근차근, 세밀하게 증명해 간다. 읽으면서 주제 자체가 주는 통찰에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주제 자체보다는 저자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본문을 하나, 하나 끄집어 주해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하는 지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정말 탄복할 정도였다. “이 본문이 그러한 의미로 읽히는구나!”, “이 주제가 신약으로 넘어와 이렇게 발전하는구나!” 하면서 감탄했던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책은 전체 분량의 2/3 이상을 우상숭배자가 자신이 만든 우상을 닮아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하고, 나머지 1/3 정도를 서론과 방법론, 그리고 전체 주제의 절반에 해당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상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에 할애한다. 그러다보니 저자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을 닮는 양상과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서술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아주 치밀하게 추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러한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사랑과 공의의 성품 때문에)‘보고, 듣고, 느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닮아가는 지를, 혹은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지를 더욱 연구해 보아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쉽지만, ‘정경적-문맥적’해석 혹은 ‘상호텍스트성’에 대하여 처음 듣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멸망을 향하든지, 회복을 향하든지, 사람들은 자신이 숭상하는 것을 닮아간다.’ 라는 이 책의 주제 자체만으로 이 책은 붙잡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워낙 깔끔한 번역과 보기 좋은 편집으로 책을 읽는데 참 편안함이 있다. 또한 이 방법론이 아주 어려운 해석적 툴은 아니기에, 이 책으로 익숙해 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탁월한 책이다. 다소 어렵긴 하지만 혼자 보기 아까운, 아니 솔직히 혼자 보고 설교 하고 싶은 그런 좋은 책이다.^^ 이러한 점에서 많은 목회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고, 우상숭배라는 주제로 한 번쯤 고민해본 성도라면 읽고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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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협동조합 - iCOOP 생협 2015년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엮음 / 알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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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책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소수에게 자본이 쏠려 있는 세상에서 1인 1표제의 민주주의는 사기나 마찬가지이다.” 1인 1표에 이르기까지도 엄청난 희생들이 뒤따랐다. 대통령도 내 손으로 뽑고, 국회의원도 내 손으로 뽑고, 지역의 단체장들과 의원들까지도 내 손으로 뽑았다. 큰 권리이고, 소중한 권리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결코 평등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정확하게 뭐가 불평등한지, 감이 오질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21세기 자본’을 읽으면서 왜 그런 ‘감’이 오질 않는 지에 대한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돈이 없으니 돈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감’이 없는 것이고, 그 돈으로 얼마나 큰 ‘불평등’이 발생했고, 그것이 점점 커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언론이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실은 1인 1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 제도가 아니라, 1주당 1표에 해당하는 기업들의 세상에 훨씬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해당 주식을 더 가지고 있으면 더 큰 권리를 갖는다. 이상한 건, 권리가 커져도 의무가 동시에 커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

 

이러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조금씩 궁금점이 생기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찾고 싶어졌다. (목사님께서 ‘경제공동체’에 대한 언급을 해주신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그러한 과정 중에 알게 된 것이 ‘협동조합’이고, ‘입문 협동조합’이란 책이다.

이 책은 머리말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1차적으로는 icoop 생협에 지원하는 입사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쓰였다. 시험공부용으로 나온 책이다. 그리고 나같이 ‘협동조합’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로 나온 책이기도 하다.

 

요약

이 책은 전체적으로 크게 세 파트로 구성이 되어있다. “1부. 협동조합을 배우다.”, “2부. 생협의 운영과 재무”, “3부. 아이쿱 생협을 배우다.”. 1부에서는 협동조합의 정의와 그 기원과 원리. 그리고 세계적인 협동조합의 사례와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역사를 다룬다. 2부에서는 협동조합의 구체적인 조직운영과 경영, 그리고 재무화계의 이해를 돕는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icoop 생협의 설립과 발전 방향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한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협동조합의 관심자들을 대상으로 집필하기도 했지만, 우선적으로 지원자들 ‘시험대비용’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나같이 ‘생협 지원자’가 아니라, 단순 협동조합 관심 자들에게는 1부에 나오는 협동조합에 대한 정의. 설립의 배경과 역사 속 발전과정, 세계와 우리나라의 사례들만 살펴보더라도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우선 저자는 협동조합을 소개한다. 협동조합이란 무엇인가? ‘조합원이 소유한 사업체’를 말한다. 협동조합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이다. 더 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이 정의만큼 간단하고 분명하다. 또한 ‘협동조합’을 기존의 ‘주식회사’의 차이점을 통해서 협동조합이란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

 

*협동조합의 목적 – 조합원 공통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키고 생활의 질을 향상하는 것

*통제 방법 – 1인 1표 의결권. 운영과 소유가 원칙적으로 일치. 유한책임과 유한 권리

 

*주식회사의 목적 – 기업의 비전 실현과 함께 이윤을 실현

*통제 방법 – 1주 1표의 의결권. 운영과 소유의 분리. 유한책임과 무한권리 가능

 

여기에서 협동조합이 갖는 중요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이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적 사명을 감당한다고 말은 하지만, 공익을 주주들, 소유자들의 이익과 함께 추구하는 것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경우엔 소유와 운영을 (원칙적으로) 일치시킴으로서 조합원 공통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려 한다. 즉,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리느냐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개인과 공동체의 필요를 얼마나 충족시키고, 생활의 질을 얼마나 향상시키는 지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협동조합의 정의와 주요 특징을 설명한 뒤, 저자는 전 세계에서 유명한 협동조합의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특징, 현황, 영향력 등을 말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스위스의 ‘미그로’,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 ‘FC바르셀로나’, 덴마크의 여러 협동조합들이 있다. 이들의 규모는 협동조합에 생소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데, 직원들의 규모가 수만 명에 달하고, 기업 전체 규모로 보더라도 각 나라에서 10위권에 드는 협동조합들이 다수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협동조합의 역사나, 규모, 운영의 노하우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이러한 협동조합의 발전은 (특히 스위스. 덴마크 등의 나라) 한 나라의 국가 경제를 건전하게 하는 것에 큰 기여를 했다.

 

저자는 이어서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역사화 현재를 개괄한다. 1920년에 있었던 물산장려운동과 소비조합과 원산 노동자 파업과 소비조합의 사례가 대표적이고,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탄생한 ‘농협’, ‘수협’, ‘축협’등과 ‘풀무생협’, 노동운동과 종교들을 통해 발생한 다수의 ‘협동조합’들이 있었다. 이후 1990년에 들어서 여러 소규모 협동조합들을 통합하고, 선진국들의 협동조합 경영의 기법들을 수용하면서 식품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사업단위의 성장과 지역사회와 결합한 다양한 조합원 활동들이 활발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감상평 - 최근 주변에서 ‘아이쿱생협’, ‘한살림’등과 같은 협동조합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저 우리 유기농 농산물들을 사먹을 수 있는 곳 정도로만 알았다. 도대체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산자도 잘 되고, 소비자도 잘 되게 하려고 만든 사업체란다. 얼마나 그 취지가 달성되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얼마나 멋진 의도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까 생각은 해봤는데, 책을 통해 확인해 보니, 이미 그러한 협동조합에 속한 조합원들만 하더라도 벌써 수십만 가정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은 이미 많아졌다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무엇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을까? 저자는 우리나라에 발생한 협동조합의 특수성을 지적하면서, 먹거리에 관한 특별한 관심들이 최근 여러 생협들이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게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태 나는 왜 몰랐을까....그 이유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특수성 중 하나가, 조합원들의 생활수준이 평균 이상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렇게 협동조합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책을 읽어가면서 협동조합에 대한 특징과 여러 정보들을 쉽고, 재미있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협동조합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책의 집필 의도가 ‘icoop 생협에 지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험서 제공’에 있기 때문에, 책의 절반 정도를 지나가면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협동조합의 운영과 재무회계, icoop의 발전 모습에 대한 내용은 나름 협동조합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과 예가 될 수 있겠지만, 읽는 동안 머릿속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 그럼에도 이 책은 협동조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알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 특히 이미 조합원이지만 자신이 지금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그리고 책 마지막 부분에 icoop 생협의 직원들을 인터뷰 한 챕터가 있는데, 구직자라면 정말 이 직장 매력있네! 할 정도로 회사 자랑을 잘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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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코틀러의 다른 자본주의 - 우리 삶이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는 14가지 길
필립 코틀러 지음, 박준형 옮김 / 더난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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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코틀러의 다른 자본주의. 필립 코틀러. 더난출판

 

“마케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세계적인 경영학자. 현대 경영학의 구루라 불리는 필립 코틀러가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정확히 이러한 광고를 보고 책을 샀다. 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경력에 걸맞지 않는 책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광고를 보고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ㅠㅠ그저 누구나 알고, 많이 알려진 자본주의의 단점들을 열거하는 것에 그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한 14가지 문제점과 과제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을 들기는 하지만, 정말 사례를 언급한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안을 제시하는 수준은 “우리 이렇게 합시다.” 말고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대신 그가 제시하는 자본주의의 단점과 과제 14가지는 우리가 복습하는 차원에서라도 한 번쯤은 읽고, 정말 그러한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소득 불평등, 파괴의 씨앗

수렁에 빠진 노동자들

자동화에 일자리를 뺏기다.

이익은 기업이. 비용은 사회가!

환경과 성장, 지속 가능한 경제

경기순환과 불안정한 경제

위험한 이기심.

부채의 늪과 금융규제

잘못된 정치가 경제를 망친다.

코앞의 이익에 눈 먼 기업들

시장은 충분히 믿을 만한가?

우리 삶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풍요와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

 

눈에 띄는 문구들. 기억할 만한 문장들.

 

“사람들은 갚을 능력이 전혀 없으면서도 앞 다투어 대출을 얻었다.....경제적 재앙 전에는 거의 대부분 가계부채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혼자 볼링을 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지나치게 이기적인 경제로 흐르는 것을 대변하는 문장.)

 

“자본이 일부 소수에게 집중된다면 1인 1투표제의 민주주의 개념은 사기나 마찬가지다.”

 

“단기수익의 극대화에 집중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경향은 가뜩이나 불안정한 투자수요를 더욱 악화시킨다.”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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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논쟁 -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2
마이클 호튼 외 지음, 문현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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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관점 학파의 출현으로 더욱 치열하고 뜨거워진 현대의 칭의 논쟁을 엮은 책이다. 여기에 지난 교회사에서 칭의와 이와 관련한 논쟁의 간략한 역사를 더해준 것은 보너스라 할 수 있다. 목사이지만, 솔직히 나에겐 어려운 책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너무 몰랐다. 이런 상태에서 ‘칭의 논쟁’은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위치.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칭의 논쟁’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물론. 여러 관점을 개관했기에 각각의 관점을 깊이 있게 다루진 못한 느낌이다.(그래도 적어도 칭의에 관한 내 지식보단 깊었다!) 하지만 각각의 관점을 제시 한 뒤에, 다른 입장의 학자들이 공감하고, 반박한 글들을 붙여 편집했다. 어쩌면 신학 안에서도 상당히 협소한 주제라 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적을 수 있는 칭의에 관해 다루었지만, 나름 흥미롭게 잘 쓴 책이라 생각한다.

 

몇 가지 느낀 점.

1. 칭의란 신학 주제를 다루는 다섯 입장의 학자들. 전통적 개혁파를 대변한 마이클 호튼. 진보적 개혁파의 마이클 버드. 새관점의 제임스 던. 신성화 입장의 카르카넨. 카톨릭의 칭의 관점을 소개한 오콜린스와 래피티. 모두 상대의 주장을 경청했고,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부분. 그리고 반대하는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한다. 신학이란 학문도 역시 학문이기에 상대방의 견해를 존중하지 않고선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어거스틴의 ‘신국론’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읽을 때도 비슷한 점을 느꼈다.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확실하게 알고, 동의할 것들, 반박할 것들을 확실하게 구분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개혁파에 속한 목사 이지만, 개혁파만 배워서는 오히려 진짜 개혁파가 될 수 없겠단 생각을 했다.

 

2. 칭의를 다루지만, 다 같은 칭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음. 특히 전통적 개혁파의 경우엔 구원 서정에 있어서 ‘칭의’, 그리고 그것의 법정적인 측면에 대해 집중하고 강조한다. 하지만 신성화 입장과 가톨릭 입장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칭의’에 개혁파가 주장하는 ‘칭의’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적은 지면에 설명을 하려다 보니, 각각의 입장에서 강조하는 부분을 쓰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3. ‘칭의’의 역사를 다룬 부분. 다섯 가지 견해를 소개하기 전, 저자는 ‘칭의’란 개념의 역사를 소개한다. 그리고 가톨릭 입장을 소개한 올리버 래퍼티 역시 어거스틴에서 시작하여 루터에 이르기까지 ‘칭의’개념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를 제시한다. 나는 이 책에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솔직히 앞부분의 개관보단, 가톨릭 학자 래퍼티의 역사 개관이 짧으면서도 재미있었다. 왜 그랬는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실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시대가 갖는 상황에 따라 ‘칭의’개념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면서, 개혁파와 가톨릭이 갖는 현재의 ‘칭의’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이 부분을 보면서 칭의 교리에 대한 역사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도 재밌겠단 생각과, 다른 교리들 역시 역사 가운데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고, 흥미롭겠단 생각을 했다.

 

4. 새관점 학파. 그리고 ‘던’의 매력. 이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던의 매력을 보여주는 마지막 단락을 그대로 인용한다. “새 관점은 이 역설과 긴장에 대한 산뜻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새 관점이 요구하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을 해석하려면 과거에도 그랬듯이 ‘설령 그것이 적합해 보이지 않더라도’ 바울의 전체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이 주제들에 관한 바울의 전체 가르침이 일관적이지 않거나 혹은 일반적인 신앙고백에 산뜻하게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긴장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바울 신학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불가피하게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전에 나왔던 ‘역사적 예수’ 논쟁, 곧 있으면 나올 ‘역사적 아담’ 논쟁을 기대하게 한 책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칭의’에 대하여 여러 입장을 소개하면서 ‘칭의’ 교리의 중요성과 ‘칭의 교리의 역사’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했다. ‘칭의’를 말하면서 자신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칭의’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알고 싶고, 알아야 할 신학생, 목회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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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일=안식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말씀과 교회의 전통을 따라 지키고 있는 주일에는 안식일의 측면이 분명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주일에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주일에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일에 다른 성도들과 말씀으로 교제하고, 식탁에서 교제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것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어느 날보다 풍성하다!

교회 내에서 누리는 예배와 교제 뿐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것을 성도 개개인의 삶과 연결해 보아도, 좀 더 확장해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안식을 취한다는 점에서)주일을 지킬 때, 나와 우리에게 무수한 유익이 뒤 따른다.

 

하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모습들도 역시 많이 변했다. 바쁘게 일하지 않고서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러한 세상에서 분리될 수 없는 성도들이, 그나마 주일에 겨우 누릴 수 있었던 안식을 빼앗긴 것은 성도나, 교회나, 심지어 사회에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과 여러 저서를 통해서 현대 자본주의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선지자적 발언을 했다. ‘안식일은 저항이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경을 보는 탁월한 통찰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세상에 저항하는 것임을 힘주어 주장한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되어 있다. 1장의 제목이 안식일과 첫째 계명. 6장의 제목이 안식일과 열째 계명이다. 제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십계명과 안식일 준수의 관계를 통하여 글의 논지를 이끌어 간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자신이 쉴 뿐 아니라, 불안(2장)과 강요(3장), 배타주의(4장)와 과중한 일(5장)에 치여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이웃’을 드러나게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이고, 모든 결론으로 첫째 계명과 열째 계명을 안식일 준수와 관련하여 해석한 부분이다.

 

“첫째 계명이 거부하는 우상숭배와 열째 계명이 거부하는 탐심을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우연이자,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것이다. 우상 숭배와 탐심이라는 두 가지를 동일시한 이유는 이 둘 모두가 실체를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안식일은 두 가지를 모두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를 거부한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저 거부에 그치지 않는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이웃이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실체를 꾸준히 훈련받은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구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안식일이 없는 실존은 우리 뜻대로 살아 나갈 궁리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상품이 쌓여 있고, 우리는 그 상품들 앞에 엎드려 절한다. 그러나 상품은 우리 손을 잡아 주지 못한다.(그러나 우리 주님은 나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신다! 시편 73편 23절)”

 

얇은 책이지만, 버릴 게 없는 책이었다. 안식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할 수 있겠지만, 철저하게 바쁘게 돌아가는 경제중심의 사회에 안식이 갖는 ‘저항’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보니 술술 읽히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누군들, 쉬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도 세상이 주는 불안과 강요, 배타주의, 내일 해야 할 일에 묻혀 안식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브루그만은 이러한 혈실에 처한 우리에게 용기를 가지고 저항하라고 도전한다. 안식을 위해서도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참 씁쓸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라면 저자의 도전에 적극 동의하며 안식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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