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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 성경신학적으로 바라본 우상숭배와 하나님 형상의 의미
그레고리 K. 비일 지음, 김재영 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1월
평점 :
‘신약의 구약사용’, ‘신약 신학’, ‘성전 신학’ 등으로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신약학자, 그레고리 빌의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 We become what we worship’. 작가는 이번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명제를 중심으로 우상숭배와 우상숭배자의 관계를, 하나님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와의 관계를 구약성경, 유대문헌,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간단 요약
그레고리 빌은 루터가 정의한 우상숭배를 약간 바꾸어 이렇게 정의한다. “궁극적인 안전을 위해 당신의 마음이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그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다. 오직 마음의 신뢰와 믿음이 하나님도 만들고 우상도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 혹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기로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인간에게 심판을 내리셨고, 그 심판은 다름 아닌 인간이 섬기는 우상을 닮아가는 것이었다.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창조주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실패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피조물의 말을 들으면서 심판을 자초했다. 놀라운 점은 피조물을 숭배하면서 그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의지했던 피조물을 닮아갔다는 점이다. 아담은 죄를 전가하고, 거짓을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하는 마귀를 닮아갔다.
모든 우상 숭배의 뿌리와도 같은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동시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사건으로 발전하고, 금송아지를 숭배한 사건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눠진 뒤에도 더욱 편만하게 되었다.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금송아지’를 닮아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고’, ‘(마음이)완강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이 있었지만 그 영광의 형상을 피조물의 것으로 바꾸어버렸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집단적 아담’의 사명을 뒤로한 채, 허무하고 헛된 형상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스스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선지자들이 우상 숭배 때문에 심판 당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눈’, ‘코’, ‘입’과 같은 감각기관을 사용하여 조롱하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이 지각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의 마음을 점점 둔하게 만들어 그들을 그들이 섬기는 우상과 같은 상태로 만드셨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유대문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신약 성경에 이르러서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아담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해당하는 범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복음서에서 나타나듯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을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처럼 마음이 굳었고, 목이 곧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맹인이 되어 눈은 뜨고 있었지만 볼 수 없는 맹인과도 같았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도 그들의 조상처럼 그들이 섬기는 우상처럼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 지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했고,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로마서 1장 20절 – 28절이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우상을 숭배한 사람들은 1차적으론 자신들이 만들고 섬기는 우상을 닮아간 것이고, 더욱 근본적으론 우상의 뒤편에 숨어 있는 마귀를 닮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무서운 방법으로 심판하신 하나님 때문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뿐 아니라 사도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우상 숭배자가 우상을 닮아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제를 전한다. 특히 들으라!’는 명령을 반복하는 것, 그들의 얼굴과 이마에 ‘짐승의 이름’이 있는 것, 그들을 666이란 숫자로 보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우상과 같아 질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우상을 닮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레고리 빌은 이 주장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 놓여 있는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상황을)뒤집는 은혜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자들에게 볼 수 있게 해주셨고,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핑계할 수 없게 보여주셨다. 신약의 저자들은 한 결 같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겨 우상과 같이 되어 우상과 함께 멸망당할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감상평
신대원에서 관심을 두고 공부했던 부분이 구약의 정경적 해석이었다. 특히 이사야서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해야 하는 지에 대하여 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있다. 정경적 해석, 혹은 정경적-문맥적 해석은 참 흥미롭고, 매력적인 방법이었다.
우선은 이 방법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기에 신앙을 북돋았다. 또한 특정 주제가 구약의 한 본문에서 신약으로 이어진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은 계시가 발전한다는 큰 해석적 틀과 부합하며 성경을 보는 재미를 더했다. 예를 들자면 ‘돈’이라는 주제, ‘심판’이라는 주제, 그레고리 빌이 다루었던 ‘성전’이나 ‘우상숭배’와 같은 주제들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주제라 할 수 있겠다.
저자가 직접 밝히는 이 책의 해석학적 접근법에 대한 부분을 직접 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이 연구의 기저에.....중요한 전제는 신구약성경 전체가 신적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관점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음을 의미한다....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는 인간 저자들을 통해 전달된 신적 저자의 의도가 현대의 독자에게도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최근에는 이러한 연구를 전형적으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용어로 언급하는데....”
그레고리 빌은 성전 신학에서 그 해석적 방법으로 ‘성전’이라는 주제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제시가 되고, 발전 되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성전’이 에덴동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스스로 그 임재의 장소에서 쫓겨난 인간들을 위하여 어떻게 ‘성전’을 회복하시고 확장하시어, 마지막 때에 완성하시는 지를 수많은 성경의 구절들을 치밀하게 주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하는 지를 추적하여 설득력 있으면서도 읽는 이들이 압도당할 정도로 장엄하게 서술했다.
이 책,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를 읽으면서 성전 신학을 읽는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주제만 ‘성전’에서 ‘우상숭배’로 바뀐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동시에 ‘성전신학’을 이 책이 보충하며 성전을 확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예배자들로 채워가고 계신다는 내용을 보충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요약에서 본 것처럼 이 책의 주제는 ‘사람은 무엇을 예배하든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것이고, 저자는 이 주제를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하여 차근차근, 세밀하게 증명해 간다. 읽으면서 주제 자체가 주는 통찰에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주제 자체보다는 저자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본문을 하나, 하나 끄집어 주해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하는 지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정말 탄복할 정도였다. “이 본문이 그러한 의미로 읽히는구나!”, “이 주제가 신약으로 넘어와 이렇게 발전하는구나!” 하면서 감탄했던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책은 전체 분량의 2/3 이상을 우상숭배자가 자신이 만든 우상을 닮아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하고, 나머지 1/3 정도를 서론과 방법론, 그리고 전체 주제의 절반에 해당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상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에 할애한다. 그러다보니 저자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을 닮는 양상과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서술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아주 치밀하게 추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러한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사랑과 공의의 성품 때문에)‘보고, 듣고, 느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닮아가는 지를, 혹은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지를 더욱 연구해 보아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쉽지만, ‘정경적-문맥적’해석 혹은 ‘상호텍스트성’에 대하여 처음 듣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멸망을 향하든지, 회복을 향하든지, 사람들은 자신이 숭상하는 것을 닮아간다.’ 라는 이 책의 주제 자체만으로 이 책은 붙잡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워낙 깔끔한 번역과 보기 좋은 편집으로 책을 읽는데 참 편안함이 있다. 또한 이 방법론이 아주 어려운 해석적 툴은 아니기에, 이 책으로 익숙해 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탁월한 책이다. 다소 어렵긴 하지만 혼자 보기 아까운, 아니 솔직히 혼자 보고 설교 하고 싶은 그런 좋은 책이다.^^ 이러한 점에서 많은 목회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고, 우상숭배라는 주제로 한 번쯤 고민해본 성도라면 읽고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