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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지음. 글항아리
7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그것도 경제학 전문 서적이 대중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러다보니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신문과 방송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피케티 현상. 혹은 증후군으로 일컬어지기까지 했다. 21세기 자본. 이름부터 부담스럽다. 누구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떠올리도록 제목을 지은 것 같은데, 이렇게 제목부터 논쟁적이고, 부담스러운 책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왜? 무엇이 이런 현상을 만들었을까?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19세기 마르크스가 보았던 ‘불평등’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이 19세기에 나타난 불평등의 정도와 모습은 다르겠지만, 우리의 절대다수는 그것도 약자의 편에서 그것을 경험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만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한바탕 바람을 몰고 온 ‘피케티 신드롬’을 설명하기엔 무엇인가 부족해 보인다. 왜냐하면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담론은 오늘날에 새로 생긴 이야기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이다. 구체적인 증거들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불평등에 대한 주제가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주 식상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보는 사람들을 제압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두께를 가진 이 전문서적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심스레 짐작해 보건데, 저자가 이 책을 썼던 목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전달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자본소유주들과 대비해 노동자들이 처한 처지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가능한 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 54p.
간단한 요약
저자는 본서를 총 4부에 걸쳐서 21세기 세계가 처한 경제적 불평등의 세계를 보여준다. 먼저 1부에서는 소득과 자본에 대한 정의를 큰 틀에서 정의함으로 앞으로 이어갈 논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한다. 여기에는 이 책을 통해 유명해진(?) 자본/소득 비율, β(베타)가 등장한다. 2부에서는 구유럽과 신대륙에서 자본/소득 비율이 약 300년에 걸쳐 어떻게 움직였고, 그 비율이 크고 작음에 따라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를 밝힌다. 3부에서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이 상위 1% 혹은 0.1 %에 얼마나 집중되어 있는지를, 그리고 이러한 부의 집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과정이 상당히 불투명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1~3부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대안-누진적 소득세, 글로벌 자본세를 제시하면서 민주적인 자본의 통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1부 소득과 자본. 2부 자본/소득 비율의 동학
피케티는 1부의 1장을 시작하면서 상당히 도발적인 예를 들면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끈다. 그것은 2012년 8월에 있었던 마리카나 백금 광산의 광부들이 벌인 파업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34명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노동으로 얻어진 생산을 임금과 이윤으로 나누는 과정이 쉽지 않고, 그러한 과정이 갈등을 일으키는 핵심요소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이고, 그러한 원인에 작용하는 요소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논의를 진행한다. ‘소득’, ‘자본’을 정의하고, 이것을 묶어 자본/소득의 비율, β를 정의한다. 그리고 β의 비율을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신대륙 몇 개국(이 책의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을 가지고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나라들이다.)에서 19세기에서 21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를 각종 자료와 표를 이용해서 보여준다. β의 변화는 제시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20세기 초반까지 전 세계에서 극한의 경제적 불평등을 보였을 때 β의 값이 7정도였다는 것이고 이 값이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의 시기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낮아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값이 점점 회복되고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세기 초반 β의 값을 회복하게 될 것으로 예측이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예측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 사회적 환경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으면 불평등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데 중요한 근거로 사용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주장, 자본과 소득의 비율이 점점 커지게 되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이 주장은 곳곳에서 반박을 받는다. 21세기는 20세기 초반과 비교해 봤을 때, 기술과 지식에 있어서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고, 어마어마한 경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놀랍게 평등해지지 않았냐는 주장이다. 정말로 그러한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저자는 그러한 반박에 이렇게 대답한다. “생산성의 향상과 지식의 확산에 기초한 현대의 성장은 마르크스가 예견한 대재앙을 피해 자본축적 과정이 균형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자본의 구조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3부 불평등의 구조.
1부에서 마리카나 광산의 파업을 예로 들면서 시작했던 저자는, 3부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19세기에 출판된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보트랭의 설교’부분인데, 내용은 간단하다. 공부, 재능, 노력을 통해 성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환상이라는 것.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해가며 학과 수석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한 끝에 성공한 법률가가 된다 하더라도, 그는 보통 수준밖에 안 되는 소득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진짜 부자가 되겠다는 희망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19세기의 상황이 지금도 재현되고 있고, 점점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토록 기분 나쁜 주장을 하려면 나름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피케티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지표를 제시한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 등장한 수퍼 경영자들의 임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뿐 아니라, 그러한 임금의 정도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날 뿐 아니라, 그 정도의 임금이 정해지는 과정이 불투명하고, 심지어 공평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대게 이들의 보수는 임원들 자신 혹은 대개 비슷한 급여를 받는 기업의 보수위원회 위원들이 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상위 1% 혹은 0.1%에 속하는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만한 대가를 받을 만큼의 기여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순진하고, 그들의 임금이 정해지는 지극히 불공정한 과정이 공개 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착각’일 뿐이다.(이와 반대로 최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받는 최저 임금 역시 그들의 생산성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이렇게 노동소득이 극한의 불균형으로 치닫는 것과 더불어 저자는 자본 소유의 불평등 역시 그러하고 있다는 것과, 이러한 현상은 노동 소득보다 훨씬 더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특히 대규모의 자본이 갖는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r > g, 자본 수익률이 경제성장률 보다 크다는 등식인데, 이 말은 돈이 돈을 버는 원리가 경제 성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혜택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불평등을 가속화하고, 이것을 내버려 둔다면, 1부와 2부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19세기, 20세기 초반에 극에 달했던 불평등이 재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큰 등식이 위험한 것은 상속의 시대를 빠르게 앞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로레알의 상속녀인 릴리앙 베탕쿠르의 재산 증식을 언급하면서, “살아오면서 하루도 일하지 않은 릴리앙 베탕쿠르의 재산도 정확히 빌 게이츠의 재산만큼이나 빠르게 늘어났다.”고 말하며 이러한 현상을 비판한다. (물론 저자는 빌 게이츠의 재산이 모아진 과정 역시 불투명 하고 결코 건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날 도둑놈이라는 표현까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어느 정도 규모의 자본이 갖추어 지면 자연스럽게 수익률이 보통 사람들이 당좌예금에 넣어 놓으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률보다 몇 배나 큰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위험을 감수한 투자를 감행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소유한 자본의 수익률의 극히 일부분을 전문가들에게 투자함으로서 정교한 투자를 할 수 있고, 더욱 큰 수익을 보장 받기 위하여 법적 장치를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자본은 더욱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정말 큰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생겨난 그들의 소득에서 정상적인 세금조차 거두기 힘들어진다는 것이고, 이러한 은닉된 재산을 추적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재산은 세계 곳곳으로 숨어들어 그들의 재산을 숨겨주면서 떨어지는 짜투리를 얻어가면서 살아가는 국가 혹은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기 때문이다.
4부 21세기의 자본의 규제.
끝없는 불평등의 악순환을 피하고, 자본축적의 통제권을 국가에서 되찾기 위한 이상적인 정책은 자본에 대한 누진적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20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점으로부터 불과 6-70년 전, 어머어마한 누진세가 시도가 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도는 “보편적 참정권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국가는 돈이 필요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최고 구간에 해당하는 초고소득자들에게 80%에서 심지어 90%에 이르도록 과세를 했었다. 안타깝게도 미국과 영국을 선두로 하여 경제성장이라는 명목 하에 누진세의 세율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고, 어느 나라에서나 현재의 상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피케티는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의 주장 중에서도 수없이 공격을 받은 ‘글로벌 자본세’를 제시한다. 이러한 생각이 상당히 유토피아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각각의 국가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정치적 법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개인들이 한 번쯤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는 될 수는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스스로도 ‘유토피아적’이라 생각하는 글로벌 자본세를 주장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목적은 대규모 자본들이 아무도 모르게 전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신뢰할 수 있는 통계 없이 진정한 민주적 토론이 진전 될 수 없고” 자연스레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불평등의 과정 역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상평 - 더욱 투명하고, 건전한 자본으로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강의 기적이라는 시기를 거치며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지어 같은 시기를 지나온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정도면 우리는 민주주의와 경제적인 평등의 면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닌가? 피케티는 이에 대하여 ‘그렇다.’ 와 동시에 ‘아니다.’로 대답을 한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내버려두면 점점 불공평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주장은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다.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 많은 수의 경제학자들, 자본가들의 편에 서있는 많은 언론들, 분배라는 말만 들어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반응을 보이는 여러 사람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료 오류. 조작 등의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21세기 자본’에 대하여 여러 반박들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함께 독서 모임에 참여 했던 분의 좋은 글이 있어서 링크를 걸어 둔다. http://blog.naver.com/jmania/220335978818
책을 천천히 읽다보면, 여러 반박들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피케티 역시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의 관계. 그리고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영향에 대하여 수많은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제한적인 측면에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렇다면 그가 진짜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 글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자 함이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 관심이라도 주기 위함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개념을 잡기조차 힘들다. 피케티는 그 이유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한다. 최상위층의 자본가들이 독식하고 통제하고 있는 자본과 관련한 정보. 그들의 수익을 지키거나 늘리기 위하여 법적 장치를 만드는 힘. 동시에 이러한 그들에 붙어 조금의 수익이라도 얻고자 하는 얌체같은 사람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자본의 흐름과 수익에 대하여 장막을 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들과 언론이 쏟아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경제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거나, 막연한 두려움,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함으로 현실에 안주하게 하거나, 현실을 지키는 것에 힘을 쏟게 한다. 피케티가 이 책을 통하여 주는 큰 유익중의 하나는 그러한 숫자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도움을 주지 못하는 지에 대하여 밝히는 것이다. 경제성장률. 평균소득. 불평등지수. 종종 듣는 말이지만, 이러한 숫자들은 정말 숫자 말고는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안 그래도 바쁘고 먹고 살기에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숫자의 의미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러한 수준의 정보만 쏟아내는 언론은 결코 중립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악하다 할 수 있다. 피케티는 이러한 상황을 적나라케 고발하기 위하여 충분히 애를 썼다. 누구나 입이 쩍 벌어질만한 자료들을 모았고, 그 자료들을 통하여 지난 300년. 혹은 100년간의 여러 경제적인 지표들, 특히 자본수익과 소득과 관련한 지표들을 0.1%의 최상위 소득자. 1%, 10%, 상위 50%. 이렇게 세분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러한 ‘숫자’들은 분명 언론을 통해 길어야 1분 사이에 한, 두 번 들려지고 마는 ‘숫자’들과 분명 다르면서도 구체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그저 어느 정도의 큰돈만 있으면, 그 돈이 돈을 벌게끔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고, 게다가 그렇게 거대한 양의 자본이 투명하지도 않고, 적법하지 않은 방법으로 생겨나고, 심지어 상속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투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누진세를 제안한다. 그리고 자본이 글로벌하게 움직이고, 더욱 교묘하게 숨고 있기 때문에 글로벌 누진 자본세를 주장한다.
r > g 라는 부등식을 경제적 불평등의 유일한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에 대해서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글로벌 누진세가 터무니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책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주장하는 것. 경제 문제는 절대적으로 정치적이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하위 50%는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본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황)보다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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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은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어렵지 않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하여 나름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하려고 애쓴 저자의 노력이 보이고, 경제에 문외한인 제가 보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였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