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뒷조사 복음서 뒷조사
김영화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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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하진 않더라도 쉽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마태복음 개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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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 삶과 죽음에 관한 김영봉의 설교 묵상
김영봉 지음 / IVP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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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피할 수 있는 사실인데, 장례식장에 가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 그곳에서는 유족들이건, 그들을 위로하러 가는 조문객들이건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더 이상 없는 고인에 대한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이 상황은 준비한다고 해서 준비가 되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를 읽어 보니 잘 준비된 장례 설교 한 편이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이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서로가 위로를 나눌 수 있게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사귐의 기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등의 저서로 알려진 김영봉 목사의 장례 설교 모음집이다. 총 열 여섯 편의 장례 설교로 이루어져 있는데, 설교 한 편 한 편에 고인에 대한 사랑과 예의가, 유족들에 대한 배려가 묻어난다.

 

특히 이 설교들은 평생 신실하게 살다 죽은 성도의 죽음으로부터 자살한 성도, 불신자 가족, 갑작스런 사고사까지....저자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경험한 다양한 죽음 앞에서 저자가 한 교회의 목사로서 어떻게 최선을 다하고 섬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는 나이기에 이 설교들은 무척이나 유익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백 명의 성도들을 목회하면서 이토록 한 사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해석해 내는 저자의 헌신과 사랑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러한 설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결국 평소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어쩌면 평생에 한 번일 수도 있는 모든 성도와의 개별적인 만남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너무나 바빠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치다 보니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잠간 멈추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잠간 멈추어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한 편, 한 편 천천히 읽으려고 애를 썼고, 우리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나라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열여섯 편의 설교들 앞과 뒤로 죽음에 대한 저자의 묵상과 장례를 준비하는 방법들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들도 목회자들에게 도전도 되겠지만,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직 읽어 보지 못한 분들, 특히 목회자가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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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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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비아.

 

전도사 시절, , 고등부 아이들에게 지옥에 관한 설교를 했던 적이 있었다. 목회자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고, 당시엔 특히나 지옥이 있는 것을 정말 믿는 것처럼 사역하고, 설교하라는 가르침에 참 많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지금도 동의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마침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도 하고, 열심히 준비도 했다. 나름 애써 준비한 설교를 아이들에게 하는 순간 내 마음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의 느낌은 너무 생생해서 잘 잊히지도 않는다. 내가 앞에서 말하면서도 내가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웠고, 듣는 아이들의 반응은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표정이기 보다는 차라리 월요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는 모습과 가까웠다.

 

내가 지옥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 듣는 학생들에게 어떤 깊은 인상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말하는 나에게 조차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던 건데, 왜 그랬던 것일까? 아마도 지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삶에는 엄연히 지옥을 상상케 하는 현실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했다. 비참한 현실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무엇이 그렇게 비참한 삶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서도 몰랐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현실에 대한 무지가 설교 한 편을 망치는 것에서 그치는 것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알지 못하고, 그러한 삶을 강제하게 하는 죄의 악함이 얼마나 강한지를 똑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통하여 기독교가 말하는 어떠한 선한 영향력도 행사하기 힘들어진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참회, 구원에 관하여>의 저자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나와 같은 수많은 설교자들이나 크리스천들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에 대하여 합당한 문제제기와 답을 한다.

 

죄와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내 관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주류 교회에서 이 단어를 말하기 어렵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일이고, 둘째는 이 단어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저자는 죄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주제에 대해서, 특히 죄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면서 혹은 어려워지면서 지금의 상태, 즉 구원에 대해 말해도 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진단한다. 죄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으니 죄로 인한 타락,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은총, 참회, 구원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기독교의 언어를 다른 종교들의 언어와 혼동하게 한 종교의 다원화(세계화), 모든 권위를 붕괴시킨 포스트모더니즘, 죄의 의미를 퇴색시킨 세속주의가 그렇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기독교의 언어를 퇴색시킨 이러한 원인들을 적대시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러한 원인들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더욱 다른 종교의 언어들을 익힐 필요가 있고, 죄의 경험과 그 여파를 생생하게 전해야만 한다. 또한 죄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 이 시대에 성경이 말하는 죄의 의미를 되찾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주류 기독교는 죄를 법률적인 의미 범법행위, 의학적인 의미 질병 정도로 축소하는 현상을 벗어나 성경,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참된 의 의미를 되찾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갈급해 하는 사람들에게 은총과 구원이라는 언어를 찾아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죄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과 같아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반역하는 행위이다. 또한 죄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 깨어진 관계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죄는 결국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기독교는 이렇듯 생명의 원천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행위를 죄라 불러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죄는 단순히 성적인 범죄나, 주일 성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을 벌고, 소비하고, 투자하는 방식에 있다.

이렇게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와 이웃의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참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참회는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참회는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돕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회가 관계를 회복한다는 결단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누군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영향이 결코 개인, 스스로에게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류 기독교회들은 죄를 내면화 시키면서 참회 역시 양심을 좀 편하게 만드는 정도로 만들었다. 설교자와 청중들이 서로 죄와 참회에 대해서 축소하기를 합의하면서 ’, ‘참회라는 언어 자체에 힘을 잃어버리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 것이다. 죄를 말할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미 우리가 목격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있지만 서로가 함께 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과도 함께 할 수 없는 무리들만 존재한다. 죄를 말하지 않으니 관계를 회복케 하는 참회도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 중에, 그래도 모범이 될 만한 몇 가지 예를 보여준다. 그것은 세이비어 교회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었던 진실과 화해 위원회. 그들이 어렵지만 괴로운 죄를 말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한다. 이유는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하고, 우리 사회에 무너진 관계들을 회복해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한다.

 

우리는 그 회복이 우리 너머에서 우리에게로 찾아온 일임을 알고 있다. 회복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참여해야 하지만, 우리의 참여만으로는 이 사건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때로 너무나 놀라운 이 회복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진정한 참회는... 하나님과 우리의, 또 우리 서로 간의 연합을 회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 모두 기독교 주류, 보수적인 교회들에서는 그 가치를 애써 축소하고 있거나, 행위 구원으로 몰아가기까지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의 신앙에서 희미해지자, 우리는 신앙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는 이러한 위기에 처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복음의 의미를 조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희망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내 죄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을지, 적게 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쟁이 있다. 적게 말하든, 많이 말하든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점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너무 적게 말하는 교회든, 많이 말하는 교회든 우리는 은혜, 구원이라는 놀라운 언어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죄를 바로 알고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회의 언어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저자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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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위한 설교
앨리스 P. 매슈스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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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위한 설교. 엘리스 매슈스. 새물결플러스

 

전도사, 신학교 시절, 많은 학생들에게는 비슷한 자신감이 있다. “나는 설교를 잘한다.” 아마도 누구보다 복음을 뜨거운 마음으로 전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그런 자신감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기억해보면 설교 실습 때 전도사님들의 설교는 하나같이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따라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그랬던 갓 같고.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신대원 1학년에 설교학 수업이 있었기에 어떠한 신학적 고민이나 깊이가 있는 설교나, 청중을 고려한 설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설교에 대한 이러한 인식 설교자는 뜨거운 마음으로 본문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된다 - 이 기성교회의 설교자들 혹은 상당수의 성도들에게 까지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이른바 교회 언어로 가득한 설교들로 나타나고 있고, 감정을 자극하는 설교를 설교자들이 추구하거나 청중들이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저자는 <여성을 위한 설교>에서 이러한 인식에 젖어있는 설교자들에게 <강해설교>의 저자 해돈 로빈슨노련한 설교자는 청중을 먼저 생각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설교를 준비할 때 청중, 특히 절반이 넘는 여성청중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조언이지만, 이 말이 너무나 오랫동안 무시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자신이 그동안 교회가 성장해 온 시기에 대해서 "...설교에서 여성에 대한 농담이 일상적일 뿐 아니라 청중의 웃음을 유도하기에 유용하다고 간주되던 때..."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설교에서 스포츠 예화가 수시로 등장하고, 성차별적인 요소가 다분한 언어들이 난무하는 현실도 함께 지적한다. ...룩한 설교시간에 어떻게 이런 일들이 멈추지 않고 일어나고 있을까? 가슴이 뜨겁고, 본문 중심의 설교를 한다고 자부하는 설교자들이라 할지라도 남성중심의 문화, 가부장적인 사회, 교회 분위기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을 듣는 다면 겸손하게 그렇구나...” 인정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닌데...’ 하거나, ‘나는 아내를 좋아 하는데?’ 혹은 여 성도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상대하는데?’ 라는 반응을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남성 중심적인 생각들과 언어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결국엔 그러한 설교자들의 생각들이 여성에 대한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그대로 수용, 재생산하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에게 차별적인 말을 하거나, 설교 중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러한 생각들을 성도들에게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단호하게 아니다는 답을 한다.(1) 그러면서 설교자들에게 세간에 있는 편견에서 벗어나 엄연히 존재하는 청중으로서의 여성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여성의 경험을 여성으로서 이해하기”, “설교를 여성이 단순히 집단적인 존재가 아님을 이해하기를 시도해 보라 도전한다.

 

이어서 저자는 도덕적 의사 결정을 위한 설교’(2), ‘심리적 온전함을 위한 설교’(3)를 통해 그동안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성차별적인 문화에 영향을 받은 여러 편견들과, 그에 근거한 메시지에 노출이 되어 일방적으로 돌봄이라는 가치를 강요받았고,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갈 것을 요구 받아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로 인하여 많은 여성들이 괴로움을 받아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아예 교회를 나가는 경우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말한다. 이에 더해서 저자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계속 전해야 하겠지만, 너무나 바쁘고 다양해진 삶의 모습과 그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혼자서 돌봄의 역할을 해낼 수 없고, 더 이상 소극적인 자세로는 삶을 버텨낼 수 없는 대다수의 여성들을 감안하여 설교할 것을 주문한다.

 

이어서 저자는 근대로부터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지나오면서 많은 여성들 역시 다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의 수준이 올라갔고, 인식의 방법도 다양해졌다는 사실을 언급한다.(4, 5) 이러한 현실에서 그동안 침묵 속에서 혹은 그저 수용적인 인식자로서의 영성을 요구 받았던 여성들은 그러한 요구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저 설교만 한다고 해서 더 이상 억지로라도 들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거니와, 이제는 그러한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된 것이다.(6) 이런 청중을 앞에 두고 설교자들이 남편에게 따뜻하게 대하며, 혹시 실수하더라도 오래 참고,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라고 하는 일방적인 요구는 결코 믿음으로의 부름이 될 수 없다.

 

이 외에도 권력(7), 리더십(8), 정체성과 역할(9)에 대해서 논하며 그동안 잘못 행해져 온 권력과 리더십으로 인하여 많은 여성들이 권력과 리더십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낀다거나, 그것을 스스로 행하는 것 역시 주저하는 경우가 많음을 이야기해준다. 또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설교자들이 지나친 소명감을 부여해 왔기 때문에 여성들이 가정과 교회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아 왔음을 말한다. 특히 가정에 대해서 우상 숭배적이라 할 만큼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여 수많은 여성들을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거나, 이급 시민 혹은 도덕적 실패자로 만들었다는 지적을 한다. 혼자 사는 가구가 절반이 넘어가는 형편인데, 설교자는 그러한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에 호응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향하여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면서 교회에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10)

 

“....교회는 시한폭탄을 손에 쥐고 있다. 여성은 화가 나 있으며 그 분노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모든 여성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교회는 남성적 관점이 지배하는 곳이다....(교회는) 전체적으로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제도처럼 느껴진다....여성들은 자신이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교회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설교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청중들이 화가 났다고.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빠져 나가고 있다고. 이런 현상은 정말 절망스럽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저자는 기존의 설교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다시 한 번 조언한다. 설교자들이 그동안 고정관념에 갇힌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는지. 혹시라도 여성을 남성의 보조 수단으로서 말하지 않았는지.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은 존중을 주는지, 자신의 언어가 성차별적인지, 여성을 배려하고 있지 않은지, 청중에 대해서 무지한지를 확인해보라고 말이다.

 

저자는 책을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 보기 전에는 그의 문제와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한다. 대부분의 남성 설교자들이 여성에 대해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설교자들은 여성에 대해서 공부하려 하지 않는다. 워낙 바쁘기도 하지만, 자신 만큼은 여성에 대해서 잘 해주거나, 잘 알고 있다고 크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치 신학교 초년생들이 자신은 설교를 잘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수의 여성 청중들이 그렇게 배려 받지 못하는, 아니 적어도 무시당하면서까지 교회를 나오려 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많은 여성 청중들이 화가 나 있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습은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이 되었다. 수많은 비혼 여성들 혹은 이혼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지만, 여전히 건강한 가정에 대해서 12주 동안 연속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혹은 이러한 생각이 왜 틀렸는지에 대해서조차 모르는 설교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 지에 대해 알기 위하여 무수한 시간을 투자하고, 진지함을 갖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청중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과도한 소명감으로부터 온 잘못된 생각임에 틀림없다. 존 스토트가 말했던가? 설교는 성경과 청중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그동안 많은 설교자들이 다리를 만들기 전, 그 다리를 놓아야 할 곳이 어떤 땅인지 확인하지 않고 다리 만드는 것에만 너무 집중해 왔던 것 같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모든 설교자들은 교회에는 대다수의 설교자와 같은 남성 뿐 아니라 대다수의 설교자가 살아본 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겸손하게 공부해야 한다. 누가 말했다.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나도 동감한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청중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그동안 남성 설교자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 책을 설교하는 많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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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컴북스 이론총서
조현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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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누군가가 주디스 버틀러라는 분이 페미니즘의 대모격이라고 해서 이분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작인 <젠더 트러블>을 도전해보려 했는데, 그 책을 펴는 순간 트러블이 생길거란 충고도 받았다. 그래서 금새 꼬릴 내리고 다른 책을 찾아보다가 그 책의 해제 겪인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이란 책이 있어서 냉큼 잡아서 읽었다. 젠더 트러블의 역자였던 조현준이 쓴 책인데, 아래는 저자가 <젠더 트러블>과 주디스 버틀러의 생각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해 놓은 부분이다.

 

버틀러를 아카데미의 슈퍼스타로 급부상 시킨 <젠더트러블>은 쟁쟁한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주목을 받았고, 기존 페미니즘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공통된 범주로서 여성을 부정하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버틀러의 젠더 이론은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줄잡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성은 구성된다는 것이다....버틀러에게는 몸이라는 물질조차 그 물질에 대한 인식성이 없다면 몸으로 인식 될 수 없기 때문에 몸과 몸에 대한 인식은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연하는 것이다.”

 

이제 페미니즘에 입문하는 사람으로서 섹스와 젠더의 차이점을 알아가고 있던 찰나였기에, 이러한 내용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섹스가 생물학적인 개념이고, 젠더가 사회문화적인 개념으로 알고 있었는데, 섹스와 젠더는 같고, 섹스도 사실상 기존의 인식에 의해서 규정 된 것이란 주장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더욱 래디컬 하게 밀어붙인다. 기존 페미니즘의 주장들, 그리고 그러한 주장들이 기반하고 있는 철학들을 비판하는데,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기존의 내용들이 아주 오래 된 편견과도 같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아래의 내용에 있다.

 

정체성의 정치학은 모든 정치적 권익을 주장하는 운동에는 그 주체가 분명한 범주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버틀러는 그런 단일한 범주로서의 정치적 주체가 그 주체에 들어가지 못하는 소수자들을 만들기 때문에 이런 정체성의 범주는 다양성과 다변성으로 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자의 소리를 대변한다는 페미니스트들 역시 소극적으로는 소수자들을 배려하지 못하거나 적극적으로는 억압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근원을 주디스 버틀러는 그들 주장의 근본부터 틀렸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이 없는 페미니즘을 주장하기에 이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기존의 인식에 의해 규정된 여성을 말한다. 페미니즘을 어떤 집단을 범주화 하는 이론으로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소수자를 품을 수 있는 열려 있는 이론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성적 소수자로서 겪는 고통과 성에 대한 정체성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이런 주장의 바탕이 된 것 같다고 (조현준)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가 아닌 우리는 서로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같이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상호 의존 속에 근본적 취약성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 삶이다.”

 

난해하다고 소문난 <젠더트러블>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으니 좋기는 하지만, 워낙 축약해 놓아 아쉬움도 있는 것도 사실, 그래도 주디스 버틀러의 핵심 주장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보여준 것 같아서 나름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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