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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비아.
전도사 시절, 중, 고등부 아이들에게 지옥에 관한 설교를 했던 적이 있었다. 목회자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고, 당시엔 특히나 지옥이 있는 것을 정말 믿는 것처럼 사역하고, 설교하라는 가르침에 참 많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지금도 동의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마침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도 하고, 열심히 준비도 했다. 나름 애써 준비한 설교를 아이들에게 하는 순간 내 마음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의 느낌은 너무 생생해서 잘 잊히지도 않는다. 내가 앞에서 말하면서도 내가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웠고, 듣는 아이들의 반응은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표정이기 보다는 차라리 월요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는 모습과 가까웠다.
내가 지옥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 듣는 학생들에게 어떤 깊은 인상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말하는 나에게 조차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던 건데, 왜 그랬던 것일까? 아마도 지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삶에는 엄연히 지옥을 상상케 하는 현실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했다. 비참한 현실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무엇이 그렇게 비참한 삶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서도 몰랐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현실에 대한 무지가 설교 한 편을 망치는 것에서 그치는 것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알지 못하고, 그러한 삶을 강제하게 하는 죄의 악함이 얼마나 강한지를 똑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통하여 기독교가 말하는 어떠한 선한 영향력도 행사하기 힘들어진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의 저자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나와 같은 수많은 설교자들이나 크리스천들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에 대하여 합당한 문제제기와 답을 한다.
“죄와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내 관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주류 교회에서 이 단어를 말하기 어렵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일이고, 둘째는 이 단어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저자는 죄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주제에 대해서, 특히 죄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면서 혹은 어려워지면서 지금의 상태, 즉 구원에 대해 말해도 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진단한다. 죄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으니 죄로 인한 타락,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은총, 참회, 구원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기독교의 언어를 다른 종교들의 언어와 혼동하게 한 종교의 다원화(세계화), 모든 권위를 붕괴시킨 포스트모더니즘, 죄의 의미를 퇴색시킨 세속주의가 그렇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기독교의 언어를 퇴색시킨 이러한 원인들을 적대시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러한 원인들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더욱 다른 종교의 언어들을 익힐 필요가 있고, 죄의 경험과 그 여파를 생생하게 전해야만 한다. 또한 죄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 이 시대에 성경이 말하는 죄의 의미를 되찾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주류 기독교는 죄를 법률적인 의미 – 범법행위, 의학적인 의미 – 질병 정도로 축소하는 현상을 벗어나 성경,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참된 ‘죄’의 의미를 되찾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갈급해 하는 사람들에게 은총과 구원이라는 언어를 찾아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죄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과 같아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반역하는 행위이다. 또한 죄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 깨어진 관계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죄는 결국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기독교는 이렇듯 생명의 원천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행위를 죄라 불러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죄는 단순히 성적인 범죄나, 주일 성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을 벌고, 소비하고, 투자하는 방식’에 있다.
이렇게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와 이웃의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참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참회는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참회는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돕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회가 관계를 회복한다는 결단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누군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영향이 결코 개인, 스스로에게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류 기독교회들은 죄를 내면화 시키면서 참회 역시 양심을 좀 편하게 만드는 정도로 만들었다. 설교자와 청중들이 서로 죄와 참회에 대해서 축소하기를 합의하면서 ‘죄’, ‘참회’ 라는 언어 자체에 힘을 잃어버리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 것이다. 죄를 말할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미 우리가 목격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있지만 서로가 함께 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과도 함께 할 수 없는 무리들만 존재한다. 죄를 말하지 않으니 관계를 회복케 하는 참회도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 중에, 그래도 모범이 될 만한 몇 가지 예를 보여준다. 그것은 세이비어 교회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었던 ‘진실과 화해 위원회’다. 그들이 어렵지만 괴로운 죄를 말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한다. 이유는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하고, 우리 사회에 무너진 관계들을 회복해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한다.
“우리는 그 회복이 우리 너머에서 우리에게로 찾아온 일임을 알고 있다. 회복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참여해야 하지만, 우리의 참여만으로는 이 사건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때로 너무나 놀라운 이 회복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진정한 참회는... 하나님과 우리의, 또 우리 서로 간의 연합을 회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 모두 기독교 주류, 보수적인 교회들에서는 그 가치를 애써 축소하고 있거나, 행위 구원으로 몰아가기까지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의 신앙에서 희미해지자, 우리는 신앙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는 이러한 위기에 처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복음의 의미를 조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희망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내 죄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을지, 적게 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쟁이 있다. 적게 말하든, 많이 말하든 중요한 것은 그 ‘의미-힘’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점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너무 적게 말하는 교회든, 많이 말하는 교회든 우리는 은혜, 구원이라는 놀라운 언어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죄를 바로 알고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회의 언어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저자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