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 빈들에 서서
백소영 지음 / 꽃자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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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 은총의 바다>, <신앙, 그 순례의 여정>, <역사, 그 빈들에 서서> 백소영. 꽃자리.


이 시리즈는 김교신과 무교회를 전공한 학자 백소영이 1년에 걸쳐 <CBS 성경사랑방>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성경으로 보는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가지고는 있는데,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의 시선으로 본 구약성경이라고 하면 이 책을 적절하게 표현한다고 볼 수 있겠다. 모세오경과 역사서, 선지서를 주로 다루는데, 63챕터에 걸쳐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면서 적실한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가벼운 묵상집으로 볼 수도 있는데, 자세히 읽다보면 저자가 성경비평을 수용하는 학자로서 적잖은 연구를 거쳐 오늘날의 언어로 풀어낸, 참 많은 수고를 거친 수십 편의 설교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저자는 수십 편의 글을 통하여 여러 내용들을 다루지만, 그중에서도 지속적이면서도 일관되게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꿈꾸셨던 공동체, 그들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 지금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공동체말이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공동체로서 내가 살고남을 살리는사명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다. 또한 서로를 동등한 로 상대하는 평등한 공동체이고. ‘소유권위를 나누는 공동체이다. 무교회를 오랜 시간 공부한 학자로서 현실의 지역 교회들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나오고 냉소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시종일관 교회를 향하여 안타까움과 기대감을 함께 표현한다. 교회 목사로서 감사한 부분이었다.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서 성경에 대한 통찰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이슈들과 그에 대한 안목도 간간히 함께 섞어가면서 책을 흥미롭고 쉽게 썼다. 책의 내용 한 편, 한 편이 좋아서 하루에 한, 두 편씩 몇 달에 걸쳐 읽었다. 웬만한 설교집, 묵상집보다 훨씬 낫고 옆에 두고 참고하며 읽을 만한 괜찮은 구약 설교집으로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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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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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있는사람

 

창조냐? 진화냐?” 라는 식의 질문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 질문이 사용되는 경우는 어느 한쪽의 정해진 답을 요구 하는, 마치 사상 검증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참 많다. 먼저는 문자, 근본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모습들이다. 만약 이때 답을 하면서 진화에 대한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어떻게 인류의 조상을 원숭이로 볼 수 있냐는 식 반응과 함께 경멸의 눈초리를 받을 수 있고, 심지어 불신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진보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거나,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태도인데, 누군가로부터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경우 더 이상 대화하기 힘든 무식한 사람이라는 식의 냉소나, 조롱을 하는 경우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책의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통해 과학과 종교의 이러한 잘못된 전쟁 서사를 바로 잡고, 더욱 풍성한 시각으로 우리의 삶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과학과 종교부분의 석좌교수로서 오랜 시간 이 부분을 놓고 치열하게 연구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여러 권의 전문적인 저술들을 내놓았고, 이 책은 해당 주제에 대한 입문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이 비록 입문서라 할지라도 충분한 연구와 묵상 끝에 그 정수들을 모아 놓은 것인 만큼 과학과 신앙에 대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총 아홉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독단주의는 과학과 종교 어디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우주의 기원’, ‘다윈과 진화론’, ‘인간의 영혼이라는 묵직한 주제들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다루면서 물리학, 생물학, 뇌신경과학 등의 학문이 결코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 저자는 자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아인슈타인, 다윈 등의 과학자들도 신앙을 배척하는 독단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시에 도킨스, 히친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은 과학자라는 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여러 저술들을 통해 주장하는 내용들은 전혀 과학적이라 부를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어서 저자는 특정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안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이 삶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한 과학으로 인간의 기술적 패턴을 설명하는 것은 쉬울 수 있으나, 그것을 규범화 하거나 윤리의 근거로 삼으려 할 땐 필연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진화적 과거에 대한 모든 과학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을 보고 내용을 미리 짐작한 사람들이 있다면, 위의 내용을 보고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얼핏 이 책은 창조과학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소위 창조과학에 대한 언급은 아주 살짝 할 뿐이다. 지구가 6천년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18세기에 밝혀진 것이고, ‘과학적 창조론이라는 주장은 기독교 신학 역사 중 꽤나 근래에 들어서야 나타난 믿기 힘든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기독교 신학 정통에서도 창조과학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이 부분을 짧게나마 언급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진화라는 주장을 잘 들어보지 않고, 과학과 신앙(신학)이 절대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지레 신앙과 과학의 잘못된 전쟁 서사에 모든 논쟁을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들은 저자의 말처럼 그야말로 아름답고 풍성한 우주를 초라하게 보이게 만드는 렌즈가 될 뿐이다.

 

저자는 책 전체를 포괄할만한 예화를 하나 인용한다. “이 주전자가 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는 에너지가 가해져서 물의 온도를 끓는점까지 높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차를 마시려고 불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이 둘은 다른 대답이다. 그러나 둘 다 옳다.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한쪽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과학과 신앙이 서로를 보완하며 좀 더 완벽한 (세상을 보는) 렌즈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상대방 혹은 주변의 상황을 한 가지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관계와 생각들을 빈곤하게 하는 지를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가끔 이런 얘길 하셨다. “하나님은 진리를 흩어 뿌려 놓으셨어.” 이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 책은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경도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한쪽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한다. 나도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필요하고, 서로가 경청해야 할 것을 어렵지 않게 설명하며 권하는 이 책을 다른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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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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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다. 1장을 읽으면서, 아니 읽기 전부터 기대하면서 읽었는데....조금 박하게 감상평을 남기자면 이런식으로 쓰자면 72년생 김xx 62년생 김xx 52년생 김xx 계속 쓸 수도 있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이 책에 해당 되는 것 같다. 왜 소설을 무슨 탐사보도 같이 썼는지 모르겠다. 동시대의 여성들의 평범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쓰려고 한 것 같은데, 차라리 에세이와 같은 방식의 글이면 어땠을까 싶다. 페미니즘이 대유행하는 시기였기에 책이 엄청 팔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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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신학
강남순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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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신학 : 여성, 영성, 생명>은 감신대에서 여성주의 신학을 가르쳤고, 지금은 텍사스의 한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강남순의 페미니스트 신학 관련 논문 모음집이다. 2002년도에 나왔으니 감신대에서 교수직 문제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한참 싸우기 전에 나온 책이라 할 수 있다. 논문 모음집이어서 그런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갖는 저항적이고 실천적인 특성들이 생생하게 다가오기 보다는 딱딱하고 현실감이 조금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만약 비슷한 주제로 그 문제를 겪은 2006년 뒤에 다시 썼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글들이 나올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총 열 네 편의 글을 통하여 페미니스트 신학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여기에는 페미니스트 신학의 쟁점, 근대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 폭력, 가정, 여성 목회, 성경 해석 등의 다양한 주제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주제들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고 핵심들만 짧고, 간단하게 다룬다. 그렇다보니 각 주제에 대한 깊은 논의를 하기 보다는 각 주제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통해 페미니스트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나는 14개의 소논문들 중에서 열두 번째 주제 기독교적 덕목의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화파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특히 저자는 그람시, 푸코 등을 인용하며 한국 교회가 가부장제적 복종을 순종이라는 기독교 핵심 개념과 혼용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폭력적인 복종의 요구를 아름다운 자발적 순종으로 포장해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남성 중심적 교회에 스스로를 종속시켰다.

이 부분이 정말 공감이 갔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저자가 지적한 부분들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몇몇 여성분들의 적극적인 반발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에 조금은 놀랐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여성이라고 전부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성차별 문화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소극적으로는 이용당했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폭력과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인내, 순종, 사랑이라는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었고, 저자의 지적처럼 성차별에 반대한다는 당연한 구호조차도 반교회적, 반가정적 발언으로 취급당하는 경우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성급한 판단일 수 있으나 남성들도 아니고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성차별을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동안 폭력적인 생각과 행동들을 꾹 참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페미니즘이 교회 안에서도 그만큼 유행한다는 것이고, 페미니즘이 그만큼 교회에서 그동안 가르쳐온 내용들과 부딪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답을 제시한다. 물론 조금은 지루하고, 딱딱할 수 있지만, 페미니스트 신학이 궁금하다면 참고해 볼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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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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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는 깜짝 놀랄 정도로 책이 얇다.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이란 말이 주는 뉘앙스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습이 왜 이렇고,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본문에도 없고 심지어 어떤 참고자료도 붙여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불친절한 책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짧지만 소책자에 가까운 이 책에 담긴 짧은 이야기만으로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일상에서 분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예배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는 집에서, 먹고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상과 종교적인 행위가 구분이 되기 힘들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푸블리우스라는 한 사람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경험한 짧지만 인상적인 예배 이야기 한 편을 통해서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워낙 많은 사람들의 평을 읽었고,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었기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이야기가 워낙 짧은데다 어려울 것도 없고 지극히 평범해서 금방 읽고 조금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게 뭐지? 솔직히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1세기 교회의 예배 이야기>라는 제목이 너무 거창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내가 왜 그렇게 이 책을 평범하게 읽었고, 조금은 실망스럽게 읽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선은 푸블리우스가 경험한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어쩌면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있고, 기도를 하고, 찬송도 하고, 2부 순서처럼 교제의 시간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친한 사람들을 초대하거나, 내가 초대 받아 가서 함께 즐겁게 교제하는 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예배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일상도 크게 특별해 보이지 않았는데,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크게 색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고, 새로운 통찰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평범한 예배와 일상의 친교의 모습이 합쳐지는 것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집에서 가족들과 예배하거나, 가끔 교회의 소그룹 멤버들이 예배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러한 모임들은 엄연히 주일 11시 오전 예배’로 대표되는 소위 '공예배'에 그 중요성을 비교하기 어렵다. 삶이 예배이고, 가정교회를 추구하고 표방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분명 교회 건물에 모여서 목사를 스피커로 두고 다른 여러 격식을 차린 예배 모임이야 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그야말로 성수주일의 핵심이 아니었던가? 그만큼 예배의 자리는 일상과 특별하게 달랐고, 더욱 거룩해야 하는 자리였다. 예배를 목숨 걸고지켰던 만큼 그러한 예배의 모임은 점점 일상의 모습과 달라졌고, ‘평범할 수 없는 모임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점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명시적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삶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일상을 예배화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어떤 친교 모임에서 환대를 받고, 서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중에 하나님을 높이고, 그러한 중에 서로에 대한 끈끈한 책임감을 엿보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푸블리우스가 경험하는 예배와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있는 예배의 자리와 일상의 자리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예배의 자리도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푸블리우스가 경험한 예배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에 걸쳐 전도 집회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많은 교회들의 예배가 그들이 부르짖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과 얼마나 배치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몇 번식 곱씹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지만, 반복해서 이 책을 읽으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예배와 나와 교회의 예배를 비교하며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책이 얇아 다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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