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은유를 우리의 사회적 몸으로까지 확장하면, 우리는 자신을 정원 속의 정원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바깥쪽 정원은 에덴이 아니고, 안락한 장미 정원도 아니다.그 정원은 몸이라는 안쪽 정원, 그러니까 우리가 좋고)나쁜 균류와 바이러스와 세균을 모두 품고 있는 곳 못지않게 이상하고 다양한 곳이다. 그 정원은 경계가 없고, 잘손질되지도 않았으며, 열매와 가시를 모두 맺는다. 어쩌면우리는 그것을 야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공동체라는 말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신비주의라는 주제는 특정한 종교적 문화 속에 있는 개인의 영적 형성 과정에 관한 문제와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있는 어떤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특정한 신학적 담론을 한데 묶는 것이었다
놀라울만큼 단호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과학책. 나보다 먼저 태어났을만큼 오래된 과학책이 지금도 베스트셀러로서 읽히고 있다니. 이 역시 놀랍다. 여기에 대한 여러 평들이 궁금하다. 철저한 유신론자로 살아왔기에 저자의 글이 눈에 거슬리는 곳이 여기저기 있었지만 재미있었고 수긍이 가는 면도 있었다. 진화론, 다윈주의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내가 읽기에도 나름 괜찮았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용 요약이라도 해야겠다.
복음서의 서문이 각 복음서를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설교자들은 네개의 복음서들을 너무나 쉽게 섞어서 하나의 메시지를 만드는데, 오히려 각 복음서 저자들은 한분 예수님을 소개하지만 비슷해보여도 자기만의 독특한 관점과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한다. 그것은 서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각 복음서의 서문을 통해 각 복음서의 고유한 신학을 매력적으로 제시한다. 물론 서론만으로 모든 것을 다 보여줄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으로 변한 기독교를 다시금 성경과 전통적 가르침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시도. 저자의 의도는 알겠으나 중간중간 지나치다 싶은 부분이 적지 않다. 물론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좋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열망에 동참하자는 저자의 반복된 지적에 적극 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