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는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들처럼 빙글빙글 돌고 뒤섞이고 갈라지는 무수한 클라우디아들로 이루어진 존재거든. 내가 들고 다니는 카드 한 팩은 한없이 뒤섞이고 또 뒤섞이지. 연속성은 없고,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 (p. 9)2. 맨부커 수상작 중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을 찾다가 발견한 책이다. 알라딘의 품절도서 의뢰센터를 통해 운좋게(!) 손에 넣었지만 역시 한참은 그냥 꽂혀 있기만 했다. 그러다 골든 맨부커를 알게 되고 <잉글리시 페이션트>와 함께 쇼트 리스트에 올랐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어서 읽었다. 결론은, “역시 맨부커는 대단해!” 우리말로 번역된 것들만이라도 죄다 읽어버려야겠다는 투지(!)가 새록새록 돋는다! (골든 맨부커의 쇼트 리스트의 나머지 세 작품은 바로 전전에 읽은 <바르도의 링컨>과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 그리고 V.S.네이폴의 <자유 국가에서>이다. 이제 네이폴만 구해서 읽으면 된다!)3. 어쩌다 보니 꽤 오랫동안 2차 세계 대전과 사막을 헤메고 있다. 시작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리시 페이션트>. 그리고 이 책까지. 가장 강렬한 건 물론 <문타이거>. 전쟁과 사막과 역사와 개인. 4. ‘문타이거 Moon Tiger’라는 제목에서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기대했었는데 이건 달과도 호랑이와도 상관없는 거였다. 문타이거란 바로 나선형의 모기향이었다! 모기향에 어쩌다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못 찾았다.5.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엄마께 넘기는데 이 책은 그러고 싶지 않다. 포스트잇으로 태깅한 문장들에서 내 속이 다 드러날까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6. 이렇게 멋진 소설이 2010년 1판 1쇄 찍고 품절(이라 쓰고 아마도 절판이라고 생각한다)이라니 안타깝다. 아무튼 나는 갖고 있지롱. 알라딘아 고맙다!
The English Patient Michael Ondaatje (1992) / 박현주 역 / 그책 (초판 2010, 개정판 2018)맨부커 50주년 기념 골든 맨부커에 지명된 소설. 20여 년 전 아카데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인데 무슨 상을 받았다면 쪼르르 달려가는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이 없었던 건 다 줄리엣 비노쉬 때문이다.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 이후 쭉 이 배우를 싫어한다. 그 영화도 물론 싫어하는데 배우와 영화 중 어느 걸 더 싫어하는지 모를 정도다. 왜냐고? 모르겠다. 이유 없이-혹은 이유를 밝힐 수 없는지도- 싫어하는 거니 정말 싫어하는 거고 그 때문에 <영국인 환자>도 싫었다. 그런데 무려 ‘다이아몬드 부커’라지 않는가! 마침 믿을 만한 번역가의 책도 있고. 초반에는 주인공 해나에 자꾸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이 겹쳐져서 읽기가 힘들었다. 섬세한 단어와 문장도 그렇고 (예들 들어 ‘바장이다’는 도대체 어떤 영어 단어의 번역일까?). 하지만 카라바지오와 키르팔 싱이 있었고 이 두 인물 때문에 영화도 궁금해졌다. 아내와 부정한 남자를 죽이고 자신도 동반자살 하려고 한 남편은 무려 콜린 퍼스의 배역이라니 더. 영화와 소설은 원작자가 각본에 참여했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이야기라고 하지만. 또 여전히 줄리엣 비노쉬가 걸리긴 하지만. 그런데 이 소설은 아주 시간이 많을 때 고요한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야 그 속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쉽다. 다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덧) 이 책은 ‘인간의 에로티시즘과 욕망을 말하는 그책(출판사 명)의 문학 시리즈’ 에디션D의 한 권이다. 시리즈에 포함된 다른 책들로는 <나인 하프 위크>, <데미지>, <비터문>, <엠마뉴엘>, 등등... 뭐지...?
알라딘의 추천마법사를 통해 알게 된 소설. 펭귄클래식에 포함된 최초의 중국 현대작가 소설이라는 타이틀에 혹해서 잡음. 그럼 위화보다 훌륭하단 말야? 뭐 이런 생각도 하고. 중국의 소설에서는 (위화 외엔 별로 아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엄청나게 넓은 땅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조합일 엄청난 역사 때문인지 어쩌면 황당하게도 숭고한 느낌을 받곤 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라는 소설의 본령에 충실하게 재미나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고 짧고 담백한 문체도 이야기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 인물들. 초반에 잠깐씩 등장하는 룽씨 가문의 기인들도 강렬하고 주인공인 룽진전은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신비와 천재성을 읽은 지금 무한한 존경과 슬픔을 느낀다. 내게 훌륭한 소설들은, 언제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어떤 슬픔을 남기는 것 같다.
Lincoln in the BardoGeorge Saunders (2017) / 정영목 역 / 문학동네 (2018)2018-11-281. 시간이나 대충 때우자며 넘기게 되는 책이 있고 작가가 던진 수수께끼를 풀듯 잔뜩 머리를 긴장시키며 읽게 되는 책이 있고, 이 책처럼 가슴으로 읽히는 책이 있다. 죽음에게 잃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지내는지. 남은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보듬고 그 슬픔과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건지. 결국 죽음은 무엇이고, 그렇게 삶은 무엇인지. 2. 형식이 새롭고 문장만큼 섬세하다. 죽은 자들은 독자에게 직접 말을 하고 (당시에) 살아있는 자들의 말은 오래된 책으로부터의 인용으로 전할 뿐이다. 3. ‘바르도’는 티벳불교에서 유래한 말로 죽은 이가 저세상으로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영혼이 저승으로 완전히 건너가기 전 49일 동안 떠도는 곳이 바로 여기라고 한다. 4. 맨부커 수상작이라 해서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에 넣은 후 ‘바르도’에 흥미를 느껴 요 근래 매우 드물게 책장에 꽂기 전에 읽은 책. 역시 맨부커는 명불허전. 그래서 또다른 맨부커 수상작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간다.
스티그 라르손의 오리지널 시리즈도 그다지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얘보다 훨씬 낫다. 리스베트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에게도 서사를 부여해서 늘어지는 서술에 막판에 드러나는 플롯 자체도 만능키 해커 리스베트 때문에 결국은 시시해진다. 무엇보다 리스베트가 이렇게 말이 많을 수가 없고 와스프와 마블 코믹스의 연결은 이것 참... 노골적으로 한 급수 낮은 장르물인데 그걸 뭐가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하드커버로 민들었어! 리스베트 쌍둥이 자매의 활약상(!)을 보면 차라리 수퍼히어로물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 이렇게 욕을 하면서도 결국 다 읽었다는. 쳇.